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소설

김훈 / ‘연필로 쓰기’중에서

송담(松潭) 2019. 5. 26. 15:10

 

김훈 / ‘연필로 쓰기중에서

 

 

 

 

 

 

< 1 >

 

 내 소년 시절에는 개들이 거리에서 자유롭게 홀레붙었다. 동네 악동들의 온갖 신나는 장난질들 중에서 개홀레를 응원하는 놀이는 상위 랭킹에 속하는 즐거움이었다. 학교가 파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개홀레를 만나면, 아이들이 빙 둘러서서 홀레를 응원했다. 개 두 마리가 꽁무니를 마주대고 운동회 때 줄다리기하는 것처럼 서로 반대쪽으로 끌고 당 겼는데 아이들은 이쪽 개, 저쪽 개 편을 갈라서 박수치며 응원했다. 어른들이 이 남세스러운 꼴을 보다 못해 뜨거운 물을 개에게 끼얹으면 개 두 마리는 교미를 해체하고 깨갱거리면서 달아났는데, 그때 아이들은 배를 잡고 깔깔거렸다. 이 짓거리는 참으로 신났다.

 

 일산 호수공원의 개들은 홀레를 붙지 않는다. 나는 이 사태를 매우 괴이하게 생각한다. 흘레를 마음대로 붙지 못하는지, 흘러 할 생각이 아예 없는지, 개노릇하기도 쓸쓸하고 힘들어 보인다. 사람의 마을에서 사는 개들은 경계심이 거의 없고, 먹이를 다투지 않고, 기아나 죽음과 싸우지 않는다. 인간의 사랑을 갈구하는 성정이 개의 본능이 되었고, 이 본능은 유전된다. 개는 개가 아닌 것이 됨으로써 아파트에서 살 수 있다. 개들은 저 자신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를 모른다. 사람도 이와 다르지 않다. 벤치에 앉아 있는 내 앞으로 우아하고 외로운 개들은 지나가고 지나간다.

 

 아무리 품격 높은 개라 하더라도 아무데서나, 누가 보건 말건 똥오줌을 눈다. 이 배뇨 방변은 개들의 마지막 자유처럼 보인다. 개가 똥을 누려고 쩔쩔매다가 쭈그리고 앉으면 개주인은 아무 도리 없이 개의 똥 마려움을 존중할 수밖에 없다. 망아지만큼 큰 개들은 똥의 물량도 엄청나고 오줌은 길 위로 길게 흘러간다. 개를 데리고 가던 젊은 여성이 개똥을 집게로 주워 봉지에 담는데. 개오줌은 처리할 수가 없다. 남의 개가 싼 똥은 공원 당국이 치울 때까지 아무도 치우지 않는다. 개똥은 땅에 말라붙어 가을바람에 똥가루가 날린다. 개주인 남녀들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개똥 봉지를 공원 쓰레기통이나 대로변 쓰레기통에 버리고 가서 파리가 들끓는다. 이것은 개똥을 치운게 아니라 이동시킨 것에 불과하다. 우아하고 교양 있는 개를 데리고 가는 남녀들이 어찌 이런 짓을 하는가. 이런 사람들이 개고기를 가끔 먹는다고 해서 나를 비난할 수 있겠는가.

 

 

< 2 >

 

 늙은 여성들이 젊은이들을 못마땅하게 말할 때는 요샛것들이라는 삼인칭 복수대명사를 쓴다. 내가 분석해보니까 요샛것들이란 주로 며느리들을 가리키는데, 이 며느리는 자신의 며느리일 수도 있고, ‘요새며느리들을 싸잡아서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며느리라는 집단을 흉볼 때는, 한 명이 말하면 봇물 터지듯이 다들 따라한다. 어떤 여성 노인은 작년에 칠순을 맞이했는데, 며느리가 전화해서 어느 식당에 가고 싶으냐?’고 묻더라는 것이다. 노인의 말인즉, 며느리가 미리 식당을 정해놓고 가자고 해야지 시어머니한테 그걸 물어보니까 비싼 식당에 가고 싶어도 말을 할 수가 없었고, 하도 더러워서 칼국수를 먹을란다고 했더니 정말로 칼국숫집으로 데려갔다는 것이다. 다른 노인이 맞장구를 치는데, 요샛것들은 다 그래, 제 돈 아끼려는 거지 뭐겠어요. 요샛것들, 제 서방하고 자식만 알고 시어미는 안중에도 없어, 아예 바라지도 마, 라고 말했다.

 

 몇 년 진에는 추석 지나고 나서 공원에 나갔더니, 여성노인들이 모여서 추석 쇤 얘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또 메모했다.

 

 해마다 추석이 지나면 요샛것들이 무슨 명절증후군이라는 걸 않는다고 신문 방송에서 하도 떠들어대길레 전을 부치고 있는 며느리한테 너도 그 증후군이 있냐?”고 물었더니 배시시 웃으면서 대답하지 않더라고, 한 노인이 말했다. 그러자 수다의 봇물이 터지면서 요샛것들을 성토했다.

 

 아, 요샛것들만 증후군이 있고 늙은 것들은 증후군이 없나, 즈들만 증후군이 있느냔 말야! 늘고 병든 거 외에 웬 증후군이 도 있냐?고 다른 노인이 말했다.

