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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생각의 좌표'중에서

송담(松潭) 2024. 5. 15. 21:08

홍세화/'생각의 좌표'중에서

 

 

< 1 >

 

학습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지적 인종주의'라는 말로 학업 성적이 부진하다는 이유 때문에 사회적으로 차별하는 것에 일침을 가했다. 우리는 피부 색깔을 선택해서 태어날 수 없듯이 두뇌를 선택할 수 없다. 두뇌의 용량과 기능은 사람마다 다른데 오로지 문제풀이와 암기 능력이 뒤떨어진다는 이유로 차별하고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면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하고 억압하는 인종주의와 무슨 차이가 있느냐는 것이다. 더구나 우리는 오로지 암기나 문제풀이 능력으로 학생을 평가할 뿐 감수성이나 사람됨에 대해선 거의 무시한다.

 

우리는 어린 학생들에게 등급과 석차를 매기는 것을 당연시한다. 아직 미성년자들에게 거리낌없이 '너는 1등이다', '너는 35명 중에 35등이다' 라고 등수를 매긴다. 이미 너무나 익숙한 일이지만 반인권적 폭력이다.

 

학업 성적이 좋은 학생은 스스로 우쭐대면서 성적이 낮은 학생들을 업신여길 수 있고, 성적이 낮은 학생은 어린 가슴에 상처를 입는다. 더 심각한 것은 학교와 교실이 차별과 억압을 '익히는' 곳이 돼버렸다는 점이다.

 

교육환경에서 우리 학생들은 좋은 가치에 관해서는 어쩌다 배울(學)'뿐이고 일상 속에서는 그 반대를 '익힌다.' 우리 학생들은 남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공동체의식, 연대의식을 어쩌다 배우지만 일상에서는 남을 누르고 혼자 이기는 것을 익힌다. 이렇게 우리 학생들은 일상에서 억압과 차별, 인권 침해를 겪으며 몸에 익히기 때문에 나중에 남을 억압, 차별하고 인권을 침해하면서도 인식하지 못한다.

 

< 2 >

 

 

헌법 제1조에 따르면 대한민국 국민은 민주공화국의 구성원이다. 하지만 우리 중에 공화국의 어원(res publica: '공적인 일')을 알고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하고 암기를 많이 했는데도 유독 공화국에 대해선 오로지 군주국의 반대로만 알고 있다. 공화국의 반대는 군주국이고, 그 어원인 '공적인 일'의 반대는 당연히 '사적인 일(res privata)'이다. 모든 사회구성원이 공화국을 군주국의 반대로 알고 있을 뿐 공화국의 어원이 '공적인 일'임을 알지 못하는 비대칭성이 낳은 것 중 하나가 공공성의 죽음이다. 공공성을 담보해야 하는 나라의 공적 부분이 온통 사적 이익을 창출하는 장이 돼버린 것이다. 가령 정당은 공당(公黨)이어야 한다. 공익을 지향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정당은 거의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정치꾼들의 이합집산의 장이었고, 공당이 아닌 사당(私黨)이었다. 공교육의 장도 일찍부터 시장과 자본이 침투한 사적 이익 창출의 장으로 변질되었다. 사교육이 창궐되기 이전부터 사익을 창출하는 사립 중고등학교와 사립대학교가 우후죽순처럼 세워졌다. 공교육이 일찍부터 훼손된 것이다. 옷을 완전히 뒤집어 입은 셈이다.

 

민주공화국이 우리에게 신기루에 지나지 않듯이 민주공화국의 공교육은 애당초 없었다. 공공성이 없는 제도교육은 사회구성원들 사이에서 사익추구의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전쟁터로 남았다. 누가 재판관, 대학교수가 되며, 누가 공장노동자, 실업자가 되는가. 누구의 자식이 고위관료, 의사가 되며, 누구의 자식이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는가. 학교가 계급투쟁의 현장인 점은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공공성이 완전히 실종되었다는 점이 한국의 특징이다. 사익을 추구하는 지배계급의 대물림 구조는 '영어유치원-사립초 - 국제중 특목고, 자율형사립고-서열화된 대학-미국 유학의 과정을 통해 더욱 공고해졌다.

