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정지아 / ‘아버지의 해방일지’(창비 출판)중에서

송담(松潭) 2022. 9. 25. 16:19

정지아 / ‘아버지의 해방일지’(창비 출판)중에서

 

 

 

 

< 1 >

 

가을 녘 아버지 지게에는 다래나 으름 말고도 빨갛게 익은 맹감이 서너가지 꽂혀 있곤 했다. 연자줏빛 들국화 몇 송이가 아버지 겨드랑이 부근에서 수줍게 고개를 까닥인 때도 있었다. 먹지도 못할 맹감이나 들국화를 꺾을 때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뼛속까지 사회주의자인 아버지도 그것들을 보고 있노라면 바위처럼 굳건한 마음 한가닥이 말랑말랑 녹아들어 오래전의 풋사랑 같은 것이 흘러넘쳤을지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아버지 숨이 끊기고 처음으로 핑 눈물이 돌았다.

 

< 2 >

 

아버지는 1948년 초, 5·10 단선반대 유인물을 살포하다 경찰에 붙잡혔다. 경찰은 아버지 성기에 전선을 꽂고 전기고문을 했다. 전기고문은 사시 말고도 또다른 후유증을 남겼다. 그날 이후 아버지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되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말했다.

“고문 중에 젤 쉬운 것이 전기고문이다. 금방 기절해 붕게."

고등학생이었던 내가 물었다.

“어떤 고문이 젤 고통스러운데?"

“물 젖은 담요를 뒤집어씌워가꼬 딱 기절 안 할 맨치 몽둥이로 계속 때리먼 참말 죽을 맛이제. 고로코롬 때리먼 멍도 안 들어야."

 

아버지는 정면을 바라보는 것인지 45도 오른쪽을 바라보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시선으로 답했다. 그럴 때의 아버지는 평소처럼 무표정하기는 했지만 어쩐지 약간 신이난 듯도 보였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신이 나서 말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마흔 넘어서야 이해했다. 고통도 슬픔도 지나간 것, 다시 올 수 없는 것, 전기고문의 고통을 견딘 그날은 아버지의 기억 속에서 찬란한 젊음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전기고문으로 아버지의 정자는 활동성을 잃었고, 병원에서는 임신 불가 판정을 내렸다. 어느 날 아버지는 장터주막에서 지리산에서 죽은 동지의 형을 만났다. 그는 한의사였다. 이런저런 안부를 주고받다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토로했더니 한의사가 약 한제를 지어주었다. 믿거나말거나 그 약을 먹고 내가 태어났다. 그날 이후 최씨 성을 가진 그 한의사는 우리 집안의 명의로 등극했다. 어쩌면 진짜 명의였을지도 모른다. 삼년 넘게 나를 괴롭힌 생리통을 약 한제로 멈춘 것도 그였다.

 

고등학교 일학년 때 나는 아버지로부터 내 탄생의 비화를 들었다. 그만큼 네가 귀한 존재라나 뭐라나. 공부 안하고 엇나가는 나를 다독이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 3 >

 

아버지는 작은아버지의 원수였다. 작은아버지는 아버지 때문에 국민학교도 마치지 못했다. 엄밀하게 말하면 아버지 때문은 아니었다. 여순사건이 나고 14연대가 지리산으로 입산한 뒤 행여 빨치산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거나 도움을 줄까봐 산골 마을들은 다 소개했다. 빨갱이였던 아버지 집만 소개한 게 아니었다. 그러니 국민학생이던 작은아버지가 학교도 다니지 못한 채 친척집을 전전하게된 건 시절 탓이지 아버지 탓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작은아버지는 집안이 망한 것도 자신이 배우지 못한 것도, 할아버지가 군인 손에 죽은 것도 다 아버지 탓이라 여겼다.

 

감옥에서 나온 아버지가 고향 반내골로 돌아왔을 때 작은아버지는 고개를 외로 꼰 채 말도 섞지 않았다. 고구마나 수수 같은, 우리 집에서 키우지 않는 작물을 할머니가 우리 집에 갖다준 걸 알기라도 하면 작은아버지는 소주 됫병을 벌컥벌컥 들이켜고는 고주망태가 되었다. 그런 막내아들의 심기를 건드리기는 싫고, 집안에서 제일 잘나 군당위원장까지 한 시절 잘못 만나 평생 감옥에서 썩은 불쌍한 둘째에게 뭐라도 갖다주고 싶기는 하고, 할머니는 작은아버지가 취해서 쓰러지거나 장에 간 틈을 타 생쥐처럼 은밀하게 우리 집으로 숨어들었다. 할머니는 내 첫 기억에서부터 허리가 기역자로 꺾여 있었다. 무거운 것을 들지 못하니 잔꾀를 써서 망태에 새끼줄을 연결하고는 그걸 허리에 질끈 묶은 채 질질 끌며 우리 집으로 왔다. 이가 하나도 없어 합죽이였던 할머니는 허리끈을 풀지도 못한 채 마루에 털썩 주저앉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고 합죽합죽 웃었다. 할머니의 망태에는 수수나 조가, 고구마나 감자가, 때로는 다슬기나 올벼가 담겨 있었다. 할머니가 합죽합죽 웃으면 아버지는 버럭 화를 냈다.

