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상식. 심리

유시민 /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송담(松潭) 2023. 10. 16. 05:31

< 1 >

뇌과학

 

1.

'나는 누구인가?' 이것은 인문학의 표준 질문이다. 그러나 인문학 지식만으로 대답하기는 어렵다. 먼저 살펴야 할 다른 질문이 있다. '나는 무엇인가?' 이것은 과학의 질문이다. 묻고 대답하는 사유의 주체를 '철학적 자아'라고 하자. 철학적 자아는 물질이 아니다. 그러나 물질인 몸에 깃들어 있다. 나를 알려면 몸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일반 명제로 확장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과학의 질문은 인문학의 질문에 선행한다. 인문학은 과학의 토대를 갖추어야 온전해진다.'

 

문과인 나는 과학자들이 인간에 대해 알아낸 여러 사실을 이의 없이 받아들인다. '지구에 사는 모든 생물, 돌·흙·물·불·공기를 비롯한 모든 물질, 달과 태양과 우리 은하의 모든 별, 다른 은하를 포함해 우주 전체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내 몸과 똑같은 배열을 이룬 원자의 집합은 어디에도 없다. 나는 우주에 딱 하나뿐인 존재다. 물질인 내 몸을 지휘하는 제어 센터는 단단한 머리뼈 안에 들어 있는 주름진 회백색 세포 덩어리다. 나를 나로 알고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철학적 자아는 우리가 뇌라고 하는 세포 덩어리에 깃들어 있다.' 옳다고 여기던 것이 그렇지 않음을 알아내는 데 과학의 매력이 있다고는 하지만, 이런 것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2.

요즘 대중의 ‘최애과학'은 뇌과학이다. 사람들은 두 가지 목적으로 뇌과학 책을 읽는다. 첫째는 생존이다. 태교부터 자녀 학습 지도와 외국어 능력 향상에 이르기까지, 생존경쟁에 필요한 지적 능력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뇌과학을 공부한다. 둘째는 자기 이해다. 자신의 성격과 기질을 파악하고 다른 사람의 행동을 이해하는 데 뇌과학은 도움이 된다. 대학에서는 이과 문과로 갈라져 있지만 정신의학과 심리학은 뇌과학을 토대로 삼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뇌과학을 알면 생존과 자기 이해에 도움이 될까? 생존에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자기 이해에는 확실히 유용하다. 과학자들이 뇌의 물리적 구조와 작동 방식에 대해 알아낸 사실 가운데 중요한 것을 간단히 추려 보았다.

 

사람 뇌는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일한다. 그래서 1.4 킬로그램 안팎으로 평균 체중의 2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데도 혈액의 25퍼센트와 에너지의 20퍼센트를 쓴다. 사람만큼 뇌가 발달한 동물은 없다. 뇌의 주름을 펴면 쥐는 우표한 장, 원숭이는 엽서 한 장, 사람은 신문지 한 장 정도다. 주름진 뇌의 안쪽은 밝고 바깥쪽은 어두워서 각각 '백색질'과 '회색질'(또는 대뇌피질)이라고 한다. 회색질에는 신경세포(뉴런neuron)의 중심인 세포체가 밀집했고 백색질에는 축삭돌기가 퍼져 있다. 대뇌피질은 두께가 4밀리미터도 안 되지만 형태와 기능이 다른 신경세포가 여러 층을 이루고 있다.

 

뇌는 부위마다 하는 일이 다르다. 예컨대 귀 안쪽의 해마는 기억을 담당하고 이마 쪽 전전두엽은 의사 결정에 관여한다. 뒤통수 쪽 후두엽은 시각정보 처리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측두엽 안쪽에 있는 편도체는 공포 반응과 주의 집중에 관련된 여러 부위에 신호를 보낸다. 뉴런이 100조 개의 연결망을 통해 만들어내는 연결의 수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데도 부위에 따라 기능이 다른 것은 뉴런의 종류·구성·연결형태·정보처리 방식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3.

컴퓨터와 인공지능은 천연지능인 인간의 뇌를 모방해서 만들었다. 그래서 컴퓨터와 비교하면 거꾸로 우리의 뇌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나는 인공지능과 천연지능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고 생각한다. 우선 우리 뇌도 하드웨어가 있다. 뉴런이다. 뇌 특정 부위의 특정 뉴런은 특정한 일을 수행한다.” 예를 들어 대뇌 측두엽의 해마가 하는 일 중에는 기억을 형성하는 작업이 있다. 해마 혼자 기억과 관련한 일을 다 하는 건 아니지만 해마가 경미한 손상을 입기만 해도 기억 기능이 혼돈에 빠진다.

 

나를 나로 인식하려면 기억이 뚜렷해야 한다. 자신의 경험이나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기억을 잃으면 남을 알아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게 된다. 뇌의 하드웨어가 심각한 손상을 입으면 몸과 정신 모두 기능마비상태에 빠질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보면 뇌에 깃든 우리의 자아는 흔들리고 갈라지는 땅 위에 서 있는 집과 비슷하다. 질병·교통사고·산업재해·폭행·고문·노화 등 뇌의 하드웨어에 물리적 손상을 입히는 요인은 다양하다. 겉으로는 아무 변화가 없어도 성격·신념·사고방식은 크게 바뀔 수 있다.

 

4.

