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구본형ㆍ홍승완 /마음편지(을류문화사 출판)중에서

송담(松潭) 2023. 2. 16. 17:18

삶에는 새로운 페이지가 펼쳐져야 할 때가 있다

 

변화경영연구소 1기 연구원 신재동 촬영



나는 융의 자서전을 수시로 꺼내 읽고 그가 정립한 분석 심리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공부했다기보다는 그냥 거기에 빠졌습니다. 융의 자서전을 읽은 후 방문을 걸어 잠그다시피 하고 한 달 내내 그의 다른 저작과 분석 심리학에 관한 책을 열 권 넘게 연거푸 읽었습니다. 자는 시간 빼고는 책만 읽었던 것 같습니다. 1년 넘게 나의 독서 목록은 융과 분석 심리학 서적으로 채워졌으며, 이후에도 오랫동안 융의 심리유형론에 기반을 둔 MBTI를 공부하고 전문 자격을 취득하기도 했습니다. 융의 사상은 난해하고 어려웠습니다. 그런데도 공부할수록 매혹되었고, 그와의 인연은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돌아보면 융의 자서전은 내게 하나의 계시였습니다. 자연의 겨울이 찬바람에 실려 있듯이 인생에 찬바람이 몰아치면 마음도 겨울에 듭니다. 융의 인생 이야기는 얼어붙은 나의 내면에 온기를 불어넣는 모닥불이 되어주었습니다. 처음 이 책에서 본 한 구절이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이 문장은 화살처럼 날아와 단단하게 굳은 내 마음밭을 뚫고 씨앗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나의 존재 의미는 인생이 나에게 물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나 자신이 세계를 향해 던지는 하나의 물음이며,
나는 거기에 대한 나의 대답을 제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단지 세계가 주는 대답에 의지할 뿐이다.

- 카를 구스타프 융, 카를 융, 기억 꿈 사상(김영사, 2007)

그때 인생은 내게 묻고 있었던 듯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자신에게 질문하고 대답하라고, 그 답을 삶으로 실현하라고 말입니다. 이걸 모른 채 나는 나를 잘 안다는 오만한 착각에 빠져 세상이 멋진 문을 열어 주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의 무시가 계속되자 무의식은 내가 알아챌 수 있도록 점점 강한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너는 너에 대해 그리 많이 알고 있는게 아니라고, 모르는 게 훨씬 더 많다고. 그러니 자신을 탐구하는 일을 멈추지 말라고 말입니다.

나는 5년 가까이 융에 관한 책을 읽고 분석 심리학을 길잡이 삼아 나 자신을 탐구하며 인생이 던지는 물음에 답을 찾아 나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소명이라 할만한 열쇳말을 발견했습니다. 소우주 인간을 탐구하는 '내면 탐험가Inner Explorer', 이것이 나의 소명입니다. 융은 내게 내면 탐험의 가치를 일깨워 주고 훌륭한 내면 탐험가의 전형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의 삶 자체가 내면 탐험의 역사로 볼 수 있을 정도로 그는 자기 자신을 치열하게 탐색했습니다. 융이 그랬듯이 나는 나의 방식으로 나란 소우주를 탐구하고 내 안의 무수한 길을 깊숙이 들어가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울리는 인물들의 삶과 내면으로도 들어가 그 안의 봉우리와 계곡, 변방과 골목길을 탐사해 보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내면 탐험가'이자 '인물 탐험가 Human Explorer'로 내 세상 하나를 만들고자 합니다. 이것이 내 삶의 비전입니다.

겨울에 잎 하나 없는 나무는 죽은 듯 보입니다. 하지만 겨울에도 자라고 있는 나무의 여정은 나이테에 고스란히 새겨집니다. 이것이야말로 거듭나는 생명력의 비법임을 이제는 나도 알고 있습니다. 삶에는 새로운 페이지가 펼쳐져야 할 순간이 있습니다. 10여 년 전 그때는 내 인생에 새로운 페이지가 펼쳐져야 할 때였습니다. 내가 원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되돌아보면 꼭 필요한 시기, 겪어야 할 일이었던 듯합니다. 융은 그 페이지를 어떻게 채워 나가야 하는지 모범을 보여 주었고, 분석 심리학은 '나'라는 미궁을 탐사하는 요긴한 도구가 되어 주었습니다. 지금도 때때로 혼란과 불안에 휩싸이곤 하지만 내 마음속에는 융의 가르침이 든든하게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내가 찾고자 노력하면 내 안에서 언제나 한 줄기 빛을 발견할 수 있음을 믿고 있습니다.

