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詩, 글 134

그런 친구 하나

그런 친구 하나 언젠가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매년 누군가 2천만 원의 돈을 건네준다면 2퍼센트의 행복을 느끼고, 좋은 친구가 하나 생기면 15퍼센트의 행복을 느낀다고.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는 돈으로 살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으니까. 그리고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니까. 문득, 내게 15퍼센트의 행복을 안겨주는 친구의 얼굴이 떠올라 그에게 전화를 걸어 말했다. 너는 15퍼센트의 행복을 안겨주는 아이라고, 그러자 친구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네가 나한데 2천만 원을 주면 난 17프로나 행복해지는 거네? 수화기를 사이에 두고 싱거운 농담을 주고받으며,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새삼 깨달았다. 어쩌면 한 사람이 주는 행복에 대한 퍼센트는 15퍼센트 이상은 ..

무덤 위에 깃든 고요

무덤 위에 깃든 고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것들이 있다. 뱀이나 쥐 등이다. 어떤 이는 새가 무섭다고도 한다. 무덤 또한 피하고 싶어 한다. 한동안 무덤을 찍으러 전국의 야산을 오르락내리락하던 때가 있었다. ‘죽음은 무엇인가?’ 하는 따위의 철학적인 명제가 아니라 무덤이 삶의 주변과 자연에서 어떻게 자리하고 있는지 알아보고 싶었다. 어린 시절 따뜻한 봄날에 등을 기대고 눕는다거나, 미끄럼을 타던 날들 속에 있던 묘지는 자연의 일부였다. 작은 반원형의 둔덕에 죽음은 없었다. 열 살 때 내가 가장 좋아하던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도 죽음의 실체는 없었다. 떠들썩한 장례식과 행렬이 있었다. 죽음이 그렇게 가버리고 나면 긴 시간 그리움만 남는다. 지금도 나는 반원형의 묘지에서 돋아나는 새순과 뜨거운 여름날..

노들섬

노들섬 사진은 재현에서 시작된다. 이 기능은 사진의 복잡한 이론을 낳게 한다. 이런 논쟁을 차치하고라도 사진이기에 가능한 초월적인 것이 있다. 사진은 먼 시간을 단숨에 끌어당기는 역사의 증언자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사진 한 장이 문득 60여년 전 한강 노들섬의 모습을 아련히 다가서게 한다. 한강을 내려다보는 두 여인의 뒤태가 곱다. 멋이란 이런 것이다. 억지로 꾸미지 않는 것, 되바라지지 않는 것, 무상한 것. 초로의 두 여인은 곱게 단장을 하고 여름날 물 구경을 나온 것인가. 한 여인은 꽃무늬 치마에 꽃무늬 양산으로 깔맞춤을 하고 있다. 여인의 뒷모습에서 속옷이 비치는 시스루룩 저고리가 인상적이다. 다른 여인은 흰 치마저고리에 흰 양산을 들고 있다. 한국의 정서와 멋과 여유를 사진에 잘 담고 있다. ..

살람, 에티오피아

살람,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 입안에서 반복해 발음하다 보면 왠지 아프리카적 낭만이 고여 드는 것 같습니다.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에 내렸습니다. 이동하는 동안 공항 앞에서 손님을 태우려는 낡은 택시들이 제일 먼저 시선을 끌었습니다. '저 택시들이 과연 달릴 수는 있을까.' 30년은 더 돼 보이는 택시는 그야말로 '너덜너덜'했습니다. 차를 오래 타는 것도 미덕이지만 안전이 의심될 지경이었습니다. 해발 2400m의 에티오피아의 수도는 선선했습니다. 이곳 날씨는 출장을 준비하며 알게 되었습니다. '아프리카는 덥다'는 걸 진리로 알고 산 지난 세월이 좀 허망했다고나 할까요. 공항 가까운 호텔에서 하루를 묵었습니다. 길 위에서 목격한 현지인들의 남루한 모습과 그 속에 우뚝 서 있는 호텔은 별개의 세..

플라이 미 투 더 문(Fly me to the moon)

플라이 미 투 더 문(Fly me to the moon) 어릴 적 나는 피아노학원의 최고참 언니를 동경의 눈길로 바라보곤 했다. 초급자용 「바이엘」이나 겨우 띵똥거리던 내게는 「체르니 40」쯤은 거든히 치는 언니가 거의 세계 최고의 피아니스트치럼 보였다. 그 언니가 매일같이 연습하던 곡은 와이먼의 였다. 태권도를 처음 배우면 달마다 바뀌는 허리띠 색으로 실력을 가늠하듯이, 피아노 초보들 사이에서는 "너 칠 줄 알아?" 하면서 서로의 실력을, 혹은 각자 자기가 다니는 피아노학원의 선배들을 자랑하곤 했다. 그러니까 제목은 아주 잘 알았지만 '은파'라는 단어의 뜻은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빛을 받아 반짝이는 은빛 물결, '은파'는 그런 뜻이다. 푸른 여름의 밤바다 위로 밝은 보름달이 고요히 떠오르면 연인들은 ..

