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 소설 61

이런 사람, 저런 사람

이런 사람, 저런 사람 손채경 변호사님께 안녕하십니까. 뵙지 못한 상태로 인사드립니다. 저는 신문의 민노진 기자라고 합니다. 스마트폰 만능의 시대 현실에 안 어울리게 편지 쓰는 걸 이해하여 주십시오. 변호사님을 취재하려고 근무처로 열 번,예, 꼭 열 번을 찾아갔지만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대형 로펌의 파워가 엄청나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 저를 완전 차단, 거부하는 일을 당하면서 그 폐쇄적 파워를 여실하게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 완강한 배타적 조직 보호에 막혀 마음 단단히 먹었던 취재를 포기, 단념한다는 것은 기자의 근성상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수단으로 이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개인정보보호법에 가로막혀 변호사님의 핸드폰 번호를 알 방도가 없으니 다른 방법이 더 무..

조정래 소설 2023.12.19

화엄사 각황전

화엄사 각황전 마당으로 나선 운정은 대웅전을 향해 합장했다. 그리고 각황전 쪽으로 돌아서 다시 합장했다. '내가 일찍이 뭐라고 가르쳤더냐. 비구의 몸으로 생명의 인연을 만들려거든 차라리 그것을 독사의 입에다 넣으라고 하지 않았더냐.' 세존의 준엄한 말씀이 또 정수리를 내려치는 것 같았다. 운정은 고뇌스런 숨길을 다스리며 천천히 눈을 떴다. 천 근 무게로 각황전은 드높게 서 있고, 기와 이음매의 덮개가 없어 기와골이 물이랑처럼 이어진 넓은 지붕 위에는 시리도록 흰 햇살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용마루와 경계 짓고 있는 하늘은 끝 모르게 깊고 푸르렀다. 아, 저것이 필경 해탈의 빛이 아닐 것인가. 문득 생각하는 운정의 내부에는 차가운 전율이 일직선으로 뻗어내리고 있었다. 각황전을 하염없이 올려다보고 있는 운정의..

조정래 소설 2023.01.08

아내의 잃어버린 삶을 찾아주기

아내의 잃어버린 삶을 찾아주기 내가 20년 동안 글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나와 함께 징역살이를 한 사람이 있다. 아내 김초혜다. 아내는 자기의 시 쓰는 일도 제쳐놓고 나의 옥바라지를 하느라고 날마다 시장을 다녀야 하고, 내가 써놓은 원고를 꼼꼼하게 읽어 감수자의 역할을 해내야 했다. 그러나 그런 일보다도 아내를 가장 괴롭혔던 일이 『태백산맥』 때문에 벌어진 여러 가지 사건들이었을 것이다. 8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시작된 심야의 공갈 협박 전화, 검찰의 내사 소식, 그리고 마침내 터진 1994년의 고발 사태, 그에 따른 경찰청의 수사, 검찰의 수사, 지금까지 미해결 상태로 밀려온 고비고비를 넘기면서 가뜩이나 겁 많은 아내는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을 것인가 아내는 주부로서 나의 건강을 지키고, 문학 동반자로..

조정래 소설 2021.08.23

조정래 / ‘한강10’중에서

조정래 / ‘한강10’중에서 가지가지 색깔로 물든 단풍과 함께 지천에 넘실거리는 새하얀 억새꽃의 물결은 가을의 막바지에서 어우러지는 아름다움의 극치인지도 모른다. 형형색색의 단풍들은 억새꽃 무리의 티없이 하얀색을 바탕 삼아 더욱 선명하고 화려하게 돋보이고, 억새꽃들은 마지막 생명을 태우는 단풍들의 현란함으로 그 순백의 청아함과 우아함이 한층 살아올랐다. 단풍과 억새꽃은 서로를 북돋워주는 조화 속에서 가을산을 눈물겹도록 아름답게 수놓고 있었다. 그들이 시샘이라고는 모르고 그디지 사이가 좋은 것은 머지않아 서로에게 닥칠 똑같은 운명을 알아서인지도 모른다. 차가운 북풍을 타고 겨울이 닥쳐오면 그들은 어찌할 수 없이 삶을 마감해야 한다. 곱고 고운 단풍들은 낙엽이 되어 어디론가 휩쓸려가야 하고, 순백..

조정래 소설 2021.08.23

조정래 / ‘한강9’중에서

조정래 / ‘한강9’중에서 “아 글씨, 지붕을 스레이트로 갈면 좋은 것이 워디 한두 가지요? 해마동 지붕 갈아 이니라고 심 안 들고 편혀서 좋제, 참새새끼덜 파고들 디 없응께로 참새 잡아묵을라고 뱀 안 탄께 좋제, 그 징헌 굼벵이 안 쓸어 좋제, 장마가 아무리 들어도 그 냄새 고약헌 노래기 안 기나와서 좋제, 그라고 서양집맹키로 그 멋지기가 또 얼매요. 요리도 좋고 존 것이 많은디 워째 그리 말을 안 듣소. 돈이 없어서 그런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것이요. 당장 돈을 내라는 것이 아니고 절반은 나라에서 대주고 남치기 절반은 싸디싼 이자로 10년 동안 차차로 갚아나가라는 것 아니오. 그 돈 갚는 디는 쬐깐만 부지런하면 된단 말이오. 돼지럴 한 마리썩 쳐서 폴아도 되고, 닭 댓 마리만 쳐서 계란..