 

 그러자 다른 노인이 또 말했다. 그건 당신들이 몰라서 하는 소리다. 내 며느리도 맞벌이하는데, 아침마다 애가 엄머하고 떨어지기 싫어서 어린이집 차가 올 때마다 운다. 우는 애를 잡아 가두다시피 차에 실어 보내고 나면 에미가 또 우는데, 울면서 화장품 찍어 바르고 출근한다. 에미는 저녁 때 애 찾아와서 씻기고 먹이는데, 서방놈은 밖에서 술 퍼먹고 늦게 들어와서 테레비 보다가 골아 떨어지는 판이니, 어찌 며느리가 견딜 수가 있겠는가. 이러니 증후군 소리가 나오응 거야. 이걸 알고 얘기 하라구. 며느리를 욕할 게 아니라 우리 아들놈들이 정신 차려야 해. 제 아바들이 하던 대로 하면 안 된단 말이야. 세상 돌아가는 물정을 알아야지.

 

 여성 노인들은 아들 편을 들었다가 며느리 편을 들었다가 며느리를 욕했다가 자랑했다를 반복하면서 끝없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야기는 날마다 이어진다. 누구의 삶인들 고단하지 않겠는가. 이러니 남에 대하여 말한다는 것은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한 생애를 늙히는 일은 쉽지 않다.

 

 젊은 부부들은 어린아이를 태운 유모차를 밀고 가고 늙은 사내는 늙은 아내가 탄 휠체어를 밀고 간다. 20년 전에 지나가던 노인들은 다 지나가고 지금은 딴사람이 지나간다. 지나가는 것들은 지나가고 지나간다.

 

 호수공원은 인공의 공원이지만 이제는 숲이 무성하고 그늘이 짙어서 자연의 너그러움을 지니고 있다. 사람들의 지지고 볶는 사연들을 숲이 품고 있다. 지금, 공원 숲에서는 가을냄새가 난다. 가을냄새는 메말라가는 숲에 내리는 햇볕의 냄새다. 김포 쪽 하늘에 노을이 지는 무렵에, 나는 집으로 돌아간다.

 

 

  < 3 >

 

오이지를 먹으며

 

 

 여름 점심때 잘 익은 오이지를 반찬으로 해서 찬밥을 막르면 입안은 청량하고 더위는 가볍다. 오이지는 새콤하고 아삭아삭하다. 오이지의 맛은 두 가지 모순된 국면을 통합한다. 그 두 개의 모순은 맛의 깊이와 맛의 경쾌함이다. 이 양극단의 모순이 한 토막의 오이 속에서 통합되는 비밀을 나는 설명할 수 없다. 짐작건대 이것은 소금과 물과 오이가 항아리 속에서 스미고 배어서, 새로운 맛으로 태어나는 모든 과정을 시간의 섬세하고 전능한 작용이 종합관리함으로써 가능한 것이지 싶다. 잘 익은 오이지는 오이의 신선함 속에 밴 간의 깊이와 소금에 순응하면서 더욱 새로워진 오이의 산뜻함이 한 토막의 채소 속에서 어우러지며 한바탕의 완연히 새로운 맛의 세계를 펼치는 것인데, 이 맛은 오이나 소금 속에 지금까지 없었던 것이다.

 

 그 항아리 속의 비밀을 경영하는 것은, 아마도, 틀림없이, ‘시간의 섬세하고 전능한 손길일 것이다. 시간은 우주의 운행과 역사의 흥망성쇠, 중생의 생로병사, 별들의 생성과 소멸뿐 아니라 김칫독, 된장독, 고추장독, 젓갈독 안의 비밀까지도 두루 관장하면서 있음being’에서 becoming’으로 사물을 전환시키는데, 그 신적神的인 작용이 가장 선명하고 육감적으로 드러나는 곳은 단연코 오이지 항아리 안이다. 오이지 항아리 속 전환의 진행방향은 그 놀라운 단순성인데, 오이지는 단순성을 완성해가면서 깊어지고 깊어져서 선명해진다.

 

 오이지 항아리 안을 찾아오는 시간은 경험되지 않은 미래의 시간이다. 지나가버린 시간 위에서는 오이지를 담글 수 없다. 오이지뿐 아니라 노래를 부를 때, 악기를 연주할 때, 그림을 그릴 때, 자전거를 탈 때도 마찬가지이다. 오이지는 다가오는 시간의 경이로운 작용을 음식의 맛으로 표현해서 사람의 몸속으로 넣어준다. 오이지는 미래의 시간을 받아들여서 스스로 변하고, 그 변화 속에 지나간 시간을 갈무리한다.

 

 오이지를 먹을 때, 나는 시간과 더불어 새로워지는 삶을 생각한다. 오이지를 먹을 때, 나는 다가오는 시간과 지나간 시간이 생명 속에서 이어지는 경이를 생각한다. 오이지를 먹을 때 나는 도공의 가마와 대장장이의 화덕과 연금술사의 램프를 생각한다. 오이지를 먹을 때, 나는 지금 도 도산서당에 계실 것만 같은 퇴계의 무말랭이를 생각한다. 무말랭이는 햇볕을 말려서 먹는 반찬이고 오이지는 시간을 절여서 먹는 반찬이다. 그 반찬 속에서 삶의 미립자들은 반짝인다.

 

 

 

 

'김훈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훈 / ‘자전거 여행1’중에서  (0) 2019.11.18
박정희와 비틀스  (0) 2019.05.28
밥과 똥  (0) 2019.05.19
공터에서  (0) 2017.02.08
공무도하(公無渡河) /사랑아, 강을 건너지 마라  (0) 2009.1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