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조선에서 백수로 살아가기

송담(松潭) 2018. 9. 14. 12:26

 

밥벌이와 자존감

소비와 부채로부터 해방

 

 

  청년백수 일러스트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우리의 구호는 '공부로 자립하기! (줄여서 공자!’ 프로젝트)'. 모든 세대에 다 해당하지만 청년 백수한텐 특히 절실한 구호다. 백수는 하류가 아니다.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에 나오는 가사처럼 "21세기가 간절히 원하는" 존재 방식이다. 절대 기죽을 필요가 없다. 떳떳하고 당당해야 한다. 그 출발은 자립이다. 자립이라고 하면 즉각 정규직과 고액 연봉을 떠올릴 것이다. 그게 아니면 자립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절대 그렇지 않다! 이 전제를 타파하는 데서부터 자립은 시작된다.

 

 자립의 첫 스텝은 일단 집으로부터의 독립이다. 청년이 되면, 더구나 백수의 경우는 가능한 한 부모의 품을 떠나야 한다. 지방에서 서울로 상경하는 경우는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다. 심지어 유학을 위해 어린 나이에 해외로 가기도 하지 않는가. 당연히 어른이 된다는 건 출가, 분가를 의미한다.(정 나오기 어려우면 가족과의 관계를 바꾸어야 한다.) 그래야 밥벌이를 스스로 해결하게 된다. 밥벌이란 의식주의 기본 곧 생계를 뜻한다. 백수가 돈이 어딨어?' 라고 생각할 것이다. 맞다. 돈이 필요하다. 하지만 돈이 전부는 아니다.

 

 그보다는 생활력과 의지가 중요하다. 스스로 밥을 하고 먹고 치우고, 삼시 세끼를 스스로 운용하는 능력 말이다. 청년들은 이 점에 아주 취약하다. 의식주 전반을 거의 대부분 부모(특히 엄마)한테 의존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20대가 되어도 집에서 설거지나 청소를 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이건 일종의 횡포다. 자식이 부모한테 자행하는! 방은 엉망진창이고, 식사는 제멋대로 하는 이런 습관을 과감하게 청산하는 것이 자립의 출발이다. 적폐 청산은 정치인들한테만 해당하는 사안이 아니다. 가족 관계야말로 갑질과 적폐의 온실이다. 그래서 집을 나와야 한다.

 

 집을 나오면 일단 삼시 세끼를 스스로 감당할 수밖에 없다. 당연히 돈에 대한 태도도 달라진다. 한 푼 한 푼이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다. 밥 한 끼에 담긴 깊은 뜻을 음미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밥벌이의 자존감이다. 당연히 알바든 비정규직이든 경제활동도 활기를 띠게 된다. 그때부터 비로소 경제적 주체가 된다. 삼시 세끼를 직접 운용하지 않고서는 정규직에 고액 연봉을 받는다 한들 자립은 없다. 결국 누군가의 배려에 의존해야 하니까. 특히 정서적 의존은 절대 돈으로 해소되지 않는다. 돈이 있어야 자립하는 게 아니고 자립을 할 때 경제활동이 시작된다는 것, 잊지 마시라.

 

 의식주의 기초가 해결되면 그다음에 중요한 건 네트워크다. 혈연을 벗어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망을 구축해야 한다. 사람들이 정규직을 그토록 원하는 것도 돈이 전부는 아니다. 사람을 만나는 현장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백수들 역시 마찬가지다. 밥벌이에는 반드시 네트워크가 수반되어야 한다. ‘알바, 혼밥, 피시방과 고시원하는 식으로 이어지는 건 최악이다. ‘숨 막힐 듯 답답한이런 코스를 바꾸어야 한다. 그래서 공동체적 실험이 중요하다.

 

 그런데 이런 경제적 실험을 하다가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대부분의 청년들이 빚이 많다는 사실이다. 학자금 빚이야 그렇다 치고, 그 밖에도 이런저런 카드빚이 꽤 있었다. 밥벌이가 어려우니 그랬겠지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부채의 원인은 밥벌이랑 상관없는 소비 충동 때문이었다. 일반적 상식으로는 수입이 없으면 소비가 줄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았다. 소비는 늘 수입을 앞질러 간다. 백수만 그런 게 아니고, 정규직은 더하다. 연봉 5,000을 받으면 소비는 연봉 1억에 맞춰진다. 우리나라의 부채 상승률이 어마어마한 이유도 알 듯하다. 쇼핑은 생필품의 범위를 넘어 취미 활동이자 스트레스 해소책이었다. 그러니 알바비를 모아 한바탕 소비로 풀고 나면 다시 마이너스, 그걸 또 메우려다 보니 다시 무리수를 두게 되고, 이른바 돌려마기가 다반사로 일어난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렇게 늘어난 빚을 갚을 생각조차 안 한다는 것이다. 아니, 엄두를 못 낸다고 해여 하나? 저축을 하겠다는 생각은 더더욱. 오 마이 갓!

