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詩, 글

김주혜(박소현 옮김) /‘작은 땅의 야수들’중에서

송담(松潭) 2022. 12. 8. 19:21

김주혜(박소현 옮김) /‘작은 땅의 야수들’중에서

 

 

 

< 1 >

 

남자의 눈이 번쩍 떠졌다. 정말로 어떤 소리가 귀에 들려오고 있었다. 벼랑 가장자리에서 낮게 그렁대는 숨소리였다. 짐승이 호흡할 때마다 싸늘하게 얼어붙은 수증기가 향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그는 활시위를 팽팽히 당겼다. 그러나 사냥감을 포획하게 되더라도, 자신이 산 아래까지 무사히 내려가진 못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저 표범의 먹이가 되어 죽고 싶지는 않을 뿐이었다.

 

표범이 절벽 끝에 튀어나온 바위로 훌쩍 올라왔다. 짙은 안개 속에서 윤곽으로만 어른거리는 그 짐승의 존재를 그는 눈으로 보기보다 온몸의 감각으로 느꼈다. 마침내 짐승이 몇 자도 되지 않는 거리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남자는 숨이 턱 막혀 활을 아래로 내렸다.

 

그것은 표범이 아니라, 아직 다 자라지 않은 호랑이였다. 콧등에서 꼬리 끝까지, 남자가 양팔을 한껏 펼친 길이만 했다. 다 자란 표범 정도의 크기. 새끼 호랑이라기엔 너무 크지만, 아직은 어려서 혼자서 사냥하지는 못하는 놈이다. 하얀 털로 폭신하게 뒤덮인 둥근 귀를 움찔거리며, 어린 호랑이는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사냥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차분한 노란색 홍채는 겁을 먹지도 화가나지도 않은 기색이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사람이라는 존재를 본적이 없는 게 분명했고, 그래서 이 이상한 형상의 등장에 약간 어리둥절해하는 것 같았다. 사냥꾼은 활을 더 단단히 움켜쥐었다. 사정거리 안에 있는 호랑이와 마주친 건 지금이 처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본인들이 한국의 모든 언덕과 골짜기를 샅샅이 뒤져가며 닥치는 대로 포획한 탓에, 그 많던 호랑이들은 가장 깊숙하고 험한 산속으로 떠밀리듯 숨어들었다. 호랑이의 값어치는 훌쩍 뛰어올라 가죽, 뼈, 심지어 고기까지 인기 상품이 되었다. 본래 고기를 취하기 위해 포획되는 짐승이 아니건만, 이제 한국의 호랑이 고기는 부유한 일본인들의 식탁에 오르는 고급 진미가 되어 있었다. 일본인들은 호랑이의 살점을 먹으면 그 용맹함과 정력까지 섭취할 수 있다고 믿었고, 온갖 견장과 훈장을 단 관료들과 유럽식 드레스를 입은 상류층 여성들이 모여 앉아 호랑이의 각종 부위로 구성된 특별 코스 요리를 맛보는 연회를 마련하곤 했다.

 

이 호랑이를 죽이면, 최소 3년은 넉넉히 먹을 음식을 마련할 수 있을 터였다. 어쩌면 땅 한 뙈기까지 살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의 아이들은 안전하게 지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거친 바람이 그의 귓가에서 아우성을 쳤고, 남자는 활과 화살을 아래로 내렸다. 호랑이가 널 먼저 죽이려 들지 않는 한, 절대로 호랑이를 죽이지 말아라.

 

그가 몸을 일으켜 세우자 어린 호랑이는 마을의 강아지처럼 겁먹은 듯 뒷걸음질 쳤다. 짐승이 안개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기도 전에, 사냥꾼 역시 뒤돌아서서 점점 굵어지는 눈발을 뚫고 발걸음을 뗐다. 고작 한두 시간 만에 눈은 그의 종아리 반절까지 푹푹 잠길 만큼 쌓여 있었다. 지금껏 남자의 움직임을 한결 가볍게 해주었던 공복감이 이제는 발 한 걸음을 뗄 때마다 그를 땅바닥으로 무겁게 끌어내리는 듯했다. 잿빛 어스름이 폭설에 몸을 떠는 나무들 위로 천천히 내려앉고 있었다. 남자는 산신령을 향해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당신의 영물을 놓아주었으니 저도 무사히 내려갈 수 있게 해주십시오.

 

눈보라는 저물녘에나 겨우 잦아들었다. 산 중턱에 이르렀을 때 남자의 다리가 꺾였다. 그는 한 마리 짐승처럼 네발로 선 채 잠시 버텼지만, 곧 팔꿈치마저 힘이 완전히 빠져버리자 달빛 아래 하얗게 빛나는 고운 눈가루 속으로 파묻히듯 쓰러졌다. 그는 생각했다. 이왕 죽을 거라면 하늘을 바라보며 죽어야지. 남자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 등을 대고 누웠다. 달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이 자연 속에서 가장 자비에 가까운 무언가가 있다면 바로 그것이었다.

 

< 2 >

 

다리 밑에 살면서 오랫동안 나는 술 한 방울은커녕 내 배를 채울 요깃거리조차 충분히 누려보지 못했다. 우리의 목표는 최소한 이틀에 끼니 한 번을 챙길 수 있을 만큼 꾸준히 버티는 것이었다. 우리는 눈을 뜨고 있는 매 순간 배가 고팠고 심지어 꿈에서조차 먹는 생각뿐이었다. 무리의 대장인 나는 종종 그 어느 일원보다도 가장 심한 굶주림을 겪는 사람이었는데, 우리 중 체력이나 건강 상태가 제일 심각하게 떨어진 아이가 누구인지 매번 눈여겨보다가 그 아이에게 내 몫을 대신 주곤 했기 때문이다. 눈앞에 놓여 있는 만두를 다른 아이에게 넘겨줄 때면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쭈르르 흐를만큼 나는 배가 고팠다. 딱히 누군가의 충성심을 사려고 했던 행동은 아니지만, 결국 내 곁에 모인 아이들은 제 친형제보다도 나를 더 따르고 의지하게 되었다. 한강 다리 밑에 사는 남정호가 종로 거지 아이들 전부를 수하에 거느린 왕초인데, 그 무리에 들어가면 최소한 굶지는 않는다는 소문이 온 동네에 퍼졌다. 내가 열여섯 살이 되었을 무렵엔 내 명령이라면 무엇이든 하겠다며 따라다니는 아이들이 마흔 명쯤 되었다.

 

< 3 >

 

이토의 아버지가 조선에서 얻은 방대한 토지와 재산을 유산으로 남기고 고인이 된 이래, 그는 열정적으로 조선 각지의 골동품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지금, 교활하고 능청스러운 눈빛을 한 그의 손에 조심스럽게 들려 나온 것은 11세기 무렵의 고려청자 한 점이었다. 그의 표정에는 이미 정답을 알고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지을 법한 교활함이 어려 있었다. 그 청초한 도자기 항아리는 아름다운 여자의 어깨선을 연상시킬 만큼 섬세하고 우아한 실루엣을 지니고 있었고, 고도의 정교한 기술이 농축된 유약은 아름다운 우윳빛 연녹색을 띠고 있었다. 실제 자연물에서는 찾을 수 없는 색깔이지만, 그 무엇보다 싱그럽고 은은한 자연을 바로 떠올리게 했다.

