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 소설

조정래 / ‘한강7’중에서

송담(松潭) 2021. 8. 13. 12:00

조정래 / ‘한강7’중에서

 

< 1 >

 

 

딸을 생각하면 도무지 견딜 수 없는 심정이었다. 딸은 너무 가르치지 못해 가여웠고, 너무 고생을 많이 시켜 안쓰러웠다. 딸은 가까스로 국민학교를 나오고 나서 열여섯을 넘기자 세상 물결을 타고 가발공장 직공이 되었다. 딸은 고등학교까지는 안 되더라도 중학교는 꼭 다니고 싶어했다. 그러나 줄줄이 잇댄 아이들을 놓고 그 소원을 풀어줄 수 없었다. 계집애라고 그 꿈을 무질러버렸고, 딸은 눈물을 머금고 돌아앉은 다음 다시는 그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딸은 부지런하기도 했지만 솜씨가 남달랐다. 가발공장에서 남들을 앞질러 잘 만들고 많이 만드는 일급 기술자가 되었을 때 애비로서 기쁨보다는 슬픔이 더 컸다. 저것을 가르쳤더라면 얼마나 공부를 잘했을 것인가 하는 안쓰러움과 함께.

 

딸은 누구보다도 돈을 많이 벌면서도 돈을 아끼는 마음이 차돌멩이였다. 처녀들이 흔히 사서 쓰는 화장품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옷도 더럽지 않게 자주 빨아 입을 뿐 몇 년이 가도 새로 해 입을 줄 몰랐다. 그런 딸은 못 배운 것에 비해 속 찬 유식한 말들을 너무나 많이 알고 있었다.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마라, 노력은 성공의 어머니, 부자가 되고 싶으면 돈을 쓰지 마라, 속이 빈 자가 겉치장이 요란하다, 가난은 견디기 고통스럽지만 정복되지 않는 가난은 없다. 딸은 이런 말들을 곧잘 하며 제 어머니를 위로하기도 했고 동생들을 타이르기도 했다. 배우고 싶은 욕심을 버리지 못한 딸은 부지런히 야학을 다녔다. 딸은 고마운 대학생선생님들한테서 중학교 공부를 하면서 그런 좋은 말들도 배웠던 것이다.

 

가난 속에서 효자 효녀 나더라고 딸은 속 깊고 마음 따스하기가 이미 어른이었다. 하청공장을 하려는 것도 제 돈벌이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제가 돈을 많이 벌어 부모 편히 모시고, 동생들을 다 대학까지 공부시켜 주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P.51~52)

 

< 2 >

 

 

가만있어라 보자, 니 입다실 것이 마땅찮다 와.”

몸을 일으키며 두리번거린 월하댁은 검정고무신을 끌며 부산스레 마당을 가로질러 갔다. 그리고 텃밭 가장자리의 생울타리 옆에 선 감나무에서 감을 따기 시작했다.

 

"아나, 얼렁 많이 묵어라. 단감으로 순천 단감을 친다드라만 우리 강진 단감 못 당헌다. 강진 단감이사 햇발 더 많이 받고 잡짜름헌 갯바람할라 쐼서 익은 것잉께 살이 더 사근사근하고 단물이 많애 맛이 훨썩 진하고 깊으제, ."

월하댁은 손바가지에 가득 담긴 감을 마루에 쏟아놓으며 감 자랑이 늘어졌다. 어렸을 때부터 들어온 그 귀에 익은 말이 정겨워 김선진은 싱그레 웃었다.

 

봐라, 노리꾸리허니 딱 묵기 좋고 맛나게 안 생겼냐. 느그덜이 지지고 볶음서 한울 안에 살 적에넌 누구 손을 타는지도 몰르게 풋감 철에 반 넘어 없어져불고 허등마 인자는 가실이 져무는디도 저리 가지가 째지게 매달렸다 와."

둥글넓적한 생김에 토실하게 살쪄 먹음직스럽게 잘 익은 감을 치마에 씩씩 문질러 막내아들에게 내밀며 이렇게 말하는 월하댁의 말끝에는 희미한 한숨이 하르르 서리고 있었다.

 

감을 받으며 가슴이 뭉클해진 김선진의 눈길은 감나무로 옮겨갔다. 정말 감나무에는 감들이 주렁주렁 달려 가지들이 찢어질 지경이었다. 그 풍성하게 매달린 감들이 자식들 다 떠나버린 사실과 홀로 남은 어머니의 외로움을 동시에 말해 주고 있었다.

 

어머니는 자신이 혼자 있을 때면 치마폭에 감추었던 풋감을 살며시 꺼내주고는 했다. “우리 막둥이는 키가 작아서 늘 손해 보지야? 아이고메 짠하고 불쌍헌 거.” 이러면서 어머니는 엉덩이를 토닥거려 주고는 했다. 그럴 때면 달치근한 풋감맛보다는 엉덩이에 느껴지는 어머니의 손맛이 훨씬 더 좋았던 것이다.

