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초언니
야학은 구로공단 끄트머리 골목길 안쪽 허름한 3층 건물에 세들어 있었다. 두 야학이 탁구장만한 공간을 베니어판으로 칸을 나누어 썼다. 옆 야학은 주로 서울대 재학생들이, 우리 야학은 서울대생과 고대생이 반반씩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스무 명 남짓한 학생들은 대부분 근처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노동자들이었고, 남학생은 가뭄에 콩 나듯 한둘이 고작이었다.
서울대 출신 교사들 가운데 심재철(현 국회부의장)이라는 내 동갑내기가 있었다. 보기 드물게 잘생긴 미남인데다 전라도 출신이라 그런지 판소리 한 대목도 그럴싸하게 잘 뽑는 재주꾼이었다. 어느 날 나는 "심재철, 그 친구 참 잘생겼지? 아폴론처럼 생겼더라. 하고 엄주웅에게 무심코 말했다. 그는 볼이 잔뜩 부어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걔가 아폴론이면 나는 아도니스게!" 남자들의 질투심도 장난이 아니라는 걸 나는 깨달았다. 그때부터 엄주웅을 놀리고 싶을 때면 “어이, 아도니스!"라고 불렀는데 주위에서는 무슨 이야기인지 눈치를 채지 못했다.
심재철과 나는 한판 붙을 뻔했다. 그는 나랑 동갑이지만 재수를 해서 학번은 나보다 하나 아래였다. 그런데도 나랑 대화할 때마다 ‘자네..... 했는가?'라는 식으로 말을 시작하고 끝내는 게 아닌가. 지가 서울대라고 그러는 건가. 동갑인 걸 강조하느라 그러는 건가. 여자라서 무시하는 건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반말까지 할 건 뭐냔 말이다.
참다 참다 어느 날엔가 교사회의 도중 또 '자네..... 했는가?' 화법이 시작되자 내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다. 회의를 하다말고 심재철에게 잠깐 밖으로 나오라고 말했다. 어두컴컴한 골목길에서 나는 아랫배에 잔뜩 힘을 주고 나지막하게 말을 씹어뱉었다.
“심재철 씨! 여자라고 나를 우습게 보는 거예요?”
“아니, 이게 무슨 소리다요. 지가 언제 그랬다고라?”
“맨날 나보고 걸핏하면 자네, 자네, 그러는데...”
“아니,'자네'는 반높임말인디…… 우리 광주서는.”
“그럼 ‘하게’는 또 뭐예요? 내가 재철씨 딸이예요. 조카예요?”
“아이고 ‘하게’도 반올림말인디”
“그런 식으로 둘러댄다고 믿을 것 같아요? 내가 소설을 많이 읽어서 웬만한 전라도 사투리는 다 안다고요!”
“오메! 나 환장허것네. 정말이요. 우리 고향 사람들한티 물어보랑게요.”
한밤중의 골목길 전투가 싱겁게 끝난 뒤에야 사연을 알게 된 야학교사들은 배곱이 빠져라 웃어댔다. 하마터면 광주 남자 재철이가 제주 여자 명숙에게 뼈도 못 추릴 뻔했다면서. 고단한 야학생활이었지만 우리는 이렇게 웃을 일을 만들고 나누며 하루하루 버텨나갔다.
< 2 >
9.14시위로 구속된 고대생 중에는 찢어지게 가난한 가정형편에 홀어머니와 함께 사는 사학과 1학년 금승기라는 학생이 있었다. 그때는 학내 사찰을 전담한 정보기관으로부터 '문제 학생'으로 분류되는 경우는 물론이고, 경찰서에 끌려갔다 훈방조치를 당하거나 구류되는 경우는 물론이고, 경찰서에 끌려갔다 훈방조치를 당하거나 구류를 산 경력만으로도 취직하기 힘든 시절이었다. 이런 시절에 구속되어 정식 재판에 회부된다는 건 법률적 판결 이전에 이미 사회적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유신헌법으로 장기독재의 발판을 구축한 박정희는 선거로 물러날 가능성이 없는 ‘구국의 지도자’였으므로.
