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Best 20

그리움의 거리

송담(松潭) 2021. 3. 5. 10:19

그리움의 거리

 

 

사람들은 말한다. 사람 사이에 느껴지는 거리가 싫다고. 하지만 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적당한 간격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오로지 혼자 가꾸어야 할 자기세계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떨어져 있어서 빈 채로 있는 그 여백으로 인해 서로 애틋하게 그리워할 수 있게 된다.

 

구속하듯 구속하지 않는 것, 그것을 위해 서로 그리울 정도의 간격을 유지하는 일은 정말 사랑하는 사이일수록 꼭 필요하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서 상처 주지 않는, 그러면서도 서로의 존재를 늘 느끼고 바라볼 수 있는 그 정도의 간격을 유지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나무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도 서로 간에 간격을 유지하는 일은 너무나 절실하다. 나무 두 그루가 너무 가깝게 붙어 있으면 그 나무들은 서로 경쟁하며 위로만 치닫게 된다. 조금이라도 높이 자라 햇볕을 더 많이 받기 위해서다.

 

그러나 이런 경쟁은 결국 서로를 망치는 길밖에 되지 않는다. 가지를 뻗고 잎을 내어 몸체 구석구석을 튼튼히 다져야 할 시기에, 위로만 자라다 보니 비정상적으로 몸통이 가늘어지기 때문이다. 그런 나무들은 나중에 약한 비바람에도 맥없이 쓰러지며, 그렇지 않더라도 비정상적인 수형을 감당하지 못해 결국 죽을 운명에 처하게 된다.

 

나는 나무들이 올곧게 잘 자라는 데 필요한 이 간격을 ‘그리움의 간격’이라고 부른다. 서로의 체온을 느끼고 바라볼 수 있지만 절대 간섭하거나 구속할 수 없는 거리. 그래서 서로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거리.

 

《어린 왕자》에는 외로움에 지친 어린 왕자와 여우가 서로 친구가 되는 과정이 나온다. 두 사람 모두 다독여 줄 누군가가 절실하게 필요한 상태지만 서로에게 급하게 다가서지 않는다. 네가 필요하다고, 곁에 있어 달라고 자기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지도 않는다.

 

그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서로 인사를 하고 약속을 하며, 서서히 서로에게 길들여질 뿐이다. 원하는 마음은 그대로 남겨둔 채, 적당히 떨어져서 서로를 느끼고 이해하는 것이다.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던진 한마디.

 

"네가 4시에 온다면 나는 3시부터 행복해질 거야."

 

그리움의 간격은 결국 행복의 간격이 아닐까. 애달프고 안타깝지만 어느덧 마음 깊은 곳에서 잔잔한 행복이 배어 나오기 시작한다. 스스로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말이다. 그래서일까. 둘이서 보낸 시간이 사십여 년을 넘긴 지금, 나는 나무와 나무 사이의 거리처럼 아내와 나 사이의 거리가 좋다. 묻거나 확인하지 않고도 서로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그 거리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길이라 해도 / 회양목

 

 

영월 동강에 가면 석회암 지대를 좋아하는 회양목의 자생지가 있어 그 본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나무가 워낙 다듬기 좋은 탓에 어느 정원에서나 많이들 키우고 있다. 너무 흔해져 버린 탓일까. 회양목을 보면 "아, 저 나무구나"하고 알아보는 이는 많아도 정작 회양목의 특성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나무는 워낙 볼품이 없다. 아무리 크게 자란다고 해도 나무의 직경이 한 뼘을 채 넘지 못하고 키도 짤막하다. 다른 나무 사이에 있으면 그저 소박한, 이름 없는 나무 정도로 인식되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자라는 모습을 알고 나면 관심 없던 사람이라도 한번쯤 돌아보게 되는 게 바로 회양목이다. 나무의 직경이 한 뼘 정도 되려면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할까. 한 10년? 길어야 20년? 그러나 회양목이 그 정도의 직경을 가지려면 최소 500년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 주변에 웬만큼 나무 모양새를 갖춘 회양목이 있다면 최소한 증조부 때부터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고 생각하면 맞다.

 

느림보라는 별명이 꼭 어울리는 회양목, 그러나 그렇게 더디게 성장하는 동안 회양목은 그 속을 다지고 또 다져 그 어떤 나무와도 비교할 수 없는 단단함을 지닌다. 더디 자라는 만큼 조직이 치밀하고 균일해져 그 어떤 충격에도 뒤틀리지 않는 견고함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단단함은 귀한 가치를 지녀 도장을 만드는 훌륭한 재료로 쓰인다. 우리가 흔히 갖고 있는 나무 도장들이 대부분이 회양목으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래서 예로부터 선조들은 회양목을 가리켜 '도장나무'라 불렀다.

