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소설 8

김훈 장편소설 ‘하얼빈’중에서

김훈 장편소설 ‘하얼빈’중에서 메이지는 1852년 임자생으로 만 열네 살에 황위에 올라서 재위 사십 년을 넘기고 있었다. 성인이 남면해서 천하의 소리를 듣고 聖人南面而聽天下 밝음을 향해 나아가며 다스린다 嚮明而治 라는 중국의 에서 명치 두 글자를 따서 치세의 연호로 삼았는데 사람들은 '밝음을 향해 나아간다'는 뜻으로 천황을 호칭했다. 메이지의 치세는 힘을 향해 나아갔다. 그의 시대에 밝음은 힘을 따라오는 것처럼 보였고, 시대는 그 힘을 믿었다. 천황의 군대는 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 이겼다. 천황의 무위(武威)는 세계에 떨쳤고, 아시아의 산과 바다에 시체가 쌓였다. 이토는 대한제국 황제 고종을 위협해서 퇴위시키고 차남 이척을 그 자리에 세웠다. 이척은 순종이고 황태자 이은은 순종의 이복동생이나 ..

김훈 소설 2022.09.15

김훈 / ‘자전거 여행1’중에서

미천골에서 동해 쪽 첫 마을 면옥치 아침 일찍 베이스캠프를 떠난 자전거는 오후 2시께 1,100미터 고지 마루턱에 당도했다. 오르막의 마지막 고비에서는 기어를 2단까지 풀어내리고도 허덕지덕하였다. 그 꼭대기에서 시설물 보수공사를 하던 근로자들이 무너질 듯이 비틀거리며 올라오는 자전거를 향해 박수를 쳐주었다. 고지의 바람은 찼고, 여러 골짜기를 훑어서 올라오는 바람의 풍향은 가늠하기 어려웠다. 거기서 커피를 끓여서 비스킷으로 점심을 먹었다. 여기서부터 저편 산 아래 첫 마을 면옥치까지는 바람을 가르고 빛 속을 달리는 3시간의 내리막이다. 내리막을 너무 기뻐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날이 저물어서 면옥치마을에 도착했다. 면옥치는 미천골 1,100미터 고지에서 동해 쪽으로 내려오는 길의 첫 번째 마을이다. 여기는..

김훈 소설 2019.11.18

박정희와 비틀스

박정희와 비틀스 오래전에 돌아가신 선배는 나에게 술 사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소설을 쓰려면 자기 시대의 대중음악을 깊이 이해해야 한다.’ 넓고 깊게 들여다보는 사람의 말이었다. 나는 그 선배의 유훈을 따르지 못했다. 내가 게으르고 또 음악적 감수성이 풍요롭지 못하기도 했지만 급변하는 음악의 흐름을 따라갈 수 없었고 젊은 세대의 음악정서를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내 성장기의 음악환경은 빈곤했다. 전쟁으로 나라는 가루가 되었고, 어린 내 귀에 들리는 소리는 일본군가의 찌꺼기, 군대풍의 행진곡, 반공가요, 전쟁가요뿐이었고, 나는 그 노래들을 따라 부르면서 자랐다. 학교 음악시간에는 교가, 광복절 노래, 3.1절 노래 같은 행사노래를 합창으로 배웠고, 음악시험 때도 한 명씩 교사 앞에 나가서 그 노래를 불렀다..

김훈 소설 2019.05.28

김훈 / ‘연필로 쓰기’중에서

김훈 / ‘연필로 쓰기’중에서 내 소년 시절에는 개들이 거리에서 자유롭게 홀레붙었다. 동네 악동들의 온갖 신나는 장난질들 중에서 개홀레를 응원하는 놀이는 상위 랭킹에 속하는 즐거움이었다. 학교가 파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개홀레를 만나면, 아이들이 빙 둘러서서 홀레를 응원했다. 개 두 마리가 꽁무니를 마주대고 운동회 때 줄다리기하는 것처럼 서로 반대쪽으로 끌고 당 겼는데 아이들은 이쪽 개, 저쪽 개 편을 갈라서 박수치며 응원했다. 어른들이 이 남세스러운 꼴을 보다 못해 뜨거운 물을 개에게 끼얹으면 개 두 마리는 교미를 해체하고 깨갱거리면서 달아났는데, 그때 아이들은 배를 잡고 깔깔거렸다. 이 짓거리는 참으로 신났다. 일산 호수공원의 개들은 홀레를 붙지 않는다. 나는 이 사태를 매우 괴이하게 생..