 

 

< 4 >

 

미국에 가는 대신, 사회주의자 운동가 무리에 끼어 러시아에 면담을 청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향하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몸을 실었다.

 

이미 지난 15년간 타국을 오가면서 보내긴 했어도, 명보는 여행이 몸에 맞는 체질이 아니었다. 하지만 마음속에 시를 품고 있는 모든 사람처럼, 그 역시 광활하게 펼쳐진 몽골의 스텝 지대와 그 광야 속에서 띄엄띄엄 서리 내린 풀을 뜯는 덥수룩한 조랑말들이 만들어내는 풍광에 깊이 매혹되었다. 이름 모를 보랏빛과 노란빛 야생화가 황무지 바람에 흩날리며 그 작고 수수한 얼굴들을 탁 트인 하늘을 향해 들어 올릴 때면 그보다 더 영광스러운 장관이 따로 없었다. 바이칼호 기슭을 따라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철로 위를 달리는 내내,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이 태곳적이고 짙푸른 호수의 물결이 끊임없이 절벽을 때리고 산들이 분홍빛 일출과 함께 솟아났다가 저물녘에는 어둠 속으로 안녕을 고하는 모습까지 감상하고 나서야 명보는 창에서 눈을 뗐다. 그러고도 유리창에 바싹 붙은 채로 머리를 부딪쳐 가며 깜박깜박 졸곤 했다. 명보의 흥분을 알아차린 사회주의자 중 하나가 그에게 말했다. "러시아는 정말 위대한 나라요. 그 웅장한 중국보다도 아름답고, 그 아름다운 한국보다도 웅장하오. 만일 우리가 바라보는 이 풍경이 그들의 정신을 보여주는 지표라면, 그들은 분명히 우리를 도와줄 것이오."

 

무엇보다 러시아는 끝없이 펼쳐진 나라였다. 기차는 열흘 밤낮으로 쉬지 않고 움직였다. 고된 투옥 생활로 여전히 쇠약한 상태였던 명보는 긴 여정 내내 자신이 음식을 거의 소화하지 못하고, 또 지나치게 피로할 때면 그대로 기절해 버린다는 사실을 다른 일행에게 들키지 않게 꼭꼭 숨겼다. 그러나 마침내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레닌과의 면담을 통해 충분한 보상을 받은 기분이었다. 레닌은 그들을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을 뿐 아니라 60만 루블의 후한 자금지원을 약속했다.

 

반면 정확히 같은 시기에 워싱턴으로 향했던 대표단은 완전히 다른 대우를 받았다. 하딩은 일본인들과 함께 아시아와 태평양을 나눠먹느라 바빴다. 미국은 필리핀을 자국 식민지로 삼았고, 그 대가로 일본이 중국으로부터 몽골을 빼앗고 러시아로부터 시베리아를 빼앗도록 합의해 주었다. 워싱턴의 정치인들은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일부 반란군을 부추겨 새로운 동맹국을 화나게 만들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한국 대표단은 가장 하급 행정관과의 의례적인 면담조차 성사시키지 못한 채 아무런 소득 없이 상해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명보는 러시아만이 그의 세계에 존재하는 두 가지 악을 없앨 유일한 해결책이라 확신하게 되었다. 한국은 러시아의 도움으로 독립국이 될 것이며, 공산주의를 바탕으로 모두에게 공정하고 모두가 번영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갈 것이었다. 현재 민중의 고통을 초래하는 두 가지 주요 원인, 즉 일제 식민 정부와 탐욕스러운 지주계급을 모두 뿌리 뽑을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그리고 미국에 관해서 말하자면, 물론 그 국민 일부는 선량하고 명예로운 사람들임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세계평화와 정의라는 명분을 앞세워 떠들어 대기만 할 뿐, 미국 역시 탐욕스러운 식민 열강이라는 점에서는 일본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 5 >

 

블라디보스토크를 본거지로 삼은 독립군은 10년간 연전연승을 거두었고, 때로는 붉은 군대와 연합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레닌을 지지하는 급진파 볼셰비키가 이들 독립군의 무장해제와 해산을 요구하며 소련군에 투항하고 합류하기를 강제했으니, 이를 거절한 사람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만주의 독립군 역시 그보다 나을 게 없는 상황이었다. 만주 지역에 거주하던 수만 명의 한국인이 군인과 민간인 구분 없이 일본군에 무차별적으로 학살당한 이후 만주 독립군 세력은 크게 약화하였다. 상해에 남아 있던 이들만이 무력 저항의 유일한 구심점이 되었으나, 중국의 심장부와도 같은 곳에서 일정 규모 이상의 외부 군대를 양성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명보는 일본이 진을 치고 가장 유용하게 사용하는 공간들을 개별적으로 공격하는 것만이 단 하나의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믿게 되었다. 한국, 일본, 그리고 중국 곳곳에 자리 잡은 일본 경찰서와 은행, 관공서, 무기고 같은 곳들이 그 대상이었다. 이렇듯 세간의 이목을 끄는 주요 목표물들을 치기 위해, 명보는 특출 난 실력을 지닌 전문 저격수 집단을 양성하고자 노력하는 중이었다.

 

 

< 6 >

 

한철은 공상에 빠져 있던 자신을 자각하고 이를 떨쳐내듯 거세게 머리를 흔들었다. 오후 5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이제 집에 들러 점심 겸 저녁을 먹어야 했다. 초가집 앞마당에 인력거를 세우자, 방에서 첫째 누이와 함께 삯바느질을 하던 어머니가 부리나케 밖으로 뛰어나왔다. 둘째 누이는 빨래하러 개울가에 나간 모양이었다. 세 여자는 동네 일꾼들의 옷을 세탁하고 수선하며 푼돈을 벌고 있었는데, 다 모아도 한철이 인력거를 몰아서 벌어 오는 금액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못했다.

 

“뭐 하고 있어, 얼른 오라버니 밥상 차려오지 않고?" 한철의 어머니가 아직 열린 방문 안에 오도카니 앉아 있던 누이를 향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소녀는 이미 제 어머니에게 학대받는 일상이 익숙했지만, 지금은 유독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아침 식사를 끝으로 보리가 한 톨도 남지 않았던 것이다. 집안의 장녀로서 먹을거리라곤 아예 없다시피 한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음식을 만들어내라는 압박 속에 지내왔지만, 그로서도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기적을 행할 수는 없었다. 더 따가운 질책이 동생에게 쏟아지기 전에 한철이 끼어들었다.

