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연 / ‘불편한 편의점’중에서
< 1 >
제이에스 오브 제이에스
시현의 수많은 알바 인생의 종착점이 편의점이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그녀 자신이 편의점 애용자이기도 했고, 그동안 여러 알바를 거치며 겪은 일들이 편의점 업무 곳곳에 녹아 있었기 때문에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 뷰티 스토어에서 배운 접객과 계산대 업무 노하우는 편의점에서의 업무와 거의 비슷했고, 배송회사에서 맡아 하던 소화물 분류 업무 역시 편의점 물품 진열과 비슷한 편이었다. 프랜차이즈 커피숍에서는 '제이에스JS'라 불리는 진상들을 응대하는 매뉴얼을 익힌 바 있고, 갈빗집에서는 자기가 구운 고기가 탄 걸 종업원 탓으로 돌리는 제이에스를 겪으며 멘탈도 단련했다.
이렇게 단련된 시현임에도 어디서 이사를 왔는지 최근 꾸준히 드나드는 제이에스 하나는 치가 떨릴 정도로 싫다.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이 아저씨는 마른 체구에 툭 튀어나온 눈이 딱 봐도 고약하게 생겼는데, 처음 왔을 때부터 반말에 돈 던지기를 시전해 그녀를 경악케 했다. 그는 마치 시현이 기계라도 되는 양 반말로 원하는 바를 입력하고 결과 역시 재촉했다. 그런데 항의하기에는 또 애매한 게 시현의 실수를 짚는 것이라 늘 당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더 분했다. 한번은 행사 기간이 딱 하루 지난 투 플러스 원 과자들을 집어 왔다가, 계산에서 행사 적용이 안 되자 '너 잘 걸렸다'는 눈빛을 쏘아대며 따져 물었다.
“왜 안 된다는 건데?"
"손님, 이게 어제까지 행사여서요. 적용이 안됩니다." "그럼 기간 지난 그 안내판 왜 안 내렸어? 내가 이거 고민해 고른건데 이제 어쩌자는 거야? 이번만 적용해."
"그럴 수는 없어요. 행사 안내판에 기한이 적혀 있는데요. 그걸 확인하셨으면"
"아니, 내가 노안인데 그 좁쌀만 하게 쓴 걸 어떻게 읽으란 거야? 요즘 마흔 넘으면 다 노안 오는데, 기한 표시를 크게 제대로 했어야지! 이거 중장년층 차별하는 거야 뭐야? 사과의 의미로 적용해." "손님, 죄송합니다만..... 그건 어렵겠습니다.”
"이 따위 과자 안 먹어. 담배." "어떤 걸로 드릴까요?" "맨날 피우는 거 있잖아. 내가 매일 담배 팔아주는데 그 정도는 외울 수 있는 거 아닌가? 단골 대하는 게 이래서야 장사가 되겠어?쯧.”
담배를 받고 돈을 던진 뒤 놈은 잔돈을 챙겨 밖으로 나가 야외 테이블에서 담배를 피웠다. 금연이라고 붙여줬지만 아랑곳없이 피우고 꽁초도 아무 데나 버리고 간다. 자기는 마음껏 진상질을 떨면서 남의 실수 같지 않은 실수는 따져대는 놈은 정말이지 제이에스 오브 제이에스다.
환골탈태한 독고 씨를 데리고 온 사장님은 마치 자신이 만든 로봇이라도 소개하듯 뿌듯한 표정으로 시현에게 그가 야간 알바를 맡을 거라 말했다. 헐. 잠시 독고 씨의 변신에 좋은 인상을 받았던 시현의 마음에 먹구름이 몰려왔는데, 심지어 사장님은 독고 씨의 매장 업무 교육을 시현이 맡아줄 것을 제안하는 게 아닌가. 오마이갓! 사장님의 제안은 곧 지시가 아닌가.
아무튼 이 어눌하고 엉성한, 갓 노숙자를 졸업한 이 아저씨를 계산대에 홀로 서게 만들어야 한다. 시현은 뜬금없이 노트에 바코드를 그리고 있는 독고 씨를 향해 매서운 시선을 던졌다.
다음 날 학원 수업을 마치고 편의점에 들어선 시현에게 카운터의 오 여사가 득달같이 다가왔다. "시현 씨. 그 미련곰탱이 같은 인간 대체 뭐예요?"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 어른들이 주로 쓰는 '미련 곰탱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적절하게 들린 건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오 여사는 마치 독고 씨를 데려온 게 시현이라도 되는 양 따져 물었다. 아니, 오 여사의 말투는 늘 따지는 듯하다. 원래 성격이 그런지 아니면 말썽쟁이 아들 때문인지 그녀는 공격성으로 무장한 말투로 모두에게 따져 묻는다. 심지어 손님에게도!
