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걷기

헝가리 부다페스트

송담(松潭) 2022. 11. 14. 12:16

헝가리 부다페스트

 

 

며칠 동안 비가 내린 탓인지 도시를 가로지르는 도나우강은 거센 탁류였다. '다뉴브강의 잔물결'도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도 존재하지 않았다. 다뉴브(Danube), 도나우(Donau), 두너(Duna)는 모두 같은 강을 가리키는 영어 · 독일어 · 헝가리어 이름이다. '푸르고 잔잔한 도나우의 물결'이라는 나의 관념은 아마도 음악 때문에 생긴 것이었으리라. 19세기 루마니아 작곡가 이바노비치의 왈츠곡 '다뉴브강의 잔물결'과 슈트라우스 2세의 왈츠곡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같은 것이다. 특히 이바노비치의 곡은 1926년 현해탄에 몸을 던진 조선 최초 소프라노 윤심덕의 <사의 찬미> 원곡이어서 한국에 널리 알려졌다.

 

도나우강은 알프스 남쪽 경계를 타고 동쪽으로 흐르면서 빈을 지난 다음 부다페스트 근처에서 직각으로 몸을 틀어 남쪽으로 내려간다. 헝가리를 벗어날 때 다시 동으로 전향해 카르파티아산맥과 발칸산맥 사이의 협곡을 따라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등 발칸반도 북부를 가로지른 후 루마니아 남부 평원과 우크라이나 저지대를 거쳐 흑해에 들어간다. 숱한 지류를 끌어안으며 알프스의 발원지에서 흑해까지 3천 킬로미터를 달리는 도나우의 품에서 빈, 부다페스트, 베오그라드 등 크고 작은 도시들이 자라났다. 1990년대에 라인강과 연결하는 운하가 개통되어 이제 도나우 물길은 흑해에서 북해까지 통하게 되었다. 하류의 도나우는 잔물결이 흐르는 푸른 강이지만 빈과 부다페스트 구간의 도나우 상류는 그렇지 않다. 탁류가 빠르게 흐르는 위험한 강이다.

 

헝가리 사람은 서기 896년 무렵 말을 타고 와서 부다페스트 도나우 우안(서쪽) 언덕 ‘오부더’ 지구를 점령했던 '머저르(magyar)'족의 후손이다. 주변에 살던 슬라브족을 밀어내고 세력을 넓혀나간 1000년, 베이크(Vajk)라는 귀족이 치열했던 내전을 종식하고 헝가리왕국을 세웠다. 그는 38년 동안 통치하면서 오늘날 헝가리 국토와 거의 비슷한 영토를 확보했고 나중 이슈트반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헝가리의 정식 국호는 '머저르공화국(Magyarorszig)'인데,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에서는 'Korea'로 통하는 것과 같은 이유로 외부에는 헝가리로 알려져 있다. 이슈트반이 '머저르 민족국가'를 창건했기에 헝가리 국민은 그를 국가의 시조(始祖)로 여긴다. 하지만 바실리카를

 

헝가리는 국토가 대한민국보다 조금 작고 인구는 서울시와 비슷하다. 오스트리아(북서), 슬로바키아(북), 우크라이나와 루마니아(동),슬로베니아와 세르비아(남)에 둘러싸인 완벽한 내륙의 평원이다. 고대에는 스키타이족과 켈트족, 판노니아족 등이 살았고 B.C.1세기 후반 로마제국 군대가 들어와 4백 년 동안 지배했다. 서로마제국이 무너진 5세기에 훈족의 왕 아틸라가 잠시 왕국을 세웠고 6세기부터 9세기까지는 몽골계 아바르족이 부다페스트 일대를 차지했다. 머저르족은 아틸라 시대에 흑해 주변의 초원지대를 떠나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고 수백 년에 걸쳐 다뉴브강과 카르파티아산맥 사이의 대평원을 잠식한 끝에 슬라브족을 밀어내고 헝가리왕국을 세웠다.

 

헝가리왕국은 오래 견디지 못했다. 이슈트반이 죽은 후 내전으로 세력이 약해졌고, 13세기 중반 몽골 침략 때 치명상을 입었다. 몽골기병은 헝가리의 드넓은 평원을 거침없이 짓밟았고 머저르왕국은 인구의 절반을 잃었다. 15세기 후반 마차시 1세의 마지막 황금기가 끝난 후 독립 공화국을 설립한 1918년까지 머저르의 후예들은 오스만제국과 합스부르크제국의 지배를 받고 살았다. 1867년의 '역사적 대타협'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이 성립한 후에야 헝가리 사람들은 독일어와 함께 자기의 언어도 공용어로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게 끝은 아니었다. 헝가리는 나치 독일과 소련의 침략과 지배를 겪었으며 새 헌법을 채택하고 자유 선거를 실시한 1990년에 처음으로 독립한 민주공화국이 되었다.

