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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교헌 / ‘방황과 고뇌의 세월, 나의 참회록’(교음사)중에서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제일 불편한 것은 아무래도 신발이었던 것 같다. 운동화나 고무신은 너무나 귀하여 여름에는 '게타'를 신고 겨울에는 짚신을 신는 것이 고작이었다. 여름에 게타를 신고 다니노라면 발에 땀이 나서 미끄럽기도 하고 게다 끈이 끊어지면 갑자기 고치기도 힘들었고 게타가 반대편 발목에 있는 복사뼈(거골)를 때려서 진물이 흐르게 되고 이미 진물이 흐르는 곳을 다시 때리게 되면 얼마나 아픈지 자지러질 지경이었다. 어떤 친구들은 겨울이 되어 눈이 쌓여도 게타를 신고 등교하는 수가 있었다. 짚신은 주로 겨울에 신지만, 진 데를 밟거나 눈이 내리면 물기가 스며들기 때문에 양말이나 버선이 젖는 것이 문제였다. 그리고 시골길 시오리라는 것이 실제로는 8km 이상이나 되는데 짚신은 아무리 조심해 신어..

청계산 수필 2022.10.28

사범학교 입학시험

사범학교 입학시험 사진출처 : 청주교육대학교(구글이미지) 나는 1947년 9월 3일, 6년제 청주사범학교에 입학하였다. 형제들 중에서 처음으로 일류 중학교에 진학하게 되었으니 온 집안의 경사이기도 하였다. 내가 사범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하였을 때 어떤 사람은 '벼슬'하였다고 나를 칭찬해 주었다. 당시 내가 살던 새마을(화하리 신촌)은 방죽마을을 합하여 약 50호의 가구가 살고 있었는데 사범학교에 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범학교는 다른 중학교에 앞서 특차로 신입생 선발시험을 실시하였고 국민학교에서 특별히 우수한 학생들이 아니면 합격할 수 없다는 것이 상식이었다. 마을에는 청주상업중학교와 농업중학교에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청주사범학교에는 최재룡과 내가 처음으로 입학하게 되었던 것이다. (...생략...

청계산 수필 2022.10.25

여수에서

집으로 가는 길에오늘도 여수에 와 구봉산 둘레길을 걸었습니다. 길을 가다가 빈 의자를 보고 잠깐 멈춰서 폰으로 사진을 찍고 잠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누군가가 앉아 있어야할 것 같은 자리가 비어있어 허전해 보였고 집사람과 함께 여기에 앉아 담소를 나누면 좋겠다며 홀로 산행을 아쉬워했습니다. 숲속이지만 의자가 깔끔했고 주변에 쌓인 낙엽이 푹신해 보였습니다. 늦가을의 정취를 느끼며 제 인생의 시계도 겨울로 접어들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산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멀리 아들이 사는 아파트단지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지은 지 30년이 지난 임대아파트에 살고 있으니 좋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에 비해 왠지 위축됩니다. 하지만 집이 가까워지니 제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지어집니다. 집에 가면 집사람과 아들이 기다리..

전원일기 2022.10.24

오직 감사하는 마음으로

오직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끔 꼭두새벽(2~3시 쯤)에 잠이 깨어 더 이상 잠들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특별한 고민거리가 없는데도 이렇게 잠을 이루지 못한 것은 제 무의식 속에 좋지 않은 찌꺼기가 남아 있나 봅니다. 저는 아직도 과거의 잘못된 선택으로 출세를 하지 못한 것이 꿈으로 나타나 저를 괴롭힙니다. 그때가 언제인데 아직까지도 열등의식을 청산하지 못하니 한심한 일입니다. 정지아 작가는 “나의 비극은 내 부모가 빨치산이라서 시작된 게 아니었다. 더 멀리 더 높이 나아가고 싶다는 욕망 자체가 내 비극의 출발이었다.”라고 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출세하지 못한 것은 시절운(時節運)이 없어서가 아니라 제가 출세를 담을 만한 그릇이 아닌데 철모른 욕망만이 들끓었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제 무의식 ..

교수는 쩨쩨해

교수는 쩨쩨해 재경향우회가 발족되었으나 인원도 적은데다가 회칙도 정비되지 못하고 사업도 계획되지 못한 형편이다. 향우회의 목적은 고향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 첫째요 향우끼리의 친목을 도모하는 것이 둘째이다. 고향을 떠나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 와 있는 향우는 수백 명이나 된단다. 우선 160명에게 발기총회의 안내장을 발송하였으나 모인 것은 20명도 안 된다. 면장을 비롯하여 고향에서 온 사람들이 재경향우들보다 많았기에 배보다 배꼽이 크다는 말까지 나오고 말았다. 출석한 사람들 중에는 사업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럭저럭 지내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다. 세 사람의 교수가 출석하였으나 마지못해 나온 눈치이고 직책도 서로 맡지 않으려 한다. 직책을 맡다 보면 고향을 돕는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해야 하니 용기가 나..