 

 그래서 분명히 알게 되었다. 자립의 최고 걸림돌은 소비와 부채라는 사실을. 소비는 정기를 소모시키고 부채는 기혈을 탁하게 한다. 빚을 짊어지고 살면 존재가 무거워진다. 몸 안에 담음(痰飮)이 쌓인 거나 마찬가지다. 담음은 당장 나를 병들게 하지는 않지만 무의식 안에 차곡차곡 새겨져 지속적으로 발목을 잡는다. 일종의 중력 장치인 셈이다. 자존감이 떨어지는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쇼핑은 충동이고 부채는 의존성이다. 충동에 휘둘리고 의존성이 강화되면 멘탈은 점점 불안하고 나약해진다. 백수에겐 자존감이 생명인데, 이게 어떻게 작고 사소한 문제일 수 있겠는가?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하지 않는가. 일상의 악마는 소비와 부채다. 그 악마에게 낚이지 않으려면 생활의 전 과정에서 거품을 걷어내야 한다. 치밀하게 단호하게! 다행히 요즘엔 전 세계적으로 미니멀리즘이 부상하는 중이다. 일본에선 필요 없는 물건을 없애고 지출을 최대한 줄이는 ‘0엔 생활의 추구가 대세라고 한다. 경제가 어려워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동안의 물질적 풍요에 질린 점도 크다. 솔직히 중산층 아파트를 장식하는 온갖 인테리어와 상품들 중에 꼭 필요한 것이 얼마나 될까? 또 그 물건들과 교감하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 하긴 그 이전에 아파트 자체가 주거 공간이 아니라 거대한 상품이다. 거기에서 좋은 삶, 좋은 관계가 만들어지기는 애당초 글렀다. 그러니 그런 삶에 회의가 드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

 

 백수들은 이런 흐름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 이런 시대에 소비 충동에 휩싸여 쓸데없는 물건을 사대는것은 정말 후진 일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소비 충동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을까? 소비를 줄일 수 있다면 부채에서 벗어나는 건 시간문제다. 그리고 소비와 부채의 망령만 떨쳐내도 두 발로 당당하게 걸을 수 있다. 그게 바로 자립의 진수다.

 

< 2 >

 

백수의 특권 주유천하

집에서 탈출하라!

 

 

 바야흐로 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20세기는 의 시대였다. 삶의 중심이 온통 집으로 쏠려 있었다. 내 집 마련이 일생일대의 미션이었고 집이 곧 정체성이자 자존감의 원천이었다. 이제 그만 그런 시대와 결별하기로 하자. 어차피 끝물인데, 우리가 먼저 작별을 고하자는 것이다. 백수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다. 정규직과 고액 연봉자는 감히 실천하기 어렵다. 노동과 화폐에 매여 사는 한, 여전히 집에 집착하고 부동산투기에 골몰하게 될 것이다. 실패하면 하우스 푸어 아니면 골방의 좀비, 백수는 좀 다르다. 일단 집을 살 수 없다. 대출이 불가능하니까. 참 다행이다. 더 중요한 건 집을 살 생각이 아예 없다는 것. 집이 삶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으니까. 해서, 본의 아니게 시대를 앞서 가는 선구자가 되었다.

 

 집은 어디까지나 베이스캠프다. 베이스캠프는 휴식과 충전의 장소이지 활동의 현장이 아니다. 휴식과 충전도 지나치면 해롭다. 해서, 베이스캠프에 오래 머무르면 울적해지거나 화가 치밀게 되어 있다. 기혈이 막히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가 우울증의 시대인 것도 많은 부분 집, 특히 아파트에 대한 집착에서 기인한다. 인생이라는 활동의 무대는 어디까지나 집 바깥이다. 그래야 한다. 거리, 광장, 시장, 공원, 도서관 등등. 어차피 집에 머무르는 시간은 아주 짧다. 짧아야 한다. 한데, 왜 우리는 집에 올인하는가. 집을 마련하기 위해 청춘의 대부분을 바치고 심지어 일생의 대부분을 빚쟁이로 살아간다. 기이한 노릇이다. 심하게 말하면, 일종의 마조히즘(피학증) 아닌가.