누구나 부러워하던 명문대 새내기, 홀어머니의 자랑거리였다는 금승기! 한 번 본 적도 없는데 사연만 들어도 가슴이 시려왔다. 나 역시 제주도 우리 어멍, 아방에게는 그런 존재였기에 그날부터 내 가슴 한켠에는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이, 다른 한켠에는 박정희 정권을 향한 불타는 증오심이 자리잡았다.
하지만 가라열 회원들의 성금만으로 뒷바라지하기에는 구속된 학생들의 숫자가 너무나 많았다. 영초언니와 나는 궁리 끝에 고대신문 선배들을 비롯해서 이야기가 통할만한 고대 선배들을 수소문해 직접 찾아뵙고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철저한 사전검열과 보도 통제로 신문과 방송에 단 한 줄도 보도되지 않은(나중에 알고 보니 일본 아사히 신문에는 시위 사진과 함께 대서특필되었다) 세종문화회관 시위를 알릴 수도 있으니 일석이조라는 판단에서였다.
선배들을 찾아나서기 전만 해도 우리는 매우 낙관적이었다. 고대, 하면 동문들끼리 유대와 결속이 강하기로 정평이 난 ‘으리으리한 의리’를 자랑하는 대학 아닌가. ‘해병대전우회, 호남향우회, 고대동창회가 대한민국 3대 조직이다.’ ‘회사에 고대생 두 명만 있어도 동문회가 생기고 알래스카에도 고대 동문회가 있다,’는 등의 농담이 회자될 만큼 고대 출신의 단결력은 그때부터 유명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다행히도 모르는 척하는 선배보다는 도와주는 선배들이 더 많아서 우리는 꽤 많은 돈을 모았다. 영초언니는 구속자들과 기부자의 명단, 모은 돈의 액수를 일수쟁이처럼 공책에 꼼꼼히 기록한 뒤에 그 돈으로 내복을 일괄 구입했다. 금승기처럼 사정이 특히 더 어려운 가족에게는 영치금도 전달했다. 그녀는 이 모든 돈 씀씀이를 기부자들에게 세세히 보고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황당한 오해를 받기도 했다. 구속자 가족들 중에는 내복을 전달해 달라고 찾아간 가라열 멤버들을 구속생의 애인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한 친구는 어느 부모님이 장래 며느릿감으로 여기면서 손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는데, 아니라면서 손을 뺄 수가 없었다고 곤혹스러워했다. 심지어는 우리를 ‘아가’라고 부르는 시골 부모님도 있었다. 그분들 입장에서는 구속 이후 자칫 불똥이 튈까봐 친지들조차 외면하거나 발길을 끊는 와중에 자신의 아들에게 내복을 전달해달라는 여학생은 필시 애인이라 여길 수밖에 없었으리라. 요즘 말로 ‘웃픈’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 3 >
개털 중의 개털, 소녀 장발장들
시간이 흐르면서 옥주보다 더한 개털들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절도방의 소년수들이었다. 운동시간에 운동장으로 나가려면 그 방 앞을 지나쳐야만 했다. 아직 솜털이 채 가시지 않은 복숭아 같은 뺨의 소녀들이 창가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게 보였다. 공장에서 그녀들과 접촉하는 옥주가 소녀들에 대해 말해주었다. 부모의 이혼이나 죽음으로 조부모와 살거나 엄마 아빠가 재혼하는 바람에 계부 계모와 사는 아이 들이 대부분이란다. 제대로 된 가족들이 없거나 있더라도 하루살이로 근근이 지내는 경우가 많아서 면회 올 처지가 못 된다고 했다.
대체 저 아이들이 무슨 죄를 지어 들어왔느냐는 물음에 옥주가 픽 웃었다.
"뭐 별것도 아닌 거… 배고파서 가게에서 소시지나 빵 같은 거 훔친 애도 있고, 화장실에 떨구고 간 지갑, 주인한테 안 돌려줘서 잡혀온 애도 있고, 한마디로 돈 없고 빽 없고 가족들도 쌩까니까 구속까지 된 거지 뭐."
소녀들은 내가 야학에서 가르쳤던 구로공단 여공들과 엇비슷한 나이의 또래였다. 그래도 공장에 다니는 아이들에게는 그리운 고향이나 그네들을 기다리는 따뜻한 가족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곳의 소년수들은 세상과 가족으로부터 완전히 버림받은 존재였다.
