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詩, 글

정지아 /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중에서

송담(松潭) 2023. 10. 1. 14:55

 

< 1 >

 

먹이사슬로부터 해방된 초원의 하루

 

 

이미지 출처 : pngtree

 

 

아프리카 초원 어딘가 야생 사과나무 한그루가 우뚝 서있다. 저 홀로 자란 사과나무는 장정 열댓 명이 끌어안아도 팔이 닿지 않을 만큼 거대하다. 돌보는 이 하나 없어도 사과나무는 때가 되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그리고 때가 되면 절로 떨어진다. 땅에 떨어진 사과는 고온건조한 기후 덕에 발효되어 향긋한 사과주로 익어간다.

 

마침맞게 술이 익은 날, 코끼리와 사자가 가장 먼저 사과나무 아래로 찾아온다. 코끼리는 긴 코로 날름날름 미친듯이 사과를 주워 먹는다. 술에 취한 코끼리가 비틀거리다 제 다리에 걸려 자빠지고 신이 나 내달리던 사자는 저희끼리 부딪쳐 나뒹군다. 그때쯤 먼 데서 망을 보던 영양이며 얼룩말, 원숭이들이 우- 사과나무를 향해 돌진한다.

 

만월의 달이 떠오르고, 보얀 달빛이 초원을 비추고, 알코올이 동물들의 몸을 적신다. 만취한 원숭이는 꺅꺅ㅡ 고음의 괴성을 내지르며 사자의 대가리를 밟고 나무 위로 튀어 오른다. 한 입 거리도 되지 않을 원숭이 따위가 제 머리를 밟았으나, 알코올이 뇌를 적셔 사자 또한 흥겨울 따름이다. 먹잇감으로밖에는 만날 일 없던 사자와 영양, 코끼리와 원숭이가 한데 어우러진 축제의 밤이 깊어간다. 만월도 술에 취한 듯 갈지자로 하늘을 가로지른다. 온몸의 에너지를 다 쏟아부은 동물들이 초원 아무 데나 쓰러져 잠든다. 원숭이 한 마리, 취기 가득한 눈을 껌벅이며 먼 하늘의 달을 아련하게 바라본다.

 

동물들이 잠에 든 사이, 외로운 달은 부지런히 하늘을 달리고, 달이 사라진 자리, 태양이 떠오른다. 청량한 첫 햇살이 가장 늦게 잠든 원숭이의 눈꺼풀에 닿는다. 반짝 눈을 뜬 원숭이가 하품을 하며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자기 눈 바로 앞에 놓인 사자의 머리를 원숭이는 인지하지 못한다. 잠시 뒤, 제가 베고 누운 것이 사자의 배라는 것을 인지한 원숭이가 화들짝 놀라 비명을 내지르며 평소보다 더 높이 더 멀리 튀어 오른다.

 

그 소리에 먹이사슬의 맨 아랫것들이 먼저 깨어난다. 취기가 사라지고 현실로 돌아온 힘없는 것들이 우다다 초원의 먼지를 깨우며 사방으로 내달린다. 먹이사슬의 최상위, 사자와 코끼리는 그제야 곤한 잠에서 깨어난다. 끔벅끔벅, 대체 여기가 어딘지 주변을 돌아보던 사자와 코끼리의 시선이 마주친다.

 

술에 취해 처음 본 사람과 원나잇을 한 남녀처럼 정신을 차린 여자가 황급히 옷을 입고, 이미 깬 남자가 자는 척 꿈쩍 않듯 사자와 코끼리는 겸연쩍게 몸을 일으켜 상대를 곁눈질한다. 그러고는 숙취에 찌든 무거운 걸음으로, 정반대의 초원을 향해 어슬렁어슬렁 걸음을 옮긴다.

