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노트 26

김지수 / '필사는 도끼다'중에서

연민으로 생존하기  인간은 서로의 어려움에 반응하도록 프로그래밍이 되어 있어요. 아기는 뇌가 완전히 발달하면 산도를 통과하지 못하기에모든 동물 중 가장 취약한 상태로 세상에 나와요.오랜 시간 의존적인 어린아이를 돌보기 위해인간은 연민을 키워야 했죠.인간은 그 연민을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진전시켰습니다.슬픔을 느끼면서도 곤궁에 처한 타인을 돌보는 능력으로 지금의 문명에 이르렀어요.다윈은 자연의 잔인성에도 불구하고아픈 고양이를 핥아주는 개,눈먼 동무에게 먹이를 가져다주는 까마귀 등에 주목했죠.다윈에게 더 맞는 구호는 '선자생존'입니다.그는 가족과 인류를 넘어 다른 종까지연민 작용을 확대하는 것이인간의 가장 고귀한 일이라고 주장했으니까요. 수전 케인 / 미국, 리더십 전문가  줄기차게 패스해  공을 갖고 있..

독서 노트 2025.03.10

이기주 / ‘그리다가, 뭉클’중에서

이기주 / ‘그리다가, 뭉클’중에서   빛을 그린다. 보이지 않는 빛을 그리는 유일한 방법은 그림자를 그리는 것이다. 밝은 것을 그릴 때는 주변을 아주 어둡게 그리면 된다. 지금 어둠이 그려지는 시간을 살고 있다면 동시에 눈부시게 밝은 빛이 그려지고 있는 중이다. 그림 그리다가 뜬금 위로가 차올라 울컥해진다.  내려놓음   한바탕 난리 끝에 지칠 대로 지쳤다. 세상에서 가장 고요한 곳이 필요했다. 극내향형에 걸맞게 아주 조용한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남해가 딱 그랬다. 구불구불 느리게 움직이는 해안선을 따라 길을 가다 보면 여기저기 보이는 풍경이 소박하고 정겨웠다. 꾸며 대는 것 없이 원래 그렇게 생긴 것들과 먼 세월부터 시간이 만든 흔적들이 그냥 그대로 조용했다. 빨간 지붕 집을 중심에 둔 한적한 ..

독서 노트 2024.10.20

김호연 / ‘불편한 편의점’중에서

김호연 / ‘불편한 편의점’중에서   제이에스 오브 제이에스  시현의 수많은 알바 인생의 종착점이 편의점이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그녀 자신이 편의점 애용자이기도 했고, 그동안 여러 알바를 거치며 겪은 일들이 편의점 업무 곳곳에 녹아 있었기 때문에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 뷰티 스토어에서 배운 접객과 계산대 업무 노하우는 편의점에서의 업무와 거의 비슷했고, 배송회사에서 맡아 하던 소화물 분류 업무 역시 편의점 물품 진열과 비슷한 편이었다. 프랜차이즈 커피숍에서는 '제이에스JS'라 불리는 진상들을 응대하는 매뉴얼을 익힌 바 있고, 갈빗집에서는 자기가 구운 고기가 탄 걸 종업원 탓으로 돌리는 제이에스를 겪으며 멘탈도 단련했다. 이렇게 단련된 시현임에도 어디서 이사를 왔는지 최근 꾸준히 드나드는..

독서 노트 2024.08.12

산해진미 도시락

산해진미 도시락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휴대폰 옆으로 내쉰 뒤 목청을 가다듬었다. "지갑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 기차 안이고요, 다음 역에 내려 바로 돌아갈 테니까 좀 보관해주시거나 어디 맡겨주실 수 있나요? 사례는 제가 가는 대로 해드릴게요." "여기 있죠. 갈 데도 없죠." “그래요? 알겠어요. 서울역 어디서 만날까요?" “공항철도 가는 길.. GS편의점......요." 서울역에 도착하고 바로 공항철도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를 발견했다. 에스컬레이터로 내려가자 전방 오른편에 GS편의점이 있었고, 곰의 목소리를 지닌 사내가 도시락에 얼굴을 묻은 채 그 앞에 웅크리고 있었다. 다가갈수록 분명해지는 그의 실체에 그녀는 다시 긴장의 끈을 움켜쥐었다. 대걸레같이 떡이 져 있는 장발의 사내는 얇은..

독서 노트 2024.08.11

양귀자 / ‘원미동 사람들’중에서

양귀자 / ‘원미동 사람들’중에서   멀고 아름다운 동네  어머니가 은혜를 업고 안방 문 앞에 섰다. 아이는 밀려오는 설움을 참느라 입을 비죽거렸다. 감기 기운이 가시지 않아 눈물 콧물로 얼룩진 얼굴이 추위에 새파란데 어머니는 계속 내사마 좋다, 를 되뇌었다. 그러는 당신의 얼굴도 까칠하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이제 살 집을 주시고 무사히 떠나게 하여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자손 만대 번영을 약속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살기 좋은 땅을 주셨습니다. 그간 이 가족, 살 집이 없어 많은 고초를 겪었으나, 아버지, 이제 주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을 찾아 떠날 수 있게 하신 은혜 감사합니다. 열여덟 평 연립주택을 마련하여 부천으로 떠나는 일이 당신에게는 가나안 땅으로 떠나는 일과 다름없다는 심정의 토로..

