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소설

박정희와 비틀스

송담(松潭) 2019. 5. 28. 22:48

 

박정희와 비틀스

 

 

 

 

 

 

 

 오래전에 돌아가신 선배는 나에게 술 사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소설을 쓰려면 자기 시대의 대중음악을 깊이 이해해야 한다.’ 넓고 깊게 들여다보는 사람의 말이었다. 나는 그 선배의 유훈을 따르지 못했다. 내가 게으르고 또 음악적 감수성이 풍요롭지 못하기도 했지만 급변하는 음악의 흐름을 따라갈 수 없었고 젊은 세대의 음악정서를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내 성장기의 음악환경은 빈곤했다. 전쟁으로 나라는 가루가 되었고, 어린 내 귀에 들리는 소리는 일본군가의 찌꺼기, 군대풍의 행진곡, 반공가요, 전쟁가요뿐이었고, 나는 그 노래들을 따라 부르면서 자랐다.

 

 학교 음악시간에는 교가, 광복절 노래, 3.1절 노래 같은 행사노래를 합창으로 배웠고, 음악시험 때도 한 명씩 교사 앞에 나가서 그 노래를 불렀다. 음정이 틀리면 회초리로 손바닥을 때리면서 다시 부르라고 했다. 매를 맞으면서 노래를 불러야 하니. 지금도 기막히다.

 

 조회 때마다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서 애국가와 교가를 불렀다. 교가 가사의 첫머리는 학교가 위치한 자리가 뒤에는 높고 푸른 산이요 앞에는 넓은 들 맑은 강, 이른바 명당이라는 주장으로 시작되었다. 내가 알아보았더니 다른 학교 교가들도 다들 이 모양이었다. 학교마다 명당이었다. 멜로디도 대개 비슷했다. 이러니 아이들은 교가를 좋아할 수 없었다.

 

 고등학교에 가니까 우리 가곡을 가르쳐주었는데 노래가 너무 얌전하고 가사도 밋밋해서 별 재미가 없었고 신바람이 나지 않았다.

 

 그처럼 메마른 시대에도 어른들이 보석 같은 동요를 몇 곡 만들어주어서 어린이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었다. 내가 어렸을 때 좋아했던 노래는 <나뭇잎 배>(윤용하 작곡.박홍근 작사)였다. KBS 라디오가 1955년부터 이 노래를 보급했는데, 전쟁에 시달리는 아이들의 마음을 쓰다듬어주려는 기회의도가 있었다고 하니, 바로 나를 위해 만들어준 노래였다.

 

 낮에 놀다 두고 온 나뭇잎 배는

 엄마 곁에 누워도 생각이 나요

 

 이 노래가 내 마음을 쓰다듬어주기도 했지만, 노래를 부르고 나면 더욱 슬펐다. 나에게는 나뭇잎 배도 없었고, 배를 띄울 만한 연못도 냇물도 없었다. 그 무렵 나의 주요 일과는 이동하는 미군부대의 지프 행렬을 따라다니며 초콜릿을 얻어먹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 노래를 부르면 어린아이가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하지만 나는 슬픔에 빠져서 허우적거리지 않고, 그다음날도 초콜릿을 얻어먹으러 거리로 나갔다. 이것은 내 유년 시절의 자랑거리다.

 

 그 밖에도 <꽃밭에서> <반달> <잠자리> <겨울나무> <파란 마음 하얀 마음같은 아름다운 동요들이 있었는데, 이런 노래들에는 슬픔의 정조가 짙게 배어 있었다. 배가 고프고 과자가 먹고 싶어서 껄떡거리는 아이들을 바라볼 때 어른들이 느끼는 슬픔을 아이들은 알 수 없었다. 아이들은 제 배고픔만을 알았다.