 

먹이사슬로부터 해방된 초원의 단 하루, 이것이 술의 힘이다. 최초로 술을 받아들인 우리의 조상도 아프리카 초원의 저 동물들과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해마다 돌아오는 해방의 하루 숙취의 고통을 알면서도, 술 깬 직후의 겸연쩍음을 알면서도, 동물들은 그날의 해방감을 잊을 수 없어 또다시 몰려드는 것일 테다.

 

술은 스트레스를 지우고 신분을 지우고 저 자신의 한계도 지워, 원숭이가 사자의 대가리를 밟고 날아오르듯, 우리를 날아오르게 한다. 깨고 나면 또다시 비루한 현실이기다리고 있을 뿐이지만 그러면 또 어떠한가. 잠시라도 해방되었는데! 잠시라도 홍겨웠는데!

 

 

 

 

 

< 2 >

 

 

그의 손에 들린 것은 맥켈란 1926이었다. 에든버러 어느 위스키샵에서 맥켈란 30년산을 본 적이 있다. 녀석은 다른 위스키와 달리 자물쇠가 달린 투명한 상자 안에 들어 있었다. 맥켈란 1926은 30년산과는 감히 비교도 할 수 없는 고가의 위스키다. 만져본 적도 마셔본 적도 없지만 맥켈란 1926의 명성은 나 같은 초짜도 익히 알고 있었다. 1986년 전 세계에 40병만 출시된 술이다. 셰리 참나무통에서 60년간 숙성했다는 맥켈란 1926 40 병은 병당 3,000만 원에 완판되었다고 한다.

 

싱글몰트계의 롤스로이스라 불리는 맥켈란 1926 이 내 잔에도 가득 찼다. 녀석은 뜨겁고 깊고 진했다. 끈적끈적, 끝도 없는 수렁으로 끌어들이는 맛이었다. 맥켈란 1926을 입에 오래 머금은 채 나는 실패한 사회주의자인 내 아버지를 떠올렸다. 세상 떠나기 전에 좋은 술, 맛이나 보라고 내가 보내준 시바스리갈 18 년산을 소주 한 박스와 바꿔 마신 내 아버지를.

 

젊은 날에는 똑같이 민족의 통일과 평등을 주장했으나 두 사람의 끝은 전혀 달랐다. 나는 실패한 사회주의자인 아버지의 삶이 늘 애달프고 서글펐다. 아버지 스스로 당신의 삶을 쓸쓸해할 것이라 확신했다. 그러나 맥켈란 1926을 마시며 나는 깨달았다. 아버지의 결말이 내 취향에 더 걸맞다는 것을. 아버지 역시 나와 같은 마음이리라는 것을. 참으로 다행 아닌가? 성공할 기회가 없어 타락할 기회도 없었다는 것은!

 

회장님의 친구가 타락한 공산당원이라는 증거는 없다. 나는 그의 이름조차 알지 못한다. 어쩌면 그는 자기 민족의 지상과제인 가난을 해결하기 위해 자본가와도 손을 잡을 줄 아는 탁월한 능력자일 수 있다. 필시 어느 자본가에게 상납받은 뇌물일 테지만, 그 뇌물을 다른 자본가와 나눠 마시는 호탕한 성품의 사나이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뜨겁고 끈적끈적한 맥켈란 1926 때문인 것도 같았다.

 

한때는 평등을 주창했을 공산당 간부와 함께 마시는 맥켈란 1926은 그러니까 나에게 타락의 맛,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모름지기 평등을 주창했던 자라면 내 아버지처럼 모를 심다 말고 논두렁에서 농민들과 막걸리 한 사발 단숨에 들이켜고 김치 한 가닥 쭈욱 찢어 우걱우걱 씹어줘야 제격 아니겠는가.