"아니, 웃지만 말고 내 말에 대답해봐요. 혹시 시현 씨가 소개한 사람이에요? 뭐 하던 사람인데 뭐 하나 제대로 못 알아듣고 말도 더듬거리고 말이야." “저 아니고요, 사장님이 직접 발탁하셨습니다.”
독고 씨가 노숙자였다고 말하는 순간 오 여사는 퇴근도 하지 않고 옆에 붙어 나라가 망한 것처럼 떠들어댈 것이기에, 말을 아끼기로 했다. 그래도 한숨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대체 언제쯤이면 이 아줌마의 수다와 질문 세례를 받지 않고 일과를 시작할 수 있을까?
“참 모르겠네. 사장님이 야간 일 너무 힘들어서 아무나 뽑은 거 같은데, 내가 보기엔 분명 큰 사고 칠 인간으로 보이더라고. 야간에 술 취한 손님이랑 다투거나 계산을 엉망으로 하거나 아니면 작정하고 삥땅을 칠 수도 있을 거고……………. 아무래도 우리가 같이 사장님에게 반대 의견을 내야 하지 않을까?" "저는 잘 모르겠어요. 근데. 나쁜사람 같진 않더라고요."
"제이에스예요. 긴장하세요." “뭐라고요? 뭐...... 에스요?" "진상이라고요. 진상은 제이에스라고 했잖아요." "아, 맞아. 진상...... 어디 있어요?" “쉿, 크게 말하지 말아요. 앗."
듣고 오기라도 하는 듯 제이에스가 태연히 계산대로 다가왔다. 시현이 독고 씨에게 더 주의를 주기도 전에 놈은 과자 몇 개를 계산대에 던져놓았다. 독고 씨는 침팬지가 스마트폰을 집듯 엉성하게 바코드 리더기를 집어 들고 화려한 과자 봉지 그림들 사이에서 바코드를 열심히 찾기 시작했다. 틀렸다. 봉지를 구매하겠냐고 먼저 물었어야 한다. 에라 모르겠다. 시현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그냥 두고 보았다. 마침내 바코드를 찾아 리더기로 찍은 독고 씨가 더듬거리며 가격을 말했다. 제이에스는 시현을 슥 돌아보고 비웃음을 지었다. 신입 교육 중인걸 눈치챈 듯했다.
“담배." 독고 씨가 제이에스를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안 피우는데." "담배 달라고.” "아, 담배・뭐?" "야, 너 손님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야? 너 몇 살이야?" “모, 몰라.” "거, 웃기는새끼네. 너 바보야?” “아닌데....... 담배 뭐?"
제이에스가 코웃음을 치고는 시현을 돌아봤다. 시현이 그제야 담배 진열대를 향해 팔을 뻗는데, 놈이 손을 들어 그녀를 제지했다. 놈은 독고 씨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바보 맞나 안 맞나 함 보자. 에쎄 체인지 4밀리. 당장!" 에쎄는 종류가 많아 잘 찾아줘야 하는 담배다. 특히 에쎄 체인지는 그냥 체인지, 체인지 업, 체인지 린, 체인지 히말리아 등 그 종류가 심히 다양해 골치가 아프다. 담배를 안 피우는 시현으로선 초기에 손님들이 무심코 내뱉는 에쎄 시리즈 주문이 제일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제이에스는 평소 던힐 6밀리를 피웠음에도 독고 씨에게 일부러 힘든 걸 주문하고 있었다.
그런데 독고 씨가 단번에 에쎄 체인지 4밀리를 집어 들더니 바코드를 찍는 게 아닌가? 제이에스는 승부욕이 돋는지 이번엔 카드를 툭 던졌다. 독고 씨는 순순히 카드를 집어 들어 계산을 진행했고, 제이에스에게 카드를 돌려주었다.
"봉지는?" 놈이 시험한다는 듯 물었다. 시현은 애써 참으며 가만히 있었다. 독고 씨는 상품들과 놈을 번갈아 보더니 히죽 웃었다. 이제 표정이 굳어진 제이에스가 해보자는 듯 상체를 독고 씨에게 들이댔다. “그・・그냥 들고 가. 봉지, 비닐이라 환경 안좋거든."
