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소설

남한산성

송담(松潭) 2008. 2. 8. 13:57

 

 

남한산성

 

< 1 >

 

 한밤중에 임금은 어두운 적막의 끝 쪽으로 귀를 열었다. 적막은 맹렬해서 쟁쟁 울렸다. 적막의 먼 쪽에서 묘당의 들끓던 말들이 몰려오는 듯싶었다. 말들은 몰려왔는데 들리지는 않았다. 바람이 마른 숲을 흔들어 나무와 눈이 뒤엉켰다. 눈에 눌린 나뭇가지 찢어지는 소리가 장지문 창호지를 흔들었다. 바람이 골을 따라 휩쓸고 내려가면 바람의 끝자락에서 나무들이 찢어졌다. 새벽마다 내관이 나인을 깨워 내행전 아궁이에 장작을 밀어 넣었다.

 

밝음과 어둠이 꿰맨 자리 없이 포개지고 갈라져서 날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었다. 남한산성에서 시간은 서두르지 않았고, 머뭇거리지 않았다. 군량은 시간과 더불어 말라갔으나, 시간은 성과 사소한 관련도 없는 낯선 과객으로 분지 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었다. 쌓인 눈이 낮에는 빛을 튕겨 냈고, 밤에는 어둠을 빨아들였다. 동장대 위로 해가 오르면 빛들은 눈 덮인 야산에 부딪쳤다. 빛이 고루 퍼져서 아침의 성 안에는 그림자가 없었다. 오목한 성 안에 낮에는 빛이 들끓었고 밤에는 어둠이 고였다. 짧은 겨울 해가 넘어가면 어둠은 골짜기에 퍼졌다. 빛이 사위어서 물러가는 저녁의 시간들은 느슨했으나, 어둠은 완강했다. 먼 산들이 먼저 어두워졌고 가까운 들과 민촌과 행궁 앞마당이 차례로 어두워졌다. 가까운 어둠은 기름져서 번들거렸고, 먼 어둠은 헐거워서 산 그림자를 품었다. 어둠 속에서는 가까운 것이 보이질 않았고, 멀어서 닿을 수 없는 것들이 가까워 보였다. 하늘이 팽팽해서 별들이 뚜렷했다. 행궁 마당에서 올려다보면 치솟는 능선을 따라가는 성벽이 밤하늘에 닿아 있었고, 모든 별들이 성벽 안으로 모여서 오목한 성은 별을 담은 그릇처럼 보였다. 별들은 영롱했으나 땅위에 아무런 빛도 보태지 않아서, 별이 뚜렷한 날 성은 모든 별들을 모아 담고 캄캄했다. 어둠 저편 가장자리에 보이지 않는 적들이 자욱했다. 이십 만이라고도 했고, 삼십 만이라고도 했는데. 자욱해서 헤아릴 수 없었다. 적병은 눈보라나 안개와 같았다. 성을 포위한 적병보다도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면서 종적을 감추는 시간의 대열이 더 두렵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 아무도 아침과 저녁에서 달아날 수 없었다. 새벽과 저녁나절에 빛과 어둠은 서로 스미면서 갈라섰고, 모두들 그 푸르고 차가운 시간의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임금은 남한산성에 있었다.

 

 

< 2 >

 

겨울 새벽의 추위는 영롱했다. 아침 햇살이 깊이 닿아서 먼 상류 쪽 봉우리들이 깨어났고, 골짜기들은  어슴푸레 열렸다. 그 사이로 강물은 얼어붙어 있었다. 언 강 위에는 눈이 내리고 쌓인 눈 위에 바람이 불어서 얼음위에 시간의 무늬가 찍혀 있었다. 다시 바람이 불어서 눈이 길게 불려갔고, 그 자리에 새로운 시간의 무늬가 드러났다. 깨어나는 봉우리들 너머로 어둠이 걷히는 하늘은 새파랬고, 눈 덮인 들판이 아침 햇살을 품어 냈다. 숲에서 새들이 날개 치는 소리가 들렸고, 잠깬 새들이 가지에서 가지로 옮겨 앉을 때마다 눈송이들이 떨어져 내렸다. 정갈한 추위였고, 빛나는 추위였다. 말발굽 밑에서 새로 내린 눈이 뽀드득거렸다. 말은 제 장난기에 홀려서 고삐를 당기지 않아도 앞으로 나아갔다. 말 콧구멍에서 허연 김이 품어져 나왔다.

