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노트 27

정희원 / ‘당신도 느리게 나이 들 수 있습니다’중에서

우리 몸은 생각보다 더 많이 움직이도록 설계되어 있다. 하루 20킬로미터를 걷고 뛰는 정도까지는 끄떡없다. 뛰면 무릎 연골이 닳아서 없어진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물론 적절한 근골격계 내재역량을 갖추지 않고 몸이 가분수인(근골격계가 취약하고 체중이 과도한) 상태에서 견딜 수 없는 부하가 걸리면 관절이 손상된다. 하지만 근골격계 내재역량을 갖춘 상태에서 올바른 자세로 적절하게 달리면, 오히려 무릎 주변의 근육과 인대가 강화되면서 장기적으로는 관절의 마모 속도를 늦출 수 있다. 편하려고 안간힘을 쓸수록, 예컨대 더 비싼 의자를 사서 오래 앉아 있거나 가까운 곳도 차량을 타고 이동하려고 할수록 미래에 더 많은 고통을 얻는다. 걸을 때는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 스마트폰을 보면서 어깨와 등, 목이..

독서 노트 2023.01.24

정지아 / ‘숲의 대화’(은행나무 출판)중에서

정지아 / ‘숲의 대화’(은행나무 출판)중에서브라보, 럭키 라이프(...생략...)"아가! 나가 분명히 봤다. 니는 할 수 있어야 겡우야! 쪼깐 힘내서 다시 해보자."경우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또르르 굴러 떨어진다. 그리고 서서히 팔이 올라간다. 반 뼘이나 올라갔을까, 아들의 팔은 턱, 둔탁한 소리와 함께 침대로 떨어진다. 아들의 팔은 분명 저 스스로 움직였다. 사고를 당한 날로부터 무려 23년 만이다. 아들은 또 기적을 만들어냈다."아이고, 아가!"그의 고함을 듣고 달려온 아내도 그 기적의 순간을 목격한 모양이다. 아내가 아들의 품에 얼굴을 묻고 흐느낀다. 아들의 양 눈가로 소리 없이 눈물이 흐른다. 그도 돌아서 눈물을 훔친다. 23년 만에 아들은 제 팔을 들어 올렸다. 의사는 근육운동을 관장하는 뇌가 ..

독서 노트 2022.12.10

김주혜(박소현 옮김) /‘작은 땅의 야수들’중에서

김주혜(박소현 옮김) /‘작은 땅의 야수들’중에서    남자의 눈이 번쩍 떠졌다. 정말로 어떤 소리가 귀에 들려오고 있었다. 벼랑 가장자리에서 낮게 그렁대는 숨소리였다. 짐승이 호흡할 때마다 싸늘하게 얼어붙은 수증기가 향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그는 활시위를 팽팽히 당겼다. 그러나 사냥감을 포획하게 되더라도, 자신이 산 아래까지 무사히 내려가진 못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저 표범의 먹이가 되어 죽고 싶지는 않을 뿐이었다. 표범이 절벽 끝에 튀어나온 바위로 훌쩍 올라왔다. 짙은 안개 속에서 윤곽으로만 어른거리는 그 짐승의 존재를 그는 눈으로 보기보다 온몸의 감각으로 느꼈다. 마침내 짐승이 몇 자도 되지 않는 거리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남자는 숨이 턱 막혀 활을 아래로 내렸다. 그것은 표..

독서 노트 2022.12.08

정지아 / ‘아버지의 해방일지’(창비 출판)중에서

정지아 / ‘아버지의 해방일지’(창비 출판)중에서     가을 녘 아버지 지게에는 다래나 으름 말고도 빨갛게 익은 맹감이 서너가지 꽂혀 있곤 했다. 연자줏빛 들국화 몇 송이가 아버지 겨드랑이 부근에서 수줍게 고개를 까닥인 때도 있었다. 먹지도 못할 맹감이나 들국화를 꺾을 때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뼛속까지 사회주의자인 아버지도 그것들을 보고 있노라면 바위처럼 굳건한 마음 한가닥이 말랑말랑 녹아들어 오래전의 풋사랑 같은 것이 흘러넘쳤을지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아버지 숨이 끊기고 처음으로 핑 눈물이 돌았다.  아버지는 1948년 초, 5·10 단선반대 유인물을 살포하다 경찰에 붙잡혔다. 경찰은 아버지 성기에 전선을 꽂고 전기고문을 했다. 전기고문은 사시 말고도 또다른 후유증을 남겼다. 그날 이후..

독서 노트 2022.09.25

하루 사용 설명서

하루 사용 설명서      잘놀다 가자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인생에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 정답에 매달리기 때문이다. 다시 태어나면 어떤 모습이고 싶은가. 인물이 월등하게 좋고, 남다르게 건강하며, 두뇌가 좋아 성적이 우수하고, 집안이 좋으며 돈은 원 없이 쓸 만큼 많고, 배우자는 오직 나만을 섬기며, 자녀는 인물 좋고 두뇌 좋고 효성이 지극하고 남다른 재능을 갖추기를 바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다시 태어날 수가 없다. 그렇다면 명답을 찾아야 한다. 명답은 ‘인생은 잘 놀다 가지 않으면 불법’이라는 것이다.   딱 한 번밖에 못 살기에 남의 기준에 나를 맞추려 애쓰지 말고 내 멋에 겨워 행복하면 그만이다. 인생, 딱 한 번 살기에 정말 잘 놀다 가야 한다.      원한은 강물에 띄우..

독서 노트 2019.02.23

조선에서 백수로 살아가기

밥벌이와 자존감소비와 부채로부터 해방        우리의 구호는 '공부로 자립하기! (줄여서 ‘공자!’ 프로젝트)'다. 모든 세대에 다 해당하지만 청년 백수한텐 특히 절실한 구호다. 백수는 ‘하류’ 가 아니다.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에 나오는 가사처럼 "21세기가 간절히 원하는" 존재 방식이다. 절대 기죽을 필요가 없다. 떳떳하고 당당해야 한다. 그 출발은 자립이다. 자립이라고 하면 즉각 정규직과 고액 연봉을 떠올릴 것이다. 그게 아니면 자립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절대 그렇지 않다! 이 전제를 타파하는 데서부터 자립은 시작된다.   자립의 첫 스텝은 일단 집으로부터의 독립이다. 청년이 되면, 더구나 백수의 경우는 가능한 한 부모의 품을 떠나야 한다. 지방에서 서울로 상경하는 경우는 자연스럽게 그..

독서 노트 2018.09.14

영초언니

영초언니    야학은 구로공단 끄트머리 골목길 안쪽 허름한 3층 건물에 세들어 있었다. 두 야학이 탁구장만한 공간을 베니어판으로 칸을 나누어 썼다. 옆 야학은 주로 서울대 재학생들이, 우리 야학은 서울대생과 고대생이 반반씩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스무 명 남짓한 학생들은 대부분 근처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노동자들이었고, 남학생은 가뭄에 콩 나듯 한둘이 고작이었다.   서울대 출신 교사들 가운데 심재철(현 국회부의장)이라는 내 동갑내기가 있었다. 보기 드물게 잘생긴 미남인데다 전라도 출신이라 그런지 판소리 한 대목도 그럴싸하게 잘 뽑는 재주꾼이었다. 어느 날 나는 "심재철, 그 친구 참 잘생겼지? 아폴론처럼 생겼더라. 하고 엄주웅에게 무심코 말했다. 그는 볼이 잔뜩 부어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걔가 아폴..

독서 노트 2018.0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