 

어쩌다 서민의 자식이 '개천에서 용나’ 교육자본을 통해 계층상승에 성공한다고 해도 계급구조에 있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서민 출신도 교육자본을 형성하여 일단 출세하면 출신 계급의 이익을 위해 복무하지 않기 때문이다. 개천에서 용 나기가 무척 어렵지만, 어렵사리 개천 출신이 용이 된다 하더라도 그는 이미 개천 사람들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는다.

 

1948년 민주공화국이 선포되었지만 친일파로 불리는 일제부역세력은 청산되지 않았다. 청산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른바 민주공화국의 모든 공적 부분을 장악한 지배세력이 되었다. 정치, 경제, 법조, 경찰, 군사, 언론, 교육, 종교의 모든 부분에서 일제부역세력에 뿌리를 둔 세력이 지배하지 않은 곳을 찾기 어렵다. 정통성을 가질 수 없었던 그들은 미국의 힘을 빌려 부족한 부분을 채웠고, 분단 상황에서 '보수'와 '민족'을 참칭함으로써 또 다른 부분을 채웠고, 지역'으로 채웠다. 민족을 배반한 사익추구 집단이 실질적인 지배세력이 되었으니 민주공화국은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정도가 아니라 옷을 완전히 뒤집어 입은 셈이다.

 

< 3 >

 

회색 사회

 

 

회색은 희지도 않고 검지도 않다. 그렇지만 때에 따라 희기도 하고 검기도 하다. 회색은 배경이 흰색일 때 검은색이 되고 검은색이 배경일 때 흰색이 된다. 회색인들은 올곧음을 배격하며 정직성 앞에서 비겁하다. 주위에 올곧음과 정직성의 청백이 있을 때 자신의 회색이 검정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직장에서나 군대에서나 학교사회에서나 청백한 사람을 따돌린다. 그리곤 "세상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군", "털어서 먼지 안나는 사람 있나", "좋은 게 좋은 거야'라고 말한다. '회색인들의 회색의 사회'에서 흰색이 조직과 사회를 위해 죽어야 하는 이유다. 흰색은, 검정은 물론 회색까지도 검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사회의 각 부문에서 회색은 힘을 합쳐 공동의 적인 흰색을 축출한다. 사회의 모든 부문에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고 악화는 부문을 뛰어넘어 강력하게 유착한다. "깨끗한 물에는 물고기가 살지 않는다“라는 말로 포장된, 흰색에 대한 이 사회의 부정적인 반응은 내부 고발자나 촌지 거부 교사들에게 대한 따돌림처럼 고발에 대한 정서적 반감의 표현이라기보다 자신이 검정으로 드러나는 것에다"라는 말로 포장된, 흰색에 대한 이 사회의 부정적인 반응은 내부 고발자나 촌지 거부 교사들에 대한 따돌림처럼 고발에 대한 정서적 반감의 표현이라기보다 자신이 검정으로 드러나는 것에 대한 회색의 사회에 내재한 방어본능의 반영이다.

 

회색인들의 회색의 사회에서 구성원들은 '검은 목표물'을 색출하여 고발하고 비난하는 데에는 대단히 적극적이다. 주위에 검은 사람이나 세력이 나타났다고 아우성을 친다. 주위의 검정을 강조하여 자신들이 희다는 점을 주장하기 위해서다.

 

회색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중립' 이라는 멋진 수사의 혜택을 입어 양쪽의 권리를 누리며 어느 한쪽의 책임도 지지 않는다. 불온이 오히려 교양이며 상식인 사회에서 상식과 몰상식의 중간은 몰상식일 뿐이지만 이명박 대통령이 대표하듯 '중도 실용'을 내세워 명분과 실리를 함께 취한다. 중간파들이 균형을 주장하는 것은 대개 명분과 실리를 함께 취하려는 포장술이지만 지식인들조차 이를 역할 관계나 현실의 이름으로 합리화한다. 그러나 명분과 실리 사이에 활금분할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중간파는 회색파의 다른 이름이다. 그래서 나에게 실용이란 항상 이기는 쪽에 붙어 명분도 채우면서 권력도 맛보려는 처세술이다.