 

 

< 3 >

 

 그해 겨울은 일찍 와서 오래 머물렀다. 강들은 먼 하류까지 옥빛으로 얼어붙었고, 언 강이 터지면서 골짜기가 울렸다. 그해 눈은 메말라서 버스럭거렸다. 겨우내 가루눈이 내렸고, 눈이 걷힌 날 하늘은 찢어질 듯 팽팽했다.

 

 눈 덮인 들은 하얗게 비어 있었다. 새들이 빈들에 내려와 눈을 헤집고 낟알을 찾았다. 낮닭이 길게 울어서 산봉우리 사이가 흔들렸다. 닭 울음소리는 성벽을 넘어가서 강가의 적진까지 들렸다. 닭 우는 쪽을 향해 개들이 짖었다.

 

김 훈 / ‘남한산성’중에서

 

 

< 참고 / 낱말풀이 >

 

구종잡배(驅從雜輩) : 벼슬아치를 모시고 다니던 하인과 잡인들.

금군(禁軍) : 왕궁을 수비하고 왕을 호위하는 부대.

망궐례(望闕禮) :

임금을 공경하고 충성을 표시하기 위한 의식으로 임금을 직접 배알하지 못하는 지방 관리들이 행했다. 나무에 ‘궐(闕)’자를 새겨 객사에 봉안하고 궁을 향해 예를 올렸다. 임금이 정월 초하루나 동지, 성절(聖節, 중국 황제의 생일), 천추절(千秋節, 중국 황태자의 생일)에 왕세자와 조정의 신료들을 거느리고 황제가 있는 북경 쪽을 향해 예를 올리는 의식도 망궐례라 한다.

 

묘당(廟堂) : 나라를 다스리는 조정 또는 의정부를 달리 이르는 말.

미복(微服) : 몰래 민심을 살피러 다닐 때 입은 허름한 옷차림.

상한(常漢) : 상놈

성첩(城堞) : 성벽 위에 낮게 쌓아 총알과 화살을 막는 담.

수구문(水口門) :

광화문의 옛 이름. 서소문과 함께 도성 안 시신을 밖으로 내보내던 문.

 

수어청(守禦廳) :

남한산성을 지키고 경기도 광주, 죽산, 양주 등의 여러 진을 다스리던 군영. 인조 4년(1626)에 설치하여 고종 21년(1884)에 폐지됨.

 

신성(晨省) :

아침 일찍 부모의 침소를 찾아뵙고 밤사이 안부를 살피는 일.

 

융복(戎服) ;

철릭과 주립으로 된 군복으로, 평소에는 무신만 입었지만 전쟁이 나거나 임금을 호종할 때는 문신도 입음.

 

장계(狀啓) :

지방 신하가 중요한 일을 임금에게 보고하는 일이나 문서.

창의(倡義) : 나라를 위해 의병을 일으킴.

차자(箚子) :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던 간단한 서식의 상소문.

체찰사(體察使) : 조선시대 전시 총사령관. 비상시에 임시로 설정하는 직책으로 영의정이 겸함.

편전(便殿) : 임금이 평상시에 거처하는 궁전.

호궤(犒饋) ; 임금이 군사들에게 음식을 나누어주며 위로함.

홍예(虹霓) : 윗부분을 무지개 모양으로 반쯤 둥글게 만든 문.

김 훈 / ‘남한산성’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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