"나 여기서 집 멀어. 봉지 없이 이거 어떻게 들고 가라고?" “그, 그럼. 사."
"미리 말해줬어야지. 그거 얼마 한다고 카드 긁으라 그래? 그냥 하나 줘." "그.. 그건 어려운데?" "아니, 손님한테 불편을 줬으면 해결을 해줘야 할 거 아냐? 여기 편의점 아냐? 그래 안 그래?" 제이에스가 이죽이듯 말했다. 장난과 협박이 섞인 말투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일이 커졌다. 긴장한 시현이 나서려는데 갑자기 독고 씨가 손뼉을 쳤다.
놈과 시현이 황당해하는 동안 그는 창고로 가더니 자신의 에코백 가방을 들고 나왔다. 무슨 봉사단체 로고가 그려져 있는, 꼬질꼬질 다 해진 에코백을 가져온 뒤 계산대 옆에 내용물을 털어버렸다. 볼펜과 노트, 폐기 샌드위치가 전부였다. 독고 씨는 빈 에코백에 제이에스의 과자들을 담기 시작했다. 놈은 혀를 차며 그런 독고 씨를 희귀 동물 보듯 살폈다.
“당신 지금 뭐 하는 거야?" "여기 담아... 가라고…." “그 더러운 거에 물건을 담으면 어떡해?"
"더러운건...... 빨아 쓰면...... 돼.” 보다 못한 시현이 나섰다.
"죄송합니다. 이분이 처음이라・ 비닐봉지에 담아드릴게요."시현이 물건을 담은 독고 씨의 에코백을 잡았다. 하지만 독고 씨는 꿈쩍하지 않았다. 당황한 시현을 뒤로하고 그는 손을 쭉 뻗어 놈의 코앞에 에코백을 들이댔다. 제이에스는 독고 씨를 한동안 노려보았고 시현은 난감해진 채로 독고 씨를 돌아보았다.
독고 씨의 작은 눈은 거의 감다시피 했지만 그래서 더 서늘해 보였고, 꾹 다문 입술에 이어진 넓은 턱은 강력한 무기처럼 튀어나와 있었다. 독고 씨는 계속 말없이 에코백을 내민 채 서 있었다. 시현은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다시 제이에스를 돌아봤다. 놈은 툭 튀어나온 눈으로 독고 씨를 죽일 듯 노려봤지만 꿈쩍없는 독고 씨의 태도에 당황한 듯했다. 곧 놈이 짜증난 표정으로 독고 씨에게서 에코백을 채갔다. 저울의 추가 기울듯 제이에스는 에코백을 내려뜨린 채 돌아서 편의점을 나갔다.
순식간에 벌어진 남자들의 기 싸움에 시현은 새우가 된 것처럼 등허리가 굽어진 듯했다. 방금 전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독고 씨는 노트에 볼펜으로 '꼭 봉지를 먼저......'라고 적고 있었다. 시현은 전운이 감돌던 그의 무서운 표정을 애써 잊으려 목청을 가다듬었다.
"독고 씨. 어쨌거나 봉지 안준건 잘했어요." "미, 미안해요. 내가 까먹었어요. 시현 씨가...... 분명 가르쳐줬는데…." "미안할 건 아니고, 다음부턴 잊지 마세요. 그리고 아무리 제이에스여도 손님은 손님이니 싸우면 안 됩니다." 그러자 독고 씨가 씨익 웃어 보였다. "두 명까진 끄떡없어요." 두 명이랑 싸울 수 있다는 건지 손님 두 명을 한 번에 접객할 수 있다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그의 웃는 얼굴에서 좀 전의 서늘한 눈빛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한숨을 돌리며 방금 전 궁금증을 떠올렸다.
"그런데 담배 어떻게 그렇게 쉽게 찾았어요?" "가, 간밤에 담배 손님 많아서…후딱 외웠어요. 에쎄는 에쎄 원, 에쎄 스패셜 골드, 에쎄 스패셜 골드 1마리,에쎄 스패셜 골드 0.5, 에쎄 클래식, 에쎄 수 0.3, 에쎄 수 0.1, 에쎄 골든 리프, 에쎄 골든 리프 1미리....“
독고씨가 마치 구구단 외우듯 담배 종류를 줄줄 내 뱉었다.