김훈 소설 2019.05.26

밥과 똥

밥과 똥 사진출처 : leeesann.tistory.com 허준許浚(1539~1615)은 인간의 똥오줌을 면밀히 관찰하고 분석해서 『동의보감』에 적었다. 그 책 ‘대변大便’편에 이르기를, 음식이 삭지 않고 그대로 나오는 똥은 날것의 더러운 냄새(성예腥穢)'가 난다고 했으니, 내가 말한 똥을 진단하는 것이지 싶다. 똥은 허준이 인간의 질병을 판단하는 중요한 준거였다. 그가 병든 똥을 진단하는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서 똥의 색깔을 기준으로 한다면, 푸른 똥, 붉은 똥, 노란 똥, 검은 똥, 휜 똥이 모두 병든 똥이다. 몸속에 열이 많을 때는 검은 똥, 한기寒氣가 많을 때는 오리똥처럼 생긴 흰 똥, 습기가 많을 때는 검은 물똥. 풍기風氣가 많을 때는 푸른 똥이 나온다. 또 설사의 원인이나 설사똥이..

김훈 소설 2019.05.19

공터에서

공터에서 소총 가늠구멍 속에서, 잇달린 산들이 출렁거렸다. 바람이 산봉우리를 훑어서 고지마다 회오리쳤다. 바람은 눈보라를 몰아서 동해로 나아갔다. 천지간에 눈 비린내가 자욱했다. 달이 뜨자 골짜기의 어둠이 더 짙어졌고 눈 덮인 봉우리에 푸른빛이 스몄다. 팽팽한 밤하늘에서 별들은 추위에 영글어갔다. 밝은 별 흐린 별이 뒤섞여 와글거렸는데, 귀 기울이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눈 덮인 산맥은 인간과는 무관하게 출렁거렸으나 그 흐린 산맥이 인간을 향해 내뿜는 적개심을 초병들을 감지하고 있었다. 북한군 GP는 북방한계선에서 1킬로미터 정도 남쪽으로 내려와 있었다. 양측 GP는 벼랑 끝에 매달린 둥지처럼 보였다. 콘크리트 더미에 촉구멍이 뚫어져 있었고 그 구멍으로 서로를 조준하고 있었다. 망원경을..

김훈 소설 2017.02.08

공무도하(公無渡河) /사랑아, 강을 건너지 마라

공무도하(公無渡河) 사랑아, 강을 건너지 마라 화면 속의 가을은 늦가을이었다. 저수지 뒤쪽 오리나무숲이 헐거웠고 갈수기의 수면은 낮았다. 울타리 위로 감이 익었고 하루의 밭일을 마친 늙은 부부가 경운기를 몰아서 저수지 뚝방길을 건너가고 있었다. 군청색 함석지붕과 녹슨 붉은색 지붕들이 격렬한 부조화를 이루었고, 그 위에 햇빛이 부딪혔다. 녹신 지붕들이 햇빛을 튕겨내면서 막무가내로 색을 뿜어냈고 저녁 어스름이 내리는 오리나무숲은 고요했다. 녹으로 삭아가는 함석지붕은 풍화의 시간 속에서 신생의 색을 뿜어내고 있었다. 팔레트에서 배합할 수 없는 낯선 색이었다. 저녁을 맞는 작은 물고기들이 수면 위로 솟구치고 있었다. 뛰어오른 물고기들의 몸통이 석양에 반짝 빛났고, 물고기들이 다시 물에 잠기면 동그라미로 주름지는..

김훈 소설 2009.10.24

남한산성

남한산성 한밤중에 임금은 어두운 적막의 끝 쪽으로 귀를 열었다. 적막은 맹렬해서 쟁쟁 울렸다. 적막의 먼 쪽에서 묘당의 들끓던 말들이 몰려오는 듯싶었다. 말들은 몰려왔는데 들리지는 않았다. 바람이 마른 숲을 흔들어 나무와 눈이 뒤엉켰다. 눈에 눌린 나뭇가지 찢어지는 소리가 장지문 창호지를 흔들었다. 바람이 골을 따라 휩쓸고 내려가면 바람의 끝자락에서 나무들이 찢어졌다. 새벽마다 내관이 나인을 깨워 내행전 아궁이에 장작을 밀어 넣었다. 밝음과 어둠이 꿰맨 자리 없이 포개지고 갈라져서 날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었다. 남한산성에서 시간은 서두르지 않았고, 머뭇거리지 않았다. 군량은 시간과 더불어 말라갔으나, 시간은 성과 사소한 관련도 없는 낯선 과객으로 분지 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김훈 소설 2008.0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