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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주 / ‘그리다가, 뭉클’중에서

송담(松潭) 2024. 10. 20. 17:51

이기주 / ‘그리다가, 뭉클’중에서

 

 

< 1 >

 

빛을 그린다. 보이지 않는 빛을 그리는 유일한 방법은 그림자를 그리는 것이다. 밝은 것을 그릴 때는 주변을 아주 어둡게 그리면 된다. 지금 어둠이 그려지는 시간을 살고 있다면 동시에 눈부시게 밝은 빛이 그려지고 있는 중이다. 그림 그리다가 뜬금 위로가 차올라 울컥해진다.

 

< 2 >

 

내려놓음

 

 

 

한바탕 난리 끝에 지칠 대로 지쳤다. 세상에서 가장 고요한 곳이 필요했다. 극내향형에 걸맞게 아주 조용한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남해가 딱 그랬다. 구불구불 느리게 움직이는 해안선을 따라 길을 가다 보면 여기저기 보이는 풍경이 소박하고 정겨웠다. 꾸며 대는 것 없이 원래 그렇게 생긴 것들과 먼 세월부터 시간이 만든 흔적들이 그냥 그대로 조용했다.

 

빨간 지붕 집을 중심에 둔 한적한 바닷가 마을은 고요했고 편안하기까지 했다. 빨간 지붕을 얹은 집을 주인공으로 그린다. 하늘과 바다와 저 뒤의 산은 배경으로 둔다. 마치 작은 빨간 지붕 집이 세상 넓고 큰 것들을 끌어안은 것 같은 구도가 되었다. 작은 것이 이길 수 있다니 위로가 되기도 했다.

 

무엇이 부족해서 욕심을 부리며 사는지 모르겠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부터 인정받고 싶은 마음까지 나이가 들어도 욕심은 어쩔 수 없는 걸까? 사람 마음이란 게 한없이 넓은 우주이고 그 우주의 한구석 자리 내주는 게 뭐 그리 대수일까 생각했다. 어쩌면 생각보다 욕심이 너무 넓어 마음 한구석을 쉽게 내주기가 어려웠는지도 모르겠다. 저기 저 빨간 지붕집 같은 소박한 정도의 욕심이면 어땠을까?

 

< 3 >

 

아름다운 것만 보면서 살 수 없으니 아름답게 보는 재주가 있다면 좋겠다. 세어 보지는 않았지만 하루 종일 보는 장면이 수만 개쯤 되겠지? 아마도 대부분은 여행지도 아니고 일상이라 평범한 장면들이겠지만 이왕이면 이런 장면 중 몇 개 정도는 아름답게 볼 수 있다면 좋겠다. 이게 쌓여서 내 인생 좀 아름다웠다고 회고할 수 있는 거니까.

 

그림을 그린다는 건 세상 좀 아름답게 볼 재주를 가졌다는 뜻이다. 네모난 도화지 프레임으로 세상을 자주 뒤적거려 아름다운 구도를 찾는 데 신경을 쓰기 때문이다. 구도가 좋으면 그림을 좀 막 그려도 어쨌든 그림 같으니까. 테크닉이 좀 어설퍼도 일부러 그렇게 그렸다고 칠 수도 있기 때문인데 심지어 어떤 때는 아주 심오한 작가의 작품 같더라니까.

 

'삼분할 프레임' 이것은 세상을 보는 그림쟁이들의 뷰파인더. 네모난 프레임에 가로 삼등분, 세로 삼등분을 하면 아홉 칸이 만들어지고 동시에 네 개의 교차점이 생긴다. 고작해야 손바닥만 한 도화지이지만 엄청 광활해서 헤맬 게 뻔한데 그나마 아홉 칸으로 나누고 보니 좀 만만해 보인다. 눈으로 본 것을 이 좌표대로 그려 넣으면 그만인 것을. 어떤 때엔 주인공을 어디다 그려야 될지 모를 때가 있는데 네 개의 교차점 중 하나 위에 그리면 된다. 그러면 영락없이 스타가 되는데 무조건 도화지의 가운데가 아니라는 것에 참 신기해하기도 했다.

 

어쩌면 이 프레임으로 너를 봤는지도 모르겠다. 어쩜 그렇게 아름답게 내 안에 자리잡고 있는 거니?

 

< 4 >

 

서로 평행해서 결코 만날 수 없는 두 개의 선이 원근에 의해 하나로 만나는 점을 소실점이라고 부른다. 긴 도로의 이쪽에서 저쪽 먼 끝을 바라볼 때 도로의 선이 하나로 만나 합쳐져 보이는 접점을 이렇게 부른다. 원근의 거리 때문에 눈이 착각해서 만들어지는 허상인데 누구는 매직아이처럼 눈을 부릅떠 찾다가 소실점을 발견하고는 그림 세계에 눈을 떴다. 누구는 끝내 찾지 못해 길을 잃어 헤매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림 그릴줄 아는 사람만이 보인다는 신비의 점 이야기다.

 

그런데 왜 소실점이라 했을까? '사라지는 점이라니. 허상안에서 만나는 것일 뿐 실제론 만나지 않는다. 그래서 사라진다고 했을까? 이 단어를 만든 사람은 적어도 소설가나 작가라고 생각했다. 허상과 현실이 서로 대치되는 슬픈 사랑 이야기가 생각나는 것은 어디 나뿐일까?

 

가까이 오면 만날 수 없고 멀어질수록 가까워지는 애달픈 이야기. 가까워지려면 멀리 두고 봐야만 하는 서글픈 짝사랑 이야기. 끝끝내 이루어질 수 없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랑 이야기.