 

 길의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아주 뚜렷한 징후가 하나 있다. 여행 붐이 그것이다. 사람들은 이동한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도시에서 오지로, 동에서 서로 특히 우리나라의 여행 열기는 엄청나다. 해외여행 세계 1, 150억 달러의 여행 수지 적자, 2,600만 명의 출국(총인구 대비 출국률 50퍼센트 등등. 청년층 혹은 백수도 이 대열에 동참하고 있다. 뉴스에 따르면 30세 이하 출국자가 사상 처음으로 30퍼센트를 돌파할 것으로 예상된다. 청년들이 알바를 해서 돈을 모으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도 해외여행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시대 청년들은 국경을 넘는, 국경이 없는 세대라 할 수 있다. 예능에서도 이국 탐방이나 오지 탐험이 대세다. 청춘의 유동성을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예도 없다.

 

 이전에는 집에서 학교 혹은 직장으로 이어지는 정주의 궤도에서 잠깐 벗어나는 순간이 여행이었다면, 이젠 여행이 먼저고 여행과 여행 사이에 잠시 휴식을 취하는 곳이 집이다. 집이 베이스캠프라는 건 이런 의미다.

 

  < 3 >

 

 자의식이란 자기에 대한 의식으로 20세기 이후 자본주의와 함께 등장한 표상이다. 오직 자신의 시선으로 뚫어져라 자신을 응시하기 때문에 외부와 타자가 들어설 여지가 없다. 내적 성찰과는 방향이 정반대다. 역설적으로 이 자의식은 인정 욕망과 깊이 연동되어 있다. 자의식이 비대해질수록 인정 욕망은 증폭된다. 현대인은 거의 대부분 이 자의식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다. 그 결과, 타자와의 교감은커녕 자신과의 소통도 어려워진다. 자신에게서 멀어질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이 가장 두려운 존재가 된다. 연암의 벗 민옹의 말이다.

 

 두려워할 것은 나 자신만한 것이 없다네. 내 오른쪽 눈은 용이 되고 왼쪽 눈은 범이 되며, 혀 밑에는 도끼를 감추고 있고 팔을 구부리면 당겨진 활과 같아지지. 차분히 잘 생각하면 갓난아이처럼 순수한 마음을 잃지 않으나, 생각이 조금만 어긋나도 짐승 같은 야만인이 되고 만다네, 스스로 경계하지 않으면 장차 제 자신을 잡아먹거나 물어뜯고 쳐 죽이거나 베어버릴 것이야. 이런 까닭에 성인(聖人)께서도 이기심을 누르고 예의를 따르며, 사악함을 막고 진실된 마음을 보존하면서 스스로 두려워하지 않으신 적이 없었다네.

 

- 박지원 저, 김명호 역, <지금 조선의 시를 쓰라, 민옹전>, 28

 

 그러니 살아남으려면 이 감옥에서 도주해야 한다. 자의식이라는 쇠창살을 부수어야 한다. 타자와 외부를 내 안에 받아들여야 한다.

 

< 4 >

 

걸음아, 날 살려라!

골방에서 광장으로

 

 

 부모의 입장에서 헤아려보자. 청년이 된 자식이 백수다. 이것도 걱정거리인데 그 자식이 하루 종일 골방에서 날밤을 바꿔 살면서 컴퓨터만 붙들고 있다면, 그건 정말 부모에 대한 정신적 테러다. 취업을 한 다음에 돈을 번 다음에 효도도 하고 제대로 살겠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지금 당장의 삶을 유예시키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그렇게 미루다간 한순간도 제대로 살아보지 못한다. 가족에게든 자신에게든 최고의 선물은 지금 당장 잘 사는 것이다. 방법은 간단하다. 아침에 나가 밤에 돌아오면 된다(솔직히 가족은 생사확인만 하면 된다.), 백수지만 기죽지 않고 명랑하게 살면 된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럼 그 긴 시간을 어디서 뭘 하느냐고? 일단 걸어라! 발길 닿는 대로 걸어라.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보면 많은 것을 배우고 발견할 수 있다. 거리 자체가 책이요 텍스트다. 주변의 둘레길을 마스터 한다든가 명승지를 답사한다든가 아니면 도심의 골목 투어를 해도 좋다. 외국인들은 그 많은 돈을 들여 서울에 오지 않는가. 남산타워, 경복궁, 성곽길. 북촌 등을 답사하기 위해, 그렇게 걷다 보면 지형지물에 익숙해지고, 그 경험들은 주유천하를 하게 때 아주 소중한 자산이 될 것이다.

