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Best 20

식탁 위의 약봉지

송담(松潭) 2022. 10. 29. 02:40

식탁 위의 약봉지

 

 

어느 시인이 '봄의 선구자'라고 찬양하던 진달래가 매봉의 서북기슭을 연분홍으로 뒤덮었다. 벌써 여섯 달째나 병원을 찾고 약을 먹는 나는 우울한 마음을 안고 숲속으로 들어섰다.

 

자연보호단체에서 가꾸는 것으로 보이는 투구꽃. 금불초꽃. 창포. 벌개미취. 비비추구절초. 참나리 .뱀딸기. 층꽃풀 따위가 무리 지어 새 싹을 틔우고 있으니 산책길은 생기가 감돈다.

 

매지봉과 종지봉을 정점으로 청계산을 바라보며 뻗어 내린 산기슭에는 소나무.참나무. 아카시아 나무가 주종을 이루고 노간주나무를 비롯한 잡목이 섞여서 우거진 모습이 발걸음을 가볍게 하고, 지저귀는 새소리와 딱따구리의 나무 찍는 소리가 귀를 기울이게 한다.

 

꽃과 나무와 새들은 우울한 마음을 위로해 주려는 듯 나를 반겨주지만 내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우울의 씨앗은 쉽사리 숨을 죽이지 않는다. 형수님의 타계에 잇달아 받았던 뜻밖의 충격은 나를 항상 우울하게 만든다. 직장에서 퇴임하고 각종 학회와 연구소에 관계하고 잡문도 쓰고 있지만 즐거움이나 보람을 느끼기는 어렵다.

 

길 위에 쌓여 있는 솔잎을 밟으며 등성이를 올라가노라니 많은 잡념이 스친다. 내 발에 짓밟히는 낙엽은 50여 년 전에 집을 나간 셋째 형님이 땔감으로 긁어모았던 바로 그것이었다. 부모와 형제와 조카들을 위하여 그토록 부지런하던 형님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 좋아하던 소설은 얼마나 읽고 피리는 얼마나 불고 있는지.…. 벌써 74세나 되는 늙은 몸이니 살아 있어도 건강을 유지하기는 어려울 것이고 세상을 버렸으면 유해는 어떻게 되었는지…

 

길 위에 노출된 나무뿌리들은 상처투성이가 되어 짓밟히고 있다. 다만 감각이 없을 뿐, 사람이나 다를 바 없는 생명체가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숲은 빽빽하다. 산림녹화사업으로 가꾸어진 소나무들은 너무나 빽빽하여 숲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나무를 솎아 낼 수밖에 없다고 한다. 서까랫감이나 더러는 기둥감으로 쓰일 만한 소나무들이 즐비하게 쓰러지고 동강 나 있다. 노간주나무와 같은 잡목들도 무참히 베어지고 어지럽게 널려 있다.

 

이미지 출처 : Freepik

 

숲은 언제나 평화롭게 보인다. 그러나 감각도 지각도 없는 초목들도 동물이나 사람처럼 치열한 시련과 고통을 겪는다고 한다. 무엇 때문일까. 얼어붙는 추위와 무서운 병충해에 견뎌야 하며 이웃과 경쟁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란다. 초목은 바람을 쐬어야 하고 햇볕을 쬐어야 한다. 그러나 밀도가 높은 환경에서는 그것이 어렵다. 먼저 자라난 큰 나무에 가리어 일조권(?)을 빼앗긴 작은 나무들은 탄소동화작용도 어렵고 기형적으로 웃자라기만 하다가 종당에는 시들어 버리고 만다.

 

어두운 동굴 속에서 스며드는 햇살을 바라보듯 좁은 공간을 향하여 머리를 들이밀지만 속절없이 숨지고 만 나무들이 처참하다. 싸움터에 버려진 사람의 시신이나 다를 것이 없다. 말라죽은 나무들을 바라보니 측은한 마음을 누를 길 없다. 그러나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종지봉의 뒷길을 돌아 매봉 약수터로 가노라면 뿌리가 뽑힌 나무가 여기저기 누워 있다. 아카시아나무도 있고, 낙엽송도 있고, 버드나무도 있다. 이웃한 나무와 함께 누운 것도 있고 홀로 넘어지다가 뿌리는 뽑혔지만 줄기 끝은 다른 나무에 가까스로 걸려 고개를 쳐든 것도 있다. 그러나 벌써 물이 말라서 한두 가닥의 가지만이 겨우 새싹을 틔우고 있을 뿐이다.

 

햇빛을 못 보아 말라버리고 뿌리를 깊이 박지 못하여 쓰러져 죽어 가는 나무들은 운명의 비극을 가슴에 묻고 사라져 간다. 그러나 그들은 말이 없다. 그저 조용히 사라질 뿐이다. 생명은 끊어지고 몸통은 썩어가고 사지는 떨어져 나간다.

 

약수터의 모롱이에는 무덤이 보인다. 허물어진 봉분 위에는 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이 자랐으니 연고 없는 무덤임에 틀림없다. 당초에는 양지바른 곳에 정성껏 모셔진 무덤이지만 이제는 잊히고 버림받은 황무지가 되고 만 것이다. 잘 살피지 않으면 무덤의 형체를 알아차릴 수도 없으니 지나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도 못한다. 죽은자는 그저 그렇게 그곳에 있을 뿐이고, 자연의 품속에 종적을 감추는 것이다.

 

광교산 너머로 구름이 물들 무렵, 마른나무 지팡이를 끌면서 탄천을 건넜다. 식탁 위의 약봉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2000, 4.16)

 

지교헌 / ‘방황과 고뇌의 세월, 나의 참회록’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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