 

흰 것이 흰 채로, 검은 것이 검은 채로 각기 제자리에 있지 못하고 흰 것과 검은 것이 서로 뒤엉키고 버무려진, 영악한 사람들을 위한 회색의 사회 모습이다.

 

 

< 4 >

 

아내가 여기서 즐거울 수 없었던 일 중엔 방을 구할 때의 일도있다. 귀국한 뒤 처음 2년 동안은 사글세를 살았고 지금은 연립주택에 전세를 살고 있는데, 집을 구하려고 만났던 부동산 중개인들은 눈으로 아내를 위 아래로 훑으며 말 없는 말을 했다. 대충 이런 내용이다. '그 나이에 그런 집을 구한다니....... 그 인생 알 만하다. 그래도 옷은 잘 입은 편이네'

 

파리의 크리스티앙 디오르 가게에서 가장 나이 많은 점원으로 일한 아내에겐 한국에서 말하는 명품이 꽤 많다. 거의 크리스티앙 디오르이지만, 아내의 옷차림새가 주었을 법한 기대가 금세 실망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물론 그들만의 잘못이 아니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줍니다"라는 광고 문구가 공중파를 통해 거리낌 없이 토해지고 있었다. 그때 아내가 토해낸 한숨에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마에 써 붙이고 다니면 어떨까. 비록 작지만 파리 근교

에 아파트가 하나 있다고 말이오."

 

아내와 내가 그 사회를 고맙게 생각하는 이유 중에는 두 아이가 학교 다닌 동안 외국인이라는 이유로도 가난하다는 이유로도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았다는 점이 있다. 거기엔 자본주의의 비인격성에 대한 문제제기가 아직 살아남아 있었고, 교육은 아이들에게 경제동물에 머물지 않도록 인문정신을 강조했다. 여기서 자본주의는 그 미덕은 승자의 몫이며 악덕은 패자의 몫인 당연한 법칙이다. 친절이나 배려도 승자에게만 해당한다. 사람들은 이따금 천박한 자본주의를 말하고 사회의 천박함을 말한다. 마치 천박한 자본주의나 천박함이 자기와 무관하다고 주장하려는 듯. 하지만 그것은 이미 한국사회의 기본 체질이 된 듯하다.

 

자본주의 생활 방식의 특징은 '제로섬 게임에 있다. 주고받거나 빼앗고 빼앗기는 물질의 합은 항상 '영'이다. 내가 획득할 때 너는 빼앗겨야 하고, 내가 승리하려면 너는 패배해야만 한다. 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인간성을 황폐화하는 것은 이러한 성질 때문일 것이다. 인간성의 발현은 이 제로섬 게임과 정반대의 성질을 갖는다. 사랑이 그렇듯이 하염없이 주고 또 주어도 없어지지 않는다. 인간성의 발현은 베풀수록 스스로 충만해지고 베풀지 않을 때 오히려 그 샘이 마른다. 천박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질을 주고받고 빼앗고 빼앗기는 제로섬 게임에 익숙해진 구성원들은 마침내 인간성의 발현마저 패배하거나 빼앗기는 것인 양 느껴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했던 조상의 말을 정면에서 배반한다.

 

아내에겐 석 달 만에 다시 돌아온 도시의 가을이 정겹지 않다. 바람에 쓸려 다닐 만큼 낙엽이 많지 않지만, 하늘은 영락없이 차갑게 파랗다. 가을밤이 더욱 깊어가듯 쓸쓸함이 깊어간다. 그래서 아수라의 도시를 종내 외면하지 못한 채 살아보겠다고 아등바등하는 내가 부러울 것이다. '교양이 밥 먹여주니? 라고 대드는 듯한 사회,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대신 몰상식이 막무가내로 관철되며, 이명박 정권 들어서 더욱 분명해지는, 생존하려면 스스로 뻔뻔해지든지 뻔뻔함에 굴종하라고 강요하는 사회, 여기서 계속 살아갈 만한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아내가 말할 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아내를 설득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아내의 말에 동의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고개를 주억거린다. 아내는 끝내 여기를 떠나자고 강하게는 호소하지 않을 것이다. 내 대답이 하나뿐이라는 것을 알기에.

 

"여기건 거기건 살아 있잖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