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Best 20 18

김수미/ ‘살아남기’중에서

김수미/ ‘살아남기’중에서 김수미 1975년 3월 전남 순천에서 태어났다. 제18회 공무원문예대전에서 동상을 수상하였고 현재 시골 우체국에서 근무하고 있다. 살아남기 13 부자되세요 BC카드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가를 말해줍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나는 친구의 말에 그랜져로 대답했습니다 TV가 뭐라하든 광고가 뭐라하든 내 지갑 안의 삶을 살아야 한다 자본이 주인인 시대에 자본주의의 한 가운데 금융업무를 하면서 몇억짜리 수표는 나에겐 종이 내 지갑 안에 만 원짜리가 실제 허구와 실제를 구별해야 한다 가끔 이렇게 추적추적 겨울비가 내리면 불야성을 이루는 자본의 함성에 기죽지 말고 눈요기로만 즐겨야 한다 그렇지 못하거든 밤하늘에 별이나 실컷 바라보아야 한다 아직도 꿈꾸는 자본이 아닌 꿈을 향해..

공감 Best 20 2024.02.19

한계령을 위한 연가 / 문정희

한계령을 위한 연가 / 문정희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 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는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

공감 Best 20 2024.01.24

12월의 노래 / 이해인

12월의 노래 / 이해인 하얀 배추 속같이 깨끗한 내음의 12월에 우리는 월동 준비를 해요 단 한 마디의 진실을 말하기 위하여 헛 말을 많이 했던 빈 말을 많이 했던 우리의 지난날을 잊어버려요 때로는 마늘이 되고 때로는 파가 되고 때로는 생강이 되는 사랑의 양념 부서지지 않고는 아무도 사랑할 수 없음을 다시 기억해요 함께 있을 날도 얼마 남지 않은 우리들의 시간 땅 속에 묻힌 김장독처럼 자신을 통째로 묻고 서서 하늘을 보아야 해요 얼마쯤의 고독한 거리는 항상 지켜야 해요 한겨울 추위 속에 제 맛이 드는 김치처럼 우리의 사랑도 제 맛이 들게 참고 기다리는 법을 배워야 해요.

공감 Best 20 2023.11.30

사랑의 시(詩) / 김산

비 오는 날, 사랑의 시(詩) 김산 선생님을 만나 정원에 자연석을 배치한 후부터 비가 오면 비에 젖어 각자의 색을 드러내는 돌들의 모습이 궁금해집니다. 오늘도 우산을 쓰고 비에 젖은 돌들을 둘러보았습니다. 집안으로 들어오니 때마침 김산선생님으로부터 카톡이 왔습니다. 정원의 돌들이 궁금한 것은 이심전심이었나 봅니다. 정원에 있는 묵묵한 돌의 모습과 흡사한 김산 선생님께서 시 한 편을 보내왔습니다. 창밖을 바라보며 사랑의 시, 사랑의 철학을 배웁니다. 사랑 / 김산 사랑이란 서로의 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아집으로 쌓았던 눈 높이의 벽 허물고 허무는 것 사랑이란 멀리 떨어져 있어도 늘 가까이 있는 것 처럼 마음의 눈은 한줄기 따뜻한 별이 되어 서로의 시린 가슴 살며서 감싸주는 것 사랑이란 받아서 채워지는 것도..

공감 Best 20 2023.10.06

당신이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당신이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이미 당신 곁에 있다 중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장이머우 감독의 영화 을 보았다. 묵묵히 기차역을 바라보고 있는 늙은 부부가 있다. 곱게 단장을 한 아내는 앞을 바라보고 있고, 자신의 이름을 쓴 피켓을 든 남편은 아직 돌아오지 않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아직 돌아오지 않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니. 어쨌든 영화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지금도 그리운 사람을 기다린다고. 산다는 것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간이라고. 그런 다음 영화는 이처럼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당신이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이미 당신 곁에 있어요.” 문화대혁명 시절, 강제수용소로 끌려간 대학교수 루옌스가 수용소를 탈출해서 집으로 돌아온다. 루옌슨은 그를 체포하기..

공감 Best 20 2022.12.30

아들에게 전하는 시

아들에게 전하는 시 섬진강 시인 김용택이 아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저도 똑같은 심정으로 아들에게 전합니다. 저뿐만 아니라 부모의 마음은 다 같을 것입니다. 요즘 나는 이따금 네가 자던 방에서 잔단다. 창밖 단풍나무 잎이 바람에 살랑이는 것을 본다. 때로 네 생각이 짙게 나서 돌아눕는다. 아프게 흘러갔을 네 청춘의 잠자리를 생각한다. 밤과 낮 그리고 홀로 문득 아파트 저 너머 다가올 네 생의 하늘을 너는 가늠해 보았겠지. 누구에게나 젊음은 그렇게 어두웠단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자기가 살아갈 환한 틈이 열리기도 한다. 그 순간이 언제 올지 아무도 모르면서 젊음은 간다. 부지런히 공부하고 부지런히 너를 갈고닦으렴. 돈이 아니고 삶이다. 삶을 믿어라 든든하게. 네가 너에게 든든하게, 너를 신뢰하는 일상의 ..