 

“상호 알먼 워쩔라고 또 가고 왔소! 지발 좀 가꼬 오지말랑게 말도 징허게도 안 듣소이!"

"우리 귀헌 새끼 묵으라고 가꼬 왔제."

 

아버지가 뭐라거나 말거나 할머니는 합죽합죽 웃으며 내 머리만 자꾸 쓰다듬었다. 내 기억 속의 할머니는 늘 웃고 있고, 작은아버지는 늘 화를 낸다. 작은아버지가 우리집까지 달려와 화를 낸 것도 여러차례였다.

 

 

< 4 >

 

"니 사정이 좀 워쩌냐?"

"왜요?"

“괜찮냐 이 말이다."

“예.”

 

괜찮지 않다고 말하는 법을 나는 모른다. 사회주의자 부모가 나를 그렇게 키웠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도 내 부모는 어린 나를 일으켜주지 않았다. 무릎이 까져 피가 흘러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조금 울다가 별수 없이 툭툭 털고 일어섰다. 그렇게 자란 나는 누구 앞에서도 힘들다는 말을 해본 적이 없다. 울어본 적도 없다. 이게 바로 빨치산의 딸의 본질인 것이다.

 

 

< 5 >

 

 

총액 십칠만 오백원.

그 밑에는 작은 글씨로,

 

4월 25일 사천원(소주 한병, 에쎄 한갑.)

4월 26일 사천원(소주 한병, 에쎄 한갑.)

4월 27일 사천원(소주 한병, 에쎄 한갑.)

4월 28일 사천원(소주 한병, 에쎄 한갑.)

4월 29일 사천원(소주 한병, 에쎄 한갑.)

4월 30일 구천오백원 (식대 4,000×2=8,000, 소주 한병 1,500원)

 

지출 내역이 적혀 있었다. 얼마 전 내가 보낸 이십만원의 잔액이었다.

 

그날 이후 어머니는 두 번 다시 보증빚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아버지는 칠순 넘은 나이에 남의 밤농사를 지어 일년에 몇십만원씩 그 빚을 갚아나갔다. 아직 그 빛은 반 넘게 남아 있고 어머니 염려대로 내 빚이 될 모양이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먼 친척은 칠순 넘은 나이에 힘겹게 번 돈으로 자신의 빚을 기꺼이 대신 갚아준 내 아버지를 위해 다른 누군가에게보다는 농도 짙은 눈물이라도 한방울 떨궈주려나. 아버지와 달리 인간을 신뢰하지 않는 나는 어쩐지 미덥지 않았다. 비쩍마른 아버지가 시래깃국을 먹을 때 그 여자는 아버지 돈으로 삼겹살을 배불리 먹었을 거라는 추측이 차라리 믿을 만했다.

 

십칠만 오백원이 든 봉투를 나는 망연히 바라보았다. 소주 한병 에쎄 한갑, 남을 위해 천이백만원을 기꺼이 지출할 수 있었던 아버지 본인에게 필요한 돈은 하루 사천원이었다.

 

마지막 날 아버지는 과한 지출을 했다. 4월 30일 구천오백원(식대 4,000×2=8,000. 소주 한병 1,500원). 생의 마지막 날, 아버지는 누군가와 사천원짜리 마지막 만찬을 즐겼다. 아마도 메뉴는 된장찌개였을 것이고 상대는 십중팔구 박선생이었을 것이다. 교원 연금으로 그럭저럭 살 만한 박선생이 만류했을 것이나 빚지고 못 사는, 치매 걸려서도 그 성정 버리지 못한 아버지는 호기롭게 만원짜리 한장을 꺼내들었을 것이다.

 

 

< 6 >

 

 

아버지는 유물론자답게 죽음 뒤를 믿지 않았다. 언젠가 어머니가 자리 운운한 적이 있었다. 지리산이 보이는 양지바른 자리에 묻혔으면 좋겠다는 말에 아버지가 또 신문을 촥 덮었다. 그러고 보니 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십중팔구 신문이나 TV 뉴스, 라디오 뉴스를 읽거나 보거나 듣고 있었다. 아무튼 아버지는 예의 그 사팔뜨기 눈으로 어머니를 쏘아보았다.

 

“암만 혀도 자네는 유물론자가 아니구만 죽으면 그걸로 끝인디 워디 묻히고 안 묻히고, 고거이 뭣이 중하대?”

 

방학 중이라 곁에 있던 내가 옳다구나 끼어들었다. “아버지는 정말 무덤 필요 없어?"

 

"두말허먼 잔소리! 땅덩어리나 아니나 쥐꼬리만 한 나라서 죽는 놈들 다 매장했다가는 땅이 남아나들 안 헐 것이다. 우리 죽으먼 싹 꼬실라부러라."

 

입꼬리가 실룩이는 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눈치였으나 유물론자가 아니라는 말에 눌린 어머니는 더는 끼어들지 않았다.

 

"꼬실라서 니 펜한 대로 암 디나 뿌레삐레라, 고기밥이 되든동 밭에 거름이 되든동, 기왕지사 죽은 몸, 뭣이라도 도움이 돼야제."

 

유물론자다운 대답이 나는 만족스러웠다.

 

"그럼 제사는?"

 

"지사는 무신 지사. 헹제라도 많아서 핑계 김에 얼굴이나 볼라먼 모릴까 니 혼찬디 지사는 무신 지사."

