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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 그 몽상과 실제의 파타피직스

송담(松潭) 2020. 5. 24. 04:52

돌담, 그 몽상과 실제의 파타피직스

Pataphysics¹

 

 

 

싸늘한 돌담에 기대서서 그대가 보낸 편지를 생각한다.

어제 불던 바람과 마른 풀꽃 이름, 붉게 물든 하늘이 접혀 있고

내 옷자락 끝 강물은 어디만큼 흘러갔는가.

지난날 그대와 나는 버선발로 사뿐히 걸어와서 마주쳐도 깜짝 놀라고

두 눈 꼭 감아도 알아맞히는 푸른 길이 있었지

 

-서지월돌담에 기대어 서서중에서

 

 

 

시인에게 돌담은 과거형이 되어버린 영상과 자막을 현재로 복구시키는 재료다. 그렇다고 시인만이 단절과 경계의 돌담을 회상의 통로로 쓰는 것은 아니다. 과거 우리 민족은 파타피직스의 마술사였다.

 

서구 문명은 성벽의 문명이었다. 서구의 모든 문명이 성벽 안에서, 벽돌과 석회로 된 요람 속에서 비롯되었다. 이 성벽은 분리와 지배, 나라와 나라를 가르는 경계, 지식의 독점과 무지의 복종, 자연과 인간을 가르는 것이었다. 이 성벽을 사이에 두고 두 개의 갈등 집단은 항상 맹렬한 투쟁을 했다.

 

반면 숲의 문명이라고 일컫는 인도는 성벽과 같은 대립의 문명이 아니다. 그들은 그저 자연에 둘러싸인 채 사고하고 철학하며 신앙하는 삶을 산다. 자연의 옷을 입고, 또 그 자연의 온갖 모습과 자신들을 일치시킨다. 경계와 단절, 지배와 피지배가 아니라 자연과의 끊임없는 접촉을 위해 광대, 포괄, 상호침투, 조화의 음악처럼 산다. 땅과 돌과 빛과 열매와 꽃들과 조화하는 전일성(全一性)의 문명이다.

 

그러나 서구 사람과 인도 사람의 사고로는 이해 불가능한 것이 우리네 돌담이나 울타리. 아무리 가난하고 쓰러져 가는 초가일망정 담이 없거나 울타리가 없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것은 서구의 지배사고로는 이해 불가이고, 인도의 인간과 자연의 무경계주의로서도 인식 밖이 된다. 산이 겹겹으로 둘러싸여 있는 나라에서, 골짜기 골짜기가 이미 높은 성벽 구실을 하거나 자연 그 자체인 나라에서 무엇 때문에 돌담과 울타리를 쳤을까? 고립과 분열 그리고 지배와 투쟁의 역사 의식적인 생존물일까? 아니다.

 

우리의 돌담은 폐쇄와 개방의 중간쯤에 있다. 밖에서 들여다보면 그 내부가 반쯤 보이지 않던가? 이런 성벽이 어디 있단 말인가! 우리는 늘 그 토담 너머로 다른 집의 마당가에 핀 맨드라미꽃이나 해바라기, 그리고 사립문을 밀고 나오는 그 집 아낙의 상반신도 볼 수 있었다. 그렇다고 담 너머의 풍경을 대놓고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 풍경이란 보일락 말락의 중첩이었으니, 이를테면 반 개방성의 개방성이라고 할까! 그게 돌담이었고 울타리였다.

 

빨간 고추잠자리가 앉아 있는 사립문, 푸른 넌출²에 반쯤 가려진 하얀 박들이 매달려 있는 돌담의 풍경은 리얼리티(reality)라기보다는 몽상(a dream)이었다. 실제의 세계에 설치된 가상의 의식이며, 실용의 세상을 가로지르는 매직스(magix)한 샹그리라(shangri-la)³였다.

 

도둑이 도둑의 마음을 도둑맞을까 두려운돌담이었으니, 도둑을 막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만약 짐승을 막으려고 돌담을 둘렀다면 담 한구석에 일부러 낸 그 개구명은 무엇으로 설명한단 말인가? 담이 있다 해도 그 담의 반발적이거나 고립적인 이미지는 애시 당초에 없었다. 그저 심심해서 그어 놓은 금() 정도라고 할까.

 

이 돌담의 반 개방성, 그것은 분열이면서 통일이고, 고립이면서 소통이며, 폐쇄이면서 동시에 개방이었다. 이 어렴풋한 돌담의 경계선, 말하자면 성벽의 문명과 숲의 문명 중간에 있는 돌담은 이 땅에 사는 생명들의 생존율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모두 부질없는 옛날이야기다. 우리는 돌담 대신 철웅성같은 벽을 쌓아 올린 채 갈등하고 투쟁하고 있다. 사회 어느 분야건 예외가 아니다. 생존의 현장에는 피를 흘리며 고꾸라지는 쪽과 그걸 기쁨으로 취하는 야만이 득실거린다.

 

잃어버린 돌담을 찾아 길을 떠나야 할 아침이다.

 

 

 

 

1.Pataphsics :

 

진중권의 책이미지 인문학10쪽에 등장하는 용어다. 가상과 현실이 중첩된 디지털 생활세계의 존재론적 특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생성된 신조어다. 여기서는 분열이면서 통일인 돌담의 반 개방성 또는 폐쇄와 동시에 개방의 중첩적인 의미를 지닌 돌담을 말하기 위해 차용했다.

 

2. 넌출 : 뻗어나가 길게 늘어진 식물의 줄기

 

3. 상그릴라 (shagri-la) :

 

제임스 힐튼이 쓴 잃어버린 지평선Lost-Horizon, 1933이라는 작품에 나오는 가공의 장소이다. 쿤룬Kunlun산맥의 서쪽 끝자락에 있는, 숨겨진 장소에 소재하는 신비롭고 평화로운 계곡,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고 외부로부터 단절된 히말라야의 유토피아로 묘사되었다. 소설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시간이 흐르면서 이 말은 지상의 어딘가에 존재하는 천국을 가리키는 보통명사가 되었다.

 

 

허태수 / ‘내 생각에 답한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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