 

이 글을 쓰면서 맥켈란 1926의 가격을 찾아봤다. 이런 젠장! 2018년 두바이 공항에 재등장한 맥켈란 1926 한 세트(그러니까 40병 출시된 중의 두 병)이 120만달러에 팔렸단다. 물론 비틀즈의 앨범 표지를 기획한 피터 블레이크와21세기 최고의 팝 아티스트발레리오 아디미의 작품이 라벨로 붙은 세트라 상상을 초월하는 가격에 팔렸겠지만, 타락의 맛이고 나발이고 즐겼어야지! 나는 자본주의를 살고있단 말이다! 이러니 아직도 이 모양 이 꼴인 거다. 한 병당 6억 5,000만 원이라는 가격을 알고 나니 그 후텁지근한 여름밤, 끈끈하게 들러붙는 강바람을 맞으며 마셨던 맥켈란 1926이 간절히 그립다. 몇 잔 더 달라고 할걸. 입맛을 다셔보지만 소용없다

 

 

< 3 >

 

북에서의 긴 여정이 끝나갈 무렵, 묘향산에 갔다. 임꺽정이 왜 묘향산으로 숨어들었는지 단박에 이해가 갔다. 설악산보다 더 뾰족한 기암괴석이 첩첩이 들어서 거기 안개라도 끼는 날이면 신선을 만나러 가야 할 듯했다.

 

묘향산에서의 밤, 어찌어찌해서 보위부 직원 둘과 나를 포함한 남한 작가 둘이 호텔 바에서 술을 마셨다. 작가치고 형편이 괜찮은 선배 작가가 위스키를 샀다. 일정 내내 보위부 직원들과 함께했지만 인간 대 인간으로 술상 앞에 마주한 건 처음이었다.

 

"마시자!"

 

위스키잔을 부딪친 그들은 거침없이 한 모금에 들이켰다. 나는 술을 좋아하지만 잘 마시는 건 아니다. 찔끔찔끔 오래 마신다.

 

뼈를 에는 듯한 한기에 눈을 떴다. 검은 하늘에 총총히 박힌 별이 보였다. 또렷한 젖빛 은하수가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응? 벌떡 몸을 일으켰다. 세찬 물소리에 귀가 아팠다. 남한에서는 쉬 보기 힘든 넓은 계곡이었다. 나는 그 계곡의 널찍한 바위 위에 앉아 있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좀 전까지 대짜로 뻗어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필름이 끊겼던 것이다. 북한 땅에서!

 

여름인데도 한기가 느껴지는 계곡가 바위 위에서 소름이 쫙 돋았다. 나 살아서 갈 수는 있는 걸까? 북한에서의 여정 내내 북한 측이 정한 곳 외에는 단독 행동을 할 수 없었다. 단독 행동을 했다가 큰일 날 거라고, 남측 관계자가 몇 번이나 주의를 준 바 있었다. 나는 지금 단독 행동을 한 것이고,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고… 소름이 돋지 않을 수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어제 들어간 호텔의 불빛이 보였다. 사람의 그림자는커녕 호텔 외에는 불빛 하나 보이지 않았다. 보위부원들이 늘 호텔 앞을 지키고 감시를 했었는데 웬일일까? 지금 생각하면 너무 첩첩산중이라 북한 사람과 접촉할 일이 없어서였을 것 같다.

 

그때는 그런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상황을 깨닫자마자 호텔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멀지는 않았다. 200~300미터쯤 숨이 턱에 닿을 즈음 호텔에 당도했다. 호텔은 지키는 사람 하나 없이 깊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아마 남한 작가들이 묵고 있을 방 몇 개의 불빛만 희미하게 빛났다. 취침중인 듯했다. 맥이 탁 풀렸다. 술을 마시다 취하고 필름이 끊기고 술과 낭만에 취해 비틀거리며 산길을 걷고, 은하수를 보다 누워 잠들고, 뭐! 사람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그리고 그럴 수 있었다. 그 금단의 땅 북한에서도.

