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소설

공터에서

송담(松潭) 2017. 2. 8. 12:20

 

 

공터에서

 

< 1 >

 

 소총 가늠구멍 속에서, 잇달린 산들이 출렁거렸다. 바람이 산봉우리를 훑어서 고지마다 회오리쳤다. 바람은 눈보라를 몰아서 동해로 나아갔다. 천지간에 눈 비린내가 자욱했다. 달이 뜨자 골짜기의 어둠이 더 짙어졌고 눈 덮인 봉우리에 푸른빛이 스몄다. 팽팽한 밤하늘에서 별들은 추위에 영글어갔다. 밝은 별 흐린 별이 뒤섞여 와글거렸는데, 귀 기울이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눈 덮인 산맥은 인간과는 무관하게 출렁거렸으나 그 흐린 산맥이 인간을 향해 내뿜는 적개심을 초병들을 감지하고 있었다.

 

 북한군 GP는 북방한계선에서 1킬로미터 정도 남쪽으로 내려와 있었다. 양측 GP는 벼랑 끝에 매달린 둥지처럼 보였다. 콘크리트 더미에 촉구멍이 뚫어져 있었고 그 구멍으로 서로를 조준하고 있었다. 망원경을 들이대면 GP 너머 북한군 진지의 병사들이 보였다. 북쪽 병사들은 양지쪽에서 모포를 말리거나 군화를 벗어서 시린 발가락을 주물렀다. 바지를 내리고 오줌을 누면 오줌 줄기에서 허연 김이 퍼졌다. 키가 작고 깡마른 몸매들이었다. , 나와 비슷하게 생긴 자들, 그러나 인연 없는 자들, 저 발 시려운 자들, 김나는 오줌을 갈기는 자들이 적()이라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면 마차세는 다리에 힘이 빠졌다. 저들도 망원경 구멍을 이쪽으로 들이대고 초병들의 입에서 나오는 허연 김을 보고 있을 것이다. 가늠구멍 안에서, 추위는 산에 가득 차 있었으나 조준할 수는 없었다.

 

 

< 2 >

 

 미군이 수송선에 피난민을 태우기로 했다는 소문은 발표도 없이 퍼져 나갔다. 수송선들이 모래 위로 선수를 들이밀고 철문을 열었다...... 손을 잡아라, 허리띠를 붙들어.....

무장 헌병들이 뒤엉킨 군중들을 곤봉으로 후려갈겼다.

 

 이도순은 반쯤 쓰러진 자세로 배 안으로 떠밀렸다. 이도순은 남편의 손을 잡지 못했다. 아이는 남편이 업고 있었다. 수송선이 철문을 올리고 시동을 걸었다. 철문에 낀 사내 세 사람이 헌병의 곤봉을 맞고 물 위로 떨어졌다. 수송선이 후진으로 선착장을 떠났다. 부두에서 배에 타지 못한 사람들이 끌어안고 울부짖었다. 아이고, 아이고.....

 

 피난민들은 산사태처럼 수송선 안으로 밀려들었다. 미군은 배에 탄 사람들의 숫자와 신원을 확인할 수 없었다. 미군 헌병들이 곤봉을 휘둘러서 피난민들을 갑판 위에 주저 앉혔다.

 

 마지막 폭격기들이 항모로 돌아왔다. 항구 안에 남아 있던 구축함이 16인치 포로 흥남부두를 부수기 시작했다. 함포는 해안에 쌓인 탄약과 중장비를 부수고 접안 시설을 부수었다. 함포가 부두를 부술 때 민간인들은 부두에 모여 있었다. 불길과 연기에 휩싸여서 부두도 산맥도 보이지 않았는데, 연기 속에서 포탄은 계속 날아갔다. 수송선 갑판에서 피난민들은 폭격 맞는 흥남부두의 불길을 바라보았다. _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가 배에서 배로 이어지면서 바다 위로 흘러갔다. 아이고는 저마다의 몸 안에 갇혀 있던 폭발물처럼 터져 나왔다. 선단은 남행했고, 아이고는 해풍에 실려 북으로 흘렀다.

