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의 치유

작은 손길에 마음이 열린다

송담(松潭) 2019. 1. 30. 06:32

 

작은 손길에 마음이 열린다

 

 

 

 

 마음을 터놓는 것, 이것이야말로 서로 통하는 세상에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바벨탑 이전의 언어를 습득할 수 있는 최상의 길이기도 하다. 본래 하나이던 언어는 입으로 발화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고 전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굳이 말을 빌리지 않아도 서로 마음이 오가는 것이다. 그런 언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되는 그림이 있다. 윌터 랭글리(walter langley 1852-1922)가 그린 저녁이 가면 아침이 오지만, 가슴은 무너지는구나를 소개한다.

 

 랭글리는 햇빛이 좋은 뉴린이라는 외딴 어촌을 찾아 그림을 그리기 위해 그곳에 몇 년간 머물렀던 영국의 외광주의 화가다. 뉴런에서 지내는 동안 그는 바다를 그저 경치가 아니라 마을 사람들의 애환이 얽혀 있는 곳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랭글리가 그린 바다에는 쓸쓸하고 애잔한 감정이 어려 있다.

 

 이 그림 속에서의 바다는 모질게도 여인이 사랑하는 사람을 데려가버린 모양이다. 어제 아침 바다로 나간 배는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는데, 또다시 아침이 오려 한다. 해는 언제 폭풍이 불었냐는 듯 바다 위로 천천히, 변함없이 찬란한 모습으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울고 있는 여인의 등을 토닥이는 노부가 보인다. 노부는 아무 말도 꺼내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 여인에게 필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함께 있어줄 사람, 슬픔이라는 짐을 나누어 들어줄 사람 말이다.

 

 세상의 일이 심장 하나로 감당하기에 너무나 버거울 때가 있다. 노부는 연륜이 묻어나는 마디 굵은 손으로 흐느끼는 여인의 등을 쓸어준다. 마음을 어루만지는 것이다. 그 따뜻한 손길에 여인은 꾹 참았던 설움이 복받쳐 올라와 목이 멘다. 하염없이 눈물이 솟아오른다.

 

 하루종일 주워 담을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말들을 내뱉고 또 듣지만, 그 말들이 허공을 빙빙 맴돌 때가 많다. 사람들끼리 말은 하면서도 마음은 내주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은 존재만으로 향기롭다

 

 

 눈처럼 하안 방에 우윳빛 피부를 가진 금발 여인의 나체가 있고, 그 위로 선혈처럼 붉은 장미꽃잎이 환상적으로 흩뿌려진다. 영화 아메리칸 뷰티에 나오는 한 장면이다. 꽃잎으로 덮인 방은 색채는 강렬하지만 실제로 꽃향기로 가득 차 있는 곳은 아니다.

 

 아메리칸 뷰티라는 이름의 장미는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줄장미 잡종인데, 특징은 아무런 향도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향은 없고, 보기에만 아름다운 이 꽃은 영화 전체를 통해 삶에 있어 향기란 어떤 것인지 암시하는 역할을 한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주인공인 중년의 남자는 가족사진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린 정말 행복했었지요. 아내와 딸은 내가 엄청난 실패자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그들이 옳습니다. 나는 무엇인가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남자는 현재 분명 행복하지 않고, 행복해지는데 결정적인 어떤 것을 놓쳐버린 상태인데, 도대체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외적으로는 아무것도 모자랄 것 없는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아메리칸 뷰티의 주인공은 자신의 인생을 되찾기로 결심한 후, 금기된 쾌락들에 자신을 내맡겨본다. 과거에 하지 못한 채 그냥 넘어갔던 일들 때문에 영영 행복을 잃어버렸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우선 나이와 직위에 어울려서. 또 점잖아 보이기 위해 취향과 상관없이 선택했던 중후한 차를 팔고, 대신 오래전부터 한번 몰아보고 싶었던 낡고 유치한 빨간색 차로 바꾼다. 그리고 인생을 골치 아프게만 하는 직장을 그만두고, 햄버거를 파는 단순한 일을 시작한다. 마리화나를 피워보는가 하면, 금발 미녀에 대해 황홀한 환상을 가져보기도 한다. 물론 그 여자가 딸의 친구라는 것조차 개의치 않고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쾌락에 내맡긴 채 살며 점점 남자가 깨닫게 되는 것은 인생이 무의미해진 이유가 금기된 것들을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금말 미녀를 실제로 유혹할 기회가 왔지만 남자는 마치 딸을 대하듯 타이르고 돌려보낸다. 젊은 여자를 안는다고 해서 인생의 덧없음이 한순간에 기쁨으로 전환되는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영화의 종결 부분에서 남자는 어처구니없는 오해로 죽임을 당하고 죽어가는 순간 비로소 자신에게 무엇이 진정 의미 있는 것인지 돌아보게 된다. 그가 놓쳐버린 것은 스치고 지나갔던 웃음들이었다. 아내가 장난치듯 웃던 모습, 어린 딸이 해맑게 아빠를 향해 웃던 모습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어리석게도 최후의 순간에서야 그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던 그는 얼굴에 깨달음의 미소를 지은 채 죽어간다.

 

등불 아래 참회하는 막달레나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서양에는 생의 헛됨을 주제로 다루는 그림이 많다. 바로크 화가 조르주 드라투르의 등불 아래 참회하는 막달레나에서처럼 해골이 나오는 그림이 대표적인 예다. 해골은 죽음을 기억하라는 경고다. 여인은 해골을 무릎에 놓고 그 위에 손을 올린 채 타들어가는 등잔불을 바라보고 있다. 죽음에 임박한 자의 마음으로 삶을 들여다보라는 뜻 같다.

 

 한순간 한순간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이 충만한 의미가 된다. 생은 유한해서 덧없는 것이 아니라, 삶의 소중함을 모르는 채 엉뚱한 것에서 의미를 찾으려 애쓰기 때문에 덧없는 것이다. 생명은 꽃향기로 가득한 방이다. 눈에 보이는 허울 좋은 아름다움을 좇느라 생명이 뿜에내는 진정한 향기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향수를 뿌릴 때마다 한번쯤 생각해볼 일이다.

 

 이주은 / ‘그림에, 마음을 놓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