인간의 뇌는 어떤 면에서 기계에 미치지 못한다. 아무리 잘 관리해도 오래되면 성능이 떨어진다. 나이가 들면 현명해진다는 말을 나는 믿지 않는다. 나이가 들수록 보통은 어리석어진다. 하드웨어·소프트웨어 · 데이터라는 세 요소를 종합하면 그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다. 우리 몸의 하드웨어는 20대에 정점을 찍고 서서히 내리막을 걷는다. 뼈·근육·관절 · 시력 · 청력이 다 그렇다. 뇌세포라고 해서 다르겠는가. 뇌의 소프트웨어는 하드웨어와 달리 더 더 늦게까지 스스로를 개선한다. 학습과 경험을 통해 뇌가 획득하는 데이터는 노년기까지 계속 증가할 수 있다.

 

소프트웨어의 성능 개선과 데이터 증가 효과가 하드웨어 퇴화로 인한 기능 저하를 상쇄하는 동안은 더 지혜로워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노화로 인해 하드웨어가 심하게 나빠지면 소프트웨어가 원활하게 작동하지 못한다. 기존 데이터를 상실하는 속도는 빨라지고 신규 데이터 유입은 줄어든다. 나이를 먹으면 젊었을 때보다 덜 똑똑해진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는 예전보다 훨씬 덜 똑똑하다. 그렇지만 앞으로 더 어리석어질 것임을 알 정도로는 똑똑하다.

 

뇌과학자들이 내게 용기를 주었다. '뉴런은 서로 연결함으로써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만들어내고, 사람의 생각과 행동은 거꾸로 뉴런의 연결 패턴에 영향을 준다.' 자아가 뇌에 그저 깃들어 있는 게 아니라 뇌를 형성하고 바꾼다는 말이다. 물질이 아닌 자아가 물질인 뇌를 바꾼다니, 신기하지 않은가? 내 뇌는 매순간 퇴화하고 있다. 내 자아는 날마다 어리석어지는 중이다. 나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조금이라도 덜 어리석어지겠다는 결의를 다진다. 내 뇌의 뉴런이 순조롭게 다양한 연결망을 형성할 수 있도록 부지런히 책을 읽고 생각한다. 타인에게 공감하고 세상과 연대하며 낯선 곳을 여행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뇌에 새로운 데이터를 공급하는 것뿐이다. 어리석어지는 속도를 늦추는 유일한 방법이다.

 

나는 내 자신을 무한정 믿지 않는다. 아무리 노력해도 대뇌피질의 신경세포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줄어드는 때가 올 것이다. 이미 그런 상황인데도 모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일 아침 갑자기 어떤 신경전달 물질이 과도하게 나오거나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 내 뇌가 자신을 이해하는 일에 관심을 접고 오로지 생존에만 집착하는 날이 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 전에 세상을 떠나면 좋겠지만 그것도 원하는 대로 되진 않는다. 나는 욕심 많고 인색하고 어리석고 보수적인 노인이 될 수도 있다. 지금의 내가 하는, 더 젊은 내가 했던, 모든 말과 행동을 부정하는 언행을 할지도 모른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뇌의 하드웨어 퇴화로 인해 벌어진 신경생리학적 사건으로 여겨 주기를, 나쁜 놈이라고 욕하지 말고 불쌍한 사람이라고 동정해 주기를 바란다. 내자아가 오늘의 상태를 유지하는 한, 어떤 경우에도 자유의지로 그런 변화를 선택하지는 않을 테니까.

 

다시 강조한다. 우리의 자아는 단단하지 않다. 지진으로 흔들리는 땅 위에서 해일과 폭풍우를 맞으며 서 있다. 흔들리고 부서지고 퇴락해 사라질 운명이다. 자유의지는 그런 곳에 기거한다. 있다고 말하기엔 약하고 없다고 하기엔 귀하다. 그래서 나는 자유의지라는 것이 있다고도 없다고도 확언하지 못하겠다. 뇌과학을 조금 알고 나니, 나를 포함해 어떤 인간도 무한 신뢰하거나 무한 불신하지 않게 되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도 마찬가지다. 사랑하기엔 흉하고 절멸하기에는 아깝다. 그 운명이 어찌 될지 나는 알지 못하고 책임질 수도 없다. 단지 나 자신의 삶 하나를 스스로 결정하려고 애쓸 따름이다. 악과 누추함을 되도록 멀리하고 선과 아름다움에 다가서려 노력하면서, 내게 남은 길지 않은 시간을 살아내자. 이것이 내가 뇌과학에서 얻은 인문학적 결론이다.

 

< 2 >

생물학

 

1.

다윈주의 Darwinism 는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같은 사상. 이념 · 철학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다윈주의자는 모든 종이 공통의 조상에서 자연선택을 통해 진화했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을 가리킨다. 인문학자도 얼마든지 다윈주의자일 수 있다.

 

다윈은 그 시대 말로는 박물학자, 요즘 말로는 생물학자다. 누구보다 넓고 깊게 인간의 유래와 본성을 연구했으니 인문학자라고 해도 괜찮을 것이다. 인문학 분야에서 19세기 최고 천재로 통했던 마르크스의 역사이론은 20세기를 지나면서 위력을 잃었고, 과학과 인문학의 경계에서 활약했던 프로이트Sigmund Freud(1856~1939)의 정신분석학도 영향력이 예전만 못하다. 그러나 과학자 다윈의 이론은 시간이 흐를수록 힘이 세졌다. 생물학의 경계를 넘어 심리학·인류학·경제학·사회학을 비롯한 인문학의 많은 분야에서 파장을 일으켰다. 과학자들이 인간에 대한 사실을 새로 찾아낼 때마다 다윈이 옳았다는 것이 더 확실해졌기 때문이다.