 

북한을 생각하면 묘향산 어느 계곡에서 눈 뜨던 순간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어릴 때 보았던 그대로의 은하수 별이 총총한 밤하늘, 그 신비로운 광경이 그리고 북한이라는 것을 깨닫자 신비고 아름다움이고 나발이고, 싸하게 밀려들던 공포가. 공포가 무색하게 무탈하게 지나간 그 긴 밤이 남파 간첩 아저씨의 눈물 젖은 두만강이, 우리 아빠와 똑 닮았던 고위 간부 아저씨가, 남이 산 위스키와 북이산 꼬냑이. 그런 날을 살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 4 >

 

녀석은 나와 달리 술을 즐기지 않는다. 술이 몸에 맞지도 않거니와 술이 싫단다. 술을 너무 좋아했던 할머니 때문에, 녀석의 할머니는 술꾼이었다. 너무 통쾌했다. 그 연배의 여성도 술꾼일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던 것이다. 그렇지. 옛날이라고 모든 여자가 술을 싫어했을 리는 없지. 녀석의 할머니는 제삿날을 제일 좋아했다. 왜? 안주가 많으니까. 우와! 이 할머니 짱이지 않아?

 

녀석이 고향을 찾을 때면 할머니는 십중팔구 동네 초입구멍가게 평상에서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때로는 두주불사(斗酒不辭)로 취해 널브러져 있기도 했다. 어느 날, 녀석은 창피하기도 하고 짜증이 나기도 해서 물었다.

 

“할머니는 도대체 왜 이렇게 술을 마셔?" 우리의 위대한 할머니는 이렇게 대답했다.

 

"술이 소화제라.”

 

그 한마디가 내 영감을 건드렸다. 해서 어느 소설에 써먹었다. 차마 그대로 쓸 수는 없어서 술이 약이라라고 썼는데, 그랴. 그대로는 절대 쓰지 않을 예정이다. 아직은 아니지만 언젠간 녀석의 영감을 건드릴지도 모르니까. 이 한 문장은 할머니가 녀석에게 남긴 위대한 유산이다. 녀석이 빨리 깨닫기를.

 

할머니의 마음에는 무엇이 얹혀 있었던 것일까? 소화제인 술이 늘 필요했을 만큼 무언가가 얹혀 있긴 했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말했더니 녀석이 시니컬하게 받아쳤다.

 

"있긴 뭐가 있어! 술꾼이 술 마시고 싶으니까 지어낸 말이겠지."

 

내심 뜨끔했다. 뭐 그럴지도, 나도 노상 술을 마시기 위해 핑계를 댄다. 바람이 좋다. 비가 술을 부른다. 저 찬란한 태양이 술을 마시라 하네, 눈발이 휘날리는데 어찌 맨정신일 수 있으랴 등등.

 

그래서 나는 녀석을 상대로 할머니 탐구에 들어갔다. 할아버지는 언제 돌아가셨는지, 재산은 어느 정도였는지, 홀로 자식들 키우느라 힘드시지는 않았는지… 젠장. 다 아니었다. 먹고살 만은 했으며 남편을 일찍 잃은 것도 아니었다.

 

아쉬운 마음에 마지막으로 물었다.

 

“할머니가 흥이 많으셨을까? 노래를 좋아했다든가..." 녀석도 할머니를 잘 알지는 못했다. 하여 술이 소화제라는, 그 시대의 여성으로는 드문 술꾼인 할머니의 정신 분석은 중도에서 끝났다. 하지만 뭐 몰라도 괜찮다. 여성들이 숨죽이고 살던 시절에도 호방하게 술을 마시고 동네 사람 다 보는 가게 평상에서 꿀잠을 자는 여성이 존재하긴 했으니까. 가족들은 창피했겠지만 뭐 어때? 할머니가 술 때문에 자식들 밥을 안 해준 것도 아니고, 뒷바라지 안 해준 것도 아니고, 할 일 다 하면서 야금야금 좀 마시겠다는데?,나는 아직도 할머니 편이다. 술이 소화제라는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 5 >

 

몇 년씩 술을 마시지 않았던 때도 있다. 수배 중이었을 때, 아이 낳고 몇 년. 술을 마시지 않은 시기에 나는 진짜홀로 있었고, 그때의 나는 뼛속까지 외로웠다. 마흔 넘어서야 깨달았다. 나를 키운 건 술이 아니라 외로움이었다는 걸.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마신다. 사람이 좋아서다. 술이 몇 잔 들어가면 나도 다른 이들도 솔직해진다. 위선과 가식의 껍데기를 벗고 온전한 나로 누군가와 만나는 것, 나에게는 그것이 술이다.

