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의 치유 65

체념의 힘

체념의 힘   의사이자 문화인류학자인 김관욱은 최근작 에서 인간의 몸이 발명해낸 질환으로 체념증후군(resignation syndrome)을 소개한다. 이 증상은 몸이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에 대해서는 극복하려 하기보다 고통을 감수하려는 현상을 말한다. 증상 중 하나가 수면인데, 무려 5년 동안 잠을 자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언제 깨어날까. 죽지 않고 영원히 잠든다면? 아니, 수면이 유일한 자기 보호 조치라면 깨어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할까’. 한 무리의 소녀들이 어느 날부터인가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흔들고 꼬집는 등 어떤 힘을 가해도 움직임이 없다. 찬 얼음을 몸에 대도 소용이 없고 그 어떤 통증에도 심장 박동 수가 올라가지 않는다. 꾀를 쓴다고 해도 자율신경계의 반응까지 통제하는 ..

상처의 치유 2024.10.24

저출생 시대, 자해하는 양가 외동아이들

저출생 시대, 자해하는 양가 외동아이들  한 여학생이 부모, 할머니, 외삼촌 등 무려 4명의 보호자들과 함께 진료를 받으러 왔다. 그 여학생의 가장 큰 문제는 자해라고 했다. 참고로 우리나라의 여학생 세계는 자해공화국에 가깝다. 칼의 세계 속에 살고 있다고 말해도 될 정도로 칼과 몸, 정확히는 칼과 마음이 가깝다. 2022년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의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초중고생 10명 중 4명이 스트레스로 자해 생각을 한다. 2021년 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 조사에서는 10대 청소년 10명 중 1명이 최근 2주 안에 자해를 생각해보았다고 답했다. 세종시를 비롯한 몇몇 지역 교육청 실태조사들에서 자해행동을 실제로 한 10대 청소년은 10명 중 1명 이상이고, 대다수가 여학생인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대부분 ..

상처의 치유 2024.06.05

슬플 것 같아요

슬플 것 같아요  얼마 전, 한 중학교에서 장애인 인권교육 강의를 마친 뒤 질문 시간에 한 여학생이 나에게 장애인이 되어 억울하냐고 물어보았다. 정확히는 의사의 과실로 인한 의료사고로 장애인이 된 게 원망스럽냐는 질문이었다. 질문한 학생을 보며 말했다. 처음에는 원망스럽지 않다가, 언젠가 문득 원망스러웠다가, 이내 다시 원망스럽지 않게 되었다고. 연이은 수술을 거치며 줄곧 병실에 누워 있던 유아기부터 청소년기까지 삶은 힘겨웠지만, 이상하게도 의사를 원망한 적은 없었다. 장애, 마비, 질병을 감내하는 시간 자체는 나에게 원망으로 기억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문득 스무 살 성인이 되어 대학에 가고, 처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 스스로 거울을 보다 내 몸이 아름답게 대상화될 수 없는 ‘작고 휘고 취약한..

상처의 치유 2024.05.21

고통이 주는 선물

고통이 주는 선물 ‘내 인생이 왜 이리 힘든지 모르겠어요.’ 만나는 이마다 이런 하소연을 한다. 행복은 저 멀리 신기루처럼 깜박일 뿐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셜미디어에 전시된 타인들의 행복한 모습은 우리의 남루함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든다. 감당해야 할 인생의 무게가 태산처럼 느껴질 때 비애감도 덩달아 커진다. 고달픔, 서러움, 억울함의 감정은 무거운 추가 되어 우리를 심연으로 잡아당긴다. 누구나 행복을 바라지만 행복이 인생의 목표가 되는 순간 지금이라는 기적을 한껏 누리지 못한다. 행복의 신기루를 좇는 이들일수록 고통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고통은 즉시 제거되어야 할 적이다. 고통은 행복의 철천지원수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한병철 교수는 고통에 대한 전반적인 두려움이 우리 시대를 지배하고 있..

상처의 치유 2024.03.22

버티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버티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식물은 물, 영양분, 빛만 있다면 잘 살아가지만, 생명을 위협하는 요소가 너무 많다. 추위, 더위, 비, 바람, 해충 자연은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베푸는 듯싶지만 참으로 가혹하기도 하다. 어느 생명체에게도 그저 평온하게 살아갈 환경을 공짜로 주는 법이 없다. 견디고 이겨낸 생명체만이 살아남을 뿐이다. 아프고, 힘겹고, 죽을 것 같아도 기어이 이겨내야 찬란한 축복을 받게 된다. 진정한 승리자는 남들보다 얼마나 평안하게, 영광스럽게 살았느냐가 아니라 마침내 잘 견디어 오늘을 여전히, 기어이 살고 있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그래서 오늘도 여전히 아프고, 힘겹고, 죽을 것 같지만 온 힘을 다해 견디고 버티며 살고 있는 모든 생명에게 외친다. 우리는 잘 살고 있다고. 겨울을 기억하는 ..

상처의 치유 2020.0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