 

『종의 기원』결론은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모든 종은 공통의 조상에서 유래했다.' 종이 각각 독립해서 발생하였거나 조물주가 따로따로 창조했다는 당대의 지배적 관념을 뒤엎은 이 결론을 대중이 알아들을 수 있게 하려고 다윈은 두꺼운 책 한 권을 썼다.

 

 

2.

자연선택 이론의 논리 사슬은 단순하다. '모든 생물은 키울 수 있는 것보다 많은 후손을 낳는 경향이 있다. 개체는 변이가 있다. 생존에 유리한 변이를 지닌 개체는 불리한 변이를 지닌 개체보다 생존할 확률이 높고 자손을 퍼뜨릴 가능성도 크다. 그리하여 생존에 유리한 형질은 널리 퍼지고 불리한 형질은 소멸한다.'

 

3.

다윈의 이론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보다 더한 시련을 겪었다. 누구는 진화론을 오용해 인류에 대한 범죄를 저질렀고, 누구는 진화론을 사회에 나쁜 영향을 준 이론이라 비난하고 배척했다. 오용한 쪽은 '우파', 배척한 쪽은 '좌파'다. 우파와 좌파를 명확하게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다윈주의와 관련해서는 그나마 수월하게 구별할 수 있다. 우파는 생존경쟁을 피할 수 없는 자연법칙으로 간주하고 격차와 불평등을 발전의 동력이라고 옹호하며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정책에 반대하는 개인과 집단이다. 좌파는 사회적 약자, 착취당하는 사람들,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의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무엇인가 하려는 개인과 집단이다.

 

우파는 진화론을 오남용했다. 영국 철학자 스펜서가 창안한 '사회다윈주의'가 시작이었다. 스펜서의 이론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부자와 권력자는 사회의 환경에 잘 적응한 사람이고 가난과 무지는 적응에 실패했다는 증거다. 약육강식은 자연스러울 뿐만 아니라 사회적·도덕적으로 바람직하기도 하다. 사회 발전을 위해서는 적응하지 못하는 자가 소멸하게 내버려 두어야 한다.' 스펜서는 『종의 기원』초판을 읽고 생존경쟁과 자연선택의 원리를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이라는 말로 요약했다. 다윈은 스펜서를 위대한 철학자로 평가했고 '적자생존'이라는 말을『종의 기원』개정판에 받아들였다. 또 가축을 개량하는 것처럼 '우수한' 남녀를 짝 지워 인간을 개량할 수 있다고 주장한 외사촌 골턴Francis Galton(1822~1911)의 우생학을 진지한 학문으로 대했다. 그런 사실을 들어 다윈이 우파였다고 주장할 수는 있다. 하지만 다윈은 좌파도 우파도 아니었다. 사실을 탐구하는 과학자였을 뿐이다.

 

4.

사회다윈주의는 ‘열등한 개체’를 제거함으로써 사회를 개선할 수 있다고 주장한 우생학과 결합했다. 민족 또는 국가의 번영을 최고 가치로 내세운 전체주의 사상과 손잡았다. 인종차별과 노예제도를 정당화하는 이념의 도구가 되었다. 사회다윈주의와 우생학의 종착점은 유럽 유대인 600만명을 죽인 나치의 홀로코스트였다. 민족주의와 전체주의를 정치이념으로 삼았던 히틀러는 강제노동수용소와 가스실에 유대인 '살인공장'을 차리기 전에 독일의 장애인 · 정신질환자·중증환자와 집시를 비롯한 소수민족을 먼저 체계적으로 학살했다. 예나 지금이나 우파는 집단을 생존경쟁의 단위로 설정하고 다른 민족 또는 국가의 구성원에 대한 적대의식과 혐오감을 조장하는 경향이 있다.

 

5.

이기적 유전자」의 핵심 내용은 ‘유전자 선택’이론이다. 생존경쟁을 통해 이루어지는 자연선택의 단위를 개체나 집단이 아니라 유전자로 보는 이론이다.

모든 생물의 DNA가 똑같이 네 종류의 염기로 이루어져 있다.

DNA는 우아하게 맞물린 한 쌍의 나선형 뉴클래오티드 사슬이다. 뉴클래오티드는 A(아데닌),T(티민), C(시토신), G(구아닌)이라는 네 종류의 염기로 이루어진다. 이것을 생명의 언어라 할 수 있다. 연결 순서만 다를 뿐 모든 동식물의 DNA는 같은 언어로 씌여 있다.