< 2 >
급똥! 잠시만요
허! 인경의 입에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급똥이라...... 그래, 그럴 수 있다. 그러면 이걸 출입문에 붙여놓고 문을 잠그고 가야 하는 것 아닌가? 여기 계산대 위에 두고 가면 대체 어쩌란 말인가? 점원이 없는 걸 파악한 사람이 상품이고 현금이고 들고 가면 어떡하려는 것인가? 주택가 사이에 콕 박혀 있어서 도둑질 당할 우려가 없다는 건가? 아니면 그냥 털려도 된단 말인가? 아무리 CCTV가 있다지만 이러면 없던 도벽도 절로 솟을 수 있기에 안전하지 않다. 따박따박 바른말을 잘 하는 인경으로서는 이 상황을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딸랑. 방울 소리와 함께 사내가 급똥을 해결한 것이 확실한 표정를 내뱉으며 서둘러 계산대로 다가왔고, 그녀는 몸을 비켜 길을 터주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아저씨. 가게를 아까 막 비워두고 가셨던데, 그러시면 안되죠.”
“그게, 그 급해서요..…………. 여기..…………. 이거.......”
사내가 어쩔 줄 몰라 하며 A4 용지를 들어 보였다.
"그러니까. 그 공지를 이렇게 놔두면 안 되죠. 출입문에 붙이고 문을 잠그고 가셨어야죠. 혹시 청소년이라도 들어왔다가 빈 가게여서 절도 욕심 내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깨진 창문 이론이란 게 있어요. 동네에 깨진 창문을 방치하면 절도와 범죄가 증가한다는 이론인데, 이렇게 가게를 방치하면 그런 사고 발생률이 높아지는 거라고요. 게다가 가게 직원이신 거 같은데, 어떤 사장이라도 직원이 이렇게 일하는 거 좋아하실 거 같진 않네요. 자기 자리를 잘 지키셔야 할 것 같아요."
원래 시시비비를 잘 따지는 편이기도 한 데다가 쓸데없이 부담을 주는 사내에게 선을 긋고 싶었던지라 인경은 일장 연설을 했다. 대개 이렇게 굴면 남자들은 질색을 하고 다신 인경에게 들이대지 않았다. 사내 역시 묵묵히 인경의 말을 듣고 있다가 민망한지 고개를 숙였다.
“그게요... 말씀이 맞긴 한데 제 입장...... 얘기해도 될까요?" "말씀하세요."
"제가 과민성대장증후군이.. 그러니까…급똥이 잘 안 참아져서요. 아까…안 그래도 이걸……문에 붙이려고 테이프를 찾으려 몸을 숙이는데.. 그때 윽, 조금...... 지, 지렸어요………. 그래서... 테이프로 붙이는 거 실패하고…… 여기 둔 채로… 문도 못 잠그고 달려가야 했어요…. 가서 바지를 내리는데 동시에……………."
"그만!" 그러니까 똥을 지려 빨리 화장실 가느라고 문을 못 잠갔다는 건데, 비위가 상해 당최 들어줄 수가 없었다. 듣다 보니 사내의 몸에서 똥 냄새가 올라오는 것 같았고, 정말이지 더럽고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알겠으니까 다음엔 조심하세요."
사내의 목례를 뒤로하고 그녀는 전자레인지로 가 도시락을 꺼냈다. 잽싸게 도시락을 들고 편의점을 나서려는데 사내가 다시 한 번 고개 숙여 인사하며 외쳤다.
"오늘 급똥이라..... 죄송했어요."
"아이 참! 밥사가는데 똥 얘기 좀 그만해요!"
넌 급똥이냐? 난 급분노다! 출입문을 밀던 인경은 사내를 돌아보고 꽥 소리 질렀다.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다. 나, 대학로 버럭대장 정인경이거든! 그녀의 성질을 목격한 사내는 놀란 눈으로 잠시 멍해 있다가 더듬거리며 '죄송합니다'를 연발했다. 저 더듬대는 말투도 견딜 수가 없다. 인경은 문을 밀고 편의점을 나서며 '내가 다시 여기를 오나 봐라 혼잣말했다.
< 3 >
불편한 편의점
인경은 낮과 밤이 바뀐 사이클을 계속 활용하기로 했다. 그녀는 새벽에 일어나 출근하듯 편의점에 가 산해진미 도시락을 먹으며 독고 씨와 이야기를 나눴다. 생각보다 똑똑하고 눈치도 빠른 사람이었다. 며칠 같이 이야기를 나누던 인경은 이후로는 아예 수첩을 들고 가 그와의 대화 꼭지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뜻하지 않은 취재는 그녀에게 글을 쓸 수 있을 거라는 용기를 불어넣어주었다.