 

'사라져 버린다'라는 '소실점'의 한자를 찾아 곱씹다가 이 절절하고 애달픈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동화되었다. 어쩌면 매일 이 슬픈 사랑 이야기를 그림에 옮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랬나 보다. 만나는 점이 눈에 보이니까 금방 닿을 것 같았다. 용기 내어 몇 발짝 다가섰다. 여전히 한 발자국도 가까워질 수 없었다. 평행선이라고 할 만했다. 마치 가도 가도 닿을 수 없는 무지개를 쫓는 것 같았다. 그림을 그리다가 소실점을 찾을 때면 늘 생각나는 사람 이야기다.

 

< 5 >

 

수염을 기르고 싶어서 하는 말.

 

첫 번째 인물은 르 코르뷔지에 Le Corbusier. 까만 뿔테 안경이 이 사람의 상징이다. 건축을 전공하면 먼저 이 사람부터 주구장창 보게 되는데 건축가가 까만 뿔테 안경을 많이 쓰는건 아무래도 이 사람 영향이라는 게 내 뇌피셜.

 

두 번째 인물은 디터 람스Dieter Rams. 디자인계에서 이사람 모르면 디자이너가 아니라고 봐야 한다. 무심히 접어 올린 소매와 심플한 넥타이에 2:8 가르마가 이 사람의 상징이다.

 

사람을 그릴 때, 대충 그려도 상징이 되는 것만 잘 넣으면 얼추 그 사람이 되는데 가끔 나도 이렇게 특징 있는 상징을 갖고 싶을 때가 있다.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다'를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단박에 알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요즘은 이런 '브랜딩'이 대세인데 이걸 '퍼스널 브랜딩'이라고 한다. 개인이 하나의 브랜드가 되는 사회.

 

'퍼스널 브랜딩'의 가치는 그 사람이 쌓아 온 '스토리'가 사실 전부인데 수염 기르고 뿔테 안경 쓴 겉모습만으로 브랜딩이 될 건 아니라는 거다. 내가 수염이나 뿔테 안경, 2:8 가르마가 절대 안 어울릴 것 같아서 하는 말 절대 아니다.

 

 

< 6 >

 

 

 

색은 이리저리 물을 따라 움직인다. 물이 말라 사라지면 색은 지나온 흔적 그대로 종이에 스며들어 추억의 무늬를 만든다.

 

색이 물의 경계에 다다르면 더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어 그대로 말라 애절하게 뭉친 흔적 한 줄을 선명하게 남긴다. 어쩌다가 다른 색을 만나면 서로의 색을 정복하지 않고 한 발짝만큼만 내어준 채 그대로 말라 종이 위에 독특한 그라데이션을 만들기도 한다. 물이 색을 품고 중력을 따라 흐를 때 종이 언덕을 만나면 에둘러 크게 휘돌아 흔적을 만들기도 하고, 종이 웅덩이를 만나면 이 색, 저 색이 한데 모여 갇혀 있다가 탈출하지 못한 채 말라 진한 혼돈의 색을 만들기도 한다. 어쩌다 물기가 충분치 않으면 흐르는 속도가 느려져 이내 가려던 곳을 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말라 아쉬운 흔적을 만든다. 이래저래 스며든 색은 고스란히 그림이 된다.

 

물은 사라졌지만 색은 스며들어 흔적을 남긴다. 지나온 시간이 만든 무늬가 이토록 아름다운 것인지 그때는 미처 몰랐다. 휘청거렸던 삶의 궤적마저 물과 색이 만든 이 그림만큼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이제 생각한다. 그땐 말라 없어지는 것조차 힘에 겨웠고 아쉬웠는데 이제 돌아보니 그게 그림이었다.

 

추억은 스며들어 이렇게 아름답다.

 

 

< 7 >

 

아무튼 위로.

 

어느 날 친구에게 지친 나를 위해 내 편이 되어 달라는 말을 꽤 논리적으로 그럴듯하게 말한 적이 있다. 머릿속에 드는 생각을 조합해서 꾸며 말해 놓고 혹시 책에서 본 게 아닐까 의심까지 했던 꽤 그럴듯한 이야기가 이 그림을 그리면서 생각난 건 이곳은 늘 나에게 위로를 주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루 한번 꼭 '위로'가 필요해.

 

인류의 조상들은 위험한 사냥을 하고 신경이 곤두선 채 하루를 마무리했는데 그렇게 해가 지고 깜깜한 밤이 찾아오면 그때부턴 곤두선 긴장을 풀어줘야 했거든. 그러지 않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과 적막함에 하루 종일 곤두섰던 신경이 독이 되어 위험했기 때문이야. 그래서 불을 피워 적당한 온기와 상대의 얼굴 정도 보일 만한 적당한 밝기를 만든 다음, 주변 사람들의 따뜻한 말을 듣는 거야. 무엇보다 무조건 내 편이 되어 내가 옳다고 말해줄 사람은 반드시 필요했어. 이런 대화로 위로를 받아야 다음 날 사냥을 나갈 힘이 생겼으니까. 그러니까 너도 무조건 내 편이 돼서 내가 옳다고 말해줘.

 

생각해 보면 지금도 우리는 이런 비슷한 걸 하면서 하루의 긴장을 푼다. 불 꺼진 거실의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빛으로 적당한 밝기를 만들고는 이런저런 대화를 하며 하루를 정리한다거나 친구와 어스름한 불빛의 식당에서 잔을 부딪치며 위로를 주고받다 보면 그날의 긴장이 사라지고 다시 살아갈 힘이 생기는 것 같은 경우다.

 

밤이 되면 따뜻한 온기와 모닥불 정도의 조명이 있는 공간에서 그날따라 지쳐 보이는 누군가에게 이렇게 말하면 좋겠다.

 

"무슨 일이든, 당신이 옳아요. 너무 고생 많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