 

모든 생물의 DNA가 동일한 알파벳으로 씌어 있다는 사실은 모든 종이 공통의 조상에서 유래했음을 입증하는 유전학의 증거다. 다윈은 염색체·DNA·유전자 같은 것을 몰랐다. 그런데도 완벽하게 옳은 결론을 내렸으니 관찰과 추론의 힘은 얼마나 대단한가. 다윈이 말한 대로, 생명은 단순한 것에서 무한히 다양한 형태로 진화했다. 쓸데없는 노파심에서 종이 무엇인지 짚고 간다. 두 생물 개체의 유전자를 섞어 각각의 천성을 가진 자손을 만들 수 있으면 같은 종에 속한다. 동물에 한정해서 일상 언어로 말하면, 암수가 교미해 생식 능력이 있는 자식을 낳으면 같은 종이다. 자식을 낳는다 해도 그 자식이 번식하지 못하면 같은 종이 아니다. 예컨대 암말은 당나귀 수컷과 교미해 노새를 낳지만 노새는 자식을 낳지 못한다. 말과 당나귀는 다른 종이다. 이 기준을 적용하면 피부색과 외모가 어떠하든 80억 호모 사피엔스는 모두 같은 종에 속한다.

 

모든 생물의 DNA가 같은 언어로 씌어 있다는 게 뭐 그리 감동이냐고 누가 묻는다면 왜 아닌지 되묻고 싶다. 나는 그 사실을 안 뒤로 '존재의 고독'을 덜 느낀다. 동네 공원에 아무렇게나 핀 풀과 꽃, 모르는 사람과 산책하는 개, 경계하며 피해가는 길고양이를 예전보다 가깝게 여긴다. 삼림욕장에서 크게 숨을 들이쉴 대는 고마움을 느낀다.

 

6.

네 가지 알파벳으로 씌어 있다는 유전자는 무엇인가? 유전자는 '오래 존속하는 염색체染色體(chromosome)의 작은 조각'이다. 만족할 만큼 명확하진 않아도 이보다 더 엄격하게 유전자를 정의하는 방법은 없다. 염색체의 조각이 오래 존속하려면 잘 흩어지지 않아야 하며, 흩어지지 않으려면 되도록 작아야 한다. 그러면 염색체는 무엇인가. 세포핵 안에 있는 유전자 운반 물질이다. 세포를 관찰하려고 사용한 염료에 잘 반응해 염색체라는 이름이 붙었다. 현미경으로 보면 실 뭉치 비슷하게 생겼다.

 

생물의 염색체는 1쌍이 보통이다. 드물지만 예외적으로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어서 '보통’ 그렇다고 했다. 예컨대 양파는 염색체가 8쌍, 수박은 11쌍, 초파리는 4쌍, 고양이는 19 쌍, 침팬지는 24쌍, 개는 39 쌍, 인간은 23쌍이다. 인간 염색체의 한 쌍은 성性염색체라 하고, 나머지 22쌍은 상常염색체 또는 보통염색체라 한다. 인간 염색체는 생식세포에서 절반인 23개로 감수 분열한다.

 

< 3 >

화학

 

1.

소금이 물에 녹는다는 건 먼 옛날에도 알던 사실이다. 하지만 그 이유를 정확하게 파악한 건 100여 년밖에 되지 않았다. 원자의 구조와 전자의 운동을 모르면 소금이 물에 녹는 현상을 확실하게 설명할 수 없다. 화학의 정의를 다시 보자 '물질의 조성과 구조 · 성질 · 관계 · 변화를 연구하는 과학'..이다. 물질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원자의 정체를 모르고는 물질의 구조와 성질을 파악할 수 없다. 양자역학이 나온뒤에야 화학은 비로소 온전한 과학이 되었다.

 

화학은 '환원'還元(reduction)의 필요성과 위력을 잘 보여준다. 환원은 크고 복잡한 것을 작고 단순한 것으로 쪼개는 것이다. 모든 대상을 이런 방법으로 연구하려는 경향을 환원주의'라고 한다. 원자와 같이 작고 단순한 것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으로 크고 복잡한 대상을 설명할수 있다면 더 큰 의미가 있다.

 

2.

우주의 모든 물질은 '원소'元素(element)로 이루어져 있다. 결합해서 어떤 물질의 분자를 이루는 원소는 보통 두 종류이상이지만 산소 • 금 • 다이아몬드처럼 원소가 하나인 물질도 많다.

 

산소(O2)를 보자 없으면 우리가 몇 분 버티지 못하고 목숨을 잃는 물질인 산소의 원소는 산소 한 가지다. 산소'분자'分子(molecule)는 산소 원자(O) 2개가 결합한 물질이다. 화학에서는 물질의 분자를 원소의 기호와 원자의 수를 적은 화학식으로 표현한다. 예컨대 화학식 H2O는 물의 원소는 수소와 산소 두 가지이고, 물 분자는 산소 원자 하나와 수소 원자 2개로 이루어진다는 정보를 담고 있다.

 

물질세계는 원자로 이루어져 있고 원자들이 결합해 물질의 분자를 만든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런데 원자들은 왜 결합할까? 결합한 원자들은 왜 흩어지지 않으며, 흩어질 때는 왜 흩어질까? 어떤 힘이 원자들을 뭉치게 할까? 궁금해한 적은 없었지만, 알고 나니 신기했다. 화학이 이렇게 신기한 과학인지 몰랐다. 둘 이상의 원자가 서로 전자를 공유해 화합물을 만드는 것을 '공유결합'이라 하고, 전자를 방출하거나 영입해 양이온이나 음이온이 된 원자들이 서로 끌어당겨 화합물을 만드는 것을 '이온결합' 이라고 한다. 공유결합이 만든 '분자화합물'은 부드러워서 액체나 기체가 많은 반면, 이온결합이 만든 '이온화합물'은 고체인 경우가 많다. 예컨대 분자화합물인 물은 액체, 이온화합물인 소금은 고체다. 그렇지만 원자를 결합하게 만드는 것은 두 경우 모두 전자(electron)다.

