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詩, 글 134

고양이 같은 봄이 달려듭니다

고양이 같은 봄이 달려듭니다 닭 잡으러 가는 고양이 동영상을 본 적이 있는데요. 얼마나 살금살금 가는지.. 풀잎을 스치는 바람 소리도 들릴만큼 조심스럽게 다가가더군요. 그러다가도 닭이 조금이라도 낌새를 챈 것 같으면 바로 얼음이 돼요. 숨도 참는 것 같더라고요. 침 삼키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긴장된 순간이 지나고 지척이 되면 확 덮치는데요. 봄이 꼭 닭잡으러 오는 고양이처럼 다가옵니다. 아직 달려들지는 않았지만 곧 "잡았다.” 하고 외칠 거예요. 그러면 천지 사방이 다 놀라서 진달래, 개나리 화들짝 피고 벚꽃 휘날리며 꽃들이 난장을 부리겠지요. 그렇게 푸닥거리를 하고 나면 초록이 내려옵니다. 김창완 / '찌그러져도 동그라미입니다'중에서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 연두빛(2024.4.24 산책길에서)

정지아 /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중에서

먹이사슬로부터 해방된 초원의 하루 이미지 출처 : pngtree 아프리카 초원 어딘가 야생 사과나무 한그루가 우뚝 서있다. 저 홀로 자란 사과나무는 장정 열댓 명이 끌어안아도 팔이 닿지 않을 만큼 거대하다. 돌보는 이 하나 없어도 사과나무는 때가 되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그리고 때가 되면 절로 떨어진다. 땅에 떨어진 사과는 고온건조한 기후 덕에 발효되어 향긋한 사과주로 익어간다. 마침맞게 술이 익은 날, 코끼리와 사자가 가장 먼저 사과나무 아래로 찾아온다. 코끼리는 긴 코로 날름날름 미친듯이 사과를 주워 먹는다. 술에 취한 코끼리가 비틀거리다 제 다리에 걸려 자빠지고 신이 나 내달리던 사자는 저희끼리 부딪쳐 나뒹군다. 그때쯤 먼 데서 망을 보던 영양이며 얼룩말, 원숭이들이 우- 사과나..

순천만 습지 (2022.12.11)

순천만 습지 (2022.12.11) 오랫만에 순천만 습지를 찾았는데 초겨울의 풍경이 아름다웠습니다. 창공에 철새들이 날면서 우는 소리까지 들렸습니다. 와온 바다 / 곽재구 해는 이곳에 와서 쉰다 전생과 후생 최초의 휴식이다 당신의 슬픈 이야기는 언제나 나의 이야기다 구부정한 허리의 인간이 개펄 위를 기어와 낡고 해진 해의 발바닥을 주무른다 달은 이곳에 와 첫 치마폭을 푼다 은목서 향기 가득한 치마폭 안에 마을의 주황색 불빛이 있다 등이 하얀 거북 두 마리가 불빛과 불빛 사이로 난 길을 리어커를 밀며 느릿느릿 올라간다 인간은 해와 달이 빛은 알이다 알은 알을 사랑하고 꽃과 바람과 별을 사랑하고 삼백예순날 개펄 위에 펼쳐진 그리운 노동 음악 새벽이면 아홉 마리의 순금빛 용이 인간의 마을과 바다를 껴안고 날아..

정지아 / ‘숲의 대화’(은행나무 출판)중에서

정지아 / ‘숲의 대화’(은행나무 출판)중에서 브라보, 럭키 라이프 (...생략...) "아가! 나가 분명히 봤다. 니는 할 수 있어야 겡우야! 쪼깐 힘내서 다시 해보자." 경우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또르르 굴러 떨어진다. 그리고 서서히 팔이 올라간다. 반 뼘이나 올라갔을까, 아들의 팔은 턱, 둔탁한 소리와 함께 침대로 떨어진다. 아들의 팔은 분명 저 스스로 움직였다. 사고를 당한 날로부터 무려 23년 만이다. 아들은 또 기적을 만들어냈다. "아이고, 아가!" 그의 고함을 듣고 달려온 아내도 그 기적의 순간을 목격한 모양이다. 아내가 아들의 품에 얼굴을 묻고 흐느낀다. 아들의 양 눈가로 소리 없이 눈물이 흐른다. 그도 돌아서 눈물을 훔친다. 23년 만에 아들은 제 팔을 들어 올렸다. 의사는 근육..

김주혜(박소현 옮김) /‘작은 땅의 야수들’중에서

김주혜(박소현 옮김) /‘작은 땅의 야수들’중에서 남자의 눈이 번쩍 떠졌다. 정말로 어떤 소리가 귀에 들려오고 있었다. 벼랑 가장자리에서 낮게 그렁대는 숨소리였다. 짐승이 호흡할 때마다 싸늘하게 얼어붙은 수증기가 향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그는 활시위를 팽팽히 당겼다. 그러나 사냥감을 포획하게 되더라도, 자신이 산 아래까지 무사히 내려가진 못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저 표범의 먹이가 되어 죽고 싶지는 않을 뿐이었다. 표범이 절벽 끝에 튀어나온 바위로 훌쩍 올라왔다. 짙은 안개 속에서 윤곽으로만 어른거리는 그 짐승의 존재를 그는 눈으로 보기보다 온몸의 감각으로 느꼈다. 마침내 짐승이 몇 자도 되지 않는 거리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남자는 숨이 턱 막혀 활을 아래로 내렸다. 그것..

