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상식. 심리

김상욱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인간’(바다 출판사)중에서

송담(松潭) 2023. 6. 16. 09:59

김상욱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인간’(바다 출판사)중에서

 

 

 

< 1 >

 

원자는 원자핵과 전자로 이루어져 있다. 원자핵은 다시 양성자와 중성자로 나뉜다. 양성자는 양전하를 띠고 전자는 음전하를 띤다. 중성자는 이름 그대로 전하가 없다.

 

원자는 원자 번호로 구분된다. 원자 번호는 원자가 가진 양성자의 수다. 원자는 중성이기 때문에 전자도 같은 수가 있어야 한다. 3번 원자 리튬은 양성자 3개, 전자 3개를 가진다.

 

원자핵도 흥미로운 주제지만 만물이 원자로 되어 있다고 할 때 중요한 것은 전자다. 원자핵은 원자 내부 깊숙한 곳에 숨어 있어 접근조차 힘들기 때문이다. 원자들이 만나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때 실제 맞부딪히는 것이 전자다.

 

자연 상태에서는 92번 원자까지 존재할 수 있다. 빅뱅이나 초신성폭발 같은 자연 현상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원자를 말한다. 93번 이후는 인공 핵 합성 기술로 만든 것이다. 현재 118 번 원자까지 보고되었다. 대충 말해서 원자 번호가 클수록 우주에 존재할 확률이 줄어든다. 따라서 만물을 이해하기 위해 118개의 원자를 모두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원자 번호가 큰 원자는 거의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몸 질량의 99퍼센트는 단지 4개의 원자로 되어 있다.

 

< 2 >

 

수소는 양성자 하나, 전자 하나로 구성된다. 만약 전자가 달아나 버리면 양성자만 남는 셈이다. 수소를 간접적으로나마 느끼고 싶다면 물을 만져보시라. 물을 이루는 원자의 3분의 2가 수소니까.

 

수소는 우주에서 가장 중요한 원자다. 우주에 존재하는 원자의 무려 75퍼센트가 수소이기 때문이다(암흑 물질이나 암흑 에너지는 무시했다). 나머지 25퍼센트는 원자 번호 2번인 헬륨이다. 둘을 더해서 완전히 100퍼센트가 아니기에 다른 원자들도 존재할 수 있다. 원자 번호 1번과 2번 원자가 우주에 가장 많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빅뱅으로부터 시작된 우주의 역사에서 핵반응을 통해 가장 단순한 구조의 원자가 먼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태양계도 대부분 수소다. 태양의 73퍼센트가 수소, 25퍼센트가 헬륨이니까. 태양과 비교하면 지구는 먼지에 불과하므로 별로 중요한 고려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지구의 대기에는 수소와 헬륨이 별로 없다. 지구 대기는 주로 질소와 산소로 구성되는데, 수소와 헬륨은 이들보다 가벼워서 날아가 버리기 때문이다. 원자 번호를 보면 수소 1번, 헬륨 2번, 질소 7번, 산소 8번이다. 번호가 클수록 대개 더 무거워진다.

 

수소는 가볍다. 그래서 초창기의 기구는 수소를 이용하여 만들어졌다.

 

< 3 >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모습은 따지고 보면 원자의 특성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지구상 생명체는 수소 이온을 배터리로 사용하여 에너지를 저장한다. 식물은 광합성을 통해 수소 이온을 모으고, 동물은 호흡을 통해 수소 이온을 모은다. 동물의 호흡은 식물이나 다른 동물을 먹이 삼아 얻은 음식을 연료로 이용하니까 결국 그 근원은 식물이다. 식물의 광합성이 태양 빛을 이용하고, 태양이 수소 핵융합 반응으로 빛을 낸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수소는 지구상 모든 생명 에너지의 근원이라 할만하다. 이는 수소가 양성자와 전자를 하나씩만 가진 단순한 구조이기 때문이다. 탄소는 양자역학으로 이해되는 4개의 팔을 이용하여 다양한 형태의 분자를 만드는 뼈대가 되는데, 이렇게 생명이라는 건축을 디자인한다. 질소는 공기 중에 널려 있지만 3개의 전자가 만드는 양자역학적 삼중결합 때문에 쉽사리 재활용되지 못한다. 하버-보슈법이 아니었다면 인류는 맬서스의 암울한 예측을 현실로 마주했으리라. 산소는 독이다. 비어 있는 전자의 자리를 채우려는 산소의 양자역학적 욕망 때문이다. 하지만 산소가 아니었으면 우리는 존재할 수 없다. 수소, 탄소, 질소, 산소는 당신의 몸을 구성하는 원자의 99퍼센트를 이룬다.