 

3.

그 많은 탄소는 다 어디에서 왔는가? 어디서 온 게 아니다. 원래 지구에 있었다. 다른 곳에 다른 형태로 있던 탄소가 풀려나 산소·수소와 결합한 탓에 기후위기가 생겼다. 오로지 인간 탓인 건 아니다. 화산 폭발과 자연발화 산불도 중요한 원인이다. 하지만 호모 사피엔스가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인간은 극히 최근에야 직접 에너지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수력·풍력·태양열·지열·핵을 이용한 발전이다. 오랫동안 나무를 에너지원으로 썼고, 산업혁명 때부터는 석탄을 파냈으며, 다음은 석유를 뽑아 썼다. 인간이 집을 데우고 자동차를 굴리고 비행기를 띄울 때마다거기 들어 있던 탄소가 풀려났다. 소와 양과 돼지를 비롯한사육 가축의 방귀와 하품과 배설물에서 나온 탄소도 만만치 않았다. 숲을 훼손해 도시와 경작지를 만든 탓에 나무가 광합성으로 흡수 고정하는 탄소량이 줄었다. 탄소는 잘못이 없다. 지구에서 탄소가 차지하는 비중은 예전 그대로다.

 

4.

환원은 복잡한 것을 단순한 것으로 나누어 단순한 것의 실체와 운동법칙을 파악하는 작업이다. 환원주의는 이러한 연구 방법을 모든 대상에 적용하려는 경향이나 태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복잡함과 단순함은 상대적 개념이라는 데 주의하자. 복잡한 것은 단순한 것으로 나눌 수 있고, 단순한 것은 더 단순한 것으로 나눌 수 있다.

 

과학자는 드러내 놓고 환원주의 연구 방법을 쓴다. 화학은 물리학으로, 물질은 입자로 거의 완벽하게 환원한다. 그러나 그걸 두고 물리학 패권주의라고 비난하는 사람은 없다. 양자역학 덕분에 화학의 세계는 완전해졌고 화학산업은 더 발전했다.

학문이 끝없이 작은 단위로 갈라진 것도 환원주의 연구방법론과 관계가 있다. 생물학·화학·물리학은 과학의 큰 갈래다. 분야마다 다양한 세부 학문이 있다. 예컨대 생물학에는 동물학·식물학·미생물학·분자생물학·세포생물학·유전학·진화생물학·사회생물학 등이 있다.

 

5.

통섭은 환원주의를 수단으로 삼아 지식을 통합하는 것이다.

분석은 과학적 방법으로 하지만, 통섭은 언어로 해야 하기에 과학과 인문학이 모두 필요하다. 진리를 따라 과감하고 자유롭게 학문의 국경을 넘나들어야 한다. 진리는 철새처럼 어느 정도 정해진 경로를 따라 움직인다. 생물학에서 나온 문제가 경제학과 정치학을 거쳐 심리학과수학에 정착한다. 사회학의 문제가 행정학·법학·기상학 ·화학·음악의 영역까지 뻗어 간다. 지난날의 '학제적interdisciplinary 연구'는 여러 분야 연구자들이 저마다 자기영역의 목소리를 보탠 '다학문적multidisciplinary 유희'에 지나지 않았다. '통섭은 학문의 경계를 허물고 일관된 이론의 실로 전체를 꿰는 '범학문적transdisciplinary 접근'을 요구한다.

 

나는 경제학을 전공했지만 2017년 이후로는 경제학 관련 학회 행사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토론자로 참여했던 마지막 학회에서 느꼈던 감정이 떠오른다. 소통하지 못하는 답답함이었다. 경제학자들은 자기네끼리도 협동 연구를 잘 하지 않는다. 노동시장 연구자와 국제금융 연구자가 학문적 대화를 나누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어디 경제학만 그렇겠는가.

 

 

< 4 >

물리학

 

1.

전자는 입자이고 파동이다.

 

도 전자와 마찬가지로 파동이고 입자다.

전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하게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전자의 운동은 확률로 기술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불확정성 원리’의 요체다.

 

2.

사람의 기도에 응답하고 선을 포상하며 악을 징벌하는 '인격신'의 존재를 나는 믿지 않는다. 앞으로는 어떨지 모르겠으나 지금까지는 기독교 성서나 성직자의 설교에 마음이 끌린 적이 없다. 구약은 유대민족의 고대사로, 신약은 예수의 전기로 여기며 읽었다. 이슬람도 역사와 교리는 기독교와 비슷하다고 본다.

 

불교는 인격신을 섬기지 않는다는 점에서 기독교나 이슬람과 다르다. 우주의 모든 것에 신성이 깃들어 있다고 보는 범신론(汎神論), 자연법칙을 신의 자리에 올려두는 이신론(理神論)에 가깝다. 석가모니는 종교를 창시하지 않았다. '스스로 깨달은 사람'이었을 뿐이다. 그는 존재의 이유와 삶의 의미를 탐색한 끝에 인간 이성과 자연법칙 말고는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결론에 도달한 철학자였다.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그를 내세워 종교를 만들었다. 범신론과 이신론에 가까운 종교는 다른 종교나 과학과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어떤 이들은 불교철학이 양자역학과 통한다고 한다. 근거가 없지는 않다. 둘은 분명 닮은 데가 있다. 공부를 많이 한 물리학자가 말하면 더 그런 것 같다.

