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Best 20 19

가을은 그런 계절인 모양이다

가을은 그런 계절인 모양이다 조금 차분해진 마음으로 오던 길을 되돌아볼 때 푸른 하늘 아래서 시름시름 앓고 있는 나무들을 바라볼 때 산다는 게 뭘까 하고 문득 혼자서 중얼거릴 때 나는 새삼스레 착해지려고 한다 나뭇잎처럼 우리들의 마음도 엷은 우수에 물들어간다. 가을은 그런 계절인 모양이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의 대중가요에도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그런 가사 하나에도 곧잘 귀를 모은다 지금은 어느 하늘 아래서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멀리 떠나 있는 사람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깊은 밤 등하에서 주소록을 펼쳐 들 친구들의 눈매를, 그 음성을 기억해낸다. 가을은 그런 계절인 모양이다. 한낮에는 아무리 의젓하고 뻣뻣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해가 기운 다음에는 가랑잎 구르는 소리 하나에 귀뚜라미 우는 소리..

공감 Best 20 2020.09.23

가을엔 ‘혼자’가 되자

가을엔 ‘혼자’가 되자 가을을 가리켜 ‘여름이 타고 남은 것’이라고 노래한 사람은 일본의 천재작가 다자이 오사무(太宰 治)다. 유난히 예민한데다가 퇴폐적이었던 그는 마흔 살을 다 채우지 못하고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투신자살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가을은 ‘초토’(焦土)이며 그래서 ‘무참하다’라고도 그는 썼다. 여름이 ‘샹들리에’라고 한다면 가을은 ‘등롱’(燈籠)이라고 표현한 것도 그 사람이다. 언젠가 작은 국수집에서 메밀국수를 기다리다가 탁자 위에 놓인 사진을 통해 대지진으로 폐허가 된 벌판에 한 여자가 지친 듯 앉아있는 것을 들여다 보고나서 그는 또한 이렇게 썼다. ‘나는 가슴이 타서 재가 되는 것 같이 처참한 그 여자를 그리워했다. 사나운 정욕까지 느꼈다. 비참한 것과 정욕은 등과 배 같은 것인 모양..

공감 Best 20 2020.09.23

돌담, 그 몽상과 실제의 파타피직스

돌담, 그 몽상과 실제의 파타피직스 Pataphysics¹ 싸늘한 돌담에 기대서서 그대가 보낸 편지를 생각한다. 어제 불던 바람과 마른 풀꽃 이름, 붉게 물든 하늘이 접혀 있고 내 옷자락 끝 강물은 어디만큼 흘러갔는가. 지난날 그대와 나는 버선발로 사뿐히 걸어와서 마주쳐도 깜짝 놀라고 두 눈 꼭 감아도 알아맞히는 푸른 길이 있었지 -서지월「돌담에 기대어 서서」중에서 시인에게 돌담은 과거형이 되어버린 영상과 자막을 현재로 복구시키는 재료다. 그렇다고 시인만이 단절과 경계의 ‘돌담’을 회상의 통로로 쓰는 것은 아니다. 과거 우리 민족은 ‘파타피직스의 마술사’였다. 서구 문명은 ‘성벽의 문명’이었다. 서구의 모든 문명이 성벽 안에서, 벽돌과 석회로 된 요람 속에서 비롯되었다. 이 성벽은 분리와 지배, 나라와 ..

공감 Best 20 2020.05.24

내 앞에 아름다움, 내 뒤에 아름다움

내 앞에 아름다움, 내 뒤에 아름다움 보라, 언제나 새로운 날이다! 인디언 천막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이른 아침의 대기와 만날 때마다 나는 그것을 깨닫는다. 눈을 뜨고 바라보기만 하면 언제나 새로운 날이라고! 한겨울의 바람, 봄을 기다리며 묵묵히 서 있는 나무들. 평원으로 난 좁은 오솔길들. 살아 있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임을 나는 다시금 느낀다. 삶은 어디에나 있다. 나뭇기지 위에도, 작은 개미들의 굴속에도. 북풍한설에 흩날리는 나뭇잎들 속에도 있다. 돌을 들춰 보면 그곳에서 어떤 것들이 움직인다. 그 삶들이 가만히 내 삶을 응시하고 있다. 나는 그런 삶을 언제까지나 사랑해 왔다. 내게 주어진 어떤 것도 우연한 것이 아님을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 역시 하나의 신비임을 알았다. 숨 쉬고, 걷..

공감 Best 20 2020.01.22

눈꽃

눈 꽃 눈꽃이 흩날려 나에게로 온다. 달빛에 흩어져 하늘마다 나풀거린다. 사각거리는 만년필 소리를 뒤로 한 채 눈발은 점점 자라나고 있다. 정신을 차려보니 동화 속 한 폭의 그림처럼 하얀, 그야 말로 하이얀 세상이다. 팅커벨이 빛을 내고 백설 공주가 찾아올 것만 같은, 고즈넉한 고요함과 언뜻 윙윙거리는 바람소리가 나를 취하게 한다. 마냥 어린아이처럼 새빨간 무거운 코트를 걸쳐 입고, 바닥에 뒹굴던 모자를 눌러쓰고, 내 키만 한 기다란 목도리를 들러 메고 느릿느릿 길을 나선다. 길을 따라 걷고 또 걸어본다. 눈덩이를 만들어 보기도 하고 크리스마스 캐럴을 흥얼거리기도 한다. 뽀드득 소리가 너무 좋다. 손이 시려워 호호 불기도 한다. 아무도 없는 눈꽃 정원 속에 유난히 큰 달을 벗삼아 순간을 즐긴다. 혼자 있..