청계산 수필 2022.10.20

유시민 / ‘유럽도시기행1’중에서

노트르담 대성당 시테섬에 있는 파리 대주교좌 성당의 이름 ‘노트르담(NotreDame)'은 이탈리아 성당들이 너나없이 이름 첫머리에 붙이고 있는'산타마리아'와 비슷한 뜻이다. 파리 주교와 로마 교황청이 12세기 중반부터 200여 년 동안 건물과 첨탑을 올리고 파이프오르간과 성가대석을 포함한 내부 시설을 지었다. 폭 48미터, 길이 130미터, 천장 높이 35미터인 이 고딕양식 성당의 건축학적 특징은 따로 말하지 않겠다. 아야소피아나 베드로 대성당과 비교하면 노트르담은 평범하고소박하다. 노트르담은 종교시설인 동시에 정치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종교적 갈등이나 정치적 격변이 일어날 때마다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16세기 중반 위그노전쟁 때는 개신교도들이 우상숭배의 상징으로 지목해 파괴했다. 루이 15세가 개축했..

여행, 걷기 2022.10.17

서서히 일상으로의 복귀 2

서서히 일상으로의 복귀 2 정원의 잔디는 4월 말부터 시작해서 10월초까지 1년에 20회 정도 깎습니다. 특히 장마철에는 잔디가 잘 자라 1주일에 한 번씩 깎아야 합니다. 처음 잔디밭을 조성할 때 동네 분들은 잔디밭이 너무 넓어 관리가 힘들 거라며 몇 년 지나면 잔디밭을 줄일 것이라 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9년 째 잘 유지하고 있고 오늘은 올해 들어 6회차 잔디를 깎았습니다. 깎을 때는 힘들지만 작업을 마치고 나면 시원하게 펼쳐진 잔디밭이 정원을 한껏 아름답게 보여 줍니다. 밤에 정원에 나오면 낮에 깎은 잔디의 풀냄새가 바람을 타고 코에 확 들어옵니다. 전원에는 꽃과 나무만 향기를 풍기는 것이 아니라 풀향기도 납니다. 이제는 풋풋하면서 약간 비릿한 풀냄새가 좋아졌습니다. (2022.6.24)..

걸명소(乞茗疏)

걸명소(乞茗疏) 차를 마시면 마음이 중정(中正)에 앉게 된다.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이 적당하고 곧은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백(李白)은 "옥천사의 진(眞) 스님이 차를 마신 덕에 나이 여든에 이르렀지만 얼굴빛이 복숭아와 오얏꽃 같았다"고 했고, 장자(莊子)는 찻잎의 푸른 윤기를 빙설(氷雪)의 흰빛에 비유했으니 좋은 차는 마음의 중정에 도달하게 할 뿐만 아니라 몸의 맑음에도 도달하게 하는 효험이 족히 있을 것이다. 내가 마시는 차는 대개 구걸해서 얻은 것이다. 지방의 지인들이나 산사의 스님들로부터 얻은 것이다. 차를 구걸해서 얻는 것이 큰 허물은 아닐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강진 백련사에 주석했던 혜장 선사에게 차를 구하는 글, ‘걸명소(乞茗疏)’를 써서 보내기도 했다. '걸(乞)'은 구걸한다는 뜻이고,..

닮고 싶은 사람

닮고 싶은 사람 그 사람은 나를 위해 먼저 노력하는 사람이었고, 나에게 매 순간 최선의 배려를 건네는 사람이었으며, 나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변화시키는 사람이었고, 자꾸만 내게 행복을 선물하는 사람이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누군가를 향해 먼저 뻗는 손길에는 배려가 숨어 있고, 누군가를 향해 먼저 내딛는 걸음에는 희생이 묻어 있고, 누군가를 항해 먼저 건네는 마음에는 용기가 담겨 있다는 것. 그런 사람의 행동에는 나를 향한 진심 외에 어떤 목적도 존재하지 않기에 나 또한 같은 마음을 전하고 싶어진다. 그런 사람이 있다. 자신이 먼저 좋은 사람이 되어 누군가를 좋은 사람으로 만드는 사람이 있다. 참 닮고 싶은 사람이 있다. 미워하지 않을 용기 삶을 걷다 보면 자꾸만 스스로를..

정지아 / ‘아버지의 해방일지’(창비 출판)중에서

정지아 / ‘아버지의 해방일지’(창비 출판)중에서     가을 녘 아버지 지게에는 다래나 으름 말고도 빨갛게 익은 맹감이 서너가지 꽂혀 있곤 했다. 연자줏빛 들국화 몇 송이가 아버지 겨드랑이 부근에서 수줍게 고개를 까닥인 때도 있었다. 먹지도 못할 맹감이나 들국화를 꺾을 때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뼛속까지 사회주의자인 아버지도 그것들을 보고 있노라면 바위처럼 굳건한 마음 한가닥이 말랑말랑 녹아들어 오래전의 풋사랑 같은 것이 흘러넘쳤을지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아버지 숨이 끊기고 처음으로 핑 눈물이 돌았다.  아버지는 1948년 초, 5·10 단선반대 유인물을 살포하다 경찰에 붙잡혔다. 경찰은 아버지 성기에 전선을 꽂고 전기고문을 했다. 전기고문은 사시 말고도 또다른 후유증을 남겼다. 그날 이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