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가족 70

늙은이의 어느 하루

늙은이의 어느 하루 이미지 출처 : 2019.7.30 부산일보 (...생략...) 시계는 벌써 오후 6시가 지나고 해는 완전히 서편으로 기울고 있었다. 먹고 마시고 떠들고 노래 부르던 노인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산책하기를 포기하고 집으로 달려갔다. 요양보호사는 퇴근하고 딸이 와 있었다. '뚝불'을 확인하니 내가 가져다 준 그대로였다. 내자는 완전히 고개를 돌렸던 것이다. 언제나 시늉만 내려다가 말고 '완전 균형 영양식'이라고 선전하는 '뉴○○' 한 개나 블루베리 두어 개가 고작이니… 참으로 걱정이다. 내자는 3년 전에 대수술을 받고 나서 모든 생활이 완전히 위축되었고, 최근에는 요양보호사의 도움을 받아 매주 'OO치매안심센터'에 다니며 학습을 받고 있다. 체력도 형편없는 데다가 치매(?)가 ..

부부,가족 2023.03.24

슬픔의 베를 짜는 일에 대하여

밤새 푹푹 눈이 내렸다. 순백의 면사포를 쓴 신부처럼 새벽이 걸어오고 있었다. 스마트폰이 통곡하듯 전율했다. “방금 7시에 남편분이 돌아가셨습니다.” 소리는 마른 모래처럼 고막을 맴돌며 나에게 닿지 못했고, 코로나는 쓰나미처럼 우리 가족을 덮쳤다. 내가 근무하는 요양병원에 남편이 입원해 있었다. 요양병원에 코로나 감염환자가 발생하자 병원은 코호트에 들어갔고, 그 와중에 남편과 나는 코로나에 동시에 감염되어 따로 격리 조치되었다. 나는 증상이 심하지 않아 생활치료센터로 격리되었고, 남편은 감염되자마자 열이 39도까지 치솟아 큰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그런 와중에 코로나폐렴에서 코로나패혈증으로 상태가 악화되어 덜컥 삶의 날개가 꺾여버린 것이다. 남편은 소위 나에게 '평생원수'였다. 한평생 경제적으로 힘들게 했..

부부,가족 2021.12.04

가족

가족 사서함에 녹음된 이야기를 듣는데 무뚝뚝한 경상도 억양의 청년이 울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아프다고 한다. 내가 앓았던 림프암이다. 투병한 지 2년째다. 하지만 잘되지 않았다. 병원에서 죽음을 준비하라고 했다. 내 이야기를 들었고, 그래서 절박한 심정에 내가 다녔던 병원으로 옮겼다. 그러니까꼭 병문안을 와달라는 사연이었다. 난감했다. 오죽하면 이런 부탁을 할까 싶었다. 하지만 그 병동에 다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재발하면 어차피 치료 안 받을 거니까 병동에 돌아갈 일은 내 삶에 더는 없으리라 생각했다. 어머니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의사는 환자에게 조금 더 친절했으면, 그러니까 이를테면 이제 가망이 없으니 죽음을 준비하라는 따위의 말은 좀 조심해서 했으면 좋겠고 환자는 아무리 미궁 ..

부부,가족 2020.12.18

‘나의 아름다운 정원’(심윤경)중에서

‘나의 아름다운 정원’(심윤경)중에서 예쁜 이름을 가지게 된 후 동생은 급격하게 매력적인 존재가 되어갔다. 동생이라는 존재가 그렇게 신기하고 사랑스러운 것인지 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 엄마가 그러는데 나도 어릴 때 그렇게 순진했다고 한다. 영주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막연히 어린아이들이란 모두 더럽고 온갖 말썽을 다 부릴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영주는 마치 갓 쪄낸 백설기나 두부처럼 하얗고 따뜻하고 향기로웠다. 침을 조금 흘리긴 했지만 알고 보니 그것도 꽤 귀여운 정경이었다. 나는 동생이 목을 가누지도 못할 때부터 그 아이를 안고 다녔고 그 분홍빛 발바닥을 매일매일 쭉쭉 빨았다. 엄마와 할머니는 처음엔 내가 동생을 떨어뜨리거나 그 연한 몸뚱이를 함부로 다루기라도 할까봐 웬만하면 손을 대지 못하..

부부,가족 2020.10.23

도토리는 왜 둥글까

도토리는 왜 둥글까 박새 부부가 지극정성으로 먹이를 날랐다. 그렇게 키운 새끼들이 날개를 푸드덕거릴 정도 되었을 어느 맑은 날, 어미 새와 박새 다섯 마리가 나란히 가지에 앉아 있었다. 어미 새가 이상하게 날아갔다 돌아오기를 반복하는 사이, 우리는 그게 녀석들의 첫 비행 연습이란 걸 알아차렸다. 드디어 몇 번의 연습 끝에 박새 새끼들이 상공으로 첫 비행을 하는 순간! 숨죽여 지켜보던 우리도 소리 없는 환호성을 질렀다. 그런데 문제는 그 후였다. 첫 비행에 성공한 다섯 마리의 박새가 그대로 둥지를 떠나 돌아오질 않았다. 그 길로 부모를 떠나 각자의 갈 길을 찾아간 셈이었다. 아. 이런 허망하고 쿨한 독립을 봤나. 가을이 되면 도토리가 상수리나무 밑에 떨어진다. 도토리가 둥근 이유는 잘 굴러가기 위해서, 그..

부부,가족 2020.09.09

애지중지(愛之重之)

애지중지(愛之重之) 애지중지(愛之重之)는 어떤 것을 아끼고 어떤 것을 무겁게 여긴다는 의미다. 특히 그림이나 책 등의 사물이 아니라 사람에계 '에지중지'라는 말을 쏠 때 그 의미는 각별한 데가 있다. 명품 가방이든 고가의 그림이든 진귀한 책이든 사물은 자신이 애지중지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사람은 자신이 애지중지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의식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닌가? 아내를 애지중지한다는 것은 아내를 아끼기에 함부로 부리지 않고, 동시에 무겁게 여겨 가볍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남편이 전구를 교체하느라 의자 위에 올라가 진땀을 흘리고 있다. 아내는 식탁 의자에 앉아 남편이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있다. 남편은 목이 마르지만 아내에게 물을 갖다달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조용히..

부부,가족 2020.0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