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해진미 도시락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휴대폰 옆으로 내쉰 뒤 목청을 가다듬었다. "지갑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 기차 안이고요, 다음 역에 내려 바로 돌아갈 테니까 좀 보관해주시거나 어디 맡겨주실 수 있나요? 사례는 제가 가는 대로 해드릴게요."
"여기 있죠. 갈 데도 없죠." “그래요? 알겠어요. 서울역 어디서 만날까요?" “공항철도 가는 길.. GS편의점......요."
서울역에 도착하고 바로 공항철도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를 발견했다. 에스컬레이터로 내려가자 전방 오른편에 GS편의점이 있었고, 곰의 목소리를 지닌 사내가 도시락에 얼굴을 묻은 채 그 앞에 웅크리고 있었다. 다가갈수록 분명해지는 그의 실체에 그녀는 다시 긴장의 끈을 움켜쥐었다. 대걸레같이 떡이 져 있는 장발의 사내는 얇은 스포츠 점퍼와 더러워져 베이지색인지 갈색인지 모를 면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런 그가 매우 정성스러운 젓가락질로 도시락 속 비엔나소시지를 집어 먹고 있었다. 확실히, 노숙자다. 염여사는 마음을 다잡고 다가갔다.
그때였다. 세 명의 낯선 사내가 도시락을 먹고 있는 그를 향해 달려들었고, 염 여사는 놀라서 다가가던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세 명의 하이에나 같은 사내들 역시 노숙자임이 분명했는데, 그들은 도시락 사내를 누르고 뭉갠 채 무언가를 뺏기 위해 안간힘을 써댔다. 그녀는 주위를 돌아보며 발을 동동 굴렀지만, 지나는 사람뿐이었다.
“ 주민번호 말해 봐요” “오이공칠이오-------됐어요?” 사내가 동의를 구하는 눈짓과 함께 주민등록증을 지갑에 넣고 다시 파우치에 담아 건넷다. 염 여사는 파우치를 받았다. 한바탕 소동이 정리되는 기분이 들자 사내에게 고마움이 물결치기 시작했다. 다른 노숙자들에게 맞아가면서까지 파우치를 지킨 것부터 주인에게 잘 돌려주기 위해 꼼꼼하게 확인한 것까지. 사실 어지간한 책임감이 아니면 할 수 없는 행동이기 때문이었다.
숙명여대 방향으로 접어든 염 여사는 사내를 꼬리처럼 매단 채 골목을 두어 번 지나 작은 삼거리에 다다랐다. 삼거리로 갈라지는 모퉁이에 자리한 편의점. 그곳이 염 여사가 소유한 작은 사업체였고, 사내에게 다시 도시락을 제공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편의점 문을 열고 염 여사가 사내에게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사내는 쭈뼛거리다가 그녀의 뒤를 따랐다.
"마음껏 골라 먹어요
여기 내가 운영하는 편의점이니까 눈치 보지 말고 마음껏."
"그럼 음 엥?"
입맛을 다시던 사내가 갑자기 입을 벌린 채 멍해졌다.
"왜요? 먹고 싶은 게 없어요?" "박찬호 도시락 없어요.....!
"여긴 GS편의점이 아니에요. 박찬호 도시락은 GS에서만 팔거든요. 여기도 맛있는거 많아요. 한번 골라봐요."
“......박찬호가, 도시락도 잘해요....."
사내의 라이벌 편의점 도시락 타령에 기가 막힌 염 여사는 앞에 있는 제일 큰 도시락을 집어 들이밀었다.
"이거 먹어요. 산해진미 도시락. 이거 반찬도 많고 좋아."
도시락을 받아 든 사내는 신중하게 반찬의 가짓수를 세어보았다. 12찬이다. 그거면 노숙자에겐 수라상이다. 이 녀석아. 염 여사가 도시락을 탐구하듯 살피는 사내를 보며 속엣말을 했다. 확인이 끝났는지 사내는 고개를 들고 그녀에게 꾸벅 인사했다. 그러고는 마치 자기 지정석인 양 가게를 나가 야외 테이블로 향했다. 녹색 플라스틱 야외 테이블은 금세 사내의 작은 식탁이 되었다.