공감 Best 20 2019.12.22

봄날은 간다

봄날은 간다  바람이 분다. 나무로부터 사람에게로, 김소월로부터 진달래꽃으로, 사랑으로부터 슬픔에게로 바람이 분다. 우리를 앞질러간 봄은 흰 조팝나무 꽃 속에 숨었다. 봄은 슬프다. 하나의 꽃이 피는 것은 개벽(開闢)이지만 꽃들의 잔치는 혁명이 될 수 없다. 나비 한 마리가 조팝나무 꽃을 뒤져서 겨우 남아있는 한 줌의 봄을 끌어내고 있다. 날개 위에 실린 봄이 위태롭다. 다시 바람이 불고, 나비를 좇던 마음까지 나풀거린다. 그렇다. 우리 사랑 또한 작은 바람에도 흔들린다.   꽃이 진다. 황홀하게 세상을 밝히고 떨어지는 잎 잎 잎……. 어디에도 꽃잎이 떨어진다. 우리네 슬픔이 스며있는 작은 못에도 꽃잎이 떨어진다. 분홍빛 작은 파문이 일면 눈물을 다 쏟아버린 슬픔이 희미하게 웃는다. 이맘때면 떠오르는 노..

공감 Best 20 2019.04.30

문득 사람이 그리운 날엔 시를 읽는다

문득 사람이 그리운 날엔 시를 읽는다 술에 취하여 나는 수첩에다가 뭐라고 써 놓았다. 술이 깨니까 나는 그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세 병쯤 소주를 마시니까 다시는 술 마시지 말자 고 써 있는 그 글씨가 보였다. 처음 이 시를 발견하고 나서 ‘와!’ 하고 감탄을 했다. 어쩌면 이렇게 내 마음을 잘 표현해 놨을까. 번번이 후회할 행동을 하고 반성하지만 참 변하지 않는 나에게 ‘반성16’은 자화상과도 같은 시다. 유치한 연애시를 좋아하던 학창시절을 지나 어느 순간 나이 들어 버린 나에게 시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심각한 말썽꾸러기였던 10대인 나를 측은한 눈으로 돌아보게 만들고. 막연히 모든 것이 두려웠던 20대의 나를 이해하게 만들고, 파란만장했던 30대의 나를 웃음으로 껴안게 만든다. 그리고 삶..

공감 Best 20 2019.03.09

사랑이 떠난 아픈 자리에

사랑이 떠난 아픈 자리에 시가 들어와 있다 어느 날 사랑이 그에게서 떠나가자 사랑이 떠난 그 아픈 자리에 문득 시가 들어와 있는, 그는 그러한 시인이다. 이명흠, 그에게 있어 시는 김소월의 경우처럼 아픔의 치유이자 싱싱한 생명력의 슬픈 신명이다. 때문에 그의 시는 김영랑의 경우처럼 「찬란한 슬픔의 봄」같은 사랑에 대한 눈물겨운 헌사이다. 그의 백 편 가까운 시들 가운데 가장 빛나는 것은 역시 떠나간 사랑에 대한 것들이다. 그의 시는 쓴 시가 아니고 쓰여진 시이다. 언어를 비틀어 짜지 않고 아픈 가슴을 순하게 투사(透寫)한다. 그는 명징한 눈을 가졌으면서도 눈으로 시를 쓰지 않고 가슴으로 쓴다. 그것은 그의 운명이다. 옷 추슬러, 건강하게 오래오래 혼자 살려고 산에 갔다네. 푸드득 한 생명 날아와 내 앞에..

공감 Best 20 2015.07.14

모란이 필 때 보았던 당신

모란이 필 때 보았던 당신 여름 초입인데, 햇볕은 벌써 빙초산같이 뜨겁습니다. 정수리를 꿰뚫듯 작열하는 땡볕 아래에서 존재 자체가 곧 녹아내릴 듯합니다. 서운산 산딸나무는 흰꽃을 피우고, 산벚나무 열매는 까맣게 익어갑니다. 오전 내내 감나무 아래를 돌아다니던 유혈목이는 그늘진 수도가 시멘트 바닥에서 엎드려 쉬고 있습니다. 물통을 들고 나가다가 그의 휴식을 방해할까봐 돌아섭니다. 해가 울울창창한 밤나무숲 너머로 지고, 황혼이 새의 깃털처럼 떨어지겠지요. 날개 달린 것들은 공중에 떠서 날고, 더위에 지친 날개 없는 것들은 지상에서 고즈넉한 저녁을 맞습니다. 내 안에 있는 노동자도 문설주 아래로 내려오는 초록늑대거미를 바라보며 고요합니다. 이 저녁 당신은 멀리 있고 나는 박복한데 그 박복이 데면데면하기만 합니..

공감 Best 20 2012.0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