 

우리 집 술자리에서 참으로 많은 발견이 있었다. 많은 친구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상처를 드러내며 울고, 자기를 넘어서기도 했다. 알고 보니 상처 없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에게 술은 자신의 상처는 물론 치졸한 바닥까지 드러낼 수 있게 하고, 그로 인해 사람과 사람의 사이를 친밀하게 좁혀주는, 일종의 기적이다. 술 없이 이토록 솔직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나는 그만한 용기가 없어 술의 힘을 빌 뿐이다.

 

요즘엔 혼술도 한다. 혼술의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느닷없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강연 요청이 늘었다. 거의 매일 강연이다. 강연을 끝내고 집에 돌아오면 대체로 늦은 밤이다. 간신히 옷만 갈아입은 채 책상이자 밥상이자 술상 앞에 앉는다. 비슷한 이야기를 반복할 뿐인데도 강연은 힘들다. 낯선 사람들과 마주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일단 모르는 사람 앞에 서는 것부터 힘들다. 내 말이 누군가에게 어떻게 가닿을지 알 수 없으니 매순간 긴장을 늦춰서도 안 된다. 술자리에서처럼 솔직한 나를 드러낼 수도 없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모르는 사람들이 있는 그대로 받아줄 거라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나와 전혀 다른 환경에서 다른 경험을 하며 살아왔을 테고 필시 다른 생각을 갖고 있을 사람들에게 나를 이해시킨다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강연은 그나마 낫다. 강연이 끝나면더 힘든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 사인을 하고 사진을 찍는.

 

엊그제 한 제자가 결혼을 했다. 신부 대기실에서 신부가 사진을 찍자고 했다. 여느 때처럼 진저리를 치며 도망치려는데 신부의 한마디가 내 발을 붙잡았다.

 

“쌤! 찍어요. 이십 년 동안 쌤이랑 찍은 사진이 단 한 장도 없더라구요."

 

결국 내가 본 중 가장 아름다운 신부와 사진을 찍었다. 이만큼이나 사진 찍히는 걸 싫어한다. 하지만 내 책을 읽고 나를 만나러 온 참으로 고마운 독자들에게 야멸차게 내 솔직한 마음을 드러낼 수는 없지 않은가.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별수 없이 사진을 찍는다. 밖에서 뒤집어쓴 가식을 씻어내기 위해 나는 늦은 밤, 홀로 술을 마신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아니라 무엇 하나 잘하는 것 없고 게을러터져서 세상만사 귀찮은 아줌마로 온전히 돌아오면 비로소 하품이 나기 시작한다. 술이 아니었으면 이 시간을 어떻게 견뎌냈을지 아찔하다. 혼술은 조만간 멈춰야겠지만 친구들과 함께 마시는 술까지 끊을 생각은 여전히 없다. 나는 나의 사람들이 좋고, 그들과 바닥까지 솔직해지는 시간들이 좋고, 술은 우리 사이의 윤활유니까.

 

내가 술꾼이 아니었다면 이 책 또한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술이 있어 누군가의 내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그 이야기들이 모여 한 권의 책이 되었다. 이 책에 등장한 대부분의 사람은 아직도 내 곁에 있다. 이 책이 그들에게 혹여 실례가 되지 않으면 좋겠다. 앞서 말했듯 내 기억은 상당 부분 소설적으로 가공된 상태다. 어떤 왜곡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니 사실과 다르더라도 너그러이 이해하시길. 이 책을 나의 사랑하는 친구들과 나의 블루와 요즘 나의 벗이 된 참이슬에게 바친다.

 

 

정지아 /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