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꽃
눈꽃이 흩날려 나에게로 온다. 달빛에 흩어져 하늘마다 나풀거린다. 사각거리는 만년필 소리를 뒤로 한 채 눈발은 점점 자라나고 있다. 정신을 차려보니 동화 속 한 폭의 그림처럼 하얀, 그야 말로 하이얀 세상이다.
팅커벨이 빛을 내고 백설 공주가 찾아올 것만 같은, 고즈넉한 고요함과 언뜻 윙윙거리는 바람소리가 나를 취하게 한다. 마냥 어린아이처럼 새빨간 무거운 코트를 걸쳐 입고, 바닥에 뒹굴던 모자를 눌러쓰고, 내 키만 한 기다란 목도리를 들러 메고 느릿느릿 길을 나선다.
길을 따라 걷고 또 걸어본다. 눈덩이를 만들어 보기도 하고 크리스마스 캐럴을 흥얼거리기도 한다. 뽀드득 소리가 너무 좋다. 손이 시려워 호호 불기도 한다. 아무도 없는 눈꽃 정원 속에 유난히 큰 달을 벗삼아 순간을 즐긴다. 혼자 있다보면 많은 생각을 갖고, 때론 모든 생각을 지워버리고, 누군가를 그리워하기도 하고, 그 사람을 미워하기도 한다.
눈이 참 좋다. 여유를 잃고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포근함을 주고 주위의 것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새삼 자각하게 한다. 모락모락 김을 내는 헤즐넛 커피 향과 함께 창밖을 바라보는 것도 꽤 낭만적이다. 좋아하는 노래를 들릴 듯 말 듯 틀어놓고 따스한 이불 속에 들어가 조그만 창문 사이로 눈이 내리는 것을 보다 잠드는 것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잠자리다.
언제나 눈이 내릴 때면 시간을 거슬러 그다지 희미하지 않은 코흘리개 시절을 회상해 보는 것도 10대 마지막 자락의 매력이다. 머리끝부터 적셔주는 포근한 차가움이 너무 좋아서 눈이 오면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어찌 할 수 없다. 혼자 좋아서 웃으며 눈발 속을 헤매고, 뛰어다니고, 가만히 서 있었다. 지나가는 발자국마다 하얗게 꽃이 되어 피어난다. 혼자라는 것이 더욱 소중한 순간이다.
눈이 오는 날, 사람이 북적이는 곳에 가보는 것도 좋다. 사람구경은 언제 해도 즐겁기 마련이다. 눈을 털어내는 손놀림도 각양각색이고, 바삐 차안으로 쑥 들어가는 꼬마아이는 무엇이 들어있는지 한아름 종이가방을 들고 간다.
눈이 부실정도로 아름다운 눈송이가 내리는데 눈길 한 번 주지도, 눈 한번 맞춰 주지도 않는 사람도 있다. 눈이 내리는 이 광경을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냥 즐길 법도 한데…. 하이얀 축복을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받아줄 법도 한데…. 시계추에 매달려 세상을 항상 총총 걸음으로만 살아가야 할 정도로 바쁘기만 한 것일까.
인생의 긴 시간에 비하자면 고작 몇 만 분의 일이라고 해도 되겠지. 왜 단편 영화 한 편을 즐기지 못하는지 씁쓸한 마음이 든다. 그러다 괜스레 남의 일에 참견하지나 않는지 두렵지도 하지만 그래도 눈꽃이 거리거리 마다 피었다고 다른 이에게 외치고 싶다.
나는 도서관 앞에 훈훈한 느낌이 배어 나오는 홍차 가게가 맘에 든다. 눈이 오는 날 신발을 툭툭 털며 문을 살며시 연다. 나는 블루 베리 향이 배어 나오는 어둠이 긴 홍차가 좋다. 아기자기한 투명 빛 컵들과 미니 주전자를 한바퀴 돌려 비스듬히 기울이면 나만을 위한 훌륭한 대접이 된다. 가장 좋아하는 사람을 만날지도 모를 문을 열 때부터 갖던 기대감이 감미로운 축제를 준비라도 하는 듯 행복감으로 찾아온다. 시리도록 얼어 있는 볼을 은은한 따뜻함으로 감싸 안아준다.
나는 눈이 오는 날이 그냥 좋다. 눈이 오는 날에는 내가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해도 되는 자유를 선사 받은 것 같다. 수줍은 고백을 했던 그 아이가 그렇게 보고 싶어도 그것은 비가 주적주적 내릴 때의 슬픔보다는, 행복했던 날들의 파노라마 한 편을 떠올리는 색다른 그리움이다.
마음 한 켠에 피가 나고 곪아, 포기하려 했던 나의 모습도 눈꽃과 함께 살포시 녹아 돌아간다. 어설픈 잠에서 깨어났다. 무척이나 어둡다. 시계가 새벽,한밤중, 늦은 밤 셋 중 하나를 가리키는 것 같다. 모두 잠에 들어서 일까? 적막함이 혼자만 깨어 있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어둠아래 빛 가운데 홀로가 되었다. 을씨년스럽게도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진다. 어울리지 않는 무더위가 나를 무기력하게 하는 이런 여름날에는, 눈송이가 그리워지기 마련이다. 숨을 쉬고 춤을 추다 황홀히 떨어지는 눈꽃처럼… 나는 다른 이의 가슴에 눈꽃처럼 머물고 싶다.
신 수 / 전주 상산고 1년 (2004년)
아름다운 글입니다.
무디고 무딘 우리들 가슴에 한줄기 눈물같은 서정이 내려와 앉게 합니다.
2004년 겨울 무등일보에 실린 글로 해마다 겨울이 되면 읽어보는 글입니다.
제가 뽑은 최고(最高)의 수필이고 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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