 

 아울러 '걷기'야말로 최고의 양생(養生)술이다. 양생이란 정기신을 잘 순환시켜 생명력을 보전하는 의학적 비전이다. 이름하여 통즉불통(痛則不通: 아프면 통하지 않는다!) 아프다는 건 생리든 심리든 어딘가 꽉 막힌 것을 의미한다. 우울증, , 치매, 중풍 등 현대인이 가장 무서워하는 질병들이 다 거기서 비롯한다. 그래서 걷기는 거의 모든 병의 치유법에 속한다. 두통을 없애려면? 걸어라! 소화가안 된다고? 걸어라. 현대인의 가장 치명적 질병인 불면증을 없애려면? 역시 걸어야 한다! 만병통치냐고? 거의 그렇다. 약간 촌스럽긴 하지만, 걷기에 관해서는 아직도 이 표현이 가장 확실하다. ‘걸음아 날 살려라!’ 병법 가운데 삼십육계 줄행랑을 표현하는 말이지만 현대인한테도 꼭 필요한 생존 전략이다. 속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속도의 기준은 내 신체다. 한 걸음이건 1만 보건 간에.

 

 특히 걷기와 수면은 뗄 수 없이 결합되어 있다. 잠은 소중하다. 낮에 생성된 암세포들을 소멸시키는 것도, 온갖 스트레스와 트라우마를 흘러가게 하는 것도, 무의식을 통해 우주적 흐름과 연결하는 것도 다 잠이다. 잠만 잘 자도 대부분의 병은 치유된다. 거꾸로 불면증은 모든 병의 원인이자 출발에 해당한다. 숙면이 양생의 포인트가 되는 건 그 때문이다. 숙면을 취하려면 햇빛 속에서 하체를 움직여야 한다. 성공한 사람들 중에서 불면증이 많은 건 그 때문이다. 햇빛과 걷기라는 축복을 누릴 수 없어서다. 그래서 요즘은 회사원들이 점심시간을 쪼개 '패스트 힐링' 을 한다고 한다. 회사 근처에 있는 안마 카페에 가서 수액 주사를 맞으며 낮잠을 잔다는 것이다. 힐링 앞에 '패스트' 가 붙는 것도 참 거시기 하지만, 오죽하면 그럴까 싶어 짠하기도 하다. 그러니 백수는 축복받은 족속이 아닌가. 정규직들과 부자들이 그렇게 원하는 걷기와 숙면을 동시에 누릴 수 있으니 말이다.

 

 나는 세끼 밥, 세끼 잠, 모두 잘 먹고 잘 잔다.

 

 - 박지원 저, 박희병 역 <고추장 작은 단지를 보내나> 48

 

 연암의 한 편지글에 나오는 대목이다. 세끼 밥은 그렇다 치고, 세끼 잠이라니. 낮잠, 초저녁잠, 새벽잠. 예전에는 이렇게 하루 세 번 나누어서 잤다고 한다. 현대인은 생각조차 하기 어려운 고매한(?) 경지다. 20세기라면 게으름 혹은 야만의 상징이었을 테지만 앞으로는 세끼 잠이야말로 고귀한 삶의 상징이 되는 날이 올 것이다.(이미 그렇게 되고 있다. 노동시간을 줄이면 수면시간은 늘 수밖에 없다. 그래야 한다!)

 

 

< 5 >

 

백수는 미래다

백수 시대 백세 시대를 향하여!

 

 

 

 가장 먼저 소유에 대한 갈망에서 벗어나야 한다. 20세기의 경우, 산다는 건 더 많은 소유를 향해 나아가는 거라고 배웠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많이 소유할수록 바보가 된다. 디지털은 유동하는데 가진 게 많으면 움직이기가 곤란하다. , , 차는 공유 경제에 포획 될 테고, 그러면 이제 최소한이면 충분하다. 사적 소유에서 벗어나야 공유경제를 적극 활용할 수 있고, 그래야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확장하고 세상과 연결될 수 있다. 소유에서 접속으로!

 

 백수는 존재만으로 덕을 베푸는 존재다. 우선 내가 백수가 된 덕분에 누군가 일자리를 얻었을 테니까. 그뿐인가 백수는 당연히 적게 벌고 적게 쓸 수밖에 없다. 이것보다 더 훌륭한 생태주의는 없다. 또 아무도 백수를 보고 긴장하지 않는다. 경쟁심을 느끼지도 적대감을 갖지도 않는다. 저절로 평화와 힐링의 메신저가 된다.

