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읽은 책 13

이기주 / ‘그리다가, 뭉클’중에서

이기주 / ‘그리다가, 뭉클’중에서   빛을 그린다. 보이지 않는 빛을 그리는 유일한 방법은 그림자를 그리는 것이다. 밝은 것을 그릴 때는 주변을 아주 어둡게 그리면 된다. 지금 어둠이 그려지는 시간을 살고 있다면 동시에 눈부시게 밝은 빛이 그려지고 있는 중이다. 그림 그리다가 뜬금 위로가 차올라 울컥해진다.  내려놓음   한바탕 난리 끝에 지칠 대로 지쳤다. 세상에서 가장 고요한 곳이 필요했다. 극내향형에 걸맞게 아주 조용한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남해가 딱 그랬다. 구불구불 느리게 움직이는 해안선을 따라 길을 가다 보면 여기저기 보이는 풍경이 소박하고 정겨웠다. 꾸며 대는 것 없이 원래 그렇게 생긴 것들과 먼 세월부터 시간이 만든 흔적들이 그냥 그대로 조용했다. 빨간 지붕 집을 중심에 둔 한적한 ..

최근 읽은 책 2024.10.20

김영민 / ‘가벼운 고백’중에서

김영민 / ‘가벼운 고백’중에서  1.드립에 대하여 드립은 거짓말과 다르다. 상대가 그 말이 드립임을 알아채지 못했다면, 즉 드립을 다큐로 받는다면 그 드립은 실패한 것이다. 누군가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라고 물으면 드립을 잘 치는 영재 소년은 이렇게 대답한다. “아, 당연히 이스탄불이 좋지!" 여기서 아이는 결코 누군가를 속이려는 것이 아니다. 대답을 들은 사람도 아이가 엄마, 아빠보다 이스탄불을 더 사랑한다고 믿지 않는다. 아이는 이분법을 강요하는 상대질문을 파훼하기 위해 드립을 구사한 것뿐이다. 드립은 훈계와 다르다. 훈계는 화자가 청자의 우위에 선다는 점에서 억압적이다. 훈계는 심미적 요소보다 도덕적 요소가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지루하다. 성공한 드립은 상대방의 허를 찌르고, 허를 찔린 상..

최근 읽은 책 2024.07.17

김도윤/'내가 천 개의 인생에서 배운 것들'중에서

김도윤 / '내가 천 개의 인생에서 배운 것들'중에서   세상에서 가장 그리운 밥 병원에 입원했던 엄마가 잠시 한두 달 정도 퇴원한 적이 있었다. 퇴원 후, 엄마는 언제나처럼 내게 밥을 차려 줬다. 대단한 반찬이 있는 건 아니었다. 소고기뭇국에 멸치볶음, 김치, 그리고 보리밥, 국 한 가지에 반찬 두 가지, 밥 한 공기였을 뿐이지만 내겐 임금님 밥상보다 귀한 상이었다. 정말 먹고 싶었지만 1년 동안 먹지 못했던 엄마가 차려 준 밥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다시는 못 먹을 거라고 생각했던 엄마가 차려준 밥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밥이었지만, 동시에 가장 슬픈 시간이기도 했다. 앞으로 다시 이밥을 먹을 수 있을까, 내게 이런 기회가 또 있겠냐는 불안감이 들었다. 그래서 밥을 두 공기, 세 공기 먹었다. ..

최근 읽은 책 2024.05.23

홍세화/'생각의 좌표'중에서

홍세화/'생각의 좌표'중에서   학습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지적 인종주의'라는 말로 학업 성적이 부진하다는 이유 때문에 사회적으로 차별하는 것에 일침을 가했다. 우리는 피부 색깔을 선택해서 태어날 수 없듯이 두뇌를 선택할 수 없다. 두뇌의 용량과 기능은 사람마다 다른데 오로지 문제풀이와 암기 능력이 뒤떨어진다는 이유로 차별하고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면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하고 억압하는 인종주의와 무슨 차이가 있느냐는 것이다. 더구나 우리는 오로지 암기나 문제풀이 능력으로 학생을 평가할 뿐 감수성이나 사람됨에 대해선 거의 무시한다. 우리는 어린 학생들에게 등급과 석차를 매기는 것을 당연시한다. 아직 미성년자들에게 거리낌없이 '너는 1등이다', '너는 35명 중에 35등이다' 라고..

최근 읽은 책 2024.05.15

이선재 /‘다시 문학을 사랑한다면’중에서

이선재 /‘다시 문학을 사랑한다면’중에서   오해와 이해 오해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제가 꼭 함께 소개하는 소설이 있습니다. 바로 프레드 울만의 소설 『동급생』입니다. 이 소설에서 운명처럼 서로에게 끌렸던 두 소년 한스와 콘라딘의 관계가 소원해진 것도 다름 아닌 오해 때문입니다. 이 소설은 유대인 의사의 아들인 열여섯 살 한스슈바르츠와 새로 전학 온 독일 귀족 소년 콘라딘 폰 호엔펠스의 우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한스와 콘라딘은 예술과 철학 그리고 신에 대해 토론하고 시를 낭송하면서 그들만의 우정을 쌓아나갑니다. 어느 날 한스는 자신의 수집품을 보여주기 위해 콘라딘을 집으로 초대합니다. 그런데 한스의 아버지가 콘라딘을 '백작님'이라고 부르며 깍듯이 대하자 한스는 열등감을 느낍니다. 자신의 우상과도 같은 ..