할머니의 마스크

할머니의 마스크 혼잡한 도심의 교차로를 낡은 리어카 한 대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잡동사니 고물을 잔뜩 실은 채 신호등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서 천천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바쁘게 걸어가던 사람들이 쳐다보고 놀란 차량들이 잇달아 경적을 울려도 끌고 있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리어카는 그냥 덜컹거리며 지나가고 있습니다 혼자 움직이는 듯한 리어카가 신기하여 손잡이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면 그곳엔 리어카보다 자그마하고 실려진 고물보다 더욱 낡고 구부러진 할머니 한분이 폭염에도 불구하고 때묻은 광목천으로 입을 휘감은 상태로 힘겹게 리어카를 끌고 있었습니다 평생을 찌든 삶의 무게에 짓눌려도 나름 꿋꿋하게 견뎌왔지만 코로나 19가 창궐한 두어 해 전부터는 스스로 생사의 경계선에도 서 보았고 소중한 사람과 때아닌 이별도 ..

고아

고아 1918년 소녀들이 도시에 도착한 그날 조금 더 이른 시각에, 한 소년이 남대문을 통과했다. 전날 밤 그 아이는 궤짝 운반을 거들거나 소소한 심부름을 하는 대가로 몇 주간 그를 거둬주었던 보부상 한 무리와 작별했다. 그들은 아이에게 20전짜리 은화 두 닢을 주었는데, 그 정도면 공동 여관방에 묵으며 국밥 한 그릇을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금액이었다. 하지만 소년은 공복을 견딜 만한 힘이 남지 않을 때까지 끼니를 거르며 돈을 아끼기로 하고, 남대문 바깥 도로변의 도랑으로 향했다. 흙바닥 어느 귀퉁이에 둥그렇게 팬 곳을 발견하자 그는 옆으로 몸을 웅크려 그곳에 누운 뒤 무릎을 가슴까지 올려 바짝 끌어안았다. 마치 소년이 그 자리에 눕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연한 강아지풀 다발이 부드러운 이불처럼 그..

닮고 싶은 사람

닮고 싶은 사람 그 사람은 나를 위해 먼저 노력하는 사람이었고, 나에게 매 순간 최선의 배려를 건네는 사람이었으며, 나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변화시키는 사람이었고, 자꾸만 내게 행복을 선물하는 사람이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누군가를 향해 먼저 뻗는 손길에는 배려가 숨어 있고, 누군가를 향해 먼저 내딛는 걸음에는 희생이 묻어 있고, 누군가를 항해 먼저 건네는 마음에는 용기가 담겨 있다는 것. 그런 사람의 행동에는 나를 향한 진심 외에 어떤 목적도 존재하지 않기에 나 또한 같은 마음을 전하고 싶어진다. 그런 사람이 있다. 자신이 먼저 좋은 사람이 되어 누군가를 좋은 사람으로 만드는 사람이 있다. 참 닮고 싶은 사람이 있다. 미워하지 않을 용기 삶을 걷다 보면 자꾸만 스스로를..

울지 말아요, 베트남

울지 말아요, 베트남 몇해전, 성탄절을 앞두고 베트남에 갔다. 호치민(사이공)공항 대합실에 들어서자 여기저기서 우는 소리가 들렸다. 둘러보니 가히 눈물바다였다. 그날은 마침 한국으로 산업연수생들이 떠나는 날이었다. 저들의 눈물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을까? 순간 1960, 70년대 우리네 풍경이 떠올랐다. 그래, 그때 김포공항이 이랬었지…. 순전히 돈을 벌려고 낯선 나라로, 잘 사는 나라로 주먹 쥐고 눈물을 뿌리며 떠나갔다. 김포공항은 눈물이 마를 새가 없었다. 후진국일수록 공항은 눈물에 젖는다. 가난했던 그때 우리처럼, 베트남 사람들도 조국을 떠나고 있었다. 한국은 1964년부터 1973년까지 8년 5개월 동안 32만여 명이 베트남전쟁에 참여했다. 파월장병! 당시 나라 안의 관심과 화제, 이야깃거리의 더듬..

그런 친구 하나

그런 친구 하나 언젠가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매년 누군가 2천만 원의 돈을 건네준다면 2퍼센트의 행복을 느끼고, 좋은 친구가 하나 생기면 15퍼센트의 행복을 느낀다고.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는 돈으로 살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으니까. 그리고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니까. 문득, 내게 15퍼센트의 행복을 안겨주는 친구의 얼굴이 떠올라 그에게 전화를 걸어 말했다. 너는 15퍼센트의 행복을 안겨주는 아이라고, 그러자 친구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네가 나한데 2천만 원을 주면 난 17프로나 행복해지는 거네? 수화기를 사이에 두고 싱거운 농담을 주고받으며,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새삼 깨달았다. 어쩌면 한 사람이 주는 행복에 대한 퍼센트는 15퍼센트 이상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