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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 / ‘가벼운 고백’중에서

송담(松潭) 2024. 7. 17. 07:01

김영민 / ‘가벼운 고백’중에서

 

 

1.

드립에 대하여

 

드립은 거짓말과 다르다. 상대가 그 말이 드립임을 알아채지 못했다면, 즉 드립을 다큐로 받는다면 그 드립은 실패한 것이다. 누군가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라고 물으면 드립을 잘 치는 영재 소년은 이렇게 대답한다. “아, 당연히 이스탄불이 좋지!" 여기서 아이는 결코 누군가를 속이려는 것이 아니다. 대답을 들은 사람도 아이가 엄마, 아빠보다 이스탄불을 더 사랑한다고 믿지 않는다. 아이는 이분법을 강요하는 상대질문을 파훼하기 위해 드립을 구사한 것뿐이다.

 

드립은 훈계와 다르다. 훈계는 화자가 청자의 우위에 선다는 점에서 억압적이다. 훈계는 심미적 요소보다 도덕적 요소가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지루하다. 성공한 드립은 상대방의 허를 찌르고, 허를 찔린 상대는 웃음을 터뜨린다. 웃음 속에서 서로 간의 긴장이 이완되므로 위계적 훈계는 성립하기 어렵다. 그러나 어떤 훈계는 드립의 형태를 띠기도 한다. 한국 사회 꼴이 말이 아니라고 식탁에서 한탄해 보라.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엄마가 이렇게 드립을 구사할지 모른다. “네 꼴이나 걱정해라, 이것아."

 

드립은 망언과 다르다. 배우자의 늙은 얼굴을 보며 “당신 눈가에 주름이 파도처럼 밀려오네. 쓰나미 같아”라고 하면 이것은 망언이다. 상대가 그런 망언을 내뱉을 때 태연히 “쓰나미가 오니 대피해야지"라며 상대를 골방으로 꺼지라고 하면 그것이 드립이다. 드립은 펀치보다는 카운터펀치로 효과적이다. 드립은 권력자의 무기보다는 저항자의 무기로 더 적합하다.

 

드립은 모욕적인 언사와 다르다. 상대가 개소리를 일삼는다고 면전에서 “네 머릿속에 든 것은 순두부냐, 돼지 곱창이냐, 우동사리냐”라고 일갈해서는 안 된다. 직설적으로 말하기보다는 에둘러 말해야 드립이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 컴퓨터를 오랫동안 들여다보느라 목이 앞으로 나온 사람에게 "너 거북목이야”라고 하면 모욕이 될 수 있다. 그 대신 "너 터틀넥이 야"라고 하면 좀 더 드립에 가까워진다. 그래도 상대가 화를 낼 것 같으면, 터틀넥 스웨터를 하나 사주면 된다.

 

왜 하필 드립인가 넘쳐나는 바른말들, 고운 말들, 엄격한 말들 사이에서 왜 하필 허탈한 드립을 말하고 들어야 하는가. 왜 일부러 궤도를 이탈한 문장을 가끔 구사해야 하는가. 그 고삐 풀린 문장들은 어떻게 인간의 삶을 반영하는 데 성공하는가. 인생에는 100퍼센트 진지해지기 어려운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동의한 바 없이 시작해서 어느 날 갑자기 끝나는 인생이란 프로젝트에 누가 완전히 진지해질 수 있을까. 그러나 인생이 농담은 아니다. 누구나 넘어지면 아프고, 살갗이 찢어지면 피가 나고, 때가 되면 배가 고프다. 그래서 인간은 진지하게 앞날을 계획하고, 먹거리를 사냥하고, 생로병사를 통제하려 한다. 생존에 관한 한 인간은 맷돌처럼 진지하다.

 

그러나 인간은 끝내 진지하기만 할 수는 없다. 불확실하기 짝이 없는 이 인생의 전모를 논리적 언어로 정의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삶은 종종 부조리와 경이를 간직한 모호한 현상이므로, 때로는 구름을 술잔에 담듯 삶을 담아야 한다. 드립은 바로 언어로 된 그 술잔이다.

 

2.

삶의 질을 측정하고 싶다면, 행복의 정도를 알고 싶다면, 근심 없이 아침 산책을 할 수 있느냐고 물어보라.

