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1564

할머니의 마스크

할머니의 마스크 혼잡한 도심의 교차로를 낡은 리어카 한 대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잡동사니 고물을 잔뜩 실은 채 신호등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서 천천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바쁘게 걸어가던 사람들이 쳐다보고 놀란 차량들이 잇달아 경적을 울려도 끌고 있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리어카는 그냥 덜컹거리며 지나가고 있습니다 혼자 움직이는 듯한 리어카가 신기하여 손잡이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면 그곳엔 리어카보다 자그마하고 실려진 고물보다 더욱 낡고 구부러진 할머니 한분이 폭염에도 불구하고 때묻은 광목천으로 입을 휘감은 상태로 힘겹게 리어카를 끌고 있었습니다 평생을 찌든 삶의 무게에 짓눌려도 나름 꿋꿋하게 견뎌왔지만 코로나 19가 창궐한 두어 해 전부터는 스스로 생사의 경계선에도 서 보았고 소중한 사람과 때아닌 이별도 ..

고아

고아 1918년 소녀들이 도시에 도착한 그날 조금 더 이른 시각에, 한 소년이 남대문을 통과했다. 전날 밤 그 아이는 궤짝 운반을 거들거나 소소한 심부름을 하는 대가로 몇 주간 그를 거둬주었던 보부상 한 무리와 작별했다. 그들은 아이에게 20전짜리 은화 두 닢을 주었는데, 그 정도면 공동 여관방에 묵으며 국밥 한 그릇을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금액이었다. 하지만 소년은 공복을 견딜 만한 힘이 남지 않을 때까지 끼니를 거르며 돈을 아끼기로 하고, 남대문 바깥 도로변의 도랑으로 향했다. 흙바닥 어느 귀퉁이에 둥그렇게 팬 곳을 발견하자 그는 옆으로 몸을 웅크려 그곳에 누운 뒤 무릎을 가슴까지 올려 바짝 끌어안았다. 마치 소년이 그 자리에 눕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연한 강아지풀 다발이 부드러운 이불처럼 그..

모두가 사랑하고 대부분 오해하는

모두가 사랑하고 대부분 오해하는 가지 않은 길 / 로버트 프로스트 노란 숲속에 두 갈래 길 나 있어. 나는 둘다 가지 못하고 하나의 길만 걷는 것 아쉬워 수풀 속으로 굽이 사라지는 길 하나 멀리멀리 한참 서서 바라보았지. 그러고선 똑같이 아름답지만 풀이 우거지고 인적이 없어 아마도 더 끌렸던 다른 길 택했지. 물론 인적으로 치자면, 지나간 발길들로 두 길은 정말 거의 같게 다져져 있었고, 사람들이 시커멓게 밟지 않은 나뭇잎들이 그날 아침 두 길 모두를 한결같이 덮고 있긴 했지만. 아, 나는 한 길을 또다른 날을 위해 남겨두었네! 하지만 길은 길로 이어지는 걸 알기에 내가 다시 오리라 믿지는 않았지. 지금부터 오래오래 후 어디에선가 나는 한숨지으며 이렇게 말하겠지. 숲속에 두 갈래 길이 나 있었다고, 그리..

아들에게 전하는 시

아들에게 전하는 시 섬진강 시인 김용택이 아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저도 똑같은 심정으로 아들에게 전합니다. 저뿐만 아니라 부모의 마음은 다 같을 것입니다. 요즘 나는 이따금 네가 자던 방에서 잔단다. 창밖 단풍나무 잎이 바람에 살랑이는 것을 본다. 때로 네 생각이 짙게 나서 돌아눕는다. 아프게 흘러갔을 네 청춘의 잠자리를 생각한다. 밤과 낮 그리고 홀로 문득 아파트 저 너머 다가올 네 생의 하늘을 너는 가늠해 보았겠지. 누구에게나 젊음은 그렇게 어두웠단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자기가 살아갈 환한 틈이 열리기도 한다. 그 순간이 언제 올지 아무도 모르면서 젊음은 간다. 부지런히 공부하고 부지런히 너를 갈고닦으렴. 돈이 아니고 삶이다. 삶을 믿어라 든든하게. 네가 너에게 든든하게, 너를 신뢰하는 일상의 ..

공감 Best 20 2022.11.29

의도(意圖), 내 마음의 지도

의도(意圖), 내 마음의 지도 자연은 스스로 삼라만상의 원칙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순응하기에 자유롭다. 산이 사시사철 변화무쌍하면서도 언제나 늠름하고 매력적인 이유는 자신에게만 온전히 몰입하기 때문이다. 산은 때때로 찾아와 보금자리를 만드는 동물들을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환영한다. 수많은 나무가 자랄 수 있도록 묵묵히 햇빛과 물을 제공한다. 인간들에게 등산을 허락해 육체와 정신의 건강을 선물한다. 강은 언제나 유유자적하다. 어디에서 흘러나왔는지 알 수 없지만, 산속 깊은 곳에서부터 샘물이 모여 자신이 가야할 장소를 향해 항상 흘러간다. 시냇물에게 커다란 바위는 방해꾼이 아니라 자신이 가야할 방향을 재촉하는 도우미다. 강물은 누가 막아서도 혹은 오물을 투척해도 정지하는 법이 없다. 강물은 자신이 가야할 ..