편의점으로 들어가 종이컵에 물을 따라 온 염 여사는 그것을 사내의 옆에 내려놓은 뒤 맞은편에 앉았다. 그녀는 사내가 도시락 먹는 걸 바라보았다. 겨울잠을 자고 나와 배고픈 건지 겨울잠을 자기 위해 영양을 채워야 하는 건지, 아무튼 꿀통 파먹는 곰 꼴이다. 노숙자라면 하루 세 끼 온전히 먹기도 힘들 텐데, 덩치는 또 왜 저렇게 좋은 걸까? 그녀는 노숙자가 살이 찌는 게 빈곤층의 비만율이 높은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닐까, 생각했다. 아니면 너무 허겁지겁 먹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천천히 먹어요. 아무도 안 뺏어 먹으니까."
그날 밤, 집에 와 TV를 보며 까무룩 잠이 들었던 염 여사는 전화벨 소리에 깼다. 액정을 보니 '아들'이란 단어가 떠 있었고 시간은 자정을 막 지나고 있었다. 그 두 가지 조합이 주는 부담에 배 속에서 신물이 올라오는 걸 느끼며 전화를 받았다. 역시 취기 가득한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에서 들려왔다. 아들은 그녀가 부산에 다녀온 줄도 몰랐고 그녀의 생일이 내일인 것도 몰랐다. 그럼에도 염 여사를 사랑한다고, 사랑함에도 효도를 잘 못 해 죄송하다고 말했다. 반복된 레퍼토리의 결말은 역시 '편의점의 상태'에 대한 존재론적인 질문이었다. 염 여사는 네가 신경 쓸 것 없다고 말했다. 아들의 대답은 늘 그렇듯 장사가 안 되는 편의점을 정리해 자신의 사업에 필요한 자금을 대면, 어머니가 더 여유 있고 평온하게 사실 수 있다는, 뜬구름 잡는 소리였다. 참다못한 염 여사는 세게 던지고 말았다.
"민식아. 가족한테 사기 치는거 아니다."
“엄마. 엄마는 왜 나를 못 믿어요? 아들이 정말 그럴 사람이야?""역사 교사로 정년을 보낸 내가 한마디 하자면, 국가고 사람이고 다 지난 일을 가지고 평가받는 거란다. 네가 그동안 한 짓들을 떠올려봐라. 너는 너 자신을 믿을 수 있니?"
“휴. 엄마 나 외로워. 누나도, 엄마도, 왜 날 더 외롭게 하는 거야? 가족이? 대체 왜?"
"술주정하는 거면 전화 끊어라." “ 엄마~”
"그럼 그쪽 이름이라도 알 수 있을까요?""몰라요."
"자기 이름도 모른다고요? 나이는요? 전에 뭐 하고 살았어요?"
"모, 몰라요." “휴."
말은 텄는데 답은 모르쇠다.
교감을 하려면 어떻게든 서로의 호칭을 정리해야 했다. "그럼 내가 그쪽을 어떻게 불렀으면 좋겠어요?"
사내가 대답 대신 서울역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돌아가고 싶은 건가? 자신이 아는 유일한 공간으로, 그때 그가 고개를 돌려 염 여사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독......고.......” "독고?" "독고…………… 다들..…… 그렇게 불러요.” "성이 독고예요, 이름이 독고예요?" "그냥...... 독고.” 염 여사는 한숨을 쉰 뒤 고개를 끄덕였다.
염 여사는 독고 씨라 불리는 사내의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눈으로 배웅했다. 독고, 홀로 고독하다는 뜻일까? 아니면 독거인으로 살아서 독고라 불리게 된 걸까? 이름만큼이나 쓸쓸한 그의 뒷모습을 그녀는 당분간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창고로 물품 박스를 다 옮기고 검수까지 마치고 나자 자정이 지났다. 이제는 발주한 물건을 진열해야 했다. 그래서 다시 꼬박 세 시간을 더 도토리 나르는 다람쥐처럼 창고와 진열대, 워크인을 오갔다. 끝나고 나니 새벽 네 시. 그녀는 카운터에 상체를 기댄 채 감기는 눈에 힘을 주며 하품을 했다. 그나마 손님이 없어서 다행이지만 그랬으면 큰일 날 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손님이 없어 다행이라는 생각,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가게가 망할 징조이지 않은가.