조정래 소설 2021.08.19

조정래 / ‘한강8’중에서

조정래 / ‘한강8’중에서 “세상에 법원의 영장 없이 체포하고, 전시도 아닌데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 처단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예요? 이게 도대체 무슨 나라예요. 서경혜가 말하는 것은 긴급조치 1호의 5항과 6항이었다. 대통령긴급조치 1호는 전체 7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2. 대한민국 헌법의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 발의, 제안 또는 청원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3.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4. 전 1, 2, 3호에서 금한 행위를 권유, 선동, 선전하거나 방송 보도, 출판, 기타 방법으로 이를 타인에게 알리는 일체의 행동을 금한다. 5. 이 조치에 위반한 자와 이 조치를 비방한 ..

조정래 소설 2021.08.15

조정래 / ‘한강7’중에서

조정래 / ‘한강7’중에서 딸을 생각하면 도무지 견딜 수 없는 심정이었다. 딸은 너무 가르치지 못해 가여웠고, 너무 고생을 많이 시켜 안쓰러웠다. 딸은 가까스로 국민학교를 나오고 나서 열여섯을 넘기자 세상 물결을 타고 가발공장 직공이 되었다. 딸은 고등학교까지는 안 되더라도 중학교는 꼭 다니고 싶어했다. 그러나 줄줄이 잇댄 아이들을 놓고 그 소원을 풀어줄 수 없었다. 계집애라고 그 꿈을 무질러버렸고, 딸은 눈물을 머금고 돌아앉은 다음 다시는 그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딸은 부지런하기도 했지만 솜씨가 남달랐다. 가발공장에서 남들을 앞질러 잘 만들고 많이 만드는 일급 기술자가 되었을 때 애비로서 기쁨보다는 슬픔이 더 컸다. 저것을 가르쳤더라면 얼마나 공부를 잘했을 것인가 하는 안쓰러움과 함께...

조정래 소설 2021.08.13

박태준에 대하여

박태준에 대하여 “박태준 사장이란 사람 아주 대단하다는 소문이야. 수학적인 머리가 뛰어나고, 논리적이며, 원리원칙주의자라는 거야. 해방 전에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거든. 보통 군출신들하고는 다르니까 알아서 접근해" 편집국장이 다시 일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 사람이 고수하는 원리원칙이 어느 정도나 하면 말야, 군대의 차는 사적으로 쓸 수 없다는 규칙을 지키느라고 큰딸을 잃어버린 사람이야. 무슨 말인가 하면, 전방 지휘관을 할 때 갑자기 큰딸이 아팠는데, 지휘관 찝차를 사적으로 써서는 안 된다고 병원에 데려가지 않았어. 애는 밤새도록 앓고, 다음날에야 버스를 타고 몇 십리 밖 병원을 찾아간 거야. 그런데 급성폐럼이라서 애는 결국 죽고 말았지. 그 얘기를 듣고 우리 사장은 폭파를 막으려고 빽을..

조정래 소설 2021.08.12

조정래 / ‘한강6’중에서

조정래 / ‘한강6’중에서 독일 의사들은 집으로 초대받는 것을 마치 무슨 상이라도 받는 것처럼 기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서양에서는 사람을 집으로 초대하는 것이 상대방에 대한 최고의 호의의 표시이니까 초대받은 의사로서는 자기의 의술이 인정받는 보람스러운 자리가 아닐 수 없었다. 김광자는 의사의 보조자로서 서너 번 그 기쁨을 함께 나눈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 자리에서는 꼭 기분 언짢은 일이 생겼다. 한국에도 텔레비전이 있느냐, 냉장고를 쓰느냐. 한국에도 한국의 고유 문자가 있다는 것이냐? 아니, 시인과 소설가가 있다고? 그들의 호의적 관심이 어느새 자존심을 긁는 모독감을 느끼게 하고는 했다. 그러나 해가 바뀔수록 한국 간호원과 광부들에 대한 호감과 신뢰는 독일 사회에 넓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조정래 소설 2021.08.10

어야, 단풍 참 오지게 곱다!

어야, 단풍 참 오지게 곱다! “허, 요런 무주 산골꺼정 머리크락이 동나부렀네 그랴. 워떤 놈덜이 골골이 잘도 더터묵었당께로.” 천두만은 산골동네를 나서며 허탈하게 혼잣말을 뇌까리고 있었다. 마을을 둘러싼 첩첩의 산에는 색색의 단풍이 꽃의 아름다움을 비웃듯 낭자하게 물들어 있었다. "아저씨, 저 개울가에서 좀 쉬었다 가요. 맥빠져서 더 못 걷겠어요." 뒤따르던 미용사 아가씨가 가방을 추스르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려, 물도 한 모금 묵고 낯도 잠 씻고 허드라고." 천두만이 고개를 끄덕이며 개울 쪽으로 발길을 잡았다. 미용사 아가씨가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뭐라고 투덜거렸다. 그 뒤를 군용 배낭을 진 나복남이 터덕터덕 따르고 있었다. "어야, 단풍 참 오지게 곱다." 천두만이 개울가에 털퍽 주저앉으며 주변..

조정래 소설 2021.0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