그림자에 속지 마

그림자에 속지 마 사진출처 : 한의사 이정환 네이버 블로그 빛을 등지고 걷지 마. 외롭다고 빛을 등지고 걷는다면 언제나 어두운 그림자와 벗하게 돼. 앞을 바로 봐봐. 저마다 저렇게 자기만의 아름다운 빛을 자랑하기 바쁘잖아. 뒤돌아보지 마. 애써 내 어두운 면을 볼 필요는 없어. 다시 겨울이 왔다 왔나 하면 가버리는 가을처럼 당신도 내게 그런 계절이었다. 가을이 슬픈 이유는 뜨거웠던 여름을 숨 가쁘게 빠져나와 나무들도 옷을 갈아입고 손을 흔들고 들판의 무르익은 벼들도 살랑살랑 춤을 추는데. 왔나 하면 가버리는 계절처럼 당신도 그렇게 가버렸기 때문이다. 사랑인가 했는데 다시 겨울이 오고 있음을. 아름다운 옷을 입고 손을 흔들며 환하게 웃으며 가을바람에 그렇게 실려 나갔다. 사랑인가 했는데 다시 차가운 겨울이..

바위 31

바위 31 내 심장 한 모서리 나무 한 그루 심네 비 그친 저 아득한 거리에서 옮겨온 나무 눈보라가 와서 가지를 흔들 때 혹은 노을 한 보자기 걸쳐 나부낄 때 아픔을 견디며 잎 내고 꽃 피워 올릴 때 못 견디게 보고 싶은 것들 내 심장에 뿌리 깊게 뻗어 나무 한 그루 살고 있네 문효치(1943~) 바위는 한번 자리 잡으면 떠나지 않는다. 그곳에서 묵묵히 풍화를 견딘다. 어지간한 비바람엔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바위는 옆에서 자라는 풀과 나무, 위로 기어다니는 개미나 자벌레를 통해 세월의 변화를 감지한다. 그들의 쉼터나 은신처가 되어주기도 한다. 시인은 ‘바위’ 연작시 70편을 묶은 시집에서 “함묵과 무표정의 발언을 채록”했다고 한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입 꾹 닫은, 마음속에 쟁여둔 침묵의 언어가 시..

친절한 사람과의 소통

친절한 사람과의 소통 (...생략...) 우리 마을에서 오르는 길도 너덧 갈래가 되지만 내가 개발한 길은 1년 내내 아무하고도 안 마주칠 정도로 사람들이 안 다니는 길이다. 딴 길은 가다 보면 약수터도 나오고 배드민턴장이나 암자도 나오는데 내가 다니는 길은 볼거리 없는 그냥 산길이다. 그 대신 하루도 같은 날이 없는 나무와 풀들, 새들과 다람쥐들을 눈여겨보게 된다. 사람들이 안 다니는 길은 꽃나무들이 온전하고 온갖 새들이 거침없이 지저귄다. 혼자 걷는 게 좋은 것은 걷는 기쁨을 내 다리하고 오붓하게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내 다리를 나하고 분리시켜 아주 친한 남처럼 여기면서, 70년 동안 실어 나르고도 아직도 정정하게 내가 가고 싶은 데 데려다주고 마치 나무의 뿌리처럼 땅과 나를 연결시켜주는 다리에게 ..

사람들이 내게 준 희망

사람들이 내게 준 희망 추워서 눈을 떴다. 다행이었다. 세 시간 후면 해가 뜬다. 전기밥통의 밥을 비우고 물을 부어 끓였다. 천장에 매달린 백열전등빛의 열기와 끓인 물 한 밥통의 온기로 밤을 견뎠다. 잠결에 너무 추워 밥통을 이불 속으로 끌어들였다. 이래도 추우면 어찌할 것인가. 밥통을 이불 밖에 다시 내놓았다. 한 가지 희망이라도 남겨놓지 않으면 얼어 죽을 것만 같은 밤이었다. 2001년 겨울 추위는 영하 15도까지 내려갔고 유난히 길었다. 나는 지금 따뜻한 옥 매트에 누워 그해의 추웠던 기록을 떠들쳐보며 무릎을 폈다 구부렸다 해본다. 뼈 부딪치는 소리가 사라지고 관절의 통증도 가셨다. 내 통증을 치료해준 '옥'이라는 동글납작한 광물질을 만져본다. 일 년 동안 신통치 않은 내 수업을 들어 준 '김포문예..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 계속된 장마와 6달째 꼼짝 못 하게 하는 코로나19로 심심하고 하릴없이 서글펐는데, 거짓말처럼 앙큼한 하늘이다. 시침을 뚝 떼고 파랗기만 한 하늘이 밉지가 않다. 오랜만에 보는 푸른 하늘이다. 차장 밖의 살아 움직이는 풍경, 나른하게 속삭이는 햇살, 투박하게 오가는 시골 할머니들의 푸근한 말들과 기분 좋은 덜컹거림까지, 가만히 앉아 그 생경한 시간을 누리는 것만으로도 굳어있던 마음이 푸근해진다. 그런데 버스비가 천원이다. 천원으로 군내 어디든 간다고 한다. 세상에 단돈 천 원으로 이렇게 호사를 누릴 줄이야. 끼익, 낡은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고 두 분 할머니가 내리고, 느릿느릿 어르신이 올라탄다. 언제 그랬나는 듯 버스는 새로이 달음질친다. 작은 버스에는 나와 노인 한 분, 괜히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