독서 노트 2024.08.10

양귀자/'모순'중에서

양귀자/'모순'중에서  외식을 하기로 한 장소는 이모네 수준에 맞게 흐텔의 정통 프랑스식당이었다. 딱히 먹고 싶은 것도 없어서 어디로 갈까 많이 망설이다 정한 곳이라는 이모의 부연 설명이 있었다.  우리 집에서의 외식은 물론 그것마저 일 년에 몇 차례 불과한 일이지만, 망설임 한번 없이 단호하게 돼지갈비집이었다. 고기 타는 연기가 식당 바깥까지 자욱하고, 맛 좋기로 소문났다는 어머니의 자랑처럼 방마다 사람들이 가득 찬 그곳에서는 먹는 일도 노동이었다. 쉴 새 없이 고기를 뒤적이고, 연기를 피해 이리저리 자리를 옮기고, 볼이 미어지게 싸 넣은 상추쌈으로 격렬한 입 운동이 불가피한 거기. 남동생과 나와 어머니는 전쟁터 속의 병사들처럼 묵묵히, 그러나 죽을 힘을 다해 돼지고기와 싸우다 거의 지쳐서 식당을 나오..

독서 노트 2024.07.21

김영민 / ‘가벼운 고백’중에서

김영민 / ‘가벼운 고백’중에서  1.드립에 대하여 드립은 거짓말과 다르다. 상대가 그 말이 드립임을 알아채지 못했다면, 즉 드립을 다큐로 받는다면 그 드립은 실패한 것이다. 누군가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라고 물으면 드립을 잘 치는 영재 소년은 이렇게 대답한다. “아, 당연히 이스탄불이 좋지!" 여기서 아이는 결코 누군가를 속이려는 것이 아니다. 대답을 들은 사람도 아이가 엄마, 아빠보다 이스탄불을 더 사랑한다고 믿지 않는다. 아이는 이분법을 강요하는 상대질문을 파훼하기 위해 드립을 구사한 것뿐이다. 드립은 훈계와 다르다. 훈계는 화자가 청자의 우위에 선다는 점에서 억압적이다. 훈계는 심미적 요소보다 도덕적 요소가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지루하다. 성공한 드립은 상대방의 허를 찌르고, 허를 찔린 상..

독서 노트 2024.07.17

이기호 /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중에서

이기호 /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중에서   비치보이스 우리도 해수욕장에나 놀러 갈까? 춘길이가 처음 그렇게 말했을 때 그냥 먼 산이나 바라보면서 하품이나 하고 넘어갈걸....... 왜 그랬을까? 왜 나나 덕진이나 그 말에 그렇게 쉽게 혹하고 넘어가고 만 것일까? 아마도 춘길이가 했던 그다음 말, 그 말 때문이 아니었을까? 우리도 해수욕도 막 하고, 여대생들한테 막 헌팅도 걸고, 또 막, 또 막 그러는 거지. 스물두 살 백수 처지에, 남들 다 가는 대학교도 못 가고, 그렇다고 무슨 직업 훈련을 받고 있는 것도 아니고, 9월 군 입대 영장마저 받아놓은 처지이니, 그래, 객기라도 한번 부려보는 심정으로, 그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여자들이 우리 대학생 아닌 거 금세 눈치채면 어쩌..

독서 노트 2024.05.27

김도윤/'내가 천 개의 인생에서 배운 것들'중에서

김도윤 / '내가 천 개의 인생에서 배운 것들'중에서   세상에서 가장 그리운 밥 병원에 입원했던 엄마가 잠시 한두 달 정도 퇴원한 적이 있었다. 퇴원 후, 엄마는 언제나처럼 내게 밥을 차려 줬다. 대단한 반찬이 있는 건 아니었다. 소고기뭇국에 멸치볶음, 김치, 그리고 보리밥, 국 한 가지에 반찬 두 가지, 밥 한 공기였을 뿐이지만 내겐 임금님 밥상보다 귀한 상이었다. 정말 먹고 싶었지만 1년 동안 먹지 못했던 엄마가 차려 준 밥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다시는 못 먹을 거라고 생각했던 엄마가 차려준 밥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밥이었지만, 동시에 가장 슬픈 시간이기도 했다. 앞으로 다시 이밥을 먹을 수 있을까, 내게 이런 기회가 또 있겠냐는 불안감이 들었다. 그래서 밥을 두 공기, 세 공기 먹었다. ..

독서 노트 2024.05.23

홍세화/'생각의 좌표'중에서

홍세화/'생각의 좌표'중에서   학습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지적 인종주의'라는 말로 학업 성적이 부진하다는 이유 때문에 사회적으로 차별하는 것에 일침을 가했다. 우리는 피부 색깔을 선택해서 태어날 수 없듯이 두뇌를 선택할 수 없다. 두뇌의 용량과 기능은 사람마다 다른데 오로지 문제풀이와 암기 능력이 뒤떨어진다는 이유로 차별하고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면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하고 억압하는 인종주의와 무슨 차이가 있느냐는 것이다. 더구나 우리는 오로지 암기나 문제풀이 능력으로 학생을 평가할 뿐 감수성이나 사람됨에 대해선 거의 무시한다. 우리는 어린 학생들에게 등급과 석차를 매기는 것을 당연시한다. 아직 미성년자들에게 거리낌없이 '너는 1등이다', '너는 35명 중에 35등이다' 라고..

독서 노트 2024.0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