독고 씨는 알코올성 치매는 물론 정신적 트라우마로 과거의 기억 한 부분을 지운 것처럼 보였다. 작가가 되고 읽은 여러 심리학 서적에서 인경은 감정적 상처에 대해 주목했다. 캐릭터는 결국 과거의 끔찍한 감정적 상처를 받은 경험이 있고, 그런 상황에서 무엇을 지키고자 했는가가 그의 앞날이 된다. 독고 씨는 눈을 감았고 둥을 돌렸다. 하지만 현재 그는 회복되고 있으며 사람들과의 소통을 통해 상처를 돌아볼 용기와 힘을 조금씩 채우고 있었다.
상처를 돌아보고 그것을 이겨내기 위한 노력 혹은 욕망이 그 사람의 원동력이 되고 캐릭터가 된다. 캐릭터를 보여주려면 캐릭터가 선택의 갈림길에서 어떤 길로 가느냐를 보여주면 된다. 독고 씨는 편의점 사장의 도움을 받아 서울역에서 나왔고, 사회에 재진입해 자신의 트라우마를 직면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확실한 거는...... 나는 원래 이렇게 살지 않았어요. 나는 사람들과 별로 나눌게 없었던 거 같아요. 이런 따뜻한 기억이 별로 없거든요." “따뜻한 기억이라면…무얼 말하는 거죠?" “지금처럼 아가씨 같은 사람과..... 허물없이 대화를 나눈다거나 하는 거요.." “참참참 드시는 손님과도 친하신 거 같던데?" “그러니까요…편의점에서 접객을 하며…사람들과 친해진거 같아요. 진심 같은 거 없이 그냥 친절한 척만 해도 친절해지는 것 같아요."
연말이라고 시답잖은 안부들이 인경의 핸드폰을 두드려댔다. 김 대표였다. 2년 전 인경의 생물학적 나이를 돌먹이며 이제 더 이상 20대 배역은 어렵지 않겠냐고 한 그 제작자. 인경으로 하여금 배우를 자발적으로 은퇴하게 한 그 인간. 한때 인경을 먹여 살리다시피 한 최고의 조력자였지만 지난 2년간은 문자 한 통 오가지 않은 관계.
김 대표는 연말이라 그냥 생각이 났다며 잘 지내냐고 흔한 안부를 물었다. 작년 연말에는 안궁금하셨어요?라고 쏘아대자 그는 작년에는 전화해도 안 받을 거 같아 못했다면서 이제 2년쯤 지났으니 화가 좀 풀렸을 것 같아 연락했다고 능글맞게 답했다. 그가 그렇게 말해주자 얼마 안남은 앙금마저 사라진 인경은 대표님이 안부만 들으려고 전화하는 사람은 아니지 않냐며, 용건이 무엇인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김 대표는 성질 급한 건 여전하다고 한마디 한 뒤 각색 제안이라고 말했다. 판권을 산 소설을 희곡화하는 일이었다. 각색이라 마지막 글 작업이 될 수도 있는데 각색을 거절하기 위해 오리지널을 쓴다고 했지만 아직 딱히 정해진 건 없었다. 그저 편의점의 이상한 사내를 취재하며 무언가 실마리를 찾아가는 중이었다. 어떻게 둘러댈까 고민하던 인경의 눈에 창밖으로 편의점이 내려다보였다.
"무대는 편의점이에요. 온갖 인간 군상이 드나드는 편의점. 주인공은 편의점의 밤을 지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야간 알바고."
"이 야간 알바는 중년 사내인데 자신의 과거를 몰라요. 알코올성 치매가 왔거든요. 손님들은 이 중년 사내의 정체를 자기들끼리 추측하죠. 조폭, 전과자, 탈북자, 명퇴자, 심지어 외계인! 그런데 이 사내는 아랑곳없이 손님들에게 낯선 상품들을 추천하고……그런데… 신기하게도 사람들이 사내가 추천하는 상품을 사고 나면,고민이 해결되는 거예요."
“정 작가." "왜요?" “그거 하자, 나랑.' "정말요? 아직 쓰지도 않았는데요." "다 썼네, 머릿속에서 그거 내년에 올리자. 장담하는데 그거 너 마지막 작품 아니야. 그 작품 올리면 다음 거 또 쓸 수 있게 될 거야." ”진짜 그렇게 생각해요?" "응." "뭐죠? 나 진짜 벼랑 끝인데…대표님이 너무 쉽게 오케이 해서 이상하거든요. 나 아직 이거 쓰지도 않았단 말이에요." "내일 제목만 써서 가져와 원래 계약서 써야 원고도 써지는 거야.” “김 대표님.” "왜?" “고마워요, 진심.” “나 바보 아니다. 아이템 괜찮아. 너 목소리에서 간절함도 느껴지고...... 잘 쓸거 같아." "나 원래 잘 썼습니다." "칭찬하기가 무섭구나. 참, 제목은 뭐야?" "음...... 편의점인데요, 아주 불편한...... 그래서...... 불편한 편의점."