 

아버지는 뼛속까지 유물론자였다. 부모가 여든 넘도록 장지 마련은 고사하고 영정사진 찍어둘 생각조차 못한 불효자식이었으나 아버지의 유지가 그러하였으니 따르면 될 터였다. 역시 유물론은 산뜻해서 좋다.

 

 

< 7 >

 

 

"긍게, 그거이 여순반란 때였제. 그때 나는 일학년 막냉이 삼춘은 이학년이었어야. 삼성분교는 두 학년이 한반잉게 삼촌이랑 나랑 한반이었단 말다."

 

작은아버지와 큰언니가 한살밖에 차이 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그러니까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한해사이로 아들을 낳고 딸을 낳은 것이다. 할머니가 열셋에 시집을 왔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그 시절에 드문 일은 아니었다. 연년생인데도 작은아버지라는 호칭 때문인지 나는 큰언니가 한참 아래인 것으로 알고 있었다.

 

여순사건이 나고 한 열흘 뒤 큰언니는 가을걷이가 끝나고 아침저녁으로 팔에 소름이 돋던 늦가을 어느 날이라고 했다. 수배 중이라 한동안 보이지 않던 아버지가 14연대를 끌고 보무도 당당하게 나타났다. 14연대는 반내골에서 일주일 남짓 머물렀다. 작은 동네가 난생처음 사람들로 북적북적, 큰언니 말로는 잔칫집 같았다고 한다. 작은아버지와 큰언니를 비롯한 동네 아이들은 젊은 군인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홀린 듯 구경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어느 날 새벽, 큰언니가 군인들 구경하러 달려갔더니 북적이던 며칠이 꿈이었던 듯 다 사라지고 없었다. 반내골이 서리 맞은 호박잎처럼 처연해진 것 같았다. 어쩐지 언니도 풀이 죽어 학교로 갔다. 두 시간 수업을 마치고 났는데 큰 총을 든 군인들이 교실로 들이닥쳤다.

 

“고상욱이 본 사람 손들어!"

 

군인의 입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불린 순간 여덟살이었던 큰언니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린 나이였지만 언니는 직감적으로 고상욱이 작은삼촌이라는 말을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혹 누가 쨔가 고상욱이 조칸디라, 이르기라도 할까봐 언니는 가슴 졸이며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그런데 키가 작아 언니보다 두 줄 앞에 앉아 있던 작은아버지가 번쩍 손을 들었다.

 

“고상욱이 우리 짝은성인디요! 짝은성이 문척멘 당위원장잉마요."

 

면당위원장은 면에서 제일 높은 사람, 작은아버지는 형이 자랑스러웠던 것이다.

 

"요씨! 고상욱이 언제 봤어?"

 

“동네서 돼야지를 시마리나 잡아가꼬 군인들허고 한대엿새 잔치를 치렀는디요. 오늘 새복에 눈 떠봉게 가볼고 없든디요.”

 

옆자리였으면 옆구리라도 찔퍽거레가꼬 고놈의 주둥이를 꿰매불고 싶등만은 떨어진 자링게 그랄 수도 없고, 나는 속이 타들어가는디 막냉이삼춘은 속도 없이 미주알고주알 오만 것을 다 일러바치지 않겠냐, 막냉이삼춘이 본래부텀 입이 방정이었단 말이다, 큰언니는 1948년, 여덟살 가을의 일을 엊그제인 양 생생하게 기억했다.

 

그날, 군인들은 아홉살 작은아버지의 등에 총을 겨눈 채 마을로 내려갔다. 아버지가 미리 몸을 피하라 일러둔 덕에 당시 구장이었던 할아버지밖에 마을에 남아 있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아버지와 달리 한민당 지지자였다. 붉은 물이 든 아버지를 가장 못마땅하게 여긴 것도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는 산속으로 피신하라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도 피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당연히 말을 전했으니 피한 줄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왜 피하지 않았는지는 모른다. 평소 우파였으니 반란군 편으로 몰리지 않을 거라 확신했을 수도 있다. 돼지를 세 마리나 잡아서 잔치를 했다고 작은아버지가 이르지만 않았더라면 할아버지의 확신대로 살 수 있었을까? 그날 들이닥친 건 구례 경찰이아니라 외지 군인들이었다. 며칠 전 14연대에게 호되게 당한 그들이 할아버지가 우파인지 좌파인지 일말이나 관심이 있었을까 싶다. 물론 지난 일이고 그날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은 군인들과 할아버지와 작은아버지뿐이었으니 이제 와 진실을 알 길은 없다.

 

군인들은 물러가기 전 집집마다 불을 놓았다. 유서 깊은 양반 가문의 한옥이든 상놈의 초가집이든 불은 훨훨 잘도 붙어 순식간에 반내골은 검붉은 화염에 휩싸였다. 집이 불타는 것을 보면서도 마을 사람들은 발만 동동 구를 뿐 불을 끄러 내려갈 수 없었다. 군인들의 모습이 신작로에서 사라진 것을 확인한 뒤에야 사람들은 마을로 내려왔다. 연기에 휩싸인 마을 정자 옆, 할아버지의 주검 곁에서 오줌을 지린 채 혼절한 작은아버지를 발견한 것은 큰언니였다.