공감 Best 20 2022.11.29

무죄한 이들의 고통에 대하여

무죄한 이들의 고통에 대하여 욥의 마지막 말 주님, 내가 주님께 부르짖어도 주님께서는 내게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주님께 기도해도, 주님께서는 들은 체도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내게 너무 잔인하십니다. 힘이 세신 주님께서, 힘이 없는 나를 핍박하십니다. 나를 들어올려서 바람에 불려가게 하시며, 태풍에 휩쓸려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하십니다.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계십니다. 끝내 나를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함께 만나는 그 죽음의 집으로 돌아가게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어찌하여 망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이 몸을 치십니까? 기껏 하나님의 자비나 빌어야 하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보잘것없는 이 몸을, 어찌하여 그렇게 세게 치십니까? (...생략...) 욥기..

종교 2022.11.27

독일 드레스덴

독일 드레스덴 1. 가해자의 상처 드레스덴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던 날을 기억한다. 1995년 2월 13일이었다. 독일 유학 중이던 나는 그날 아침 신문에서 '드레스덴 폭격' 관련 보도를 처음 보았다. 눈에 잘 띄지 않는 면에 실린 그리 크지도 않은 기사였다. 그 폭격의 표적이 독일군과 군사시설이 아니라 드레스덴이라는 도시 자체였다는 사실에 나는 크게 놀랐다. 연합국 공군은 전쟁 막바지에 인구 10만이 넘는 독일 도시의 군사시설과 철도역, 군수공장 등을 폭격했는데 조준이 빗나가 주택이나 교회 건물에 폭탄이 떨어진 일은 많았다. 그러나 드레스덴처럼 도 시 전체를 잿더미로 만든 경우는 없었다. 영국과 미국 공군은 1945년 2월 13일 밤부터 사흘 동안 네 차례 번갈아 드레스덴을 '융단폭격'했다...

여행, 걷기 2022.11.20

체코 프라하

체코 프라하 사진출처 : 네이버 포스트 1. 체코공화국 국토는 세 지역으로 나뉘는데 중부와 서부의 보헤미아(Bohemia)가 국토의 대부분이고 동부에 슬레스코와 루사티아라는 두 지역이 붙어 있다. 라틴어 지명 보헤미아는 이곳을 점령한 로마제국 군인들이 켈트족의 지파 ‘보이’족이 산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었다. 체코 말로는 보헤미아를 체키(Čechy), 주민들을 체크(Cech)라고 한다. 국호 체코공화국(Česká republika)도 여기서 나왔다. 체코인은 슬라브족의 한 갈래다. 로마제국 시대에 켈트족을 밀어냈던 게르만족이 서쪽으로 떠난 5세기 이후 그들이 보헤미아를 차지했다. 체코와 보헤미아는 같은 말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체코공화국은 인구는 2020년 기준 1,100만 명에 조금 못 미친다..

여행, 걷기 2022.11.18

신성로마제국

신성로마제국 1605년 당시의 신성로마 제국의 국장 870년 두(동서 프랑크)나라는 오늘날 네덜란드 땅인 메르센에서 전쟁을 끝내기로 합의하는 메르센 조약을 체결했어. 이 조약에 따라 중프랑크의 영토에서 이탈리아만 빼고 나머지는 동과 서프랑크가 나눠 가졌어. 동프랑크 왕국은 오늘날 독일, 서프랑크왕국은 프랑스로 발전했지. 이때 프랑크 왕국을 지배하고 있던 왕조는 카롤링거 왕조였어. 그러나 나라가 쪼개지면서 왕조의 힘은 별로 강하지 않았어. 봉건제도가 발달했기 때문에 지방정부, 즉 제후국들도 중앙정부에 충성하지 않았지. 이때는 동서 프랑크 왕국 모두 왕의 권력이 약했어. 특히 동프랑크에서는 마인츠 쾰른 등의 대주교와 작센, 브란덴부르크의 제후국 왕(대공) 등 6명이 모여 왕을 선출했단다. 왕을 뽑는 이 사람..

역사 2022.11.18

헝가리 부다페스트

헝가리 부다페스트 며칠 동안 비가 내린 탓인지 도시를 가로지르는 도나우강은 거센 탁류였다. '다뉴브강의 잔물결'도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도 존재하지 않았다. 다뉴브(Danube), 도나우(Donau), 두너(Duna)는 모두 같은 강을 가리키는 영어 · 독일어 · 헝가리어 이름이다. '푸르고 잔잔한 도나우의 물결'이라는 나의 관념은 아마도 음악 때문에 생긴 것이었으리라. 19세기 루마니아 작곡가 이바노비치의 왈츠곡 '다뉴브강의 잔물결'과 슈트라우스 2세의 왈츠곡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같은 것이다. 특히 이바노비치의 곡은 1926년 현해탄에 몸을 던진 조선 최초 소프라노 윤심덕의 원곡이어서 한국에 널리 알려졌다. 도나우강은 알프스 남쪽 경계를 타고 동쪽으로 흐르면서 빈을 지난 다음 부다페스트 근처에서..

여행, 걷기 2022.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