 

세상의 많은 종교와 윤리 도덕 강령 중에서 과학적 진리와 충돌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는 것이 불교의 연기법緣起法이다. 연기법은 붓다가 깨달은 보편적 진리로 그 자체가 과학이다. 시공간의 모양과 물질의 분포는 어느 쪽이 먼저 결정되고 그에 따라 다른 쪽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서로를 결정한다. 둘은 상호의존 관계다. 이것을 불교적으로 해석한 것이 바로 연기법이다. 어떤 사물도 다른 것과의 관계를 떠나 독립해서 존재할 수는 없으며 모든 것은 다른 것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의미를 가진다.

 

3.

불교철학과 양자역학의 논리적·역사적 연관성을 확인할 수 없으니 둘이 닮은 것을 우연이라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어떤 점이 닮았는지 생각하다 보면 깨달음을 얻는 것 같기도 하다. 예컨대 불교의 가장 중요한 경전이라는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 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문장이 그렇다. 「반야심경」은 당나라 승려 현장이 산스크리트어 경전을 중국 글자 270자로 압축한 텍스트다. 한글 번역본은 한문을 소리 나는 대로 옮긴 것부터 철학적 해석을 넣어 가독성을 높인 것까지 가지각색이다. 산스크리트어 원문과 대조해 의미를 더 분명하게 드러낸 번역본이 나올 정도로 「반야심경」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넓고 깊다. 해설서도 헤아리기 어려울정도로 많다.

 

4.

기독교 성서는 히브리어에서 출발해 라틴어와 영어를 거쳐 한국어판까지 왔다. 중간에 중국어판이나 일본어판이 낀 경우도 있었다. 내가 알기로는 예수의 언행을 기록한 ‘4대 복음서'의 기록자들 가운데 살아 있는 예수를 만난 사람은 없다. 신약은 예수의 제자의 제자의 제자들이, 자기네 신앙공동체에서 전해오던 이야기를 적은 것이다. 히브리어 원전을 바로 번역한 우리말 성서는 1980년대에 처음 나왔다. 조선 시대와 일제강점기에 제작한 한국어 성서는 국한문 혼용에 가까운 문장을 썼고 명백한 오역이 적지 않았다. 불교경전도 석가모니가 쓴 게 아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추종자들이 만든 텍스트가 쌓여 불교 경전이 되었다. 「반야심경」은 중국어를 거쳐 우리말 경전으로 왔다. 기독교든 불교든, 우리말로 옮겨 놓은 경전의 내용을 글자 하나 틀리지 않은 진리라고 주장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인간의 언어는 절대 진리를 담지 못한다.

 

5.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은 석가모니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문장이라고들 한다. 기계적으로 옮기면 간단하다. '색과 공은 같다.' 문제는 '색'과 '공'이 무엇이냐는 것인데, 불교 철학자들은 '현상과 실체', '존재와 변화', '물질과 마음’, ‘존재와 무無’, ‘물질과 에너지' 등 갖가지 해석을 제시한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정확하게 어떤 뜻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진리를 담고 있다는 증거도 없다. 저마다 다르게 해석하는 게 당연하다. 이 문장을 양자역학과 연결하려면 ‘색’과 ‘공’을 '존재'와 '무'로 해석하는 게 자연스럽다.

 

우리가 감각으로 인지하는 세계는 물질로 꽉 차 있다.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 비어 있는 것 같지만 지구행성의 모든 공간은 공기로 가득하다. 달과 지구, 지구와 태양, 태양과 다른 별, 은하와 은하 사이에도 물질이 존재하지 않는 공간은 없다는 걸 우리는 안다. 그렇지만 그 역(逆)도 성립한다. '겉보기는 꽉 찼으나 실제로는 텅 비어 있다.' 원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면 이 말을 수긍하게 된다. 석가모니가 그런 뜻으로 말했다는 게 아니다. 그가 원자의 구조를 알았을 리 없다. 우연일 뿐이다. 그래도 흥미롭긴 하다.

 

6.

철학자 러셀Bertrand Russell(1872~1970)은 쓸쓸한 어조로 우주의 종말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지구는 영원히 거주할 수 있는 곳이 아니며 인류는 사라질 것이다. 우주는 서서히 침몰해 마침내는 관심을 끌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신이 우주 기계의 태엽을 다시 감을 거라는 주장은 털끝만큼의 가능성도 없다. 과학의 증거로 말한다면, 우주는 비참한 몰락을 향해 가는 중이다. 이것이 존재의 목적을 증명하는 것이라면 내가 신을 믿어야 할 이유는 없다.'