 

“그때게…… 막냉이삼춘이 손만 번쩍 안 들었으면 할배가 안 죽었을랑가.……”

 

큰언니가 옷고름으로 눈물을 찍으며 중얼거렸다.

 

그날, 반내골 사람들은 집이 죄 불타 이불 한 채, 옷 한 벌도 건지지 못한 채 입고 있던 옷 그대로 뿔뿔이 흩어졌다.

 

“우리는 외가로 가고, 할매는 막냉이삼춘이랑 고모을 데꼬 워디로 갔능가 모르제 난리 끝나고 돌아와봉게 막냉이삼춘이 딴사람이 돼부렀드라고 전에 삼춘 벨멩이 촉새였어야. 눈만 뜨먼 나불나불, 암말이나 지껄여쌓는통에 저눔의 입이 방정이라고, 입 잘못 놀리다 필시 겡을 칠 거라고 할배가 천날만날 쎄를 찼었는디, 꿀 묵은 벙어리맹키 입이 위알로 딱 붙어부렀드랑게 나 시집 갈 때꺼정 삼춘 입 여는 것을 댓번이나 봤을랑가…… 자개도 그날 입 촐랑거린 것이 영 맘에 쓰였겄제이. 긍게 일초도 안닫히던 입이 영 닫혀분 것이여. 난중에 장가들고 새끼 낳고는 도로 쪼까 열리긴 했지만.”

 

그런 사연이 있는지 몰랐다. 그저 빨갱이 아버지 때문에 집안 망하고 공부 못한 것이 한이라 사사건건 아버지를 원망하는 줄로만 알았다. 아홉살 작은아버지는 잘난 형 자랑을 했을 뿐이다. 그 자랑이 자기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갈 줄 어찌 알았겠는가. 작은아버지는 평생 빨갱이 아버지가 아니라 자랑이었던 아홉살 시절의 형을 원망하고 있는 게 아닐까. 술에 취하지 않으면 견뎌낼 수 없었던 작은아버지의 인생이, 오직 아버지에게만 향했던 그의 분노가, 처음으로 애처로웠다.

 

 

< 8 >

 

 

아버지는 왜 하필 고향으로 돌아온 것일까, 나는 늘 궁금했다. 언젠가 물었더니 의아한 얼굴로 아버지가 되물었다.

 

“글먼 고향 납두고 워디로 간다냐?"

 

구례는 아버지의 고향이기도 하지만 아버지의 전장이기도 했다. 아버지의 친척과 친구가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아버지를 적으로 아는 사람도 있는 곳이라는 의미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고향에서 사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몇년에 한번씩 바뀌는 정보과 담당 형사들과도 허물없이 농을 주고받으며 두루두루 잘 지냈다. 감시하는 형사와 술잔을 나누고 싶냐는 내 비아냥도,

 

“순겡은 사람 아니다냐?"

아버지는 대수롭잖게 받아넘겼다. “몰르는 사램잉게 총질을 해대제 구례사람들끼리는 안 그랬어야. 뽈갱이든 퍼랭이든 노상 얼굴 보고 살았는 디 총이 겨놔지가니, 구례는 해방 직후에 친일파 숙청도 지대로 못했당게."

 

고씨 집안사람 하나가 친일파였다. 친일로 제법 돈을 모았고, 일본에 헌납도 한 모양이었다. 해방 직후 면의 젊은이들이 그를 당산나무 아래로 끌고 왔다. 쳐 죽이라는 고함이 터져 나왔다. 혈기왕성한 젊은이 하나가 낫을 들고 다가가자 누군가 빽 소리를 쳤다. 젊은이의 어머니였다.

 

"그 어른 아니었으면 니가 시방 산 목심이 아니어야!"

 

젊은이가 어린 시절 이질로 죽어갈 때 고씨가 병원비를 댄 것이다. 사람들이 한마디씩 보태기 시작했다.

 

“우리 애기 학벵 끌레가게 생겼는디 고씨 어른이 손을 써줬그마요.”

 

고씨 성토장이 이내 미담장으로 변했다. 쳐 죽이자고했던 젊은이들도 그만 머쓱해져서 흐지부지 흩어지고 말았다.

 

"민족이고 사상이고, 인심만 안 잃으면 난세에도 목심은 부지허는 것이여."

 

자신도 고씨처럼 인심을 잃지 않았으니 빨갱이라도 고향서 살 수 있다는 의미인 듯했다. 한때 적이었던 사람들과 아무렇지 않게 어울려 살아가는 아버지도 구례 사람들도 나는 늘 신기했다. 잘 죽었다고 침을 뱉을 수 있는 사람과 아버지는 어떻게 술을 마시며 살아온 것일까? 들을 수 없는 답이지만 나는 아버지의 대답을 알 것 같았다. 긍게 사람이제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내가 목소리를 높일 때마다 아버지는 말했다. 긍게 사램이제. 사람이니 실수를 하고 사람이니 배신을 하고 사람이니 살인도하고 사람이니 용서도 한다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와 달리 실수투성이인 인간이 싫었다. 그래서 어지간하면 관계를 맺지 않았다. 사람에게 늘 뒤통수 맞는 아버지를 보고자란 탓인지도 몰랐다.