 

 어른들이 자신들의 슬픔과 고통을 소재로 동요를 만들어서 아이들을 쓰다듬어주려 하니까 그 슬픔이 동요에 스며든 것이다. 이런 노래들은 리듬감이 떨어진다. 여자아이들이 운동장에서 고무줄놀이할 때는 이런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고무줄놀이는 노래와 운동을 함께 하는 단체놀이다. 이 놀이는 고무줄 한 가닥으로 10여 명이 동시에 놀 수 있고 고무줄이 늘어나기 때문에 놀이가 위험하지 않다. 이 놀이는 그 시대의 폐허 속에서 대한민국 여자 어린이들이 이루어낸 훌륭한 문화업적이고 생명력의 분출이다. 정부나 교사가 만들어준 것이 아니고 아이들 속에서 스스로 우러나온 것이다. 그 가난한 학교 운동장에서 남루한 옷차림의 여자아이들이 펄펄 뛰면서 노래 부르던 모습을 생각하면 나는 지금도 신나고 눈물난다. 이때도 여자아이들은 박자가 느린 노래는 부르지 않았다.

고무줄놀이할 때 여자아이들은

 

 압박과 설움에서 해방된 민족

 싸우고 싸워서 세운 이 나라

 공산오랑캐의 침략을 받아

 자유의 인민들 피를 흘린다

 

 이런 반공시국가요를 부르기도 했는데, 이것은 어른들한테서 배운 노래였고

 

 어머니 사친회비 주세요

 아버지 사친회비 주세요

 돈 없다 돈 없다

 다음 달에 가져가거라

 난 몰라 난 몰라

 오늘 당장 가져오랬어

 

 처럼 당면현실에 맞는 노래를 아이들 스스로 만들어서 불렀다. 운동장에서 펄펄 뛰면서 합창으로 불렀고, 동네 공터에서 불렀다. 교사들과 부모들도 이 노래를 들었을 터인데, 들은 척하지 않았다. 어른의 슬픔을 아이들은 알 수 없었다.

 

 내 어린 날을 지배한 음악정서는 8할이 트로트고 전쟁가요였는데, 이 결핍은 그 시대의 보편적 빈곤의 정서적 밑바닥을 이루고 있었다.

 

 박정희 소장은 1961년 군대를 이끌고 한강을 건너왔고 비틀스의 노래는 1963년 한국에 들어왔다. 이 무렵이 나의 격렬한 사춘기였다. 박정희와 비틀스가 거의 동시에 역사에 등장한 사태를 나는 지금도 기이하게 여긴다. 나는 박소장의 혁명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비틀스야말로 나의, 우리들의 혁명이고 천지개벽이었다. 나는 심청이 아버지 심봉사가 눈을 뜨듯이 귓구멍이 뚫렸다. 아이들은 발칵 뒤집혔다.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아도, 새로운 음악에 감응하는 생명의 힘이 아이들 내면에 살아서 작동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라디오로 <I want to hold your hand> <Love me do>를 배워서 쉬는 시간에 교실에서 빈 도시락을 젓가락으로 두들기며 합창했다. 한 아이가 영어 가사를 구해와서 칠판에 쓰면 다들 옮겨서 적었다. 비틀스의 영어는 단순하고 명료했다. 그때 영어를 겨우 배워서 영어가사를 해독하고 영어로 노래 부르는 일은 신대륙을 발견하는 느낌이었다. 나는 고등학교에 들어오기를 정말로 잘했다고 생각했다. 비틀스의 노래는 자유이고 그리움이고 신바람이었다. 학교는 여전히 행사노래를 가르치고 있었다. 교사들은 아이들이 왜 저러는지를 몰랐고 알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비틀스의 노래를 들으면서 소년기에서 청년기로 건너갔고, 그 시기에 박소장의 절대권력은 강고하게 자리잡아갔다.

 

 비틀스로 귀가 뚫리자, 더 많은 노래들이 뚫린 귀로 밀려들어왔다. 롤링스톤스, 자니 마티스, 엘튼 존, 밥 딜런, 존 바에즈, 폴 사이먼, 해리 벨라폰테 같은 가수들을 나는 좋아했다.