 

"어머니, 괜찮아요. 전 벌써 대폿집에서 국밥 한 그릇 먹고 오는 길인걸요. 여기, 이거 저녁값에 보태세요." 그는 이렇게 말하며 어머니에게 2원을 건네주었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어머니의 얼굴에 미소가 활짝 번졌다. "아이구, 내 새끼. 우리 장남이 최고다.”

 

어머니가 집에 들어온 김에 잠시 쉬었다 가라고 붙잡았지만, 한철은 고개를 저은 뒤 다시 인력거를 끌고 나갔다. 어머니는 누이들에겐 결코 내보인 적 없는 끈끈한 애정을 한철에게만 듬뿍 쏟았다. 한철이 열네 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어머니는 어린 가장으로서 한철을 존중했고 심지어 자신이 낳은 아들인 그를 두려워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뼈대 있는 안동 김씨 가문의 방계 친족인가 뭔가 하는 한철의 혈통에 대한 어머니의 진득한 집착 때문에, 한철은 어머니 곁에 있으면 늘 뭔가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네 아버지만 여태 살아 계셨어도 시사촌댁에서 우리 식구들을 모셔 갔을 텐데……….” “한철이 너는 반드시 우리 가문의 이름을 되살리고, 우리 집안 명예에 걸맞게 살아야 한다……….” 어머니는 늘상 이런 말을 후럼구처럼 외워대곤 했다. 아직도 그의 종갓집 문중은 안동 지역의 부유한 땅에서 대대로 권세와 번창을 누리고 있었지만, 정작 한철의 가족은 할아버지 시절부터 본가와 연락을 끊은 채 떨어져 살던 터였다. 가세가 기운 지금 그들의 형편은 이웃 소작농들보다 사정이 나을 게 없었으나, 가문의 명예를 잃지 않기 위한 형식적인 예의범절을 엄격히 지키며 양반으로서의 긍지를 간직하고 있었다. 가족들은 언젠가 한철이 대학에 진학하여 훌륭한 직업을 가지고 출세하게 되면 그들 모두를 현재의 비참함으로부터 구원해 줄 것이라 기대했다. 태양은 여전히 건물들 위에서 빛났지만, 화창한 봄 저녁이 그렇듯 하루 내내 쌓여 있던 온기가 땅속에서부터 이제 올라오는 시원한 기운으로 서서히 대체되는 중이었다.

 

한철의 다음 손님은 둥근 안경을 쓰고 말쑥하니 옷을 잘 차려입은 신사로, 을지로에 새로 생긴 야구장까지 가는 내내 조용히 신문만 보고 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한 한철이 인력거를 세우자 남자는 양손으로 펼쳐 들고 있던 신문 너머 나른하게 시선을 던지고는 인력거에서 훌쩍 뛰어내려 양복의 주머니들을 뒤지다가 말했다. “아, 마침 딱 10전밖에 없는 걸 깜빡했네. 이거 미안하게 됐어, 젊은 친구!" 한철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신사는 10전짜리 지폐를 얼른 건네고는 냅다 인파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한철은 역겨움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손안의 지폐를 꽉 구겨 쥐었다가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인간들이란!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은 식으로 이리저리 다니는 동안 몇 시간이 흘러갔다. 밤 10시 30분이 되어 옥희가 극장 옆문으로 빠져나왔을 때, 한철은 언제나처럼 인력거를 세운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옥희의 모습이 제 눈 안에 담기자마자 한철의 기분은 즉시 밝아졌다. 그의 새 연극이 올라간 첫 주였다. 옥희는 한때 신분 높은 집안의 규수였지만 편찮으신 아버지와 중병을 앓는 오빠의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기생이 된 주인공을 맡았다. 오늘 밤은 하늘색 치마 정장에 높은 구두를 신은 모습이었다. 정장과 비슷한 색조의 연푸른 실크새틴 리본으로 장식한, 중간 정도 크기의 챙이 달린 남색 모자가 그의 얼굴을 깊숙이 덮고 있었다. 두 손으로 핸드백 끈을 꼭 쥔 채 한철의 모습을 찾는 듯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는 옥희의 모습은 이제 막 낯선 땅의 항구에 도착한 그의 연극 속 주인공의 모습과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옥희의 발치에 물웅덩이처럼 고인 가로등의 찬란한 빛살이 황금빛 광채를 되쏘아 그를 따스한 빛 속에 일렁이게 했다. 한철은 그 사랑스러움에 경외감을 느낀 나머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옥희가 자신에게 발휘하는 영향력을 애써 막아보기라도 하려는 듯, 그는 짐짓 천천히 인력거를 끌어 옥희에게 다가갔다.

 

옥희를 도와 인력거에 태운 뒤 기계적으로 그의 집을 향해 출발할 때까지, 옥희는 내내 말이 없었다. 그는 한철과는 무관한 다른 생각에 깊이 잠겨 있는 듯했고, 묵묵히 달리면서도 한철은 그 점이 내심 신경 쓰였다. 이처럼 옥희가 수심에 가득 찬 기색을 보이며 슬픈 분위기 속에 조용히 앉아 있는 밤은 드문 편이었는데, 그럴 때마다 한철은 무엇 때문에 저토록 슬퍼하는 건지,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해야 그의 기분이 더 나아질 수 있을지 간절한 마음으로 생각하는 스스로를 발견하곤 했다. 지난날 옥희는 귀갓길마다 연화와 함께 쾌활하고 시끌벅적한 사담을 나누곤 했다. 자기들이 쏟아내는 이야기가 인력거꾼의 귀에 그대로 들어가리라는 걸 잘 알면서도, 그들은 자신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돈을 뿌려대는 부자 연인들에 대해 하나도 빠짐없이 시시콜콜하게 수다를 떨고 깔깔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연화가 다른 극장으로 소속사를 옮긴 이후 옥희는 홀로 인력거를 타고 가는 동안 굳게 다문 입을 여는 적이 거의 없었고, 그저 차분히 가라앉은 모습으로 나른한 재즈 음악에 흠뻑 젖은 가게들이나 서늘하고 하얀 달빛 아래 걷는 사람들을 바라보곤 했다.

 

대로에 들어서자, 옥희가 긴 침묵을 깨고 말을 건넸다. “한철 씨, 우리가 알고 지낸 지도 꽤 오래됐는데, 한철 씨가 본인 얘기를 하는 건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네." 한철은 문득 인력거를 멈추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그 마음을 애써 누르고 계속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러나 한철의 심장 고동이 점점 빨라지는 것은 그의 달리기와는 아무 관련이 없었다.

 

"제 사는 얘기 중에 아씨께 흥미로울 만한 게 있을지 모르겠네요." 한철이 돌아보지 않은 채 굵직한 청동빛 목소리로 말했다.