 

3.

Q : 결혼이란 무엇인가.

A : 봉사할 기회를 얻는 것이다.

 

4.

사회생활을 하려면 말을 곱게 해야 한다. “못 생겼다”라고 하는 대신 “웃기게 생겼다”라고 하는 게 낫고, “웃기게 생겼다”라고 하기보다 “얼굴에 유머가 있다”하는 게 낫고, “얼굴에 유머가 있다”라고 하기보다 조용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게 낫다.

 

5.

평소에 호감이 가던 이에게, 이 가을을 선물한다고 했더니, 봉이 김선달이라고 하는군.

 

6.

목련과 작약은 모두 큰 꽃잎을 눈물처럼 떨구며 진다. 목련과 달리 작약은 낙하하며 자신을 쉽게 더럽히지 않는다. 필멸자로서 인간은 작약에게 낙법을 배워야 하지 않겠나.

 

7.

노인이 되면, 전보다 현명해지되 속은 좁아진다고 한다. 위기감 때문이겠지.

 

8.

세상에는 고독한 사람들이 있다. 자신과 싸우며 트랙을 뛰고 잇는 사람, 거울을 보며 무거운 것을 들고 있는 보디빌더, 그리고 죽은 사람과의 약속을 홀로 지키고 잇는 사람.

 

9.

희망이 있어서 희망을 갖는 것이 아니다. 희망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어서 희망을 갖는다. 절망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절망하지 않는다. 누구도 희망을 뺏을 수 없다.

 

10.

비와 함께 멀어져가는 여름에게 묻노니, 내게는 날들이 얼마나 남았는가. 그날 동안 무엇을 하면 나쁘지 않겠는가. 그리고 누구에게 마무리를 부탁할 것인가.

 

11.

세상에는 세 종루의 신발이 있다. 주인을 기다리는 신발, 주인을 잃은 신발, 주인을 잘못 만난 신발. 당신은 어떤 신발인가.

 

12.

7월 1일이라고 자판을 치는 손가락이 떨렸다. 올해 상반기가 속절없이 가버렸다는 사실을 부정하려고 음력이 존재하는 것이다.

 

13.

학생들하고 저녁을 먹거나 술을 마시면, 1차만 하고 곧바로 일어난다. 선생님들이나 동료들에게 그렇게 배웠다. 오래 남아 있어 학생들에게 부담을 주지 말라고. 금요일 저녁에 우리는 상암동에서 술과 저녁을 먹었고, 늘 그렇듯 나는 떠나기 위해 일어났다. 더 있다가가라고, 함께 2차를 가자고, (예의상?) 만류하는 학생들에게 "자리에서 일어나야 한다고 배웠다"라고 말하고 택시를 탔다. 떠나는 택시에 대고 그들이 소리 질렀다. "잘못 배우신 거예요!" 이 이야기가 뭐라고, 위로가 되네.

 

14.

청중이 졸면 강연자는 상처받는다. 청중의 상상보다 더 상처받는다. 그러나 강연 시작하기 전부터 졸고 있으면 상처받지 않는다(그것은 강연자의 책임이 아니니까!). 가능하면 강연 시작하기 전부터 졸기 바란다.

 

15.

수입 고기가 아닌 한우를 먹어달라는 캠페인성 TV 광고는 말한다. “한우를 지켜주세요."

한우를 지키는 방법으로, 한우를 도축해 먹으라고 권한다.

 

16.

이른바 '통속의 뇌brain in a vat' 사고실험이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인간의 뇌를 몸에서 분리해서 통에다 넣고, 슈퍼컴퓨터가 뇌에게 평소 받는 것과 같은 전자신호를 보내면, 그 뇌는 실제로 대상과 접촉하지 않고도 접촉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통속의 뇌는 자기가 진짜 인간인지 통 속에 담긴 뇌인지 확신할 수 없다. 이를 통해 볼 때, 인간은 외부 세계에 대해 믿고 있는 모든 것이 거짓인지 여부를 알 수가 없다.

 

자기 확신이 지나친 사람은 약간 다른 사고실험이 필요하다. '내 뇌가 두개골 속 곱창에 불과하다면? 아는 척만 할 뿐, 대가리가 텅 비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