그때 딸랑 소리와 함께 요란한 욕설을 앞세운 일군의 무리가 편의점으로 들어왔다. 20대 초반의 취기 가득한 여자아이 둘과 역시 술 취한 남자애 둘이었다. 노란색과 보라색으로 염색한 두 여자아이는 연신 욕설을 섞으며 자기들끼리 떠들었고, 남자애들은 음흉함과 허세가 섞인 말투로 그 아이들의 비위를 맞춰주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숙대생은 아니고 남영역 쪽 술집에서 한잔하고 넘어온 아이들인 듯싶었다.
“아이 씨발, 여기 붕어싸만코 없잖아!" "아냐 여기 있잖아. 떡붕어싸만코!" “떡 싫다고. 존나 싫다고!" "바보야. 그럼 떡 없는 붕어싸만코 실컷 찾아. 난 비비빅 먹을 거야!” "니네 싸만코가 뭔 뜻인지 아냐? 싸고 양도 많고거든!”"뭐래. 아직도 싸만코 찾아? 아 근데 왜 비비빅 없어? 팥 먹고 싶은데 씨."
주저리주저리 떠들며 욕하는 그들의 모습에 염 여사의 미간이절로 찌푸려졌다. 참아야 한다. 취한 애들한테 뭐라 말해봐야 들어먹을 것도 아니고.
"여기 바밤바 있다. 바밤바나 처먹어!" "바보야. 바밤바는 밤이고! 나팔 먹고 싶다고!!" "팥 먹고 싶음 팥빙수 먹어. 여기 있네!" "개추운데 뭔 팥빙수야. 이런 팥, 빙신아!" "뭐야? 이 씨발이 뭐래? 아 니미..""이봐요, 학생들!!"
도저히 참다못한 염 여사가 소리쳤다. 뒤이어 남의 매장에서 함부로 욕하지 말고 빨리 사서 집에 가라는 말을 마구 쏘아붙였다. 결국 욱하고 말았다. 욕하는 아이들에게 알레르기 증세를 보이는 그녀는 그들의 저속한 발언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염 여사의 학생도, 단정한 청년들도 아니었다. 오히려 술 취한 불량배라 할 수 있었고, 급기야 염 여사를 향해 인상을 구긴 채 다가오는 네 명의 마귀가 되어 있었다. 긴장한 염 여사는 침을 꿀떡 삼켰다.
앞서 다가온, 머리를 노랗게 염색한 여자애가 바닥에 침을 뱉었다. "할매. 할매 구미호야? 목숨 몇 개 있어?" "너희들이 먼저 소란 피웠잖니. CCTV에 다 나올거야."
염 여사는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며 경고했다. 그때 보라색 여자애가 염 여사 앞에 들고 온 붕어싸만코를 부서질 듯 내려놓았다. "계산이나 해. 확 붕어눈깔 만들어버리기 전에!"
두 여자애는 깔깔 비웃으며 염 여사에게 당장이라도 손찌검을 날릴 태세였고, 사내애 둘은 뒤에서 이 광경을 보며 실실거리고 있었다. 순간 염 여사도 독이 올랐다. 염 여사는 물러나지 않기로 했다. "너희들에게 안 팔아. 나가. 안 그러면 경찰 부를 테니까." 그러자 노란 여자애가 붕어싸만코 하나를 집어 들더니 염 여사의 머리를 톡쳤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염 여사는 눈만 똥그랗게 뜨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할매. 할매 아까 뭐랬어? 이봐요 학생들? 우리가 어딜 봐서 학생이야? 씨발 꼰대들은 걸핏하면 젊은 사람 다 학생이래. 나 학교 안다니거든. 나 할매 같은 선생 죽빵 날려 퇴학당했거든!"
노란 여자애가 다시 붕어싸만코로 염 여사의 볼을 치려는 순간, 염 여사가 여자애의 손목을 꽉 잡아버렸다. “너 혼나볼래 진짜!"