 

"어떤 거라도 좋아. 뭐라도 듣고 싶은걸." 지금 옥희의 눈가에는 웃음이 가득 맺혀 있으리라고 한철은 상상했다. "예를 들자면, 한철씨는 몇 살인지." 한철이 열아홉 살이라고 대답하자 옥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보다 어리네. 난 벌써 스무 살이야. 아, 야간 학교는 아직 잘 다니고 있나?" “네, 아씨." “한철 씨는 똑똑한 사람인 게 분명해. 나는 눈빛만 봐도 상대가 얼마나 총기 있는 사람인지 대번에 알거든."

 

옥희가 자신을 똑똑한 남자라 생각한다는 것, 그리고 그가 자신의 눈빛을 자세히 살펴봤다는 것을 한꺼번에 받아들이느라 한철의 머리는 터질 것 같았다. 옥희가 자신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본 적이 있었단 말인가?

 

“그냥 다른 학우들을 겨우 따라가는 정도예요. 최선을 다하고 있지요.” 한철은 겸손하게 말했지만, 사실 야학에서 그를 가르치는 교사도 - 히로시마에서 공부하고 왔다는 기독교인 선생이었는데-한철의 명민함과 놀라우리만치 철두철미한 기억력을 여러 번이나 칭찬한 터였다.

 

"어쩌면 겸손하기까지. 만약 한철 씨가 야학이 아니라 전일제 학교에 다녔으면 이미 대학 입학시험을 통과하고도 남았을 거야."

 

한철 역시 스스로 수백 번도 넘게 했던 생각이었다. 종일 인력거를 끌어도, 식구들 입에 간신히 풀칠할 생활비를 대고 나면 야학 등록금조차 거의 남지 않았다. 대학 학비는 고사하고, 과연 언제쯤 입학시험을 칠 수 있을지조차 모를 일이었다. 스물다섯? 아니, 스물여섯 살이 될 즈음엔 대학생이 될 수 있을까? 그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비참한 사정에 대해 털어놓는 대신, 한철은 화제를 돌리려 했다.

 

“옥희 아씨도 영리하신데요." 그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기 전까지는 한철 자신도 스스로 무슨 말을 하는지 의식하지 못했는데, 막상 그렇게 말을 하고 보니 그제야 자신이 늘 그런 생각을 해왔다는 깨달음이 들었다. "내가?" 깜짝 놀란 듯한 목소리였다. "왜 그런 생각을 했어?"

 

"저도 상대의 눈빛만 보면 알 수 있거든요." 한철은 짐짓 농담처럼 대답한 뒤, 문득 용기를 내어 오른쪽 어깨 너머로 고개를 돌리고는 옥희에게 힐끗 시선을 던졌다. 남색 모자 아래, 잔뜩 커다래진 눈으로 그를 빤히 쳐다보는 옥희의 장밋빛 입술에 반달 같은 미소가 어려 있었다.

 

"나더러 영리하다고 말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한철이 다시 길 쪽으로 몸을 돌리는 사이 옥희가 멋쩍게 중얼거렸다.

 

“옥희 아씨는 항상 이치에 맞는 말씀만 하시잖아요. 연화 아씨랑이야기하실 때도요."

 

“아, 그럼 한철 씨는 우리가 하는 얘길 엿듣고 있었던 거야?" 옥희는 짐짓 화가 난 척 장난스럽게 되받았다. 옥희의 집에 도착할 때까지 그들은 조심스러우면서도 설레는 대화를 이어갔다. 집 앞에 이르자 한철은 평소처럼 옥희를 도와 인력거에서 내려주었는데, 이번에는 옥희의 손을 잡아 부축하는 내내 사무적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대신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어느 쪽이 더 오래 손을 붙잡고 있었는지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둘 다 서로의 손을 놓지 않으려던 순간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서로에게서 떨어지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해준 그 짧은 시간은 터무니없이, 비이성적이리만치 달콤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의 손이 마지못해 떨어졌을 때, 각자는 이미 서로의 손길을 간절히 그리워하고 있었다. 옥희는 요금을 내느라 바삐 지갑을 뒤지며 혼란스러운 마음을 숨기려 했다.

 

“이 정도면 남는 돈으로 책 몇 권 정도는 살 수 있을 거야." 그는 이렇게 말하며 접힌 지폐 몇 장을 한철의 손안에 밀어 넣었다.

 

“아씨한테 돈 받고 싶지 않아요." 한철은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대담하게 옥희의 눈을 마주한 채였다. 옥희는 문득 눈부신 흰 태양을 마주하기라도 한 양 시선을 돌려 한철의 오른쪽 귀 위쪽을 바라보았다. 평소 자신이 원한다면 어떤 남자라도 곧장 가질 수 있을 것처럼 굴던 이 사랑스러운 여자에게, 이런 행동은 예상치 못한 수줍음의 표현이었다. 그런 그를 향한 애정이 한없이 솟아나는 것을 한 철은 거부할 수 없었다.

 

“나 태워주고서 이 돈 안 받겠다면, 다음부터는 나 한철 씨 못 불러. 그러니 그냥 받아." 옥희는 한철의 손바닥에 돈을 더 꾹 눌러댔고, 이번에는 한철의 완강한 태도도 누그러졌다. 옥희의 맵시 있는 몸이 대문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뒤 돌아 나온 그는 갑자기 이 세상의 모든 것이 - 자동차들과 자전거들, 술주정뱅이들의 노랫소리, 신선한 밤공기, 어두운 도로 위에 액체처럼 홀러내린 불빛들까지 - 그 어느 때보다도 다채롭고 생생한 감각으로 자신을 가득 채우는 걸 느꼈다. 집에 점점 가까워지면서 대로변의 희미한 노랫소리는 잦아들었고, 이따금 천진하고 리듬감 있게 울려퍼지는 소쩍새 소리가 이 적막한 밤의 고독을 한층 순수하게 만들어주는 듯했다. 봄밤에 들려오는 새의 울음소리가 이처럼 한철의 마음을 파고들며 통렬하게 다가왔던 적은 없었다. 삶의 모든 것이 그 소리에 담겨 있는 것만 같았다.

 

 

 

< 7 >

 

"언니!" 대문까지 뛰어나가 은실을 처음으로 끌어안은 사람은 단이였다. 그들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채 오랫동안 그렇게 서로를 안고 있었다. 지난 세월 동안 서로가 얼마나 사뿐하고 연약해졌는지, 햇볕 아래 오래 놓아둔 책등의 색이 바래듯 중년의 나이를 넘어선 여자의 몸이 얼마나 흐릿하고 채도가 낮아지는지를 두 사람은 실감했다. 원래도 늘 나긋하고 날씬했던 은실은 이제 아예 작게 쪼그라든 것 같았다. 은실은 최신 유행을 따르는 요즘 여자들과 달리 염색을 하지 않은 데다, 군데군데 은빛으로 센 머리카락은 고집스럽게 가운데 가르마를 타고 옛날식으로 쪽을 찐 탓에 단이 보다 열 살은 더 나이가 많아 보였다.