운동시간 전에 마가린 한 통과 건빵 두 봉지를 수의 안에 이미 숨겨두었다. 소녀들이 여느 때처럼 창가에 매달려 있었다. 그녀들에게 눈을 찡끗한 뒤에 교도관의 눈을 피해서 먹을 것을 식구통 안으로 얼른 밀어넣었다. 며칠 뒤 운동하러 그 방 앞을 지나는데 한 소녀가 내게 말했다.
“대학생 언니 고마워요! 우리 모두 잘 먹었어요."
눈물이 핑 돌았다. ‘잘 먹었다니 내가 고맙구나. 동생들아!’
그 뒤로도 나는 틈틈이 소년수들에게 마가린과 건방을 투척했고 그네들은 소지를 통해 내게 답례품을 보내왔다. 비닐봉지를 꼬아 만든 인형이나 수건의 실을 한올 한올 뽑아 만든 ‘조랭이(잡동사니 물건을 넣어두는 주머니를 감방에서는 이렇게 불렀다)’ 따위를.
친구가 된 옥주, 그래도 어린 여대생이라고 나를 딸이나 손녀처럼 여기는 할머니들, 그리고 ‘대학생 언니’라고 부르며 나를 잘 따르는 소년수들 사이에서 나는 조금씩 감방생활에 익숙해져갔다.
< 4 >
왜 그런 일을 하느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언니는 도리어 확신에 찬 어조로 내게 말했다
“제품이 정말 너무 좋아 다단계라면 무조건 나쁘다는 건 잘못된 고정관념이야. 광고비 거품을 걷어내고 복잡한 유통경로 대신 직거래로 좋은 제품을 싸게 살 수 있는 혁명적인 유통구조지. 부패한 집권여당을 무너뜨릴 혁명자금을 마련하려면 이길밖에 없지않니? 번역이나 하고 잡문이나 써서 받는 푼돈으로 언제 어떻게 세상을바꾸겠니?”
그때 영초언니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건 우리 사회 전체를 확 바꿔놓을 혁명자금이 아니라 당장의 생활비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언니의 마지막 자존심이랄까 스스로 믿고 싶어하는 바를 눈앞에서 박살내고 싶지는 않았다. “명숙아, 바쁘겠지만 한번 와서 설명회 들어보지 않을래?"라고 말하는 언니를 향해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와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이제 정말 천영초와 만나는 일은 없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한동안 언니 소식을 듣지 못했고, 나도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 언론사에서 직위가 점점 올라가면서 나는 더 극심한 격무에 시달렸다 그러던 중 언니에게 오랜만에 전화가 걸려왔다. 모든 걸 정리하고 아들과 캐나다로 이민 간다고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내 얼굴이 보고 싶다고 했다. 문화형이랑 끝내 헤어지는구나 생각했다.
나와 만난 언니는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본인도 한국 사회에 충분히 지쳤고 넌더리가 났고, 이제는 사회를 바꾸겠다는 열망도 포기한 지 오래라고, 그러나 시쳇말로 '헬조선'을 떠나기로 결심한 결정적안 아유는아들 때문이라고 했다. 어릴 적부터 천재 소리를 듣던 아들은 중학교에 진학한 뒤로도 줄곧 학년 전체에서 1, 2등을 다툴 정도로 성적이 좋았다. 그럼 아들을 해외파로 만들기 위해서? 언니가 ‘아들 바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듯 극성 엄마일 줄이야. 다단계에 이어서 언니의 또 다른 면모를 보는 것 같아서 적이 실망스러웠다.
그러나 내 추측은 성급한 것이었다. 언니의 아들은 당시 한국에서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오르기 시작한 ‘왕따’였다. 엄마아빠를 닮아 학업 성적은 뛰어나지만 또래와 잘 어울리지 못하는 수줍은 아들이었다. 아이들은 엄마가 학교에 한 번도 찾아오지 않는 비사교적이고 성적만 좋은 친구를 따돌리고 놀려대고 심지어는 주먹질까지 하기 시작했다. 학교에 가기가 두렵다는 아들의 말을 들으면서 영초언니는 이 나라에 가졌던 마지막 애정의 끈을 놓기로 결심했다.