 

 

리스트 기념관은 큰 볼거리는 아니지만 빠뜨리기에는 또 아깝다. 조그만 전시실이 셋 있는 이 기념관은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였던 리스트(Lisa Ferenc, 1811-1886)가 만년에 직접 지어서 살았던 집이다. 관람료, 사진 촬영 허가 요금, 한국어 오디오가이드 사용료까지 다 합쳐도 얼마 되지 않기에 마음껏 사진을 찍었다. 피아노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악기, 탁자, 책상, 침대, 일상 용품, 훈장 등 리스트가 쓰던 것이 그대로 있었다. 관람객이 많지 않아 여유 있게 둘러보았다.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였던 리스트는 작곡가로서 <헝가리 광시곡>을 비롯해 700곡 넘는 작품을 남겼으며 수많은 피아니스트를 길러냈다. 다섯 살에 피아노에 흥미를 보였고 여덟 살에 작곡을 시작했으며 아홉 살에 첫 연주회를 했던 그는 헝가리 귀족들의 후원을 받으며 빈에서 체르니와 살리에르 등 당대의 대가들한테 연주와 작곡을 배웠다. 소년기에 우울증으로 음악을 그만두기도 했지만 성년이 된 후에 베를리오즈, 파가니니, 쇼팽과 교류하면서 자신의 음악 세계를 창조했다. 여러 귀족 부인들과 사귀었던 리스트는 30대 중반 연주를 그만두고 독일 바이마르에 살면서 작곡에 전념했다. 나중에는 로마에 장기체류하면서 종교음악에 빠졌는데 1867년 요제프 황제의 형가리왕 즉위식 음악 작곡을 의뢰받은 일을 계기로 조국에 대한 관심을 가졌고 1871년 부다페스트에 지금 기념관으로 쓰는 집을 장만했다. 1886년 룩셈부르크에서 마지막 연주회를 한 직후 연주회를 보러 바이로이트에 갔다가 폐렴으로 사망했다.

 

리스트는 헝가리에서 태어났지만 '헝가리 사람'이라 하기 어려웠고 음악도 '헝가리 음악'이 아니었다. 빈 · 파리 런던 로마 등 유럽 전역의 여러 도시에 장기 거주하면서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섭렵하고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구축한 '유럽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헝가리 집시음악에 매료되어 <헝가리 광시곡>을 썼고 황제의 헝가리왕 대관식 음악을 만들었으며 삶의 마지막 국면을 부다페스트의 자택에서 지냈다. 헝가리 국민이 좋아하는 게 당연하다.

 

영웅 광장 리스트 기념관. 테러하우스에서 민족적 정체성과 역사에 대한 헝가리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을 엿볼 수 있었다. 그들은 열등감과 자부심, 피해 의식과 책임 의식 사이에서 오래 방황했다. 한국 사람이라면 그게 무언지 느낌으로 안다. 우리 민족은 자신을 지키는데 능하다. 우리는 우리의 언어·문화 · 역사가 있다. 우리 민족은 대륙의 중국에 흡수당하지 않았고 해양 세력 일본의 침탈을 이겨냈다. 머저르 민족도 슬라브 세력권의 한가운데에서 5백 년 넘는 인고의 세월을 견딘 끝에 독립 공화국을 세웠다. 두 민족 모두 ‘보수’에 능하다. 그런 민족이 이민족의 지배를 받은 것은 혁신에 소극적이어서였다.

 

오늘의 헝가리 정치도 보수정당이 압도한다. 제1당은 보수당, 두번째는 극우 정당이고 중도 진보 성향의 정당은 그다음 자리다. 그래서 유럽연합 회원국이면서도 시리아 난민 수용을 단호히 거부했다. 자기네가 당했던 부당한 억압의 역사는 분명하게 드러내면서도 이중제국 시절 크로아티아를 비롯한 발칸 민족들의 독립투쟁을 오스트리아와 손잡고 짓밟은 일이나 영토를 회복하려는 욕심에 나치 독일과 손잡았던 사실은 입에 올리지 않는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과거사를 일관성 있는 태도로 소화해 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유시민 / ‘유럽도시기행2’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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