 

동생 쪽은 최신 유행에 맞추어 세련되게 꾸민 모습이었고, 세심한 습관과 관리를 통해 대부분의 중년 여자들에게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우아하고 단정한 분위기 역시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도 벌써 마흔아홉에 이르렀으니, 남자들의 노골적인 욕망이나 감탄 어린 시선을 받을 만한 시기는 한참 지난 뒤였다. 최근 단이는 밤마다 잠에서 깰 만큼 흠뻑 땀을 흘려 피부가 축축해졌고, 볼에는 새빨간 열감과 홍조가 돌기 시작한 참이었다. 게다가 체중을 유지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자꾸만 살이 쭉쭉 빠지는 느낌이었다. 두 여자는 각각 자신의 정다운 친구이자 사촌 자매의 변한 모습에 매우 놀랐지만 그 마음을 감춘 채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며 서로를 다독이려 노력했고, 그러다 문득 상대방이 이만큼 변했다면 자신도 마찬가지일 거라 깨달으며 슬픔에 잠겼다. 둘 다 각자 시대에 이름을 날리던 최고의 미인이 아니었던가.

 

 

< 8 >

 

갑판에서 명랑하게 손을 흔드는 연화의 모습이 점점 작아지는 것을 지켜보며, 옥희는 이제부터는 좋은 일들만 그의 앞길에 있으리라 믿었다. 오직 크나큰 평화만이 깃들기를. 이제 그가 막 건너가게 될 바다의 이름처럼 말이다. 부서지는 파도와 갈매기들의 울음 사이로 연화의 밝은 웃음소리가 아직도 희미하게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그들 사이에 일어났던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옥희는 어디서든 자신은 연화만의 윤곽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을 거라고, 그리고 그럴 때마다 자신의 마음은 '친구'라는 말로 가득 차리라고 느꼈다. 손만 흔들어대던 그들은, 둘 사이에 거대한 바다가 들어서기 시작하자 이제 머리 위로 팔을 높이 휘저었다. 네가 보여, 난 여전히 널 보고 있어. 옥희는 생각했다. 누군가를 정말로 사랑한다면, 작별을 고한다 해도 떠나는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 모두, 서로가 수평선 너머 점이 되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상대를 향해 멈추지 않고 손을 흔들었다.

 

 

< 9 >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비서실장이 고개를 내밀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여기 어떤 나이 드신 여자분이 약속도 없이 무작정 회장님을 뵙겠다고 왔는데요. 제가 그냥 돌려보내려 했지만 회장님과 오래전부터 아는 사이라고 하십니다."

 

한철은 서류철에서 시선을 들었다. 이따금씩 한철의 명성을 듣고 찾아오는 먼 친척들이나 식객들을 상대해 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이제는 그만큼 한가한 시간이 정말 없었다. 보나 마나 이번에도 의탁할 곳 없이 어려운 형편에 있다는 어느 친척 아주머니겠지. 용돈이나 약간 쥐여줘서 얼른 보내야 할 터였다. "들여보내." 한철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잠시 후 문이 다시 열렸을 때, 한철의 심장이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만큼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그 익숙한 모습을 그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뒤로 당겨서 쪽을 찍어 올린 머리카락은 연한 물빛이 감도는 회색으로 세었고, 좁은 이마에는 깊은 주름이 파여 있었다. 한때 그토록 탐스럽게 무르익은 과일처럼 도톰했던 그의 입술도 이제 얇고 쪼글쪼글했다. 그러나 그의 눈, 그 눈만큼은 여전히 특유의 밝고 영롱한 빛을 발했고, 유난히 꼿꼿한 자세를 유지한 몸의 윤곽 역시 한철이 기억하는 그대로 우아했다. 한철은 제대로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옥희 " 낮은 목소리로 그는 여인의 이름을 불렀다. 달리 어찌할 바를 몰라, 한철은 옥희를 향해 허둥지둥 걸어가 그의 두 손을 꼭 부여잡았다. 옥희 쪽에서도 한철의 달라진 모습을 천천히 살피고 있는 듯했다. 탄탄하던 두 팔과 어깨와 가슴은 살짝 굽었고, 복부에는 둥그렇고 부드러운 살집이 약간 붙었다. 2~3센티미터쯤 뒤로 물러난 머리 선에, 맑았던 피부는 나이 먹은 남자들이 대개 그렇듯 진흙 같은 구릿빛을 띠었다. 하지만 옥희가 가장 좋아했던 그 미소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렇게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해." 옥희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도대체 어떻게 날 찾았어?"

 

“전화번호부 보고." 옥희는 부끄러운 듯 한철의 손을 놓고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아니, 그런 뜻 아냐. 이렇게 찾아와 준 게 나는 정말 반가워서 어서 앉아봐.” 한철은 이렇게 말하고 비서실장에게 얼른 커피를 타 오라고 시켰다. 뜨거운 커피 두 잔과 크림 롤케이크 한 접시를 든 수행원이 다시 나타날 때까지, 두 사람은 최근 날씨와 올겨울의 혹독한 추위에 대해 조용조용 대화를 나누었다.

 

"그래, 그동안 어떻게 뭐 하고 지냈어?" 한철이 물었다. "나 나름대로 잘 지냈어. 해방 이후로는 쭉 고려예술학교에서 애들 가르치고 있고, 그럭저럭 괜찮아…. 전통 무용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매년 점점 줄어들긴 하지만, 그래도 직업이 있다는 게 감사하지."

"그러면 결혼은 어떻게……. 가정은 꾸렸고?" 옥희는 당혹감을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이는 그가 예상하지 못했던 굴욕이었고, 특히 더 아프게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아무와도 결혼한 적 없다는 건 별로 신경 쓰이지 않는데, 그래도 아이는 한둘 있었으면 좋았을 걸 싶어." 옥희는 단순하고 솔직하게 말했다.

 

한철은 그런 옥희가 안쓰럽고 마음이 아팠지만, 이 상황에서는 자신이 하는 어떤 말도 불쾌하게만 들릴 것 같아 그저 "그렇겠군"이라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한철 씨는? 신문과 잡지에 실리는 한철 씨 얘기 늘 읽었어. 텔레비전에도 나왔던데! 한철 씨는 모든 일이 잘 풀린 것 같더라."

“다른 사람들처럼 나도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결국엔 어찌어찌 운이 좋았지."

“애들은 몇이야?" “아들 셋에 딸 둘. 큰애는 대학교 3학년이고, 막내는 이제 열두 살이야."

 

옥희가 미소 지었다. "한철 씨 인생을 부러워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어? 내가 늘 그랬지, 한철 씨가 서울에서 가장 성공한 남자가될 거라고 말이야. 정말로, 한철 씨는 내 예언을 훨씬 뛰어넘었네.”

“옥희………….” 한철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내가 당신한테 신세 많이 졌지."

