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Best 20

문득 사람이 그리운 날엔 시를 읽는다

송담(松潭) 2019. 3. 9. 07:24

 

 

문득 사람이 그리운 날엔 시를 읽는다

 

 

 

 

 

 

술에 취하여

나는 수첩에다가 뭐라고 써 놓았다.

술이 깨니까

나는 그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세 병쯤 소주를 마시니까

다시는 술 마시지 말자

고 써 있는 그 글씨가 보였다.

 

 

처음 이 시를 발견하고 나서 !’ 하고 감탄을 했다.

어쩌면 이렇게 내 마음을 잘 표현해 놨을까.

번번이 후회할 행동을 하고 반성하지만 참 변하지 않는 나에게

반성16’은 자화상과도 같은 시다.

 

유치한 연애시를 좋아하던 학창시절을 지나

어느 순간 나이 들어 버린 나에게 시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심각한 말썽꾸러기였던 10대인 나를 측은한 눈으로 돌아보게 만들고.

막연히 모든 것이 두려웠던 20대의 나를 이해하게 만들고,

파란만장했던 30대의 나를 웃음으로 껴안게 만든다.

 

그리고 삶의 많은 것들을 실패하며 살다보니

알게 된 소중한 사실 하나가 있다.

모두 혼자 살아가는 것 같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대부분 다른 것들에 기대여 산다는 것이다.

꽃은 바람에 기대어 살고, 바람은 구름에 기대여 살며,

상처받고 또 상처받아도 사람은 사람에 기대여 산다,

 

그래서일까?

외로운 날에 시를 읽으면 문득 누군가가 그리워진다.

정채봉 시인의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을 읽으면

치매로 요양병원에 계신 엄마가 저절로 떠오르고,

오세영 시인의 언제인가 한번은이란 시를 읽으면

젊은 나이에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간 동생 재규가 생각난다.

시를 읽으며 누군가를 떠올렸을 때 어떤 기억은 쓰리고 아프며,

어떤 기억은 나를 저절로 미소 짓게 만든다.

 

나는 어떤 시를 닮았을까?

그들에게 나는 어떤 기억으로, 어떤 시처럼 남았을까?

돌이켜 보면 나도 지금껏 살면서 참 많은 사람들과 만났다.

그러나 지금 내 곁에 남아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 사실이 조금은 나를 슬프게 하고, 조금은 쓸쓸하게도 하지만

괜찮다. 용서를 빌 사람에게는 용서를 빌면 되는 일이고,

나한테 큰 상처를 준 사람은 잊으면 될 일이다.

그리고 살면서 내가 잘해야 하는 사람들은

지금껏 내가 무슨 짓을 했건 간에 내 곁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다.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하늘이 맑거나

별이 유난히 총총한 저녁 문득 사람이 그리운 날엔 시를 읽는다.

당신은 지금 뭐하고 있을까?

누군가와 수다를 떨고 있을까?

아주 가끔 나처럼 그 옛날의 서로를 생각하고 있을까?

 

 

박광수 /‘문득 사람이 그리운 날엔 시를 읽는다서문(序文) 중에서

 

 

 

 

 

 

 

 

 

 

 

'공감 Best 20'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앞에 아름다움, 내 뒤에 아름다움  (0) 2020.01.22
눈꽃  (0) 2019.12.22
봄날은 간다  (0) 2019.04.30
사랑이 떠난 아픈 자리에  (0) 2015.07.14
모란이 필 때 보았던 당신  (0) 2012.0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