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Best 20

김수미/ ‘살아남기’중에서

송담(松潭) 2024. 2. 19. 05:06

김수미/ ‘살아남기’중에서

 

 

 

김수미

1975년 3월 전남 순천에서 태어났다.

제18회 공무원문예대전에서 동상을 수상하였고

현재 시골 우체국에서 근무하고 있다.

 

 

< 1 >

 

살아남기 13

 

 

부자되세요 BC카드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가를 말해줍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나는 친구의 말에

그랜져로 대답했습니다

TV가 뭐라하든 광고가 뭐라하든

내 지갑 안의 삶을 살아야 한다

자본이 주인인 시대에

자본주의의 한 가운데 금융업무를 하면서

몇억짜리 수표는 나에겐 종이

내 지갑 안에 만 원짜리가 실제

허구와 실제를 구별해야 한다

가끔 이렇게 추적추적 겨울비가 내리면

불야성을 이루는 자본의 함성에

기죽지 말고

눈요기로만 즐겨야 한다

그렇지 못하거든

밤하늘에 별이나 실컷

바라보아야 한다

아직도 꿈꾸는 자본이 아닌 꿈을 향해

주파수를 맞춰야 한다

 

 

< 2 >

 

살아남기 14

 

바람을 맞으며 강변도로를 달린다

 

갈 때는 순풍이더니

오늘 길엔 역풍이다

 

힘겹게 페달을 굴리며

역풍에 맞서며

 

때론 인생길도 역풍이 불 때가 있다고 생각한다

 

삼재라든지

악재라든지

사람의 힘으로 견디는 것이

버거울 때가 있다.

 

그래도

페달을 굴려야 한다

 

바람은 머지않아 처한 상황에 따라서는 조금 오래겠지만

방향을 바꿀 것이다

 

이미지 출처 :Love Pik

 

 

 

< 3 >

 

살아남기 35

 

벚꽃이 피었다 지는지도 모르고

철쭉이 빨간지 하얀지도 모르고

앞만 보고 뛰지만

러닝머신의 기계가 돌 듯

늘 제자리기 만한 내 모습

오늘도 상사에게 원투펀치 맞고

고객에게 잽 세대 맞았더니

눈앞이 핑그르르

KO되기 직전 집으로 돌아와

나만 바라보는 늙으신 어머니와

매운맛 짠맛 설움 풀어

김치찌개를 먹는다

 

맷집으로 버틴다

 

 

< 4 >

 

살아남기 50

 

1등을 바람막이로 쓰는

스케이트 선수처럼

등 뒤에서 간다

쉬어 간다

 

쓰임 받지 못한

재야의 고수들이

어디 한둘이더냐

 

등 뒤에 바짝 붙어

쳐지지 말고

 

 

< 5 >

 

살아남기 79

 

힘든 하루 일을 마치고

아이를 데리고 오는 길에

김밥집에 들른다

부쩍 오른 물가 탓에

분식집은 오히려 호황이다

아이에게 치즈돈까스를 시켜주고

난 오뎅을 먹는다

옆 테이블에서는

씩씩한 남정네들이

김치볶음밥을 남김없이 비워낸다

저녁도 못 먹고 남의 밥을 차려내는

김밥집 아줌마들의 바쁜 손길 위로

산다는 것의 숭고함이

밥심의 위대함이

이 저녁의 평화로움이 깃든다

허기진 마음 허기진 배고픔

허기진 외로움 허기진 세상사가

밥 한끼에 눈녹듯 사라진다

잘 먹었습니다

 

이미지 출처 : 한국일보

 

 

 

< 6 >

 

독자감상

 

 

가정에서는 아내, 엄마 역할을 하면서 직장에서는 자신의 업무를 해야하는 1인3역, 워킹 맘의 애환입니다. 직장에 가면 자상하여 만기친람(萬機親覽)하고 근엄한 상사가 버티고 있고, ‘고객은 언제나 옳다’라는 근무수칙이 있습니다. 이러한 근무수칙은 너무 일방적이고 무자비해서 많은 워킹 맘들의 눈물을 흘리게 합니다. 요즘 모 교수이자 정치인이 쓴 ‘디케의 눈물’은 사치스런 눈물입니다. 워킹 맘들에게 직장은 권한행사의 장(場)도 아니요, 자아실현의 적소(適所)도 아닙니다.

 

더욱이 자본주의 고도화는 경쟁에 익숙한 사람들의 잔치판이기에 영특하지 못하고 순박한 사람은 언제나 B급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자본주의를 향유하지 못하는 루저들의 정신승리법은 체념하면서 밤하늘의 별을 보는 것입니다. 김수미 시인은 이러한 자본주의 환경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꿈꾸는 자본이 아닌 꿈을 향해 주파수를 맞춰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녀가 말하는 꿈은 출세, 1등이 아닙니다. ‘1등을 바람막이로 쓰는 스케이트 선수처럼 등 뒤에 바짝 붙어 쳐지지 말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욕심부리지 않는 평범한 직장인의 살아남기입니다.

 

일선에 일하는 직원은 계절의 감각이 없습니다. 꽃이 피고 져도 잘 모릅니다. 상사와 고객에게 얻어맞고 집으로 돌아오면 ‘매운맛 짠맛 설움 풀어 김치찌개를 먹어야’합니다. 그러다보니 어느덧 제법 맷집이 단단해진 자신을 발견합니다.

 

시인은 어느날 고된 몸을 이끌고 퇴근하면서 김밥 집에 들렀습니다. ‘옆 테이블에서는 씩씩한 남정네들이 김치볶음밥을 남김없이 비워냅’니다. 김밥집 아줌마들은 ‘저녁도 못 먹고 남의 밥을 차려’냅니다. 이런 풍경을 바라보며 시인은 ‘산다는 것의 숭고함’을 느낍니다. 그리고 이러한 저녁을 평화롭다고 합니다. 이제 살아남기의 달인이 되었습니다.

 

‘허기진 마음, 허기진 배고픔, 허기진 외로움, 허기진 세상사가 밥 한 끼에 눈녹 듯 사라진다’면서 마지막으로 ‘잘 먹었습니다’라고 말하는 시인은 착한 사람입니다. 아름답습니다.

 

지금도 일선에서 작은 희망의 불씨 하나 갖고 버티면서 살아남기에 힘쓰는 워킹 맘들께 위로를 드립니다. 계속 잘 버텨 살아남으시라고.

 

(2023.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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