 

이제 옥희가 묵묵히 커피를 홀짝거릴 차례였다. 갑자기 왈칵 차오르는 눈물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그래, 맞아." 옥희가 커피 잔으로 얼굴을 가린 채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한철이 손을 뻗어 옥희의 팔을 살며시 매만졌다. 옥희는 커피 잔을 접시 위에 내려놓고 화장이 망가지지 않도록 손가락 끝으로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꾹꾹 찍어냈다.

 

"당신에게 상처 줘서 정말 미안해." 한철이 말했다.

 

"자기가 마지막으로 우리 집에 왔던 날 밤에....” 옥희의 목소리가 거칠게 떨려 나왔다. "바로 그날 단이 이모가 돌아가셨어. 난 죄책감으로 괴로워서 죽는 줄 알았지만, 그땐 전쟁 시절이었으니까 아마도 그냥 굶어 죽어가고 있었던 거겠지. 어떻게 그 고통을 버티고 살아남았는지 모르겠네.”

 

한철은 옥희의 팔에서 천천히 손을 떼고 말없이 자신의 무릎을 내려다보았다.

 

"정말로, 내가 많이 잘못했어."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옥희 씨에게 용서를 빌기 위해 뭐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좋겠어”

고개를 푹 숙인 채였지만, 옥희의 숨소리를 통해 한철은 그가 이제 소리 내어 울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한철 씨가 날 위해서 해줄 수 있는 일이 하나 있어." 격렬하게 숨을 삼키며 옥희가 간신히 말했다. “할게, 그게 뭐든지."

 

"남정호 씨라고, 혹시 기억나? 우리 어렸을 때 여러모로 나를 도와줬던 사람이야. 내가 뭐든 필요할 때면 항상 내 곁에 있어줬지." 한철도 그 남자를 기억했다. 키가 작고 말랐지만 강단이 있고, 약간 거칠고 무례한 구석이 있던 사람. 한번은 전쟁 중에 정호가 자신의위신과 주도권을 과시하기 위해 사람들 앞에서 한철에게 망신을 주어가며 일부러 공짜 음식을 주었던 일도 있었다. 하지만 한철은 정호를 미워하거나 경멸하지 않았다. 사실상 정호라는 사람에게 애초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적이 없었다.

 

“단이 이모가 돌아가시기 전, 아무도 먹을 것이라곤 구경도 못 할 만큼 혹독했던 그 시절에 정호는 종종 금보다 귀한 쌀자루를 들고 우리 집에 들르곤 했어.” 옥희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중엔 실종된 연화를 찾아 데려올 수 있도록 날 돕기도 했지. 그 친구가 지금 체포되어 있어."

 

"무슨 혐의로?" 한철이 물었지만, 대답을 듣기도 전에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간첩, 공산주의 활동. 오래전에 공산당원이었던 적은 있지만, 나는 그 사람이 정말 북쪽에 소속된 간첩이라고는 생각 안 해. 그리고 이게 그가 실제로 뭘 믿거나 어떤 행동을 하는지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거, 한철 씨도 알겠지………. 그냥 정치판에서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한 핑계일 뿐이잖아. 나는 정호가 결백하다는 걸 알아. 그렇게 선하고 정직한 남자는 본 적이 없어, 한철 씨는 정계에 연줄이 많잖아. 그 사람은 죄가 없다고 딱 한마디만 말을 보태줄 수 없을까?"

 

"지금 옥희가 부탁하는 거… 사실 몹시 어려운 일이야. 설령 내가 그 사람을 대변해서 말한대도 그게 효과가 있으리란 보장도 없고, 박 대통령한테는 그 나름의 투철한 방식이 있어서, 그건 옥희 씨도 이해하지?" “쉽지 않으리라는 거 알아. 내가 부탁하는 건 그저 시도라도 해봐달라는 거야." "알겠어. 말 한번 넣어보기로 내 약속하지."

 

옥희가 가보려고 일어나자 한철도 함께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떠나지 마. 내 곁에 있어줘.’ 한철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 말이 목구멍에 걸린 채 뭉쳐서 그의 목을 꽉 메웠다.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좋겠어." 대신 한철은 간신히 이렇게 말을 꺼냈다. "언젠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지. 다른 누구에게서도 당신에게 느꼈던 것과 같은 감정은 느끼지 못할 거라고. 지나보니 그 말이 맞았어."

 

"아, 한철 씨, 나도.” 옥희가 손을 뻗어 마지막으로 한철의 손을 꼭 쥐었다.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한철의 손목 위로 떨어져 촉촉한 무늬를 만들었다. "나도 그래, 천 번도 더 그래."

 

 

< 10 >

 

"있잖아, 정호 너는 내 인생에서 가장 진실한 친구이자 최고로 훌륭한 사람이야.” 옥희는 슬픔을 보이는 대신 기운을 북돋워 주는 어조로 명랑하게 말하려 애썼다. “널 위해서 윗선에 한마디 넣어달라고 한철 씨에게 부탁하러 다녀왔어. 그 사람은 현 정권이랑 군부 쪽에 엄청나게 연줄이 많거든. 나를 봐서라도 최선을 다해보겠다고 그이 입으로 직접 약속했어. 분명히 잘 풀려날 테니 아무 걱정 마."

 

"고마워. 네가 날 위해 애써줬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온 세상을 다 가진 것 같다. 단지 그게 정말 가능한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그는 말을 뚝 멈췄다. 옥희가 반박하려 했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젓고 말을 이었다. “옥희야, 나 어젯밤에 어느 사막을 건너는 꿈을 꿨어. 아주 곱고 부드러운 분홍색 모래와 푸른 하늘이 펼쳐진 아름다운 곳이었지. 그러다가 갑자기 모래가 비처럼 떨어지는 거야. 처음에는 발목 높이까지 차다가 어느새 무릎까지 올라오는데……….”

 

옥희는 어둡고 짙은, 여전히 사랑스러운 눈동자로 정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거기서 도망치려고 필사적으로 애를 쓰다가 꿈에서 깼어. 그러다 오늘 아침 뒤늦게 그런 생각이 들더라. 나는 모래시계 안에 갇혀있었던 거라고." 씩 웃는 정호의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 잡히고, 회색수염으로 희끗희끗한 두 뺨은 축 늘어졌다.

 

"정호야......." 옥희가 안타깝게 입을 열었지만,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확률상 나는 오래전에 이미 죽었어야 했을 사람이야. 그래서 앞으로 다가올 그 어떤 일도 두렵지 않아……. 다만 단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면, 인생을 살아오면서 어떤 일들은 조금 다르게 했다면 좋았을 걸 싶어. 삶의 끝이 가까워지니 이제야 모든 것들이 선명하게 보인다." 정호는 자신의 두 손으로 옥희의 작은 손을 감쌌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우리 아버지와 호랑이 얘기 해준 적 없지?" 옥희는 고개를 가로 지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내게 해주셨던 아주 놀라운 이야기인데, 어렸을 땐 그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지만 한참 지나고 나서 아버지의 말이 진실이었다는 걸 확인해 준 누군가를 만나게 됐어.