 

 비틀스가 한국에 들어온 이래로 노래를 중심으로 저항과 일탈의 정서가 집결되었고 박정희 대통령은 이 젊은 에너지를 두려워했다. 박대통령은 <고래사냥>이나 <물 좀 주소>같은 노래를 미워했다. 박대통령은 권력과 법을 동원해서 노래를 박해했으나 이길 수는 없었다. 국가권력이 데모하는 젊은이들을 잡아가둘 수는 있었지만 노래하는 입을 틀어막을 수는 없었다. 가둘수록 더욱 노래했다.

 

 그후로 전개된 댄스음악의 전성시대에서 나는 대중음악의 흐름을 따라갈 수 없었다. 흐름만으로 말하자면 내가 받아들인 대중음악은 대체로 신촌블루스에서 끝나고 있다. 1990년대 초 서태지와 아이들이 나왔을 때, 나는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새로운 세대는 자신에 맞는 음악과 율동을 스스로 만들어내고 있었다. 아프리카나 남태평양 도서지방의 원주민들은 음악이 들리면 바로 몸이 흔들려서 춤을 춘다. 이 춤의 동작은 거의 생래적이다.

 

 나는 리듬이 빠른 음악을 들어도 몸이 흔들리지 않는다. 이것은 내가 늙어서 그렇다기보다는 몸과 마음 사이에 직접성이 빈약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것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서 태지와 아이들의 춤동작을 들여다보니까 아프리카 원주민의 춤동작처럼 생래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음악에 맞추어서 만들어낸 동작에 가깝다. 그 동작은 절도 있게 꺾이면서 흐름을 이어가고 있었다. 동작이 꺾일 때마다 에너지가 폭발하고 이 에너지를 흐름 안으로 수습해 들였다. 어린 청중은 모두 일어서서 뛰고 춤추면서 열광했다. 그때의 나의 어린 자식들도 그 속에 있었다.

 

 나는 사실, 서태지나 방탄소년단의 음악을 음악으로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들의 춤동작을 이해할 수는 있다. 그들의 춤은 고도로 기획되고 훈련되어 있었다. 그들의 춤은 빛처럼 퍼져나가면서 부서지고 반짝였다. 그들은 인생론에서 벗어나 있었고 기쁨과 힘으로 가득차 있었다. 음악은 몸이 하는 일이고 음악과 몸은 구별되지 않는다.

 

 몇 년 전 연말에 세시봉 그룹의 디너쇼에 갔더니 다들 나처럼 나이 먹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그날 무대에는 한대수 송창식 들이 나왔다. 그들은 여전히 멋있었고, 그들의 늙음은 편안해 보였다. 그들은 여전히 자유, 서정, 저항, 희망, 사랑을 노래했다. 나는 맨 앞줄에서 손바닥이 깨지도록 박수쳤다. 청중은 자기 시대의 가수들과 함께 나이 먹어가고 있었다. 나는 내 또래 청중 속에서 동지들에 둘러싸인 듯 든든했다 나는 신세대의 노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게 부끄럽지 않았다. 내 생애의 음악은 풍요롭지 않지만 초라하지 않다. 그것은 음악이면서 생활이었다.

 

 요즘엔 가끔씩 LP바에 가서 그 옛날의 노래, 전쟁과 분단, 철조망, 판문점, 흥남부두. 삼팔선, 호남선, 경부선, 실향과 망향의 노래를 듣는다. 그런 노래도 이제는 편안하다. 옛 가수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는데, 그 목소리가 남아서 사람이 옆에 있는듯하다. 그 입김이 내 가슴에 닿는다. 새들이 아침마다 숲에서 노래하듯이, 날마다 새로운 노래, 새로운 시는 태어나고 있다. 비틀스로부터 나는 아주 멀리까지 와 있다.

 

 박정희 소장이 한강을 건너올 때 비틀스가 따라왔다. 나는 한국 현대사에서 이 사태가 가장 난해하고 통쾌하다. 이것을 역사의 섭리라고 해도 좋을는지. 노래는 섭리다.

 

 김훈 / ‘연필로 쓰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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