 

세상 만물은 원자로 되어 있다. 세상 모든 것을 원자로 환원할 수는 없지만 원자는 세상이 왜 이런 모습인지 알려준다.

 

< 4 >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라. 지금 필자의 눈에 보이는 무생물은 책상, 의자, 컴퓨터, 책, 마룻바닥 같은 것들이다. 이런 물질들은 정말 특별하다. 인간이 의도를 가지고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지구 전체를 놓고 볼 때 인간이 만든 물질은 정말 무시할 만큼 적다. 인공위성에서 지구를 내려다볼 때 인간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지구의 껍질인 지각의 대부분은 흙과 암석이다. 생물이 있기는 하지만 흙의 양에 비하면 새 발의 피도 안 된다. 아니 새 발의 피도 너무 많다. 지각은 두께가 불과 수십 킬로미터에 불과하다. 지구의 반지름은 6400킬로미터에 달하며 그 대부분은 핵과 맨틀이다. 이들은 온도가 수천 도니까 흔히 보는 지각의 흙이나 암석과는 다른 상태에 있다.

 

사실 지구조차 우주에서는 표준이 아니다. 태양계만 해도 그 질량 대부분을 태양이 가지고 있다. 태양은 수소와 헬륨이 엄청난 온도로 밀집되어 있는 플라스마 덩어리다. 플라스마란 원자가 전자와 이온 형태로 분리되어 뒤섞여 있는 것으로 일상에서는 '불'이 좋은 예다. 태양계의 다른 행성들을 보아도 지구와 같은 암석 행성은 표준이 아니다. 지구 질량의 100배가 넘는 목성이나 토성 모두 기체 행성이다. 따라서 우리가 세상 모든 물질을 이해하려고 할 때 우리 주위에서 보는 물질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 5 >

 

원자의 시각으로 본 물질의 세상은 의외로 단순하다. 우주는 대개 텅 비어 있다. 존재하는 물질의 대부분은 수소와 헬륨으로 이루어진 기체 덩어리다. 태양과 같은 별이나 토성, 목성 같은 거대 행성이 여기에 해당된다. 사실 질량으로 보면 이들이 태양계의 거의 전부라고 해도 무방하다. 지구 같은 암석 행성은 사실상 없는 거나 다름없다.

 

< 6 >

 

죽음이 우주에서 자연스러운 상태라는 이야기는 막상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마주한 사람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생명이 없는 우주에서는 생명이 놀라운 일일지라도, 이미 생명을 가진 존재에게 생명은 당연한 것이라 죽음은 인간에게 속수무책의 재앙일 뿐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물리학적인 죽음에서 소소한 위로를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 죽음은 피할 수 없지만, 죽음으로 모든 것이 소멸된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는 있다. 죽음 이후에도 우리는 무언가를 남기고 또 무엇이 된다.

 

먼저 우리에게는 남길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자녀를 낳는 것은 적어도 나의 유전자 절반을 남기는 일이다. 기록이나 이름을 남길 수도 있다. 고대 로마에서 엘리트가 받을 수 있는 최악의 형벌은 '기록 말살형'이었다. 죄인이 남긴 모든 흔적을 말살하는 것인데 사형보다 심한 형벌로 간주되었다. 또한 죽음 이후에도 원자는 남는다. 죽음이란 원자의 소멸이 아니라 원자의 재배열이다. 내가 죽어도 내 몸을 이루는 원자들은 흩어져 다른 것의 일부가 된다. “인간은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간다”라는 말은 아름다운 은유가 아니라 과학적 사실이다. 이렇게 우리는 원자를 통해 영원히 존재한다.

 

최초의 원자는 빅뱅으로 탄생했다. 원자가 모여 핵융합을 일으키면 별이 되어 산소와 같은 무거운 원자들이 생성된다. 수십억 년이 지나 수명이 다한 별은 폭발로 생을 마감하고 우주 공간에 산소를 흩뿌린다. 우주 공간을 방황하던 산소는 태양이 탄생할 때 주위를 떠돌다 지구라는 행성의 일부가 된다. 산화철에서 물로, 물에서 이산화탄소로 옮겨 다니던 산소는 공룡이라는 생물이 된다. 공룡이 죽자 땅으로 돌아간 산소는 나무가 되고 토끼가 되고 강물이 되었다가 건물이 되기도 하고, 지금의 내가 되기도 한다. 나 역시 죽으면 흙이 되고 나무가 되어 어떤 책의 일부가 될 수도 있다. 죽음 이후에도 우리는 무엇인가가 된다.