 

그러니까, 50년 전쯤 내 고향 평안도에서 있었던 일이야. 한겨울이었고 우리 남매들이 배를 채울 거리라곤 하나도 없어서 아버지는 활과 화살만 들고 산속으로 사냥을 나가셨지. 토끼나 사슴 같은 걸 잡아 올 생각이셨지만 산에서 표범 발자국처럼 보이는 걸 발견했고, 그래서 더 부푼 기대 속에 그걸 추적하기 시작했어.

 

짐승의 발자국을 따라 가장 깊은 산속까지 들어가다 보니 결국 깎아지른 듯한 절벽 끝까지 가셨지 뭐야. 거기서 아버지는 그 발자국의 주인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건 표범이 아니라 아직 어린 호랑이였어. 만약 그때 총을 쏴서 그놈을 죽였다면, 그걸 팔아 번 돈으로 최소 1년은 충분히 먹고살았을 거야. 하지만 왜인지 아버지는 그냥 돌아서서 빈손으로 산에서 내려가기로 했어. 때마침 눈이 내리기 시작한 데다 아버지는 이미 굶어 죽을 지경이었지. 마침내 기운이 다 빠져 땅에 쓰러지면서, 이대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겠구나 생각하신 거야.

 

그렇게 산에서 동사하시기 직전에 어떤 일본군 장교가 아버지를 발견해서 되살려 주었다고 해. 이 장교는 이 이야기의 이어지는 부분이 사건이라고 확증해 준 인물이고, 수십 년 뒤에 난 아주 신비한 우연으로 그 사람과 만나게 됐지. 장교는 자기와 마주친 우리 아버지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정확히 묘사했고, 또 내 얼굴 생김새가 그분과 똑 닮았다고도 하더라.

 

어쨌든 아버지와 그 일본 군인들이 함께 하산하던 중에, 호랑이 한 마리가 그들을 뒤쫓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대. 거대한 발자국으로 미루어봐서는 몸집이 집채만큼 커다란 놈이었어. 그러다 진짜로, 그 호랑이가 갑자기 그들 앞에 펄쩍 뛰어 나타나더니 공격할 태세를 취하더라는 거야. 모두가 죽고 말 그 위기에서, 우리 아버지가 나서더니 소리를 질러 놈을 쫓아버렸어. 놀랍게도 호랑이는 앞으로 나선 아버지를 쳐다보고는 가만히 뒤돌아 숲으로 다시 달려가 버렸다. 그렇게 크고 사나운 호랑이라면 아버지를 단 한 번에 덮쳐서 죽일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야."

 

“호랑이는 왜 아버님을 해치려 하지 않았던 걸까?"

“아버지는 늘 그 호랑이가 환생한 우리 어머니였을 거라고 생각하셨어."

 

정호는 옥희의 눈을 들여다봤다. 옥희의 얼굴도 삶의 풍파에 많이 쏠렸지만, 그 검고 빛나는 눈만은 어렸을 때부터 보아온 모습 그대로였다. 모래시계 안에서조차 영원히 시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정호의 마음이 아려왔다.

 

"그게 과연 맞는 말인지는 나도 몰라. 그냥 아버지 당신께서 그렇게 믿고 싶으셨던 거겠지. 먼저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아버지를 너무 사랑하셔서 다른 삶을 살면서도 그분을 지켜주려 하셨던 거라고. 왜냐면, 옥희야,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인연이니까. 길거리에서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을 하잖아.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깊은 인연은 백년가약을 맺는 부부의 연이겠지. 그리고 그게 바로 내가 인생에서 제일 아쉽고 후회스럽게 생각하는 점이야. 이번 생에서 나랑 그런 인연이 되지 못했다는 거” 정호는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혹시나 옥희가 자신을 싫어하게 될까 봐 평생 마음에 묻어두었던 말이었다. 그러나 이는 두 사람 모두 이미 아는 사실이었고, 또한 떨어져 있는 동안 경험한 모든 것을 돌이켜 볼 때, 정호의 인생에서 가장 진실하게 선언할 수 있는 이 고백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았다.

 

"미안해...... 나도 지금 와서 이 후회가 돼 정말 우리가 그렇게 되었다면 좋았을 텐데." 옥희가 따끔따끔한 코끝을 훔치며 말했다.

 

"만약 내가 다음 생으로 돌아온다면 그땐 너를 찾아서 꼭 결혼할거야. 혹시 돌아오지 못하고 이승과 저승 사이 어딘가의 황혼 녘에 갇힌다 해도.... 아니면 천국에서든 지옥에서든..... 내 영혼은 너를 찾아서 계속 떠돌아다닐 거야." 정호가 조용히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다시 내게 청혼하면 그땐 꼭 받아들일게 약속해." 투명한 눈물이 옥희의 뺨을 타고 시냇물처럼 흘러내렸다.

 

"잠깐만 기다려 봐." 정호는 꼭 잡고 있던 옥희의 손을 놓은 뒤 바지 주머니를 서둘러 뒤적이기 시작했다. "너한테 주고 싶은 게 있어." 그가 손안에 쥔 작은 물체를 내밀었다. 그것은 장식 없이 도톰한 은가락지었다.

 

"세상에, 이건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왔어?" 옥희가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4

“허리춤 안에 숨겨놨었지."

“신기하네. 평양에 있을 때 나를 돌봐주셨던 양어머니께서 갖고 계시던 반지랑 진짜 똑같이 생겼다. 그 이후로는 이런 반지를 본 적이 없는데, 어디서 난 거니?"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주신 거야. 아마 어머니 것이었겠지…. 아버지는 어머니를 무척이나 사랑하셨으니까. 자, 손 이리 줘봐."

 

정호는 한때 가늘었으나 이제는 옹이가 져 울퉁불퉁해진 옥희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정말 예쁘다. 고마워." 옥희가 흐느낌을 삼키며 웃었다. “있지, 정호야, 이게 살면서 내가 받아본 유일한 반지다? 나는 늘 이런 반지가 갖고 싶었어."

 

"훨씬 더 일찍 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옥희야,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내가 이 세상의 모든 보석을 다 너한테 갖다줄 텐데…….” 자신의 눈물이 옥희의 마음에 짐으로 남을까 봐, 울지 않으려고 눈을 부릅뜬 채 붉게 달아오른 옥희의 귀 뒤쪽을 응시하며 정호는 말했다.

 

 

< 11 >

 

아기 철수는 땅에서 1미터 정도 올라온 그릇 모양으로 움푹 팬 검은 바위 안에서 새끼 고양이처럼 꼬물거리고 있었다. 진도댁은 싸게 속저고리를 풀어 헤치고 아이에게 젖을 먹이기 시작했다. 나는 진도댁의 어깨에 큰 멍이 들어 있다는 걸 알아챘다. 어쩌다 그리 다쳤냐고 묻자, 진도댁은 이렇게 얼버무렸다.