김 대표의 전화를 끊자마자 인경은 노트북 한글 프로그램을 열었다. 그러고는 빠르게 타이핑을 시작했다. 제목을 적고 두 칸 줄을 띈 뒤 그녀의 마지막 작품이 될지도 모를 새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그녀는 쉬지 않고 타이핑을 했다. 어떤 글쓰기는 타이핑에 지나지 않는다. 당신이 오랜 시간 궁리하고 고민해왔다면, 그것에 대해 툭 건드리기만 해도 튀어나올 만큼 생각의 덩어리를 키웠다면, 이제할 일은 타자수가 되어 열심히 자판을 누르는 게 작가의 남은 본분이다. 생각의 속도를 손가락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가 되면 당신은 잘하고 있는 것이다. 인경은 연기하듯 대사를 발음하며 동시에 타이핑을 했다. 그녀의 왼손과 오른손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 듯했다. 그녀는 그동안 봉인됐던 필력이 풀린 듯 쉼 없이 이야기를 써내려갔다. 저녁에 시작된 작업은 어느덧 자정을 넘겼고, 겨울 밤하늘의 어둠이 짙어질수록 그녀의 글도 밀도를 더해갔다.
그 새벽, 동네에서 유일하게 불이 켜진 곳은 독고 씨의 편의점과 그녀의 작업실뿐이었다.
< 4 >
상담을 하며 그녀는 걱정을 많이 했다. 수술 시 아픈지, 부작용은 없는지 그리고 주기적으로 다시 손을 대야 하는 것은 아닌지 물었다. 나는 전신마취를 할 것이고 손님이 걱정하는 것은 강북 변두리의 허접한 병원에서나 경험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뉴스에 나오는 건 뉴스에 나올 만해서예요. 한마디로 말도 안되는 일이고 그래서 뉴스에 나오는 거죠. 쓸데없이 걱정이 많으시네. 여기 압구정동이에요. 우리 성형외과 다 살펴보고 오셨을 거 아니에요. 그쵸?"
"그게・・・ 제가 오래 모은 돈이거든요. 재수술이나 추가 수술 같은거 받을 수가 없어서………… 좀 초조했나 봐요. 아무래도 처음이기도 하고요."
"잘 오셨어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잘해드릴 테니 걱정 붙들어 매시고, 병원이랑 의사 말 잘 듣고 따라오시면 됩니다.”
“예. 한결 마음이 놓이네요. 고맙습니다."
일주일 뒤 나는 똑같은 말을 그녀가 수술받는 동안 다른 내담자에게 반복하고 있었다. 수술은 치과 쪽 최가 맡아 하고 있었고, 나는 최가 집도하는 것을 살피다 상담을 위해 자리를 비웠던 것이다. 내가 안심시켰던 나의 환자는 그렇게 고스트 닥터에게 수술을 받다 사망하고 말았다.
원장은 발 빠르게 사건을 수습했다. 고스트 닥터는 말 그대로 존재하지 않았고 그녀의 사망은 의료사고의 일부가 되었다. 유가족측은 죽은 딸의 목숨을 살려내라 외치며 병원을 고소했지만, 원장이 법조계 인맥을 가동하자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결국 적당한 보상금과 나의 퇴직으로 사건은 무마되었다. 원장은 급한 불 끌 때까지 잠시 쉬라고 했고 이에 나는 오랜만에 휴가를 얻은 듯 집에서 쉴 수 있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고스트 닥터에게 대리 수술을 맡긴 것 때문일까? 대리 수술이 당연한 듯 수술실을 비우고 한 명이라도 내담자를 더 상담해 돈을 벌었기 때문일까? 걱정과 기대가 섞인 눈빛을 보내며 내게 수술을 맡긴 그녀를 기만한 것 때문일까? 혹은 대리 수술을 밥 먹듯 지시하며 돈만 밝히는 원장 밑에서 일한 게 잘못일까? 애당초 신분 상승만을 목표로 의사가 된 내 빈곤한 정신 탓일까? 아니면 세상을 원망하며 성공해 떵떵거리겠다 다짐하게 만든 내 10대 시절의 가난과 무능력한 부모를 탓하면 될까?