염 여사는 있는 힘을 다해 여자애의 손목을 꽉 잡았다. 노란 여자애는 기성을 지르며 반항했지만 그녀의 악력을 이기지 못했다. 오히려 염 여사가 손을 놓자 반항하던 힘을 어쩌지 못하고 털썩 주저앉았다. 그 모습에 보라색 아이가 염 여사의 어깨를 틀어쥐었고, 염여사는 반사적으로 여자애의 머리채를 잡아 붕어싸만코가 놓인 계산대 위로 눌렀다.
“붕어눈깔로 만든다고? 그게 어른한테 할 소리니?”
염 여사는 보라색 여자애의 발악에도 한동안 그녀의 머리를 흔들어 혼을 쏙 빼준 뒤 놓아주었다. 곧 여자애는 정신이 다 나간 표정으로 가쁜 숨을 내쉬며 기침을 캑캑 해댔다. 그러자 사내놈들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염 여사는 서둘러 유선 전화기의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이대로 놔둔 채 시간이 흐르면 가까운 지구대로 자동으로 연결이 된다.
"노인네가 진짜 뒈지려고 환장했나!" 사내애 하나가 포스기를 부술 듯 달려들었다. 놀란 염 여사가 계산대 끝으로 물러났다. 그러자 녀석은 피식 웃으며 수화기를 들더니 유선 전화기에 올려놓았다. “누군 편의점 알바 안 해본 줄 아나? 수화기 왜 내려놓는데? 경찰불러 뭐 할 건데?" 실수였다. 수화기를 내려놓기보다 포스기 긴급 버튼을 눌렀어야 했다. 녀석은 다시 한번 히죽이고는 일행에게 외쳤다. "야! 처발러! CCTV 녹화기 챙기면 돼. 돈도 챙기고!”
염 여사는 등골이 차가워지는 걸 느끼며 꼼짝할 수 없었다. 사내놈들이 흥분한 채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고 여자애들은 포스기에 달려들었다. 겁에 질린 염 여사는 어찌할 바 모른 채 손만 떨고 있었다.
그때 딸랑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야...... 이...... 개자식들아!"
천둥이 치는 것 같은 목청이었다. 사내애들과 여자애들의 시선이 한순간에 문으로 향했다. 염 여사 역시 간신히 고개를 들어 보니, 독고 씨였다. 분명 독고 씨였다.
“어른한테 이………… 이게 무, 무슨 짓이야!" 쩌렁쩌렁 소리치는 독고 씨는 웅얼거리며 말하던 노숙자 사내도, 엉거주춤 움직이던 병든 곰 같은 모습도 아니었다. 염 여사는 구원의 군대가 강림한 듯 독고 씨를 보며 감탄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젊은 불량배들의 눈에는 독고 씨가 결코 그렇게 보이지 않는 듯했다.
"뭐야 이 개뼉다구는! 앗, 냄새." “이 새끼 노숙자 아냐? 씨발 드러. 재수 좆같네."
사내애들이 동시에 독고 씨에게 달려들었다. 독고 씨는 그들을 상대로 몸으로 버텼다. 말하자면 문을 막아선 채 둘의 공격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것이었다. 사내애들은 독고 씨가 방어로 일관하자 더욱 거칠게 주먹질을 했다. 반면 독고 씨는 이제 공처럼 몸을 말고는 문 앞에 웅크린 채 미동이 없었다.
한동안 악다구니와 구타가 계속되던 중 사이렌 소리가 울려왔다. 여자애들이 먼저 눈치를 챘고 사내애들도 당황한 게 역력해 보였다. 그들은 독고 씨를 밀치고 나가려 했지만 문 앞에 거대한 장애물처럼 버티고 있는 그를 밀어내지 못한 채 코를 틀어쥘 따름이었다.
"아이 씨발 비켜! 비키라고!! 이 똥같은 새끼야!!"