 

 

< 9 >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한 이들에게도 아버지의 자수는 심각한 문제였다. 그건 고결한 혁명가로서 있을 수 없는 변절이고, 전향서 한장 때문에 몇십년씩 감옥살이를 했던 자신들과는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는 중차대한 타락인 모양이었다. 나는 그들과 생각이 같지 않았으므로 대답하지 않았다.

 

노인이 나에게 종이 한장을 건넸다. 거기에는 '통일애국인사 고상욱 추모제'라고 적혀 있었다. 아버지는 그들의 동지가 아니라 인사, 그러니까 함께 통일애국운동을하기는 했던 어떤 사람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플래카드 하나 없이 그냥 보내드릴 수는 없으니 이 문구로 플래카드를 몇개 만들어 내걸도록 합시다."

 

.어머니에게 여쭙겠다고 돌아선 건 딱히 그들에게 서운해서가 아니었다. 아버지의 고향에서 통일애국인사 고상욱이라는 플래카드를 굳이 걸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상주 휴게실에 누워 있던 어머니는 말을 듣자마자 힘겹게 일어나서는 손사래를 쳤다.

 

“아이, 안 된다. 느그 아배 땜시 육사 못 간 길수가 두눈 멀쩡히 뜨고 살아 있는디, 고씨 집안에 넷이나 공무원인디, 갸들 가슴에 또 못을 박자고야? 가는 마당에 멀라고 속 시끄럽게.… 느그 큰어매가 무덤서 벌떡 일어날 일이다. 그냥 조용히 가시게 할란다고 해라.”

 

어머니의 말을 전하자 노인의 눈에 노기가 서렸다.

 

"민주화된 지가 언젠데 그런 플래카드 하나 못 건단 말인가?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책임질 테니 어머님께 다시말해보시게."

 

무슨 일이 생길 리 없다는 건 나도 안다. 보수정권하지만 그런 플래카드 하나 걸었다고 경찰이 오기야 하겠는가. 온다 한들 플래카드나 떼겠지 뭘 더 하겠는가. 플래카드 하나 붙였다고 철창에 가두는 세상은 진작에 끝났다. 암암리에 불이익을 줄 수야 있겠지만 시간강사에게 불이익을 줘봤자였다.

 

 

< 10 >

 

 

어린 시절, 큰고모부는 내가 옆에 있는데도 어디 가서 아들을 하나 낳아 오라며 자주 아버지를 들볶았다. 한 귀로 흘려듣던 아버지는 짜증이 난다 싶으면 나를 번쩍 들어 무등을 태웠다.

 

"나는 요놈만 있으면 돼라. 아들 필요 읎당게 징허게 말도 많소이, 아리야, 니가 아들 노릇꺼정 다 헐 거제이?"

 

초등학교 삼학년이었지만 말귀 밝았던 나는 그 참에 얄미운 고모부 약 올리는 것까지 잊지 않았다.

“하모, 기동이는 이번에 삼십등 했는디?"

기동이는 큰고모네 막둥이이자 유일한 아들로 나와 같은 반이었다.

 

“우리 아리는?”

"일등!"

"아들보다 낫구만."

 

아버지가 소리 내어 웃으며 마당을 빙 둘러 내달렸다. 새파란 하늘에 뭉게구름이 피어나고 있었다. 뭐가 그리좋았는지 나는 아버지의 목 위에서 등허리가 흠뻑 젖도록 웃어젖혔다. 우물가에 핀 달큰한 치자꽃 향기에 숨이 막혔다.

 

아무 걱정 없이 행복했던 그런 날도 있었다. 이듬해 아버지는 감옥에 끌려갔고, 나는 아버지를 잃었다.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 더 불행했다. 광주교도소에 있다는 걸 알았지만 만날 수 없는 아버지는 없는 것과 같았다. 몸 약한 어머니를 대신해 온몸으로 놀아주던 아버지를 잃고 나는 세상 전부를 잃은 느낌이었다. 그때 잃은 아버지를 어쩌면 나는 지금까지도 되찾지 못한 게 아닐까? 아버지를 영원히 잃은 지금, 어쩐지 뭔가가 억울하기도 한 것 같았다.

 

 

< 11 >

 

 

“누군데?”

“이, 느그 아부지 첫 번째 마누래 동생이여. 니는 본 적 없냐?"

 

우리 집 족보는 이런 식이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재혼을 했다. 그 무렵 대부분이 그랬듯 둘 다 초혼은 중매결혼이었다. 당시 마음에 둔 여자가 있던 아버지는 어른들끼리 잡은 결혼식 날, 집안 어른들에게 끌려가 영문도 모른 채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이 다 끝나기도 전에 도망친 아버지는 다시는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여자는 아버지가 입산을 하고 감옥에 가 있는 동안에도 홀로 기다렸다. 아버지는 면회조차 받아주지 않았다. 그래도 여자는 매주 찾아왔고, 마침내 면회를 허락한 아버지는 창살 너머 여자가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는 동안 냉정하게 말했다.

 

"이녁이나 나나 봉건제도의 희생양이었을 뿐이오. 그러니 나 같은 건 잊어불고 좋은 사람과 새출발하시오.” 그게 두 사람의 끝이었다.

 

그 여자의 동생이, 그러니까 한때는 아버지의 처제였던 양반이, 자기 언니를 불행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형부의 현재 마누라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형부의 장례식에까지 찾아온 것이다.