공감 Best 20 2022.11.29

의도(意圖), 내 마음의 지도

의도(意圖), 내 마음의 지도 자연은 스스로 삼라만상의 원칙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순응하기에 자유롭다. 산이 사시사철 변화무쌍하면서도 언제나 늠름하고 매력적인 이유는 자신에게만 온전히 몰입하기 때문이다. 산은 때때로 찾아와 보금자리를 만드는 동물들을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환영한다. 수많은 나무가 자랄 수 있도록 묵묵히 햇빛과 물을 제공한다. 인간들에게 등산을 허락해 육체와 정신의 건강을 선물한다. 강은 언제나 유유자적하다. 어디에서 흘러나왔는지 알 수 없지만, 산속 깊은 곳에서부터 샘물이 모여 자신이 가야할 장소를 향해 항상 흘러간다. 시냇물에게 커다란 바위는 방해꾼이 아니라 자신이 가야할 방향을 재촉하는 도우미다. 강물은 누가 막아서도 혹은 오물을 투척해도 정지하는 법이 없다. 강물은 자신이 가야할 ..

공감 Best 20 2022.11.29

식탁 위의 약봉지

식탁 위의 약봉지 어느 시인이 '봄의 선구자'라고 찬양하던 진달래가 매봉의 서북기슭을 연분홍으로 뒤덮었다. 벌써 여섯 달째나 병원을 찾고 약을 먹는 나는 우울한 마음을 안고 숲속으로 들어섰다. 자연보호단체에서 가꾸는 것으로 보이는 투구꽃. 금불초꽃. 창포. 벌개미취. 비비추구절초. 참나리 .뱀딸기. 층꽃풀 따위가 무리 지어 새 싹을 틔우고 있으니 산책길은 생기가 감돈다. 매지봉과 종지봉을 정점으로 청계산을 바라보며 뻗어 내린 산기슭에는 소나무.참나무. 아카시아 나무가 주종을 이루고 노간주나무를 비롯한 잡목이 섞여서 우거진 모습이 발걸음을 가볍게 하고, 지저귀는 새소리와 딱따구리의 나무 찍는 소리가 귀를 기울이게 한다. 꽃과 나무와 새들은 우울한 마음을 위로해 주려는 듯 나를 반겨주지만 내 마음속에 도사리..

공감 Best 20 2022.10.29

그리움의 거리

그리움의 거리 사람들은 말한다. 사람 사이에 느껴지는 거리가 싫다고. 하지만 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적당한 간격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오로지 혼자 가꾸어야 할 자기세계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떨어져 있어서 빈 채로 있는 그 여백으로 인해 서로 애틋하게 그리워할 수 있게 된다. 구속하듯 구속하지 않는 것, 그것을 위해 서로 그리울 정도의 간격을 유지하는 일은 정말 사랑하는 사이일수록 꼭 필요하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서 상처 주지 않는, 그러면서도 서로의 존재를 늘 느끼고 바라볼 수 있는 그 정도의 간격을 유지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나무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도 서로 간에 간격을 유지하는 일은 너무나 절실하다. 나무 두 그루가 너무 가깝게 붙어 있으면 그 나무들은 서로 경쟁하며 위..

공감 Best 20 2021.03.05

아름다운 마무리

아름다운 마무리 세월이 흐를수록 깊이를 더해가는 삶이어야 한다 어느 순간도 소중하지 않은 시간이 있으랴만 새벽 가로등 불빛 아래 하염없이 내리던 함박눈 내겐 특별한 그가 그리워진다. 지금껏... 삶의 향기를 뿜어내지 못한 나는 조금씩 추워지고 겨울이 다가오면 몸살처럼 한동안을 온몸으로 앓곤 한다 겨울 아이로 태어난 내가 그를 만나는 것이 아직도 어렵고 가슴 떨리는 조심스런 긴장감 탓일까? 벌써 봉화엔 겨울 올 채비를 한다. 나 역시 그를 만날 준비를 한다 곧 솜털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는 내게 오겠지 아무런 소리도 없고 발자욱도 남기지 않을 것이다 다만 내가 그에게 발자욱을 남길 뿐이다 나는 눈사람을 만들테고 길을 트기 위해 빗자루질도 할 것이다 그는 오랫동안 내게 머물지는 않는다 그는 또 소리없이 나..

공감 Best 20 2020.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