놈들의 발악은 제복 사내 둘이 나타나자 마침내 멈췄다. 그제야 염 여사는 가쁜 심장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느릿느릿 일어나 경찰들에게 문을 열어주는 독고 씨의 커다랗고 듬직한 등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고개를 돌린 독고 씨가 그녀를 향해 찡그린 미소를 지어보였다. 처음으로 보는 웃는 그의 얼굴은 눈가에서부터 흘러내린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독고 씨는 아랑곳없이 피 묻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반창고가 훈장이라도 되는 듯 만지작거리며 독고 씨가 이를 드러냈다. 염 여사는 무어라 더 말하려다가 자기야말로 요새 애들한테 덤벼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쓴웃음을 짓고는 독고 씨를 응시했다. "고맙네요." "바, 밥값...... 한건가요?"
"그럼. 근데 어떻게 마침 온 거예요?" "어르신 밤에 일한다는 거 들었어요. 잠도 안 오고 걱정도 돼서 갔죠." "휴. 난 그쪽이 더 걱정되네요."
"독고 씨가 당당히 나서길래 소싯적에 싸움이나 좀 한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렇게 맞고만 있을 줄은 몰랐네. 마침 순찰차가 왔으니 망정이지 크게 다칠 수도 있었다고요."
“경찰……… 내가 불렀죠." "응?" "부, 부근에...... 공중전화...... 있어요. 애들 시비 거는 거 보고 신고하고 온 거예요....... 그럼 쫌………… 맞다 보면.. 경찰이 구해주니까...."
순간 염 여사의 입이 떡 벌어졌다. 독고 씨는 경우만 바른 게 아니라 머리도 좋다. 무엇보다 날 위해 그렇게 순찰도 돌고 대신 맞아도 줬다. 순식간에 감탄과 감동이 염 여사의 머릿속에 뭉게뭉게 차올랐다. 그녀는 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머리를 벅벅 긁으며 해장국을 먹는 독고 씨를 살폈다.
"소주 한 병 시켜줘요?" 독고 씨의 작은 눈이 커졌다. “......진짜요?"
"근데 이게 마지막 술이에요. 이거 먹고 술 끊는 조건으로 우리 가게 일 좀 봐줘요." 독고 씨의 커다란 머리가 갸우뚱거렸다. "제, 제가......요?"
"독고 씨 할 수 있어요. 곧 날 추워질 텐데 밤에도 따뜻한 편의점에 머물고 돈도 벌고 얼마나 좋아요."
염 여사는 독고 씨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답을 기다렸다. 독고씨는 시선을 피한 채 곤란한 듯 광대를 연신 씰룩이다가 작은 눈을 돌려 그녀를 살폈다.
“저한테 왜...... 잘해주세요?" “독고 씨 하는 만큼이야. 게다가 나 힘들고 무서워 밤에 편의점 못있겠어요. 그쪽이 일해줘야 해요." “나 누군지... 모르잖아요."
“뭘 몰라. 나도와주는 사람이죠.” “나를 나도 모르는데…믿을 수 있어요?"
“내가 고등학교 선생으로 정년 채울 때까지 만난 학생만 수만 명이에요. 사람 보는 눈 있어요. 독고 씨는 술만 끊으면 잘할 수 있을 거예요."
한동안 독고 씨는 자신의 수염을 쓸어대며 입술을 조물딱거렸다. 갑작스러운 제안이긴 하지만 거절당하면 마음이 불편할 것 같았다. 독고 씨에게 손으로 수염 그만 만지작대고 어서 말하라고 독촉하고 싶은 마음이 끓어올랐다.
그때 결심한 듯 독고 씨가 염 여사를 응시했다.
“그럼.. 한병 더요. 한 병만 먹고 끊는 건 좀 억울해서……”
"그러도록 해요. 밥 먹고 나면 내가 가불해줄 테니 사우나가 씻고 머리도 깎고 옷도 사 입고, 응? 그러고 나서 저녁에 편의점으로 와요."
"고마워요."
염 여사는 소주 두 병을 주문했다. 곧 나온 소주 한 병을 그녀가 직접 뚜껑을 따 독고 씨에게 따라줬다. 그리고 자신의 소주잔도 채웠다.
두 사람은 건배로 고용 계약을 마무리 지었다.
김호연 / ‘불편한 편의점’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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