 

"혼인허는 해에 느그 아부지가 저 감나무를 심군 것인디...... 사람은 가고 옶서도 정 남은 표식인가 으쩐가 감은 오래도 잘도 달린다......”

원하댁은 낮은 가락을 읊조리듯 중얼거렸다.

 

(P.175~177)

 

< 3 >

 

 

깊고 깊은 어둠 저 멀리 무수한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크고 작은 별들의 맑은 반짝거림은 수많은 생명들의 맥박이 뛰고 있는 것같이 경이로운가 하면, 가슴 깊이 저려오는 감탄과 함께 이유 모를 허무감에 싸이게도 했다. 사춘기에 느꼈던 그 감정은 세월의 흐름 속에서 어쩌다 밤하늘을 볼 때마다 변함없이 마음을 적시고는 했다.

 

번잡하기 이를 데 없는 서울에서, 그것도 매일 시간과 다투는 기자 노릇을 하며 참 오랜만에 바라보는 밤하늘이었다. 여느 때 없이 깊은 허무감 속에서 문득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하늘을 나는 새가 허공에 그 발자국을 새기지 못하듯이 인간사 그 무엇이 영겁 속에 남음이 있으랴.’

 

언젠가 읽었던 불경의 말씀이었다. 불경은 역시 진리의 바다고, 석가모니는 비교할 자 없는 지고한 현자였다. 그 허무의 철학은 극점에 이른 미학이고, 이론을 제기할 수 없는 결과론이었다. 그러나 인간 군상들은 나날의 생활 속에 묻혀 현실만 크게 볼 뿐 그 허무의 가르침을 쉽게 망각해 버렸다. 그 허무의 가르침의 핵심은 현실을 작게 보고, 과욕을 줄이라는 것이었다.

 

신준호……. 그는 허무의 가르침과는 반대로 현실을 크게 보고, 한껏 욕심을 키우며 타서는 안 될 잘못된 권력의 열차에 편승한 것이다. 그가 그렇게 모질게 자신을 내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도대체 사람이란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가……...

세상살이를 해갈수록 거듭되는 인간에 대한 회의와 절망을 또 다시 느끼며 원병균은 고개를 떨구었다.

 

(P.293~294)

 

< 4 >

 

 

김선태는 중얼거림 끝에 또 긴 한숨을 매달았다. 그의 눈길은 멀리 아득하게 흘러가고 있는 한강에 가 있었다.

"그야 어디 자네만 그런가. 나도 그랬고, 한강철교 건너온 젊은놈들이야 다 청운의 꿈을 품었었지. 그래, 서울은 참 묘한 곳이야. 출세의 도시이기도 하고 절망의 도시이기도 해. 무작정 사람을 끌어 당기는 마력을 발휘하면서 책임은 지지 않는 잔인한 도시이기도 하지, 조선 500년에서 지금까지 출세해 보겠다고 서울로 밀려들었다가 꿈을 이루지 못하고 저 한강에 눈물을 떨구며 발길을 돌린 젊은이들이 그 얼마나 많겠는가. 그 눈물을 다 모아놓으면 또 하나 한강이 될지도 모르지. 오랜만에 남산에서 한강을 내려다보니 감정이 묘해지는군, 이 사람아, 제사 지내니?""

", 예에..."

김선태는 반쯤 남은 술을 털어넣고 일른 잔을 건넸다.

 

사실 인생이란 게 별게 아니긴 한데 고비고비 잘 풀리지 않으면 그것 참 팍팍한 모래밭인 거라. 죽고 나면 다 헛것인데 산목숨 하루하루는 심각하고 절실하니까 최선을 다해 노력을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숱한 사람들이 인생에 대해 제 나름으로 많은 말들을 했는데 정작 정답은 없는 게 인생이거든, 사는 것, 그것에 열중할 수밖에 없어.”

저 멀리 시선을 둔 박만길은 술을 찔끔거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저어………. 선배님은.., 고시를 시작한 걸 후회하지 않으세요?"

김선태는 주저하고 머뭇거리며 이 말을 꺼냈다.

"! 자네가 결국 그걸 묻는군, 글쎄에……. 그걸 뭐라고 해야 하나, 후회 안 한다고 하면 형편없이 둔감한 놈이 될 것이고, 후회한 다고 하면 내 인생이 한없이 초라하게 될 거고……. 그게 반, 반이라고 해둘까? 키엘케고르가 말했지 아마? 인생은 어차피 후회다. 결혼하라, 후회할 것이다. 결혼하지 마라, 후회할 것이다. 출세해 보라, 후회할 것이다. 출세를 외면하라, 후회할 것이다. 인생이 이런 거니까 다 자기가 마음먹기에 달린 거지. 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게 흠이었고, 공부깨나 잘한 게 두 번째 흠이었지. 이 나라 농부의 태반이 그렇듯이 우리 아버지도 힘없고 가난한 농사꾼을 가장 천한 직업으로 여기고 아들만은 출세시켜 권세를 누리기를 바라셨지. 그러나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셨고.

박만길은 어깨가 처져내리게 한숨을 쉬더니 술잔을 꺾었다.

(P.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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