 

 다음, 노동과 화폐에서 벗어났으니 당연히 증식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수동적으로 의기소침하게 산다는 의미는 아니다. 자본은 움직인다. 움직이면서 증식한다. 그래서 사람들을 미혹시킨다. 그 운동과 속도감에 빠져드는 것이다. 그래서 멈출 수가 없다. 병들 때까지 죽을 때까지. 백수도 움직인다. 하지만 증식의 레일에 올라타지 않는다. 움직이되 증식하지 않는 것. 그것을 순환이라 이른다. 돈이건 활동이건 재능이건! 고로 백수는 미래다!

 

 백수의 소명은 고립으로부터의 탈출이다. 고립은 우울을 낳고, 우울은 중독으로, 중독은 충동과 폭력으로 이어진다. 백수가 해야 할 일은 이 고립의 사슬에서 벗어나 공감의 바다로 나아가는 것이다. 백수는 명랑하게 사는 것만으로 세상을 이롭게 한다. 그 명랑함으로 사람과 사람을, 세상과 세상을 연결하는 존재다. 문명은 연결이다. 생명은 공감이다. 앞으로 이런 가치들이 문명의 새로운 척도가 될 것이다. 20세기를 통과하면서 사람들은 서로 연결되는 법을 잃어버렸고, 공감 능력은 거의 제로에 가까워졌다. 전투태세로 늘 긴장하면서 살다 보니 그리 되었으리라. 이제 그런 식의 스릴과 서스펜스는 필요 없다. 평생 성공을 향해 달려가지 않아도, 평생 악착같이 돈을 모으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온 것이다. 게다가 기대 수명이 100세다. 이제 가장 중요한 사항은 관계와 활동! 누구랑 살지? 누구랑 밥을 먹고 누구랑 산책을 하고, 누구랑 공부를 하고 누구랑 여행을 하지?

 

 그런 점에서 앞으로 정치경제학의 화두는 외로움이 될 것이다. 문제는 가족이다. 그중에서도 핵가족! “그것만이 내 세상이라고 외쳐서는 안 된다. 이미 핵가족은 다시 쪼개져서 1인 로 흩어지고 있다. 다시 대가족으로 돌아가기는 틀렸고, 남은 길은 1인 가구들의 자유로운 헤쳐모여, 즉 우정의 연대뿐이다. 이것이 가능해지려면 혈연, 그리고 사유재산, 그리고 자의식이라는 표상에서 탈출해야 한다. 그래야 우정이라는 우주적 파동에 접속할 수 있다. 20세기는 가족과 연애의 이름으로 우정과 의리를 침묵시킨 시대다. 이제 그 봉인을 해제하고 다시 우정과 의리 소통과 교감을 일상의 축으로 복원해야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고 또 그것을 넘어 동물, 기계와도 공감할 수 있는 윤리는 우정밖에 없다. 그 윤리를 구현할 수 있는 건 백수밖에 없다. 고로 백수는 미래다!

 

 일하지 않아도 100세를 산다는 건 인류사의 축복이다.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정도로 황홀한 세상이다. 그럼 그 기나긴 시간을 무엇으로 채우는가? 배우면 된다. 인생과 우주에 대하여, 마음의 행로에 대하여, 역사와 종교에 대하여, 그동안 먹고 사느라고, 지지고 볶고 싸우느라고, 또 수명이 짧아서 하지 못했던 일을 누구나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지식은 정보다. 정보의 바다에 익사하지 않으려면 기예를 익혀야 한다. 능동적이고 자율 적인 삶의 기예를. 지식과 삶이 마주치면 지성이 된다. 백수는 당연히 지성을 연마해야 한다. 그 지성이 삶과 죽음의 경계로 나아가면 지혜가 된다. 지식에서 지성으로, 지성에서 다시 지혜로 나아가는 지평선이 우리 앞에 펼쳐졌다. 그럼 이제 우리가 할 일은? 그 지평선 위를 거침없이 달려가는 것뿐. 각자의 현장에서 각자의 속도대로, 청년에서 중년, 노년에 이르기까지 소크라테스와 공자, 부처와 장자 등 인류의 영원한 멘토들이 그랬던 것처럼. 백수의 원조이자 21세기 청년들의 영원한 길벗, 연암 박지원이 그랬던 것처럼. 이것이 백수 시대에 백세 인생을 살아가는 최고의 전략이다. 단언컨대, 이보다 더 좋은 삶은 없다 고로, 백수는 미래다!

 

고미숙 / ‘조선에서 백수로 살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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