 

어머니는 누구보다 반갑게 아버지의 옛 처제를 맞았다. 허리 때문에 다른 사람과는 나누지 않았던 맞절도 했다. 두 여자는 한동안 손을 맞잡은 채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이 말없이 나누고 있는 마음이 어떤 것일지 나는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아버지의 옛 처제가 막 나간 문으로 이번에는 어머니의 옛 시동생이 아내는 물론 아이들 셋을 데리고 나타났다. 속 모르는 사람이 보고 개판이라고 욕을 해도 할 말이 없을 집안사였다.

 

어머니의 옛 시동생을 나는 어릴 때부터 만났다. 어머니의 전남편은 남부군 소속으로 낙동강 전선에서 연락이 끊겼다. 십중팔구 도강을 하다 죽었을 것이다. 감옥에서 나온 뒤, 방물장사로 시어머니와 시동생을 부양하던 어머니는 내 아버지를 만났고, 전남편 가족들의 동의를 얻은

뒤 아버지와 혼인신고를 했다. 결혼하고도 어머니는 간혹 전 시어머니와 시동생들을 찾아가 만났다. 군인이었다는 큰삼촌은 무뚝뚝해서 좀처럼 입을 여는 법이 없었지만 지갑은 잘도 열었다. 만날 때마다 어머니 용돈은 물론 내 용돈까지 두둑이 챙겨줘서 어떤 관계인지도 모른 채 나는 삼촌을 잘 따랐다.

 

아버지가 감옥에서 나오고 나서야 나는 어머니와 삼촌의 관계를 알게 되었다. 고등학교 삼학년 겨울방학이었을 것이다. 부모님이 도란도란 빨치산 시절의 추억을 안줏거리 삼아 말려놓은 밤 껍질을 벗기고 있는데 느닷없이 형광등이 나갔다. 어머니가 비추는 손전등 빛에 의지해 형광등을 갈아 끼우려던 아버지가 성질을 버럭 내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아버지는 손재주가 젬병이었다.

 

“아이고, 먼 놈의 남자가 형광등 한나도 못 갈아 낀대? 윤재는 그 옛날에도 혼자서 뚝딱 해치우등만, 멋 하나 윤재보담 낫을 것이 읎당게. 인물이 낫기를 해, 다정하기를 해. 아이, 니가 전등 쪼까 비춰봐라."

 

"윤재가 누군데?"

 

그때까지 나는 어머니가 재혼했다는 걸 알지 못했다. 형광등을 갈아 끼우려 의자에 올라간 어머니가 멈칫하는 게 느껴졌다. 밖에서 담배를 피우던 아버지가 어머니 대신 넙죽 말을 받았다.

 

“누구긴 누구겄냐! 늬 어매 첫서방이제. 서방 앞에서 첫서방 야그를 저래 당당허니 꺼내는 사람은 대한민국에 늬 어매 하나배끼 없을 것이다."

 

“아이고, 애기 앞에서 못허는 말이 읎소이, 애기가 고런 야그 알아서 멋이 좋다고……… 이러니 나가 만날 속이 터지제...

 

아버지는 윤재의 절친한 동무이자 동지였다. 죽은 친구의 아내와 결혼해 살았던 아버지의 심리를 죽은 친구와 늘 비교당하면서도 화 한번 내지 않았던 아버지의 심리를 나는 지금까지도 이해하지 못한다.

 

어머니의 옛 시동생 가족들이 아버지의 영정을 향해 절을 올리는 모습을 나는 어쩐지 처연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저들에게 내 아버지는 평생 함께할 줄 알았던 형수를 빼앗아간 사람만은 아닐 터였다. 형의 친구이고 동지였으며, 운명이 조금만 달랐다면 형과 친구의 처지가 뒤바뀔 수도 있었다. 어쩌면 이건 어디에나 있을 우리네 아픈 현대사의 비극적 한 장면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대단한 것도, 그렇다고 이상한 것도 아니다. 그저 현대사의 비극이 어떤 지점을 비틀어, 뒤엉킨 사람들의 인연이 총출동한 흔하디흔한 자리일 뿐이다.

 

어머니를 끌어안고 같이 흐느끼는 친구의 동생을, 아내의 전 시동생을, 영정 속 아버지가 사팔뜨기 눈으로 보는 듯 아닌 듯 지켜보고 있었다. 느그 윤재 동상 봉게 좋은가? 내 동상 볼 때게랑 영판 다른디? 아버지가 그렇게 묻고 있는 것만 같았다.

 

< 12 >

 

 

지팡이를 짚고 조문실로 들어온 노인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물끄러미 아버지 영정을 바라보던 그가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는데 눈을 쓱 비볐다. 이제는 밖으로 흘러넘칠 눈물조차 남아 있지 않을 성싶기도 했다.

 

노인이 품에서 뭔가를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오래된 사진이었다. 내게 보여주려 가져온 모양이었다.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사진을 집어 들었다. 누르스름하게 변색된 사진 속에서 세명의 남자가 팬티 차림으로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다. 섬진강 문척 나루터였다. 국민학교에 입학하기 직전까지 나도 그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아버지를 따라 읍내 나들이를 하곤 했었다. 아버지가 하동댁 궁둥이를 두드린 날도 나는 입이 댓발이나 나온 채 이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집에 돌아갔다.