 

하늘 높이 자라서 멋진 그늘을 만드는 나무를 좋아하는 사람들, 하지만 빨리 자라서 크게 가지를 뻗는 속성수일수록 그 속은 단단하지 못하다. 성장하고 꽃 피우는 데 모든 것을 소모한 나머지 내실을 다질 여력이 없는 것이다. 그런 나무들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 몰라도 생명이 다하고 나면 혼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긴 시간 더디 자라며 결국엔 그 값어치를 발휘해 단단한 도장으로 쓰이는 회양목, 그리고 헤이온 와이를 전 세계적인 책 마을로 만든 부스.

 

나는 기나긴 시간 동안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길을 걸었던 그에게 박수를 보낸다. 당장은 인정 받지 못하더라도 자기가 가고자 하는 길을 묵묵히 가는 그 모습이 얼마나 위대하고 멋진가. 그리고 생각에 본다. 내 안에는 과연 기나긴 시간 더디면 더딘 대로 그렇게 노력해 온 무연가가 있는지를.

 

 

 

나무야 아프지마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의학 드라마를 본 적이 있단다. 주인공 의사가 의대에 다닐 때의 일이었는데, 그는 해부학 실습을 나가는 것이 무척이나 끔찍해했지. 첫 번째 수업이 가까워지자 저도 모르게 구역질을 할 정도였으니까. 그는 내심 자신이 의대를 무사히 마칠 수 있을지 조차 의심스러워했지. 그런데 그는 동기들 중 가장 좋은 성적으로 해부학 수업을 마칠 수 있었단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그건 바로 첫 수업 시간에 담당 교수가 했던 말 때문이었어. 그 교수가 그랬단다.

 

"의사는 신이 바빠서 대신 지상으로 출장 보낸 사람이다. 그래서 신만이 관장하는사람 목숨을 다룰 수 있는 거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런 말을 했지.

“환자가 우리 손에 생명줄을 맡겼는데 신은 아니어도 가깝게 가봐야 되는 거 아냐?"

 

아마도 그건 의사로서의 소명이었을 게다. 신을 대신해 사람 목숨을 다루는 것, 그게 의사의 소명이라면 나의 소명은 무얼까. 감히 말하지만, 그건 신을 대신해 너의 목숨을 다루는 일이 아닐까 싶다. 자연의 품을 떠나 모든 악조건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너, 그래서 더 이상 신의 축복 아래 머물 수 없는 너에게, 신을 대신해 자연을 대신해 미약하나마 배려의 손길을 보내는 게 나의 천직일 것이다.

 

 

좀 바보 같으면 어떻습니까? / 노간주나무

 

 

이른 봄 자하문 터널을 지나 인왕산 산자락 상명대 삼거리를 지나 본 적이 있는지. 그곳에 가면 노간주나무와 함께 진달래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걸 볼 수 있다. 노간주나무가 보인다 싶으면 그 옆에는 영락없이 진달래꽃이 얼굴을 들이밀고 있다. 생긴 것도 비슷하지 않은데 두 나무가 어떻게 무리를 이뤄 한데 자라고 있는 걸까.

 

그건 다 노간주나무 덕이다. 쉽게 말해 노간주나무가 진달래를 먹여 살리는 거다. 이른 봄 바위 틈에 먼저 자리를 잡는 건 노간주나무다. 그러면 어디선가 흙과 먼지가 흘러 들어와 그 견고한 돌 위에 작은 토양이 생긴다. 아니 자연적으로 생겼다기보다, 일단 뿌리를 내린 노간주나무가 제가 살아가기 위해 토양을 마련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어렵게 마련한 토양 위에 어느새 진달래 씨가 날아든다. 마치 노간주나무가 먼저 자리 잡길 기다렸다는 듯.

 

노간주나무 입장에서야 저 먹고 살기도 빠듯한 형편에 갑작스럽게 찾아 든 손님이 영 불쾌할 법도 하다. 그러나 노간주나무는 찾아 든 손님을 절대 식객 취급하지 않는다. 아무리 흉년이 돌어도 찾아오는 거지에게 눌은밥 한 사발이라도 들려 보내는 그 옛날 어머니 인심처럼 진달래를 넉넉한 마음으로 맞아들인다. 그리고는 제 몸 웅크려 자리를 내주고 더불어 함께 산다. 어쩔 땐 식구가 더 많아 진달래 틈에 노간주가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처음 노간주나무를 봤을 땐 그랬다. 참 보 같다고, 제 코가 석 자면서 남 다 퍼 주는 놈이 어디 있냐고,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내게는 노간주나무의 그런 바보 같은 모습이 오히려 사랑스럽다. 사람도 그렇지 않은가, 제 것만 챙기는 사람보단 형편이 어려워도 주변 사람 도와주며 허허거리는 사람이 더 정겹지 않은가.