 

 수송선이 철문을 열었다. 똥오줌에 버무려진 사람들이 비척대며 배에서 내렸다. 부두에서 피붙이를 찾은 사람들이 끌어안고 울었다. 사람들은 바람부는 저녁의 어스름 속으로 사라졌다. 이도순은 배에서 사람들이 모두 내릴 때까지 선착장에서 기다렸다. 남편과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적십자 어깨띠를 두른 여자들이 배에서 내리는 사람들에게 빵 한 개와 가마니 한 장을 나누어 주었다. 이도순은 빵과 가마니를 받았다.

 

< 3 >

 

 현저동 비탈 마을에, 밤이면 다듬잇방망이 소리가 퍼졌다. 가을 밤공기가 맑아서 다듬이 소리는 멀리 나갔다. 방망이 소리는 빠른 박자로 솟아올랐다가 느리게 흘렀다. 아랫동네 방망이 소리가 윗동네 방망이 소리를 일깨웠고 먼 곳의 방망이 소리가 이 집 저 집 방망이 소리를 이끌며 다가왔다. 개들이 소리 나는 쪽으로 귀를 기울였지만 소리에 익숙해져서 짖지 않았다. 방망이 소리가 잦아들면 풀벌레 소리가 살아났다.

 

 저녁에, 해가 강 건너로 내려앉았고 썰물의 하구는 헐거웠다. 말라서 가벼워진 군복 소매와 가랑이가 바람에 퍼덕거렸다. 가랑이들의 그림자가 땅 위에서 흔들거렸고, 줄에 널린 붕대에 노을이 스몄다.

 

 

< 4 >

 

 그날 아버지는 마차세를 데리고 이발소에 갔다. 동네 초등학교의 구내 이발소였다. 마차세는 나란히 이발 의자에 앉았다. 거울에 비친 두 얼굴이 똑같아서 마차세는 흠칫 놀랐다. 어디라고 딱히 말할 수 없는 그늘까지도 두 얼굴은 닮아 있었다. 마차세는 해어날 수 없는 사슬에 옥죄이는 느낌이었다. 방과 후의 학교 운동장은 비어 있었고 운동장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다. 노을이 내리는 빈 운동장이 이발소 거울에 비쳤고, 그 위에 닮은 얼굴 두 개가 떠 있었다. 거울 위쪽 벽에,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_ 푸시킨

 

 이라는 글귀가 붙어 있었고, 그 옆에 추수가 끝난 들판에 허리를 굽혀서 이삭을 줍는 서양 여자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 5 >

 

 마차세는 선임자들에게 배운 대로 도심지 교차로 신호등에서는 대기 차량의 맨 앞줄에 오토바이를 들이대고 신호를 기다렸다. 앞줄에는 늘 여러 회사들의 배송 오토바이들이 횡대로 늘어서 있었다. 신호등 앞에서 급제동을 걸면 오토바이가 멈추어도 뒷자리에 실린 화물들이 앞으로 내달아서 속도는 뒤쪽에서부터 앞으로 쏟아지듯이 차체를 밀어붙였다. 브레이크에 눌린 바퀴가 길바닥에 미끄러지면서, 차체가 위아래로 벌컥거렸다. 일렬횡대로 늘어선 다른 오토바이들도 똑같이 벌컥거리며 신호를 기다렸다. 신호가 바뀌면 오토바이들은 엔진 파열음을 쏟아내며 튀어 나갔다. 한 줄로 늘어선 오토바이들은 신호가 바뀌면 직진, 좌회전, 우회전으로 흩어졌고 다시 신호가 바뀌면 다른 오토바이들의 대열이 대기선상에 급정거하면서 차체를 벌컥거렸다.