그때 나는 알 수 없었다.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이제 알게 되었지만, 이제 되돌릴 수 없음도 알게 되었다. 여기 Green A-303호 앞에 서서 내가 죽인 것과 다름없는, 여전히 앳된 스물두 살 여자의 얼굴 앞에서 멈추지 않고 흐르는 눈물을 마스크로 훔칠 수밖에 없었다.
취업을 앞두고 면접을 위해 얼굴에 투자를 해야 했다던, 얼굴을 고치기 위해 대학 내내 아르바이트를 했다던 그녀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그녀는 살아남기 위해 세상의 기준에 맞추려 했고, 그것이 그녀를 살아남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목숨을 앗아간 비정한 칼날이 그것이 여전히 내 손에 들려 있는 것만 같아 소름이 끼쳤다.
나는 눈물을 참고 파카 속 깊은 곳으로 손을 넣었다. 그곳에서 칼이 아닌 꽃을 꺼냈다. 어제 구입해놓은 붙이는 조화였다. 나는 붉게 빛나는 가짜 꽃을 그녀의 작은 공간에 부착했다. 그리고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서 있었다. 다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누군가 드나드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젖은 마스크로 입을 가리며 고개를 숙였다. 눈물이 흐르는 눈을 감고는 빌고 또 빌었다. 미안합니다. 정말...... 잘못했습니다. 저를 용서......하지 마세요. 그곳에서... 평안하세요. 부디...... 평안하시길...... 기원합니다.
귀가해 보니 아내와 딸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게 끝이었다. 나도 끝이었다. 아내와 딸은 어디론가 사라졌고 연락조차 받지 않았다. 처참했던 내 유년의 집구석과는 다른, 온전한 나만의 가정을 꾸리려 했지만 이제 모든 것이 엉망으로 변해버렸다. 나는 취하지 않으면 잠들 수 없게 되었다. 며칠 출근하지 못하자 원장에게 연락이 왔다. 나는 휴대폰에 대고 지껄였다. 지금 내 가정이 무너졌고 나도 미칠 지경이라고. 원장은 비웃으며 영영 쉬라고 했다. 원장에게는 허튼소리였을 것이다. 대신 나는 원장을 엿 먹이겠다 마음먹었다. 나를 허튼 놈 취급한 원장이라도 같이 지옥으로 끌고 가야 망쳐버린 내 삶을 보상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병원비리에 관한 자료를 모아 클라우드 계정에 옮겨놓았다. 한편으로 아내와 딸을 찾는 일도 멈추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조금씩 망가지고 있었다. 병원의 비리를 파헤치는 것은 내 파렴치함을 목격하는 일이었고, 아내와 딸에 대한 죄책감은 내가 죽인 환자에 대한 죄책감과 맞물려 나를 옥죄어왔다. 괴로웠고 구역질이 났다. 술은 회피책이자 도피처였다. 견딜 수 없어진 나는 내내 취해야 했고 어느새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그리하여 아내와 딸을 찾는 것보다 나를 먼저 찾아야 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아내와 딸이 대구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을 때 나는 차압 딱지가 덕지덕지 붙은 집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마지막 힘을 짜낸 나는 짐을 챙겨 서울역으로 향했다. 대구행 KTX 티켓을 들고 탑승을 기다리던 그때, 개표구 너머로 아내와 딸의 얼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벌벌 떨렸다. 한동안 식은땀을 흘리던 나는 티켓을 찢고 뒤로 내달렸다. 화장실에 가구토를 하고 그대로 쓰러졌다. 깨어나 보니 내게 남아 있는 물건이라곤 바지와 티셔츠뿐이었다. 고급 점퍼와 수제화, 지갑, 가방은 누군가 훔쳐간 지 오래였다.
맨발로 선 채 화장실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 속에서 다시 아내와 딸의 얼굴이 보였다. 거울 속 아내와 딸이 혼란스러운 내 얼굴로 바뀌자마자 나는 그것을 머리로 받아버렸다. 이후로 나는 서울역을 떠날 수 없게 되었다. 사람들은 나를 노숙자라 불렀고 노숙자 동료들은 나를 독고라 불렀다. 죽은 노인의 이름이었고 새 이름으로 나쁘지 않았다.