 

< 7 >

 

남녀의 사랑은 두 사람이 하는 것이다. 서로의 마음이 움직여야 한다는 뜻이다. 인간의 마음과 심리에 대해 과학은 아직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 따라서 사랑에는 물리학을 넘어서는 측면이 있을 수밖에 없다.

 

김소연의 <마음사전>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사랑은 하나의 점이다. 선이나 면처럼 이어져 존재하지 않고, 찰나 속에서만 존재한다. 우리가 타인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그 순간, 사랑은 휘발되고 없다.

 

찰나의 순간에 존재하는 것은 사랑만이 아니다. 백영옥은 <애인의 애인에게>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인생의 목표가 행복인 사람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는걸 나는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행복은 지속 가능한 감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이나 행복 같은 상태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그렇다고 너무 낙담하지 말자. '점'은 상상할 수 없이 작은 존재지만, 의외로 복잡하다. 유클리드의 <원론>을 보면 '점'의 정의가 첫 번째 문장으로 등장한다. "점은 부분이 없는 것이다." 점은 실재하는가? 그렇다면 그 크기는 얼마인가? 이 질문에 간단히 대답할 수 없다. 크기를 말하는 순간, 그 크기의 절반에 해당하는 부분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점은 크기가 없지만 0은 아니어야 한다. 크기가 0이면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점을 모아 선을 만들 수 없다고 주장했다. 선은 크기가 있는데, 어떻게 크기가 없는 점을 모아 선을 만들 수 있겠느냐고 말이다. 그렇다면 선과 점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답이 걸작이다. "선은 점이 움직여 만들어진다." 이쯤 되면 수학이 아니라 물리다. 움직인다는 것은'시간'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사실 선을 쪼개어 점을 만들 수도 있다. 다만 선을 무한히 쪼개야 점을 얻을 수 있다. 무한하지는 않지만 충분히 많이 쪼개어서는 곤란하다. 충분히 많은 수보다 한 번 더 쪼개면 부분이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크기가 없을 만큼 작은 점을 얻기 위해 우리는 무한이 필요하다. 무한은 숫자가 아니다. 무한대 더하기 1도 무한대이고, 무한대 더하기 무한대도 무한대이다. 무한대에서 무한대를 빼면 0일 때도 있지만, 어떤 숫자가 되거나 무한대가 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하지만 이런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이해하려면 무한대가 숫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무한은 숫자가 아니라 과정이다. 끝없이 커져가는 과정이다. 점은 무한한 과정으로 만들어지는 존재다. 따라서 점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사랑이 점이라면 사랑도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 8 >

 

 

침팬지와 두뇌의 크기가 비슷한 인간의 조상이라니! 다른 동물에 비해 두뇌가 큰 것을 유난히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인간에게 충격적인 발견이었다. 아나멘시스, 차덴시스, 투게넨시스는 뼈의 일부만 발견되어서 명확한 결론을 내리기에 정보가 충분하지 않다. 이미 발견된 인간 조상 중 하나인지, 아니면 고릴라에 더 가까운지는 여전히 논란이 있다. 라미두스는 전체 골격이 발견되었지만 직립 보행을 하지 못한 것으로 보여 혼란을 가중시킨다. 최초 인류의 조건으로 직립 보행이 중요할까, 큰 뇌가 중요할까? 남아 있는 뼈 몇 조각으로 최초의 인류를 알아내는 일은 쉽지 않다.

 

안개에 쌓인 최초의 인류로부터 호모 사피엔스가 탄생하기까지 호모 속屬에 속하는 많은 조상의 이름이 등장한다. 호모 하빌리스 H. habilis, 호모 에렉투스 H. erectus,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 H. heidelbergensis,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 H. neandertbalensis 등등. 이들을 구분할 수 있는 것은 화석에 서로 다른 특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화석이라고 했지만 대개 뼈 몇 개뿐이다. 그래도 정강이뼈라면 그 구조로부터 직립 보행여부를 알 수 있고, 두개골의 일부라면 뇌의 크기를 추정해볼 수 있다.

 

네안데르탈렌시스의 경우 말을 했을 거라고 예상하는데, 이 역시 뼈에서 알아낼 수 있다. 뼈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려준다. 더구나 네안데르탈렌시스는 현생 인류와 동일한FOXP2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데, 이 유전자는 언어를 관장한다.

 

말을 할 수 있었던 네안데르탈렌시스는 사냥 및 채집뿐 아니라 도구를 사용하고 매장하는 풍습도 있었지만 결국 멸종했다. 인류의 모든 조상과 친인척 종 가운데 오늘날 살아남은 것은 호모 사피엔스뿐이다.

