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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송담(松潭) 2020. 12. 18. 13:03

가족

 

 

이미지 출처 : 부산일보 2019.7.30

 

사서함에 녹음된 이야기를 듣는데 무뚝뚝한 경상도 억양의 청년이 울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아프다고 한다. 내가 앓았던 림프암이다. 투병한 지 2년째다. 하지만 잘되지 않았다. 병원에서 죽음을 준비하라고 했다. 내 이야기를 들었고, 그래서 절박한 심정에 내가 다녔던 병원으로 옮겼다. 그러니까꼭 병문안을 와달라는 사연이었다.

 

난감했다. 오죽하면 이런 부탁을 할까 싶었다. 하지만 그 병동에 다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재발하면 어차피 치료 안 받을 거니까 병동에 돌아갈 일은 내 삶에 더는 없으리라 생각했다.

 

어머니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의사는 환자에게 조금 더 친절했으면, 그러니까 이를테면 이제 가망이 없으니 죽음을 준비하라는 따위의 말은 좀 조심해서 했으면 좋겠고 환자는 아무리 미궁 속에 있는 것처럼 뿌옇고 답답해도 다른 길에 현혹되지 말고 오직 병원과 의료진이 시키는 대로만 따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손을 꼭 잡는데 힘이 느껴져서 좋았다. 면회를 마치고 병원을 나섰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미 몇 년 전에 이혼을 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동생을 맡고 있고 사연을 보낸 형은 직장을 다니며 어머니를 살핀다. 그렇게 남이 되어 따로 살다가 어머니가 암에 걸린 이후로는 아버지가 찾아와서 돌보기도 하고 이렇게 병문안을 오기도 한다는 것이다.

 

나는 가족의 신화에 대해 믿지 않는 편이다. 가족이라는 말 앞에서 무마되어버리는 수많은 것들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망치면 망쳤지 좋게 만들지는 않았다는 마음에서다. 하지만 이 가족의 사정 앞에 크게 감동받았다. 그렇다. 나는 이런 게 진짜 가족이라고 생각한다.

 

재물을 쌓아 올려 자식에게 고스란히 전수해내는, 혹은 재물 그 자체를 위한 인프라로써 기능할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이는 지리멸렬한 평생의 과정이 가족의 본령이 아니다. 내부의 갈등을 가족이라는 허명으로 덮어 일방적으로 무마하려 하지 않고 해체되었더라도 위기가 닥쳤을 때는 아무런 조건 없이 언제든 다시 찾아와 옆을 지켜주는 게 가족이다. 그게 반평생을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서 삶을 공유한 사람들 사이에 마땅한 의리다. 의리 말이다. 아, 한국 사회에서 의리라는 단어는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저평가되어 있는가.

 

가족이 혈연 공동체라는 이야기를 흔히 한다. 나는 가족이 혈연 이전에 사연으로 유지되는 운명공동체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정작 나는 해체된 상태로 그냥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가족의 일원이다. 그래서 그런지 우연하게 하루를 섞은 이 가족이 부럽고 기뻤다. 귀하게 느껴졌다. 그런 경험들이 있다.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사람을 충만하게 만드는 것들이다.

 

어머니는 방문한 이후 처음으로 수치가 호전되었다고 한다. 이제는 나아질 일만 남았다. 어머니의 완쾌를 바라고 기다리겠습니다.

 

허지웅 / ‘살고 싶다는 농담‘중에서

 

 

* 위 글은 책에서 특히 공감한 부분을 발췌한 것으로써

  글 제목 ‘가족’은 독자가 임의로 정하였음.

 

 

가족

 

 

5월은 가정의달이다. 5일은 어린이날이었고, 8일은 어버이날이었다. 21일은 부부의날이다. 이 5월에는 누구나 한번쯤 가족을 돌아본다. 나의 경우 가족을 생각하면 먼저 떠오르는 건 기형도의 시 ‘엄마 걱정’이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내가 기억하는 우리 세대 가족의 초상은 이처럼 시리다. 마음 아픈 풍경이 먼저 소환된다.

 

(...생략...)

 

가족의 초상은 어떤 색일까. 나의 경험을 돌아볼 때 화려한 색깔은 아닌 듯하다. 유채색이 아닌 무채색인, 애틋하지만 삶에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그런 색깔이 아닐까.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기형도 ‘엄마 걱정’의 마지막 구절이다. 가정의달을 맞아 우리 시대 가족의 초상에 대한 개인적 생각을 여기에 적어둔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2021.5.11. 경향신문)

 

 

수호천사

 

언젠가 인터넷에서 본 예쁜, 움직이는 그림으로 만든 동화 같은 글 한 편이 머릿속에 떠올랐지요.

 

하나님께서 아기천사에게 지상으로 내려가라고 명하시니 아기천사는 겁에 질려 “하나님, 사람들이 사는 지상에는 도둑도 많고 위험한 차도 많이 다니고 전쟁도 있다는데 제가 어떻게 인간이 사는 땅에 내려가 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응답하십니다. “너는 혼자가 아니다. 너에게는 항상 너를 지켜주는 수호천사가 너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벌써 아기천사는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고 있었지요. 하나님, 하나님! 아기천사는 하나님을 다급하게 부르면서 이렇게 소리쳤지요. “수호천사의 이름을 가르쳐주셔야 만날 수 있지요.”

 

하나님은 크게 웃으면서 말씀하십니다. “너의 수호천사의 이름은 '어머니'라고 부른단다.”

 

이어령 / ‘지성에서 영성으로’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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