 

 핸들이 자주 흔들려서 오토바이 백미러 속의 세상은 불안정했다. 세상은 영상이 되어 그 볼록거울에 비쳤는데, 영상은 깨져서 흩어졌고 또 나타났다. 8차선 도로 전체가 자동차의 엔진음과 에어브레이크의 비명에 덮여 있을 때도, 백미러 볼록거울 속의 세상은 적막했다. 소음에 찬 거리의 이면은 아무런 소리도 발생하지 않았거나, 발생한 소리가 귓속으로 건너오지 않는 무인지경의 적막이었다. 8차선 교차로 신호 대기선에서 백미러를 들여다보면서, 마차세는 중화기와 진지들이 눈에 덮이는 동부 산악 고지의 적막을 생각했고, 직장이 통합되어서 강제 실직당하고 사람들이 흩어져 돌아가던 날 저녁의 적막을 생각했다. 여러 적막이 백미러 안에 겹쳐있었고, 신호가 바뀌면 마차세는 다시 엑셀을 당겨서 튀어 나갔다.

 

< 6 >

 

 화장장에서 내려오는 언덕에 억새가 피어서 바람에 흔들거렸다. 억새꽃이 부풀었고, 그 속에 가을빛이 자글거렸다. 시든 줄기가 바람에 끄달리면서 바람을 버티고 있었고 꽃씨들은 바람 속으로 흩어졌다. 억새는 꽃이 아니라 꽃의 혼백처럼 보였다.

 

< 7 >

 

 유치원은 5월의 첫째 토요일을 아빠 오시는 날로 정했다. 유치원 정문에 아빠 고맙습니다라는 현수막이 걸렸다. 원아들의 아버지 20여명이 아이들 손을 잡고 유치원 마당에 모였다. 남자들은, 제가 아무개 아빠입니다, 라고 아이들 이름으로 인사를 나누고 명함을 교환했다. 남자들은 어색하게 주빗거렸다. 어버이회장이 성금을 걷어서 원장에게 전했다. 동네 구멍가게 주인 남자는 추리닝 차림에 슬리퍼를 끌고 와서 원장이 인사말을 하는 동안에 마당에 침을 뱉었다. 전날 술마신 남자들이 트림을 하거나 하품을 했다. 원장이 아이의 이름을 부르면, 아이가 아버지의 손을 이끌고 앞으로 가서 인사를 했다. 원장이 예비군복 차림의 아버지에게 꽃을 달아주었고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오전에는 강당에서 아이들의 공연을 보고 유치원에서 준비한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어린이 공원에 가서 노는 것이 하루의 일과였다. 아이들은 머리에 토끼 모자, 고양이 모자, 사슴 모자를 쓰고 무대에 나와서 교사의 오르간 반주에 맞춰서 춤을 추고 노래했다. 주말의 휴식을 빼앗긴 월급쟁이 가장들이 뒷자리에 앉아서 졸다가 박수 소리가 들리면 덩달아 박수를 쳤다. 강당에 들어오지 않은 남자들은 마당에 앉아서 담배를 피웠다.

 

 오후에는 노란 버스를 타고 어린이 공원으로 갔다. 공원 숲 속에서 아버지들과 아이들이 둘러앉아서 인솔교사의 지도로 수건돌리기 게임을 했다. 손뼉치고 노래 부르고, 아이들이 하나씩 나와서 아버지 자랑을 했다. 남자들은 박수를 치면서 멋쩍어했다. 게임이 끝나고 두 시간의 자유시간이 있었다. 아이들은 제 아버지 손을 잡고 놀이기구 앞에 줄을 섰다. 새치기한 아이와 새치기 당한 아이가 밀치고 싸우다가 어른들끼리 말다툼을 했다. 솜사탕을 먹는 아이들 입가에 설탕이 엉겼고 그 자리에 벌들이 날아들었다. 아이들이 비명을 질렀고, 아버지들이 달려들어 벌을 쫓았다.

 

 

< 8 >

 

 

 더 길게 쓰고 싶었지만, 기력이 미치지 못했다. 수다를 떨지 말아야 한다고 늘 다짐하고 있다. 쉬운 일은 아니다.

 

 나의 등장인물들은 늘 영웅적이지 못하다. 그들은 머뭇거리고, 두리번거리고, 죄 없이 쫓겨 다닌다. 나는 이 남루한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늙기가 힘들어서 허덕지덕하였다. 의료비 지출이 늘어났다. 지금은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온 느낌이다. 여생의 시간을 아껴 써야 할 것이다.

2017년 설에 나는 쓰다

_ 김훈

 

  김훈/ ‘공터에서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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