 

겉보기엔 답답해 보일지 몰라도,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결국에 다시 찾게 되는 건 그런 바보 같은 사람이다. 가끔 사람과의 일로 괴로울 때, 뭔가 억울한 일이 생길 때 나는 노간주나무를 떠올린다. '일평생 불평 않고 그렇게 사는 놈도 있는데'라고 스스로 위로하며 말이다. 도봉산에 있는 노간주나무는 오늘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좀 바보 같으면 어떻습니까? 좀 손해 보면 어떻습니까? 어차피 더불어 사는 세상 아닙니까?"

 

 

박수 칠 때 떠날 것 / 동백나무

 

 

 

한겨울 설경 위에 다섯 장 꽃잎으로 단아하게 단장한 동백꽃을 본 적이 있는지. 절개를 지킨 여인네가 죽어 동백꽃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던데 딱 맞는 말이지 싶다.

 

그러나 내가 동백꽃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때는 한창 꽃이 피었을 때가 아니라 오히려 그 꽃이 몸뚱이로부터 떨어져 나갈 때다. 눈발 휘날리던 거문도에서 나는 그 모습을 보았다. 때는 2월, 눈을 보기 힘든 거문도에 그날은 바다를 덮을 정도로 엄청난 눈이 내렸다. 마을 주민 한 분은 육십 평생에 거문도에서 이런 눈을 보긴 처음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평생 가야 한번 볼까 말까 한 남쪽의 설경. 그것도 기이한 일인데, 마치 영화에서처럼 휘몰아치는 눈보라에 몸이 휘청거릴 정도였다.

 

그런데 눈을 뜨지 못할 정도로 후려치는 그 바람결에 동백꽃이 꽃송이째 후두둑 떨어졌다. 아니 떨어졌다기보다는 쏟아져 내렸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이다. 하늘에서 꽃이 내리는 느낌이랄까. 몰아치는 눈발과 어우러져 일제히 쏟아지는 동백꽃에 한동안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렇게 일사불란한 낙화의 순간도 잠시, 흰 눈밭 위는 온통 떨어진 동백꽃으로 가득했다. 하얀 눈 위에 붉게 떨어진 핏빛자국, 그렇게 붉은 빛에 취해 얼마나 셔터를 눌러댔는지..

 

한겨울 붉은 꽃으로 보는 이를 숙연하게 만드는 동백꽃. 그 꽃은 꽃잎 하나 시들지 않은 채 꽃송이 그대로 툭 떨어져 생을 마감한다. 한 치의 미련 없이 그렇게 생을 마감하는 모습을 보

고 있노라면 왜 그를 순교자에 비유했는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거문도 눈밭 위에 떨어진 동백꽃을 보고 한순간 사라져 버린 아름다움이 얼마나 안타깝던지, 가져갔던 필름을 온통 동백꽃 사진으로만 채워 왔다. 조금 더 살 수도 있었을 텐데, 그냥 꽃잎 한 장씩 떨구며 사라져도 그 선연한 아름다움에 시비를 걸 사람은 없을 텐데.

 

그러나 결국 나로 하여금 동백나무를 가슴 안에 담게 한 것도 그 장렬한 낙화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한창 아름다움이 절정에 다다랐을 때 그 모습 그대로 떨어지는 걸 보면 어떤 말도 감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다.

 

떠나는 뒷모습이 아름다워야 진정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했던가. 그러나 나설 줄은 알아도 물러설 줄은 모르는 게 우리네 사는 모습이다. 고백컨대 나 역시 생활 여기저기서 물러서지 못하는 마음을 자주 들키곤 한다.

 

그러나 그게 어디 생각만큼 쉬운 일이던가. 절정의 순간에 물러서야겠다는 이 생각도 나중에 어떻게 바뀔지 솔직히 자신이 없다. 그때는 다시금 동백꽃이 지는 모습을 보러 가야겠다. 박수 칠 때 떠나야한다는 사실. 떠난 자리가 아름다워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기에.

 

 

우종영 / ‘나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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