 

아직 사회주의를 모를 때의 아버지, 열댓의 아버지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질곡의 인생을 알지 못한 채 해맑게 웃고 있었다. 사진 속 소년 둘은 입산해 빨치산이 되었고, 그중 한 사람은 산에서 목숨을 잃었다. 형들을 쫓아다니던 동생은 형을 잃고 남의 나라에서 제 다리도 잃었다. 사진과 오늘 사이에 놓인 시간이 무겁게 압축되어 가슴을 짓눌렀다.

 

"나는이, 상욱이 성만 보면 성이 나드라고. 감옥에 가고 고생은 했겄제만 그래도 지는 살아 있응게. 살아서 겔혼도 허고 새끼도 보고 희컨 머리도 남시로 늙어강게. 나는 우리 성 늙어가는 것도 못 봤는디, 지는 자꼬 내 앞에서 늙어가게...'

 

내 부모는 평등한 세상이 곧 다가오리라는 희망을 품고 산에서 기꺼이 죽은 사람들을 늘 부러워했다. 쭉정이들만 남아서 겨우겨우 살고 있노라, 한탄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누군가는 그런 삶이 부러워 미웁기도 했던 것이다. 어느 쪽이 나은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의 마음을 짐작은 할 것 같았다.

 

나는 전혀 알지 못했던 내 아버지의 청춘이 담긴 사진을 그에게 건넸다. 그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지팡이를 짚었다. 사진은 바닥에 남겨둔 채.

 

"자네 줄라고. 인자 우리 성 얼굴도 잊어불라고."

 

그는 아침이라도 먹고 가라는 내 말을 들은 척도 않고 아무 데나 짚었던 지팡이로 힘주어 조문실 바닥을 짚으며 걸음을 옮겼다. 출입문 앞에서 나를 돌아본 그가 무슨 말을 할 듯 달싹거리다 말했다.

 

"또 올라네."

 

여기 사람들은 자꾸만 또 온다고 한다. 한번만 와도 되는데, 한번으로는 끝내지지 않는 마음이겠지. 미움이든 우정이든 은혜든, 질기고 질긴 마음들이 얽히고설켜 끊어지지 않는 그 마음들이, 나는 무겁고 무섭고, 그리고 부러웠다.

 

술이 불콰한 상태로도 지팡이를 다리처럼 자유롭게 쓰는 그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미련 없이 잘 가라는 듯 오늘도 날은 화창했고, 도로변에는 핏빛 연산홍이 불타오르고 있었고, 허벅지 아래로 끊어진 그의 다리에서 새살이 돋아 쑥쑥 자라더니 어느 순간 그는 사진 속 그의 형보다 어린 소년이 되어 달음박질을 치기 시작했다.

 

 

< 13 >

 

 

그런 일이 있었다. 아주 오래 전에, 대학 시절부터 꼬박 팔년을 만난 선배였다. 판사가 꿈이었던 그를 아버지는 아주 마음에 들어했다. 그는 방학 때마다 제 집인 듯 반내골 우리 집을 드나들었다. 숫제 법전 보따리를 싸들고 내려와 방학 내내 묵고 가기도 했다. 반내골 친척들은 그를 정서방이라 부를 정도였다.

 

대학을 졸업하던 날, 아버지가 나를 앉혀놓고 말했다. 큰일 헐 놈잉게 니가 놔줘라. 큰일 헐 놈이 뽈갱이 사위가 되면 그날부텀 팔다리가 묶여불 것이다. 지금꺼정은 애기들 연애게 암말 안 했다만 우리가 넘의 인생을 망쳐서야 쓰겄냐. 자신을 빨갱이라 일컬으며 빨갱이 딸인 내가 사랑하는 남자를 큰일 하도록 놓아주라는 것이었다. 결혼 생각 같은 건 꿈에도 하지 않을 때였다. 그 무렵엔 부모와도 잘 지내고 있었는데 그 말에 다시 어깃장이 났다. 그래서 기를 쓰고 그를 만났다. 사귄 지 다섯해가 지났을 즈음엔 아버지에 대한 오기로 그와의 관계를 지속하고 있는건 아닌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는 나 때문에 판사 임용을 포기하고 변호사가 되었다. 그리고 사귄 지 팔년 만에 청혼했다. 처음으로 그의 집을 방문한 날, 그는 조심스럽게 부모님 이야기는 꺼내지 않는 게 좋겠다고 당부했다. 내가 왜 이런 결혼을 해야 하는지 의구심이 들었지만 약속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일사천리로 결혼이 진행되었다. 상견례를 치르고 식장을 잡고 청첩장을 돌렸다. 사달이 난 건 결혼식 전날이었다. 그의 집에서 자고 같이 식장으로 이동하기로 한 친구가 술김에 부모님 앞에서 이실직고를 하고 만 것이다.

 

그 친구가 어찌나 놀랐는지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전화를 했다. 밤 열두시였다. 부모냐 여자냐, 결정을 하라며 아버지가 식칼을 당신 목에 겨누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말없이 울고만 있다고. 신파도 그런 신파가 없었다. 결정은 내가 했다. 자정 넘은 시간에 전화로 이유불문, 결혼 취소를 통보하고 다시는 그를 만나지 않았다. 억울하지는 않았고 차라리 홀가분했다. 아버지가 옳았다. 그가 감당을 하든 안 하든 평생 그의 발목을 잡았다는 죄책감을 안은 채 살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살 필요도 없었다. 나는 젊었고, 시절은 좋아졌으며, 나에게는 달리 살 여러 길이 놓여 있었다. 가뿐하게 까맣게 잊었는데, 어찌됐든 빨치산의 딸로 산다는 것은 이렇게나 파란만장했다.

