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의 치유

버티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송담(松潭) 2020. 9. 9. 12:26

버티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식물은 물, 영양분, 빛만 있다면 잘 살아가지만, 생명을 위협하는 요소가 너무 많다. 추위, 더위, 비, 바람, 해충 자연은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베푸는 듯싶지만 참으로 가혹하기도 하다. 어느 생명체에게도 그저 평온하게 살아갈 환경을 공짜로 주는 법이 없다. 견디고 이겨낸 생명체만이 살아남을 뿐이다. 아프고, 힘겹고, 죽을 것 같아도 기어이 이겨내야 찬란한 축복을 받게 된다.

 

진정한 승리자는 남들보다 얼마나 평안하게, 영광스럽게 살았느냐가 아니라 마침내 잘 견디어 오늘을 여전히, 기어이 살고 있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그래서 오늘도 여전히 아프고, 힘겹고, 죽을 것 같지만 온 힘을 다해 견디고 버티며 살고 있는 모든 생명에게 외친다. 우리는 잘 살고 있다고.

 

 

겨울을 기억하는 식물들

 

기억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우리가 경험한 많은 일들은 기억이라는 형태로 우리의 몸과 뇌에 저장된다. 기억의 종류에 따라 기억되는 방식이나 장소도 각기 다르다. 예를 들면 잊지 않고 우리가 눈을 깜박거리는 것도 감각의 기억이다. 또 아주 짧게 기억하고 지워지는 기억도 있다. 벼락치기로 외운 지식이 며칠 후 홀라당 사라져버리는 것처럼 뇌에 저장했지만, 단기간에 사라지는 기억들도 있다. 어떤 것은 뇌가 아니라 우리의 근육에 기억되는 경우도 있다. 헤엄을 치거나 자전거 타는 법을 우리 몸이 기억하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런가 하면 백혈구처럼 한번 이겨낸 병원체를 기억하는 면역세포도 있다.

 

우리는 왜 이런 다양한 기억 장치를 갖고 있을까? 아마도 경험을 저장해 필요한 순간에 다시 꺼내 잘 활용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신기한 것은 후천적으로 습득한 기억들은 이렇게 우리 몸속과 뇌에 남아 나의 생애는 물론이고 유전을 통해 다음 세대로도 전달된다는 것이다.

 

식물에도 이런 기억 장치가 있다. 가을에 심는 보리는 추위가 오기 전 싹을 틔웠다가 겨울에 잠시 성장을 멈춘다. 그러다 이듬해 봄, 날이 따뜻해지고 수분이 충분해지면 다시 성장을 시작해 열매를 맺는다. 한때 과학자들은 겨울에 밀이 얼어 죽게 되자 아예 보리를 이른 봄에 심도록 권장했다. 하지만 웬일인지 보리는 싹을 틔우질 않았다. 보리가 겨울 추위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겨울 추위가 사라지자 아직도 봄이 오지 않았다고 여기고 싹을 틔우지 않은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식물들을 지금까지의 축적된 기억과 전혀 다른 환경으로 옮기면 어떻게 될까? 실제로 겨울 추위 속에서 살아온 식물은 겨울 추위가 없는 곳으로 옮기면 몇 해 동안 꽃을 피우거나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한 채 혼란을 겪는다. 일종의 몸살인 셈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식물들은 스스로 축적된 새로운 기억을 바탕으로 생존을 위해 겨울 추위가 없더라도 꽃을 피우도록 진화한다. 식물이나 우리 모두 경험을 잘 축적해 생존에 유리한 방향으로 이용한다.

 

살면서 겪는 수많은 힘겨움과 스트레스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피폐하게 한다. 하지만 식물이 그러하듯 우리도 힘들고 어려웠던 경험을 축적하여 내일의 삶을 더욱 건강하게 만드는 중이다. 그래서 지금 내가 얼마나 힘든지 토로하기보다 이 어려움을 어떻게 기억하고, 다시 위기의 순간에 잘 꺼내서 활용할 수 있느냐가 더욱 중요할 것이다.

 

오경아 / ‘안아주는 정원’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