몇 년째 별거나 다름없이 남남처럼 지내오던 두 사람이지만 아들문제에 대해서만은 의견이 일치했다. 둘 다 폭력이라면 진저리가 날 정도로 많이 당해본, 그래서 누구보다도 폭력을 증오하는 사람들이었다. 이 나라를 떠나서, 폭력 없는 사회에서 아들을 키우기로 서로 뜻을 모았다. 하지만 문화형은 이 나라에 남겠다고 했고, 언니는 아들과 떠나기를 원했다. 자연스럽게 두 사람은 이혼에 합의했다. 여자친구를 위해 서울 시내를 다 뒤져서 겨울 딸기를 사다 바쳤던 정문화와 내 사전에 이혼은 없다던, 결혼 문제에 관한 한 지독한 보수주의자였던 천영초가 이렇게 헤어진다니, 그 사랑의 시작을 지켜본 내게는 참으로 씁쓸한 결말이었다.
비록 내게 고통도, 실망도 안겨주었지만 찬란한 청춘의 봄날을 함께했던 내 인생의 첫 멘토 영초언니. 풀각시처럼 영롱했던 그녀가 서서히 부서지고 망가져가는 걸 눈뜨고 지켜보기가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터, 그녀가 떠나는 날 공항에 나가지는 못했지만 부디 새로운 땅에서 새롭게 출발하기를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서명숙 / ‘영초언니’중에서
그 시대 젊지만 아무데도 기댈 곳 없이 외롭고 힘없던 여성으로서 겪어낸 활동가의 삶은 감동적이고 무참하고 안타깝다. 언젠가 어느 길모퉁이에서 언뜻 지나쳤던 풀꽃 한 송이나 냇가의 하얀 자갈돌이 그렇듯이, 또는 근처에 머물렀을 한줌의 바람처럼 그들은 그때의 시간 속에 멈추어 있다. 나는 이 기록을 보며 몇 번이나 눈시울이 젖었다.
- 황석영(소설가)
우리는 지난겨울의 매서운 밤추위를 무릅쓰며 1700만 개의 촛불을 밝혀 끝내 민주시민혁명을 이룩해냈다. 그 줄기찬 협동과 용기와 인내는 어디서 온 것인가. 그 뿌리는 바로 유신독재 투쟁으로 이어져 있다. 우리가 더 온전한 ‘민주세상’을 갈망한다면 필히 이 <영초언니>를 읽어야 한다. 영초언니의 희생에 사죄하는 마음으로. 역사에 대해 책임지는 마음으로.
- 조정래 (소설가)
법은, 법치주의는 그 숱한 오류와 무고한 사람들의 고통과 목숨을 담보로 조금씩 정당해지고 단단해져왔던 것. 이 땅의 법치주의는 그렇게 한발 한발 더딘 걸음을 걸어왔습니다.
- 손석희(2017년 4월 5일 JTBC 뉴스룸 앵커브리핑에서)
이 책이 그린 것은 ‘옛사랑’이 아니라 ‘첫사랑’이다. 세상에 대한 첫사랑으로 불타올랐던 청춘, 같은 대상을 두고 첫사랑에 빠졌던 여자들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 다 설명할 길 없는 불운 때문에 말을 잃어버린 ‘영초언니’를 대신해 대책 없이 씩씩했고 지금도 여전히 어여쁜 그 첫사랑의 떨림과 짜릿함을 전해준 서명숙이 내게 물었다.
짧고, 부질없으며, 결국 아무것도 남기지 못할 우리네 인생에서 이것 말고 다른 무엇이 의미가 있단 말인가? 나는 대답한다. 없다!
- 유시민(작가)
이 시대는 영초언니를 만들었고, 영초언니를 기억하는 우리가 다음 시대를 만들 것입니다. 그 길목에서 이 이야기는 결코 절망적이지 않습니다. 잔혹한 격동의 시간 속에서도 뜨거운 우정과 사랑 그리고 작은 웃음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프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우리들이 꼭 기억해야 할 언니들. 고맙고 미안합니다.
-이경미(영화감독)
서명숙 / ‘
영초언니’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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