 

러셀이 말한 '과학의 증거’는 열역학 제2법칙 또는 엔트로피 법칙이다. 열역학 제1법칙은 다들 알 것이다. 어떤 물리적 과정이 일어나도 물리계의 에너지 총량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에너지는 운동에너지·위치에너지·복사에너지·열에너지 등 모든 형태를 아우르며, 절대 틀리는 일이 없기 때문에 '에너지 보존 법칙'이라고 한다. 열역학 제2법칙은 제1법칙처럼 딱 떨어지는 형태가 아니지만 우리 우주에서 최후까지 살아남을 법칙이다. 모든 물리적 과정에서 엔트로피는 증가하지만 아주 드물게 감소하는 경우가 있어서 '엔트로피 증가 법칙'이 아니라 '엔트로피 법칙'이라고 한다. 엔트로피 법칙에 다르면 우주는 점점 더 무질서해져서 언젠가는 어떤 질서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

 

엔트로피 법칙은 우주의 묵시록이다. 모든 것은 결국 사라진다. 나는 러셀의 말에 공감한다. 신을 믿어야 할 이유는 없다. 엔트로피 법칙은 영원성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고 말한다. 이 우주에는 그 무엇도, 우주 자체도 영원하지 않다. 오래간다고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존재의 의미는 지금, 여기에서, 각자가 만들어야 한다. 우주에도 자연에도 생명에도 주어진 의미는 없다. 삶은 내가 부여하는 만큼 의미를 가진다. 길든 짧든 사람한테는 저마다 남은 시간이 있다. 나는 그리 길지 않을 시간을 조금 덜어 이 책을 썼다. 쓰는 동안 즐거웠다. 남들과 나누면 더 좋을 것 같다. 그게 전부다.

 

호모 사피엔스에게 남은 시간은 더 길다. 태양이 부풀어 올라 지구를 삼킬 때까지 50억 년이 있다. 우리의 후손이 혹시라도 그때까지 살아남아 다른 행성으로 이주하는 데 성공한다면 태양과 지구에게 작별 인사를 할 것이다. 하지만 지구 탈출에 성공한다 해도 빅 칠이나 빅 크런치를 견디지는 못한다. 죽어 없어지는 게 나 혼자만은 아니라니 위로가 된다. 물론 이 모두는 쓸데없는 생각인지도 모른다. 인식 주체인 내가 죽고 없는데 호모 사피엔스가 생존하든 말든, 우주가 있든 없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 5 >

수학

 

1.

지구 크기를 처음으로 알아낸 사람은 기원전 3세기 알렉산드리아에 살았던 에라토스테네스다.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범위에서는 그렇다. 놀랍지 않은가? 그 먼 옛날에 지구가 구형이라는 사실을 파악하고 크기까지 측정했다니 말이다. 그게 다가 아니다. 그걸 알아낸 방법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간단해서 더 놀랍다.

 

에라토스테네스는 알렉산드리아 남쪽 시에네 지방의 나일강 첫 급류 가까운 동네에서는 6월 21일 정오에 수직으로 꽂은 막대의 그림자가 사라지고 우물의 수면에 태양이 비친다는 파피루스 기록을 보았다. 그 시각을 기다려 알렉산드리아 땅에 막대를 꽂았더니 시에네와 달리 그림자가 생겼다. 그는 막대와 그림자의 길이를 활용해 태양 빛이 수직에서 약 7도 기울어 떨어진다는 사실을 파악했고 그것을 근거로 땅이 구형이라고 추론했다. '태양은 아주 멀리 있기 때문에 빛은 지면에 수직으로 떨어진다. 땅이 평평하다면 그 시각에 어디서나 막대 그림자가 없어져야 한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으니 땅이 둥글다고 볼 수밖에 없다.'

 

에라토스테네스는 구형인 땅의 둘레길이를 알아내려고 초급 기하학을 통해 거리를 측정했다. 시에네와 알렉산드리아의 수직 막대를 원 위의 두 점으로 보고 원의 중심을 향해 직선을 그으면 두 직선은 지구 중심에서 만난다. 그리고 교차각은 태양 빛이 알렉산드리아 땅에 떨어진 각도와 같다. 사용한 기하학은 그게 다였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시에네까지 걸어서 몇 보인지 헤아리고 걸음 수에 평균 보폭을 곱하는 방법으로 두 도시가 직선으로 약 80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고 추정했다. 왕복 1,600킬로미터가 넘는 길이었으니 건강하고 똑똑한 노예를 시켰을 것이다.

 

마지막은 간단한 산술이었다. 교차각 7도는 360도의 약50분의 1이다. 직선거리 800킬로미터에 50을 곱하면 그게 지구 둘레다. 에라토스테네스가 추정한 지구 둘레는 약 4만 킬로미터로 적도 길이에 근접했다. 눈과 발, 막대기, 초급 기하학과 간단한 곱셈으로 행성의 크기를 알아냈으니 얼마나 대단한가.

 

2.