최근 읽은 책 2023.11.19

강인욱 / ‘세상 모든 것의 기원’중에서

강인욱 / ‘세상 모든 것의 기원’중에서   신라는 닭의 나라였다  신라 신화에 닭이 등장한다. 《삼국사기》에는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 신화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석탈해왕 9년(65년) 봄에 왕이 금성 서쪽 시림 숲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듣는다. 날이 밝은 후 닭이 우는 곳에 가 살펴보니 나무에 작은 함이 달려 있었고 그 안에 조그마한 사내아이가 들어 있었다. 아이는 총명함과 지략이 넘쳤기에 알지(智)라 이름하고 금함으로부터 나왔으므로 성을 김(金)으로 삼았으며, 닭 우는 소리로 아이가 있는 곳을 발견했으니 시림의 이름을 바꾸어 계림(鷄林)이라 칭하고 이를 나라 이름으로 삼는다. 신화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닭은 상서로운 기운을 전달해주는 매개체로 서술되었다...

최근 읽은 책 2023.11.15

유시민 /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뇌과학 1.'나는 누구인가?' 이것은 인문학의 표준 질문이다. 그러나 인문학 지식만으로 대답하기는 어렵다. 먼저 살펴야 할 다른 질문이 있다. '나는 무엇인가?' 이것은 과학의 질문이다. 묻고 대답하는 사유의 주체를 '철학적 자아'라고 하자. 철학적 자아는 물질이 아니다. 그러나 물질인 몸에 깃들어 있다. 나를 알려면 몸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일반 명제로 확장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과학의 질문은 인문학의 질문에 선행한다. 인문학은 과학의 토대를 갖추어야 온전해진다.' 문과인 나는 과학자들이 인간에 대해 알아낸 여러 사실을 이의 없이 받아들인다. '지구에 사는 모든 생물, 돌·흙·물·불·공기를 비롯한 모든 물질, 달과 태양과 우리 은하의 모든 별, 다른 은하를 포함해 우주 전체에 존재하는 모든 물..

최근 읽은 책 2023.10.16

정지아 /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중에서

먹이사슬로부터 해방된 초원의 하루  이미지 출처 : pngtree  아프리카 초원 어딘가 야생 사과나무 한그루가 우뚝 서있다. 저 홀로 자란 사과나무는 장정 열댓 명이 끌어안아도 팔이 닿지 않을 만큼 거대하다. 돌보는 이 하나 없어도 사과나무는 때가 되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그리고 때가 되면 절로 떨어진다. 땅에 떨어진 사과는 고온건조한 기후 덕에 발효되어 향긋한 사과주로 익어간다. 마침맞게 술이 익은 날, 코끼리와 사자가 가장 먼저 사과나무 아래로 찾아온다. 코끼리는 긴 코로 날름날름 미친듯이 사과를 주워 먹는다. 술에 취한 코끼리가 비틀거리다 제 다리에 걸려 자빠지고 신이 나 내달리던 사자는 저희끼리 부딪쳐 나뒹군다. 그때쯤 먼 데서 망을 보던 영양이며 얼룩말, 원숭이들이 우- 사과나무를 향..

최근 읽은 책 2023.10.01

세이노 / ‘세이노의 가르침’중에서

불꽃  삶에 있어 가장 소중한 불꽃의 참의미는 로빈슨 크루소처럼 무인도에 절대 고독의 상태로 고립되어 있는 상태에서만 검증될 수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돈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다. 한국인이라는 사실도 의미가 없으며 남을 위한 봉사니 사랑이니 하는 것들도 무인도에서 혼자가 된 처지에서는 무의미하다. 무슨 이데올로기를 신봉하건, 고향이 어디건, 어느 학교를 나왔건, 나이가 몇 살이건, 재산이 많건 적건, 이력서가 아무리 화려하건 간에 다 하찮은 것들이다. 그런데도 그것들을 최고로 여기며 사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돈을 최고로 여기며 살았다고? 웃기지 마라. 나는 내 인생 자체의 중요성을 최고로 여기며 살았다. 돈은 내 인생의 자존심을 세우는 데 필요한 것이었고, 수없이 넘어지면서 그저 게임의 방법을 체득하여..

최근 읽은 책 2023.08.01

김상욱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인간’(바다 출판사)중에서

김상욱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인간’(바다 출판사)중에서    원자는 원자핵과 전자로 이루어져 있다. 원자핵은 다시 양성자와 중성자로 나뉜다. 양성자는 양전하를 띠고 전자는 음전하를 띤다. 중성자는 이름 그대로 전하가 없다.  원자는 원자 번호로 구분된다. 원자 번호는 원자가 가진 양성자의 수다. 원자는 중성이기 때문에 전자도 같은 수가 있어야 한다. 3번 원자 리튬은 양성자 3개, 전자 3개를 가진다. 원자핵도 흥미로운 주제지만 만물이 원자로 되어 있다고 할 때 중요한 것은 전자다. 원자핵은 원자 내부 깊숙한 곳에 숨어 있어 접근조차 힘들기 때문이다. 원자들이 만나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때 실제 맞부딪히는 것이 전자다.  자연 상태에서는 92번 원자까지 존재할 수 있다. 빅뱅이나 초신성폭발 같은 자..

최근 읽은 책 2023.0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