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떠난 아픈 자리에 시가 들어와 있다
어느 날 사랑이 그에게서 떠나가자 사랑이 떠난 그 아픈 자리에 문득 시가 들어와 있는, 그는 그러한 시인이다. 이명흠, 그에게 있어 시는 김소월의 경우처럼 아픔의 치유이자 싱싱한 생명력의 슬픈 신명이다. 때문에 그의 시는 김영랑의 경우처럼 「찬란한 슬픔의 봄」같은 사랑에 대한 눈물겨운 헌사이다. 그의 백 편 가까운 시들 가운데 가장 빛나는 것은 역시 떠나간 사랑에 대한 것들이다. 그의 시는 쓴 시가 아니고 쓰여진 시이다. 언어를 비틀어 짜지 않고 아픈 가슴을 순하게 투사(透寫)한다. 그는 명징한 눈을 가졌으면서도 눈으로 시를 쓰지 않고 가슴으로 쓴다. 그것은 그의 운명이다.
옷 추슬러,
건강하게 오래오래 혼자 살려고
산에 갔다네.
푸드득 한 생명 날아와
내 앞에 앉은
저 산비둘기도 혼자라네.
전에는 혼자라도 슬프지 않았는데
오늘따라 저 비둘기
왜 그리 초라할까.
왜 슬프게 보일까.
이명흠 / 「산비둘기」전문
당신 보러 만년산에 올랐네
찌르륵 짹짹
새소리
쏴아쏴아, 조올 졸
물소리 예나 같고
당신만 보이지 않네
멀리, 저 멀리
골짜기 타고 산을 흘러
당신 목소리인양 독경소리 슬픈데
어느새 당신은 내 옆에 와 앉네
당신의 숨결 초록 잎으로 파르르 떨리네.
이명흠 / 「만년산」전문
사랑의 시만큼 가슴을 울리는 시는 없다. 그는 지금 혼자 살고 있지만 결코 혼자 살고 있지 않다. 떠나간 사랑과 함께 산다. 그가 시를 쓰지만 사실은 그의 사랑이 쓴다. 그의 시는 그의 의도에 의해서가 아니고 사랑에 의해서 쓰여지는 것이다. 때문에 그의 시는 기교를 동반하지 않는다. 그냥 말하듯 뱉어내는데, 그것이 시로 앙금지고 있는 것이다.
모든 시는 그것을 쓴 사람의 가슴의 독특한 풍경이기 마련이다. 모든 풍경은 보는 자의 눈과 가슴이 입은 상처라는 안경을 통해 프리즘으로 투영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사랑시의 면면은 나의 눈물샘이나 울음보를 자극하여 눈시울을 뜨겁게 하고 코를 시큰하게 한다.
낡고 좁은 방
더 가까워서 좋았고
사치스런 옷자락 없어
순수했다
사랑하는 방법을 몰라 수줍고
가녀린 새가슴 빨갛게 타도
묵언의 눈빛은 행복했다
벌써 수십 세월 흘러
진홍의 가을 잎 떨어질 때면
흠뻑 그날의 그리움으로
오솔길 함께 걷고 싶다
이명흠 / 「그리움」전문
당신이 땅에 묻힐 때
나도 당신과 함께 묻혔습니다
당신의 무덤에 싹이 무성할수록
우리의 사랑도 푸르릅니다
그러나 나의 몸은 지상에 남아
당신을 그리워 합니다
저녁 무렵 현관문을 열면
미소 지으며 당신이 나를 맞을 것 같은데
나를 맞는 것은 썰렁한 냉기뿐
집안은 너무 넓고 고요 합니다
당신이 앉았던 화장대,
당신이 밥상을 마련하던 주방,
당신의 손길이 거쳤던 것들이지만
어쩐지 낯설게 느껴져 슬픕니다
나의 혼은 이미 당신과 함께 묻히고
수수깡 같은 허우대만 혼자 남아
어찌할 줄 모릅니다
오늘도 비가 내립니다
비를 맞으면 온 몸이 아파오지만
비가 오는 날은 당신이 오는 날,
그 비를 피할 수 없어
온 몸으로 비를 맞고 있습니다.
이명흠 / 「당신이 떠난 뒤」전문
그의 시의 무기는 순수이다. 현란한 기교는 성장(盛粧)을 하고 거리를 나서는 것에 비견된다. 기교 왕성한 시는 기교만 보이고 그 순수한 몸을 보이지 않기 마련이다. 시에서 순수는 알몸으로 말하기이다. 부끄러움을 앞세운다면 애초에 알몸이 될 수 없다. 솔직 담백한 몸으로, 몸짓으로 말하기 보다 더 감동적인 시어는 없다. 그의 시는 몸짓이다. 당신이 그의 시들 전편을 읽는다면 내가 지적한 것보다 더욱 많은 감동을 앙가슴으로 보듬게 될 것이다. 나는 순수한 맨 얼굴의 참한 시인을 발견한 즐거움과 이 흥분을 오늘 밤 술 한 잔으로 가라앉혀야겠다.
한승원 / 시인, 소설가
이명흠 / ‘여행 떠난 당신에게 부치는 편지’중에서
< 독자 감상 >
사랑하는 아내를 떠나보낸 아픔의 시로 도종환의 「접시꽃 당신」이 있다. 하지만 이명흠군수의 사랑의 시는 도종환의 그것보다 더 애절했다. 위 글을 타이핑하는 동안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가슴이 울렸다.
사랑하는 님, 그것도 30년을 함께하면서 남편과 자식을 위해 오직 헌신만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허망하게 가버린 아내, 님은 비록 떠났지만 초록의 잎으로 파르르 떨리는 아내의 숨결, 현관문을 열면 반갑게 맞아주어야 할 아내, 그러나 그 자리에 아내는 없고 고요한 슬픔만 자리하고 있다. 비가 오는 날은 님이 오는 날, 그래서 그 비를 하염없이 맞고 걸어야 하는 사람....
시인의 아픔을 공감하면서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되었고, 세상의 많은 사람들도 자신과 관계 맺고 있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말해주는 것 같았다.
내가 지금까지 느꼈던 이명흠군수는 단순히 성공한 지방자치단체의 장, 그리고 정치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시집을 읽고 큰 공감을 갖게 되었고 그분이 왜 성공한 삶을 살 수 있었는지 원인을 찾았다. 며칠 전 군수실에서 자리를 했는데 그분의 얼굴, 피부가 그렇게 맑게 보였다. 나에게 또 하나의 ‘의미 있는 타인(Significant Others)’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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