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소설

공무도하(公無渡河) /사랑아, 강을 건너지 마라

송담(松潭) 2009. 10. 24. 08:27

 

공무도하(公無渡河)

사랑아, 강을 건너지 마라

 

 

< 1 >

 

 화면 속의 가을은 늦가을이었다. 저수지 뒤쪽 오리나무숲이 헐거웠고 갈수기의 수면은 낮았다. 울타리 위로 감이 익었고 하루의 밭일을 마친 늙은 부부가 경운기를 몰아서 저수지 뚝방길을 건너가고 있었다. 군청색 함석지붕과 녹슨 붉은색 지붕들이 격렬한 부조화를 이루었고, 그 위에 햇빛이 부딪혔다. 녹신 지붕들이 햇빛을 튕겨내면서 막무가내로 색을 뿜어냈고 저녁 어스름이 내리는 오리나무숲은 고요했다.

 

 녹으로 삭아가는 함석지붕은 풍화의 시간 속에서 신생의 색을 뿜어내고 있었다. 팔레트에서 배합할 수 없는 낯선 색이었다.

 

 

< 2 >

 

 저녁을 맞는 작은 물고기들이 수면 위로 솟구치고 있었다. 뛰어오른 물고기들의 몸통이 석양에 반짝 빛났고, 물고기들이 다시 물에 잠기면 동그라미로 주름지는 물 위에서 노을이 흔들렸다.

 

 토요일 야외수업 때 노목희는 아이들을, 이제는 무너져버린  저수지 뚝방으로 데리고 나갔다. 저무는 해가 능선을 스치면서 내려앉은 저녁 무렵에, 수면에서 명멸하는 빛과 색 들의 변화를 노목희는 아이들에게 보여주었다. 기우는 해에 끌리는 쪽으로 빛들은 떼지어 소멸했고 소멸의 순간마다 새롭게 태어나서 신생과 소멸을 잇대어가며 그것들은 어두워졌다. 물 위로 뛰어오른 작은 물고기들이 다시 물에 잠기는 그 짧은 동안에, 물고기 비늘과 눈알에서 빛은 색으로 태어났다. 시간이 빛과 색을 가장자리 산그늘 쪽으로 끌어당겼고, 빛이 저무는 시간과 합쳐지면서 푸른 저녁이 수면위로 퍼졌고, 색들이 그 위에 실려서 흘렀다.

 

 산그늘에 덮여서 빛이 물러나는 가장자리 수면에서 색들은 잠들었고, 바람이 수면을 스칠 때 물의 주름사이에서 튕기는 빛이 잠든 색을 흔들어 깨웠다. 어두운 수면에서 빛들은 무슨 색으로 잠드는 것인지, 바람에 흔들려 다시 깨어나는 색은 잠들기 전의 색이 아니었다. 부서져서 흩어지고 다시 태어나는 그것들은 빛 또는 색이라고 노목희는 아이들에게 말해 줄 수 있었다. 말을 하는 동안에 그것들은 다시 부서지거나 새로 태어나서 말 너머에서 명멸하는 것이었다. 그것들은 짧고, 정처없었다.

 

 

< 3 >

 

 노역에 끌려나온 죄수들이 염전 바닥의 소금을 밀었다. 법무부에서 노역장으로 쓰는 염전이었다. 소금은 눈처럼 내려쌓인 노을의 결정체였다. 카빈 총을 든 경찰이 염전의 네 귀퉁이를 지켰다. 죄수들은 육체의 동작을 아껴가며 천천히 소금을 밀었다. 해안초소에서 내려와 보면 죄수들의 몸놀림은 지나간 시간의 지층 위를 기어가는 슬로 리뷰였다. 죄수들의 작업은 노동이 아니라 시간을 인내하는 자들의 종교의식처럼 보였다. 호송 나온 교도관들은 죄수들의 작업을 재촉하지 않았다. 노역의 수칙으로, 죄수들은 작업중에 묵언(黙言)했다.

 

 한낮의 해가 기울고 염전 바닥에 앙금이 엉기기 시작하면 마을의 염부들은 ‘소금이 온다’고 말했다. 소금은 고요히 왔다. 소금은 노을 지는 시간에 앙금으로 염전에 내려앉았다. 소금 오는 바닥에는 폭양에 졸여지는 시간의 무늬가 얼룩져 있었고 짠물 위를 스치고 간 바람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공기가 말라서 바람이 가벼운 날에 바다의 새들은 높이 날았고 새들의 울음은 멀리 닿았다. 그런 날 햇볕은 염전 바닥에 깊이 스몄는데, 늙은 염부들은 ‘소금 오는 소리가 바스락거린다’고 말했다.

 

 

< 4 >

 

 타이웨이 교수가 중국으로 돌아갈 때 노목희는 공항에서 전송했다. 그의 짐은 입국 때처럼 작은 여행가방 하나가 전부였다. 부여에서 강연이 끝나고 5일장을 돌아보다가 그는 노점 좌판에서 흰 고무신을 한 켤레 샀다. 고무신을 보는 순간에 그는 신고 온 구두가 너무 무겁다고 느낀 모양이었다. “평화로운 신발입니다. 인간의 발바닥에 잘 들러붙군요. 피부의 변형입니다” 타이웨이 교수는 말했다.

 공항 출국장에서 그는 청바지 차림에, 부여에서 산 흰 고무신을 신고 있었다. 그는 가벼움의 힘으로 먼 길을 가는 사람처럼 보였다.

 

김훈 / ‘공무도하’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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