 

"아, 암껏두 아니어라, 파도가 너무 쎄분께 멍이 져부렀소.”

 

낮이 점점 길어지면서 뙤약볕에 그을린 철수의 피부는 밝은 빨간색에서 연갈색으로 바뀌었다. 그는 정말 순하고 착한 아기였다. 나는 바다가 내뿜는 물보라와 바람, 햇빛을 가려주는 물어귀 안쪽에 철수와 함께 단둘이서 앉아 있었다. 다른 여자들은 주기적으로 그곳에 돌아와 전복이 든 망태기를 비우고 간식 한 입으로 배를 채운 뒤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곤 했다. 그들은 위계에 따라 나뉘어 있었고 각각 자기 구역에서만 물질을 할 수 있었다. 철수 엄마는 해변에서 가까운 얕은 물가로만 나갔는데, 뭍으로 돌아올 때마다 그의 망태기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별로 든 게 없어 훨씬 가벼웠다.

 

어느 밤에는 잠을 이루기가 힘들었다. 파도가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에 날이 새도록 몸을 뒤척였다. 하늘이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하자마자 나는 곧장 산책을 하러 나갔다. 태양이 바다 바로 밑에서 찰랑댔고 온 세상이 샛노란 주황빛과 밝은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발 닿는 대로 걷다 보니 어느새 절벽 앞에 이르렀다. 따뜻한 새싹들이 돋아나 바람에 나부끼는 풀밭 가운데 윤기 나는 밤색 털을 지닌 야생 조랑말 한 쌍이 서 있었다. 그 말들은 매우 평온한 눈동자로 오랫동안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 싸게 와보쇼잉, 다일로 물에질하구 잡으면, 나가 보여드릴 텡게." 진도댁이 내게 잠수 바지와 하얀 아마포 속바지를 던져주며 말했다.

 

"철수는 어떡하고?" 내가 물었다.

 

“갱기찮지라. 방금 젖두 다 먹였고 아짐니랑 나랑은 금뱅 댕겨오제요."

 

나는 얼른 잠수복으로 갈아입고 머리 위에 둥근 물안경을 썼다. 진도댁은 내게 해녀가 쓰는 망태기도 칼도 테왁도 주지 않았는데, 그만큼 깊이 잠수해서 전복이라도 따려면 최소한 몇 달은 걸리기 때문이었다.

 

물은 생각보다 따뜻했다. 그날 배운 거라곤 가라앉지 않고 수면위에 떠 있는 법뿐이었다. 몇 시간 동안이나 나는 푸른 터키옥 빛깔의 얕은 바닷물에 살짝 잠겼다 솟아오르기를 반복했다. 파도가 내몸을 앞뒤로 흔들며, 내가 철수를 재울 때 하듯이 부드럽게 나를 안고 넘실거렸다.

 

조금 더 연습한 후에, 나는해안 근처에서 굴을 따 모으기 시작했다. 지칠 때면 물어귀로 가 다른 여자들과 담소를 나누는 대신 바다에 머물며 그저 물 위를 동동 떠다녔다. 물속에서, 나는 과거의 ‘나’들의 무게가 깊은 해저로 가라앉는 걸 느꼈다. 나는 그 모든 고통과 후회를 겪었던 그 사람이 더는 아닌 것 같았다.

 

초여름의 제주 언덕과 절벽들은 온통 분홍빛 진달래로 뒤덮였다. 제주도에 와서 내가 또 하나 알게 된 건 여기서는 봄여름에도 코스모스가 핀다는 사실이었다. 아름답게 피어난 야생화들과 푸른 바다를 바라보면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나는 줄곧 물을 찾아갔다.

 

나는 물어귀로 아기를 데려가 그릇 모양으로 팬 바위에 눕혔다. 다른 해녀들은 이미 해안에서 수백 미터는 더 앞서 나가 있었다. 나는 그 연장을 가지고 혼자 얕은 곳으로 헤엄쳐 갔다.

 

물이 어찌나 맑고 깨끗한지 수면 위에서도 알록달록한 작은 물고기들이 보였다. 새끼손가락만한 크기에 하얀 줄무늬가 난 귤색 물고기 한 마리가 발가락에 살짝 입질을 하다가 얼른 헤엄쳐 달아났다.

 

물어귀로 돌아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잠수를 했다. 바로 그때, 내게서 1미터쯤 떨어진 어느 바위에 매달려 있는 전복하나가 보였다. 수면 위로 올라가 턱까지 차오른 숨통을 틔우고 싶은 충동을 누른 채, 나는 깊은 바닥을 향해 발을 차 내려갔다. 마침내 손에 닿은 전복의 아래쪽으로 칼날을 넣고 힘을 주어 바위에서 도려냈다.

 

물결을 박차고 머리가 수면 위로 솟아오르자마자 나는 헐떡이며 참았던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절벽 위에서부터 쏟아져 내리며 눈부시게 빛나는 햇살에 잠시 정신이 혼미해졌다. 간신히 물어귀로 돌아왔을 때 다른 여자들은 이미 오전 수확물을 챙겨 자리를 떠나 있었다.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는 해녀들은 하루에 스무 개도 넘게 전복을 따는데, 나는 이제 겨우 첫 번째 전복을 딴 참이었다.

 

나는 바위에 앉아 아까 잡은 전복을 들어 보았다. 껍데기에는 진녹색 미역이 얇게 뒤덮여 있었고 특별히 먹음직스럽게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동안 해녀들이 간식 삼아 활전복을 먹는 걸 여러 번 보아온 터였다. 그들을 흉내 내어, 나도 아래쪽에 감춰진 속살이 위로 오도록 그것을 뒤집었다. 그러곤 껍데기에서 전복을 빼내려는데, 칼날이 말캉말캉한 살 속에 감춰져 있던 딱딱한 무언가에 부딪혔다. 은은하고 희미하게 빛나는 완벽한 구체, 내 손바닥 위에 놓인 그것은 새벽달처럼 옅은 분홍색과 회색으로 빛나는 진주 한 알이었다.

 

한참이나 그걸 바라보던 나는, 정호가 아직도 나를 돌봐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심지어 저세상에 가서도 말이다. 그리고 나도 똑같은 방식으로 있을 거라는 것도. 삶을 계속 놓아주고 또 붙잡고 버티면서, 오직 바다에서 온 나의 일부만이 남을 때까지.

 

삶은 견딜 만한 것이다. 시간이 모든 것을 잊게 해주기 때문에 그래도 삶은 살아볼 만한 것이다. 사랑이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주기 때문에.

 

나는 진주를 옷 가방에 넣고 물가로 걸어 나왔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시원한 청색 파도 사이를 둥실둥실 부유했다. 살아가면서 처음으로, 그 어떤 것에 대한 소망도 동경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마침내 바다와 하나였다.

 

이미지 출처 : 아이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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