물리학과 화학을 비롯한 과학은 정의가 내려져 있다. 이견이 있다고 해도 다수의견 또는 통설이 존재한다. 하지만 수학이 어떤 학문인지에 대해서는 과학처럼 분명한 합의가 나와 있지 않은 것 같다. 수학은 과학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수학에 대해서는 크게 보아 두 갈래의 서로 다른 접근방식이 있다. 평생 독특한 청년들한테 수학을 가르쳤던 프랑스의 수학 교육자는 그 차이를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갈릴레이는 수학이 우주의 언어라고 말함으로써 플라톤을 따랐다. 수학자들이 창조한 세계는 플라톤의 이데아를 닮았다. 수학적 정의에 따르면 점은 위치만 있고 크기가 없다. 그러나 그런 이상적인 점은 현실에 없다. 현실의 점은 어느 것이든 다 어느 정도 도톰하다. 직선도 마찬가지다. 두께가 없는 이상적인 직선은 현실에 없다. 기하학의 공리들은 사람이 마음대로 만든 게 아니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에 연원을 둔 사고방식에 따르면 수학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언어유희일 뿐이다. 수학의 공리는 논리 법칙에 따라 일관된 이론을 구축하는 데 쓰는 규칙일 뿐이다. 그런데도 그렇게 해서 얻은 수학의 결과가 현실에서 유용한 것은 그렇게 되도록 공리를 선택했기때문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수학자가 아니다. 수학자들은 두 철학자에게 큰 관심이 없다. 수학의 정의를 둘러싼 논쟁을 이해하는 데 고대 그리스 철학이 꼭 필요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논리학에 기대어 수학의 정의를 살피는 것은 일리가 있는 방법이다. 이 설명을 하디의 언어로 옮기면 논리가 더 분명해진다. '물리적 실재를 서술하는 데 사용하는 하찮은 수학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진정한 수학의 일부이다. 진정한 수학자는 현실과 무관하게 수학적 진리를 추구하고, 과학자와 엔지니어는 물리적 실재를 서술하는 데 유용한 수학적 도구를 필요한 방식으로 가져다 쓴다.'

 

진정한 수학과 하찮은 수학의 관계는 기하학의 발전 과정에서 잘 드러난다. 에라토스테네스와 같은 시기 같은 도시에 유클리드라는 사람이 있었다. 학교를 세워 청년들을 가르쳤던 그는 책을 최소한 2권 썼는데 하나만 양피지 두루마리 13개에 담겨 후대에 전해졌고 나머지는 없어졌다. 그 책이 세상에서 가장 오랫동안 가장 널리 읽힌 책 자리를 두고 기독교 성서와 경쟁했다는 『유클리드 원론』이다. 유클리드는 고대 그리스의 기하학 지식을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용어를 명확하게 정의하고 수학적 증명의 규칙을 정립함으로써 무의식적 가정과 부정확한 추측을 기하학의 세계에서 추방했다.

 

유클리드는 용어 정의 23개, 공리 5개, 그리고 '일반관념'이라고 한 부가공리 5개를 활용해 정리 465개를 증명했다. 공리는 자명하기 때문에 증명하지 않고 참으로 인정하는 명제다. 선분, 선분의 연장, 원의 반지름, 직각에 관한 공리가 자명하다는 데는 이의를 제기하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다섯 번째 평행선 공리는 달랐다. 유클리드는 그 공리를 이렇게 정리했다. '두 직선을 가로지르는 선분을 기준으로 같은 쪽에 있는 내각의 합이 두 직각보다 작으면 두 직선은 결국 그쪽에서 만난다. 지금은 똑같은 내용을 다르게 표현한다. '한 직선 밖의 한 점을 지나면서 주어진 직선에 평행인 직선은 같은 평면 위에 오직 하나뿐이다.' 어떤 수학자들은 평행선 공리가 참이지만 자명하지는 않다고 보았다. 다른 공리를 활용하거나 평행선 공리를 부정하는 방식으로 증명해 보려고 했다. 그러다가 평행선 공리를 부정해도 일관성이 있는 기하학이 성립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새로운 수학을 발견한 것이다.

 

3.

사람은 자신에게 없는 것을 선망하는 경향이 있다. 수학을 못해서 학교생활이 힘들었고 수학 때문에 대학 입시에서 고생한 사람일수록 수학자를 더 우러러본다. 수학 천재는 확실히 다른 분야의 천재보다 더 천재 같다. 전성기의 메시와 호날두는 축구의 신이었다. 보통 선수는 ‘인간계’人間界, 유럽 빅리그의 몸값 높은 선수는 '중간계', 메시와 호날두는 ‘신계’神界에 속한다고 했다. 하지만 수학자는 대부분 신계에 있는 초월적 존재 같다.

 

메시와 호날두가 한 일을 우리는 이해한다. 메시가 1분 동안 다른 선수들보다 얼마나 많은 볼 터치를 했는지, 공을 몰고 갈 때 축구공과 발이 얼마나 가까웠는지, 방향을 바꿀 때 회전 각도가 얼마나 컸는지 데이터로 확인하고 영상으로 감상한다. 호날두가 헤딩을 할 때 다른 선수보다 얼마나 높이 솟아올랐는지, 슈팅한 공의 속도가 다른 선수들보다 얼마나 더 빨랐는지도 안다. 피카소처럼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모차르트처럼 작곡을 하지 못해도 우리는 작품을 감상하면서 그들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는지 이해한다. 빅토르 위고와 톨스토이의 소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수학자는 다르다. 그들은 인간계의 사람이 알지도 못하는 문제를 연구한다. 우리는 그들이 일하는 방식을 흉내 내지 못하며 그들이 쓴 논문을 읽을 수 없다. 중간계에서 활동하는 전문작가들이 최선을 다해 설명해도 극히 일부를 겨우 알아듣는다. 수학자는 우리와 다른 차원에 있는 존재다. 그렇지만 수학자의 삶을 부러워할 필요는 없다. 꼭 존경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모두가 그렇듯, 그들도 자신이 가진 것으로 인생을 산다. 뇌의 특수한 영역이 특별히 발달했기에 수학자가 되었을 뿐이다.

 

유시민/'문과 남자의 과학공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