 

< 9 >

 

프랑스 남부의 쇼베 동굴에는 이 시기 호모 사피엔스가 그린 벽화가 남아 있다. 이 벽화는 당시 사람들이 동굴에서 할 일이 없어 소일거리로 그린 것이 아니다. 일단 벽화가 있는 장소는 종유석이 달려 위험하기 이를 데 없는 통로를 수백 미터나 지나야 도착한다. 물론 칠흑 같은 어둠 속이므로 불을 밝혀야 한다. 선사 시대에 불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일도 쉽지 않았을 거다. 행여 불이 꺼지면 동굴에서 길을 잃을 테니 죽을 수도 있다. 도대체 당시 사람들은 왜 위험을 무릅쓰고 그림을 그렸을까? 동굴 벽화는 단 한 번 그려진 것이 아니다. 동굴 여기저기 그려진 벽화들은 5000년 가까운 시차를 갖는다. 몇천 년이 지나도록 대를 이어 굳이 같은 동굴에 와서 그림을 그렸다.

 

인간이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대개 종교적 이유 때문이다. 아마 쇼베 동굴은 신성한 장소였으며, 그림을 그린 사람들은 사제나 주술사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신神이란 개념이 이 시기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즉 인간이 허구(虛構)를 믿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뜻이다. 인지 혁명의 핵심은 바로 이런 추상적 사고의 탄생에 있었을 것이다. 《사피엔스 Sapiens》에서 유발 하라리 Yuval Harari는 허구야말로 인류가 더 큰 규모의 사회를 형성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발명품이었다고 강조한다. 서로 유전자가 다른 호모 사피엔스들이 상대를 신뢰하고 협력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만든 상상의 질서를 믿어야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핵심 역할을 한 것은 언어였다. 고도로 발전된 인간의 언어만이 허구를 표현할 수 있다. 침팬지도 “사자다!"라는 의미의 울음소리를 낼 수 있지만 "사자 신께서 분노하셨다”라는 문장을 표현할 수는 없다.

 

인지 혁명과 허구를 믿는 능력에 대한 이야기는 물리학자에게 대단히 흥미롭다. 물리는 기본적으로 물질에 기초하여 세상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유물론적이란 뜻이다. 모든 물리량은 직접 측정이 가능하고 정량적으로 다룰 수 있다. 사랑, 정의, 도덕 같은 개념과 비교하면 위치, 속도, 질량, 에너지, 전하 같은 물리량이 얼마나 물질적인지 알 수 있다. 인간은 인지 혁명을 통해 물리학이 미치지 못하는 허구의 영역을 만들었다. 허구는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문명을 건설하는 토대가 된다.

 

 

< 10 >

 

창발

 

기본 입자와 원자 사이의 관계는 미묘하다. 원자는 기본 입자로 구성된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모든 물질의 근원은 기본 입자다. 그렇다면 '만물은 기본 입자로 되어 있다"라고 말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기본 입자에 대해 충분한 지식이 없어도 원자를 이해하는 데 큰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원자는 원자핵과 전자로 구성된다. 전자는 기본 입자의 하나다. 원자핵은 양성자와 중성자로 구성되는데, 이들은 기본입자가 아니다. 양성자는 업 쿼크 두 개, 다운 쿼크 하나, 모두 세 개의 기본 입자로 되어 있다. 쿼크는 글루온이라는 또 다른 기본 입자에 의 해 단단히 묶여 있다. 원자만을 연구하는 연구자는 쿼크나 글루온이라는 기본 입자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해도 연구하는 데 거의 지장이 없다. 기본 입자들이 모여 원자가 되면 기본 입자와는 완전히 다른 특성을 갖기 때문이다. 더구나 새로 나타난 특성을 기본 입자로부터 예측하기 힘들다. 이처럼 존재하지 않았던 예측하기 힘든 새로운 특성이 나타나는 것을 '창발'이라고 부른다.

 

한글 자모가 기본 입자라면 단어는 원자라고 할 수 있다. 'ㅅ' 'ㅏ' 'ㄹ' 'ㅇ'이라는 기본 입자가 모여 '사랑'이라는 원자가 되었지만, 자음 'ㅅ' 'ㄹ' 등으로부터 단어 '사랑'이 갖는 의미를 추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랑'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한글 자모가 모여 각각의 자모에는 존재하지 않던 의미가 새롭게 나타난 즉 창발된 것이다. '창발'은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 가운데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