 

위약금으로 약간의 손해를 보긴 했지만 논 몇 마지기 판 돈은 고스란히 남아 내 전셋값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빨치산 부모 덕을 본 적도 있다. 그 종잣돈이 없었다면 서울에서 방 한칸 마련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 14 >

 

 

나는 줄 지어 선 차를 지나쳐 산길로 들어섰다. 초입인데도 숲이 울창했다. 우리 일행들 외에는 오가는 사람도차도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곳에 묻히고 싶을까? 아무도 없이 적적하게 깊은 산속에 홀로? 아버지는 백운산에 가장 오래 있긴 했지만 이산 저산 떠돌며 48년 겨울부터 52년 봄까지 빨치산으로 살았다. 아버지의 평생을 지배했지만 아버지가 빨치산이었던 건 고작 사년뿐이었다. 고작 사년이 아버지의 평생을 옭죈 건 아버지의 신념이 대단해서라기보다 남한이 사회주의를 금기하고 한번 사회주의자였던 사람은 다시는 세상으로 복귀할 수 없도록 막았기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그래서 아버지는 고작 사년의 세월에 박제된 채 살았던 것이다. 아버지는 더 오랜 세월을 구례에서 구례 사람으로, 구례 사람의 이웃으로 살았다. 친인척이 구례에 있고, 칠십년지기 친구들이 구례에 있다. 아버지의 뿌리는 산이 아니다. 아버지의 신념은 그 뿌리에서 뻗이나간 기둥이었을 뿐이다. 기둥이 잘려도 나무는 산다. 다른 가지가 뻗어 나와 새순이 돋고 새 기둥이 된다.

 

 

< 15 >

 

 

아버지 유골을 손에 쥔 채 나는 울었다. 아버지가 만들어준 이상한 인연 둘이 말없이 내 곁을 지켰다. 그들의 그림자가 점점 길어져 나를 감쌌다. 오래 손에 쥐고 있었던 탓인지 유골이 차츰 따스해졌다. 그게 나의 아버지, 빨치산이 아닌, 빨갱이도 아닌, 나의 아버지.

 

 

< 16 >

작가의 말

 

 

유년기의 나는 매일같이 동네 초입 팽나무 아래 앉아읍내로 뻗어 있는 신작로를 보았다. 그 너머의 세상을 상상하며 성장기의 나는 먼 데서 기적이 울릴 때마다 그 기차가 가닿을 서울을 꿈꾸었다. 지금보다 더 멀리 더 높이. 그렇게 동동거리며 조바심치며 살다가 알게 되었다. 빨치산의 딸이므로 더 멀리 더 높이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나의 비극은 내 부모가 빨치산이라서 시작된 게 아니었다. 더 멀리 더 높이 나아가고 싶다는 욕망 자체가 내 비극의 출발이었다.

 

쉰 넘어서야 깨닫고 있다. 더 멀리 더 높이 나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행복도 아름다움도 거기 있지 않다는것을 성장하고자 하는 욕망이 오히려 성장을 막았다는 것을.

 

고향에 돌아오니 서울서 보이지 않던 아름다움 천지다. 섬진강변의 벚꽃길, 반야봉의 낙조, 노고단의 운해만 아름다운 게 아니다. 벚꽃은 정 없어 싫고 산수유는 속 읎어 싫다는 동네 할매, 필요 없다고 해도 밥을 묵어야 힘이 난다며 기어이 가져다주는 식당 주인, 심지어는 먹도 못할 억센 나물을 삶으면 부드럽다고 뻥쳐서 파는 장터 할매. 주방에서 가장 먼 안쪽 테이블에 앉았더니 사람도 없는데 가차이 앉으라고 호통치는 식당 아줌마(알고 보니 그이는 관절염이 심했다)까지. 이곳엔 사람 냄새 넘치는 사람이 그득하다. 오죽하면 할매가 뻥을 치겠는가.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이다. 급하면 뻥도 치고 호통도 치는 것이 사람 아닌가.

 

사램이 오죽하면 글겄냐. 아버지 십팔번이었다. 그 말 받아들이고 보니 세상이 이리 아름답다. 진작 아버지 말들을 걸 그랬다.

 

아버지. 아버지 딸, 참 오래도 잘못 살았습니다. 그래도 뭐, 환갑 전에 알기는 했으니 쭉 모르는 것보다는 낫겠지요? 딸을 대장부의 몸으로 낳아주신 것도, 하의 상의 인물로 낳아주신 것도 다 이해할 터이니 그간의 오만을, 무례를, 어리석음을 너그러이 용서하시길……… 감사합니다. 아버지. 애기도 하는 이 쉬운 말을 환갑 목전에 두고 아버지 가고 난 이제야 합니다. 어쩌겠어요? 그게 아버지 딸인걸. 이 못난 딸이 이 책을 아버지께 바칩니다.

 

정지아

 

사진출처 : 한국생활체육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