대구행 티켓을 끊고 다시 서자 4년 전 이곳에서 무너져 내린 기억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번엔 혼자가 아니다. 도시락이 든 편의점봉지를 들고 내게 다가오는 사장님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됐다고 해도 굳이 배웅을 나오겠다고 했다. 서울역에서 만났으니 서울역에서 이별도 해야 한다는 그 논리는, 그럴듯했다. 설득됐다. 사실은 사장님의 도움이 절실했다. 혹시라도 내가 또 티켓을 찢고 화장실로 달려가 머리를 박고 쓰러지는 걸 그녀가 말려주길 바랐다.
"자네가 좋아하던 것들이네." 사장님이 비닐봉지를 건넸다. 안에는 산해진미 도시락과 옥수수수염차가 들어 있었다. 나는 한동안 그것을 바라보며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대구가면 자네가 의사라는 거 증명할 수 있는 거지?" “이미 전화로 확인했습니다."...
이 나라에선 사람을 죽이거나 성범죄를 저질러도 의사 면허가 취소되지 않는다. '불사조 면허'라고 한다. 왜 그러냐고? 의료 기술자들이 법 기술자들과 친하기 때문이다. 그걸 믿고 우리는 그런 짓들을 저질렀는지 모르겠다. 그런 끔찍한 특권으로 사람들을 죽이고 살리다 보니 스스로를 전지전능한 신으로 착각한 건지 모르겠다. 내가 집도한 환자 하나가 연예인으로 성공한 뒤 사람들은 그녀가'의느님'의 손을 빌렸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인간에 불과했다. 그것도 나뿐인 인간, 나쁜 인간, 오직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존재.
사장님이야말로 자신이 믿는 신을 닮은 사람인가 보다. 어떻게 내 마음을 미리 알고 살펴주는 걸까? 이 세계에서 신성을 얻은 자는 의느님이 아니다. 사장님같이 남에 대한 헤아림이 있는 사람이 그러한 자일 것이다.
출발 시간이 다 되어가는데도 나는 발을 못 떼고 있었다. 여전히 보이지 않는 자석이 뒤에서 당기는지 좀처럼 나서질 못했다. 사장님이 내 산소호흡기라도 되는 양 그녀 옆에서 전전긍긍 서 있을 뿐이었다.
"이제 가보게. 나 오래 서 있으니 힘들어." 나는 몸을 돌려 사장님을 바라보았다. 날 두고 사라진 엄마인가? 날 돌봐주시다 돌아가신 친할머니인가? 누구인가? 나는 그녀를 안고 나직이 말했다. "죽어야 될 놈을... 살려…주셨어요. 부끄럽지만… 살아보겠습니다.” 대답 대신 그녀는 마주 안은 작은 손으로 내 등을 두드려주었다.
개표구를 지나자마자 뒤돌아보지 않고 쉼 없이 발을 놀려 플랫폼에 다다랐다. 기차에 올라 지정 좌석에 앉자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어서 출발하길 바랐다. 눈물이 날아가버릴 정도로 빠르게 달려 단숨에 대구에 날 떨궈주길 바랐다. 내 열망을 아는지 기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울역을 벗어나자 차창 밖으로 편의점가는 길이 보이는 듯했다. 푸른 언덕이라는 청파동과 그곳에 자리잡은 불편하기 그지없다는 편의점도 보이는 것 같았다.
기차가 한강철교에 올랐다. 오전 햇살이 물의 표면에 반사되어 생동감 넘치게 빛나고 있었다.
노숙자로 자리 잡은 뒤론 서울역과 그 주변을 벗어나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사실 딱 한 번 한강에 간 적이 있었다. 다리에 올라 몸을 던지려 했다. 실패했다. 사실 올겨울을 편의점에서 보내고 나면 마포대교 혹은 원효대교에서 뛰어내릴 계획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알 것 같다.
강은 빠지는 곳이 아니라 건너가는 곳임을.
다리는 건너는 곳이지 뛰어내리는 곳이 아님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부끄럽지만 살기로 했다. 죄스러움을 지니고 있기로 했다. 도울 것을 돕고 나눌 것을 나누고 내 몫의 욕심을 가지지 않겠다. 나만 살리려던 기술로 남을 살리기 위해 애쓸 것이다. 사죄하기 위해 가족을 찾을 것이다. 만나길 원하지 않는다면 사죄의 마음을 다지며 돌아설 것이다. 삶이란 어떻게든 의미를 지니고 계속된다는 것을 기억하며, 겨우 살아가야겠다.
기차가 강을 건넜다. 눈물이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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