홍승완 / ‘마음편지(구본형 홍승완 지음)’중에서

< 2 >

지금은 오히려 지혜로 남은 '퍼펙트 실패'는 무엇인가요?


고대 그리스의 음유 시인 호메로스가 『오디세이아』 즉 '오디세우스의 노래'를 인류에게 들려준 이래로 서양의 지적 거장들은 오디세우스를 다양한 목소리로 변조해 왔습니다. 아일랜드의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도 가장 난해한 현대 소설로 손꼽히는 『율리시스』를 썼습니다. '율리시스'는 '오디세우스'의 라틴어 이름입니다.

조이스의 『율리시스』는 고대 신화 속 영웅을 현대의 한 인간의 삶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오디세이아』의 주인공인 그리스의 장수 오디세우스는 집을 떠나 트로이 전쟁에 참전했다가 우여곡절을 거치며 겨우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의 고난은 항해 중인 배를 깨뜨리는 천둥과 번개 그리고 폭풍과 파도, 게걸스럽게 인간을 먹어 치우는 괴물들에게서 벗어나려는 분투로 상징됩니다. 조이스의 펜을 통해 오디세우스의 모험은 리오폴드 블룸이 더블린 거리를 배회하면서 겪는 하루 일상으로 전환됩니다. 신화 속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들은 블룸이 일상에서 체험하는 일들과 겹쳐집니다. 신화 속 괴물과 마녀는 조이스의 소설에서 술 취한 싸움꾼, 치마를 벌려 속을 보여 주는 여자, 수없이 남자를 바꾸는 가수 등으로 치환되어 등장하지요.

고향을 떠나와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애쓰는 신화 속 영웅처럼, 우리도 생명이 시작되어 죽는 날까지 삶이라는 두려움과 모험에 찬 여정을 살아 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디세우스의 모험은 영웅의 삶이 아니라 평범하기 짝이 없는 모든 인간의 인생과 다를 바 없습니다. 아마 이점이 오디세우스의 이야기가 지금까지도 매력적인 소재로 살아남은 이유인 듯합니다. 나는 조이스의 작품을 읽다가 한 구절에서 눈이 커졌습니다.

블룸 : 자넨 왜 부친의 집을 떠났지?
스티븐 : 불행을 찾기 위해서죠.
-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스(생각의나무, 2011)

이 대화는『율리시스』의 열여섯 번째 에피소드에 나오는 리오폴드 블룸과 스티븐 데덜러스의 대사입니다. 이 짧은 대화는 나이가 들어서도 가슴이 저릴 만큼 나를 몰아세웁니다. 젊었을 때는 주체할 수 없었던 나의 젊음 때문에, 나이가 들어서는 젊은 에너지가 사라져 가는 두려움 때문에, 그리고 이제는 한창때인 내 아이들 때문에 이 대화를 잊을 수 없습니다.

『오디세이아』같은 신화는 자신을 찾아 떠나는 위험한 모험을 선동하는 북소리입니다. 오디세우스는 고향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여러 실수를 저지르고 시행착오를 겪습니다. 동시에 숱한 역경에도 집으로 귀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그리고 그 여정이 오디세우스의 삶의 절정이자 그의 정신을 도약시키는 날개를 키워 줍니다.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살아 있음으로 자신의 인생이 무엇이었는지를 증명하는 존재가 아니던가요. 그러니 언젠가 한숨을 쉬며 말하게 되더라도 직접 살아 봐야 합니다.

삶의 여정에서 불행이 축복이 되고 상처가 영광이 되려면 꼭 하나 기억해 두어야 할 점이 있습니다. 바로 '백 퍼센트 최선을 다해 실패하라.'입니다. 최선을 다한 실패는 시시한 성공보다 열 배는 더 소중합니다. 실패는 아주 잘 배우는 또 하나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백 퍼센트 최선을 다해 실패하면 그 실패는 오롯이 내 것이 됩니다. 최선을 다하지 않은 실패는 또 다른 실패로 이어집니다. 왜 실패했는지 확실히 모르기 때문이지요. '퍼펙트 실패'만이 후회가 없습니다. 그 실패는 결코 불행으로 연결되지 않는답니다. 그 실패는 지혜와 통찰로 빛나니까요.



< 3 >

누군가를 위해 함께 비를 맞아 본 적 있나요?



그가 웃는 것은, 다른 사람이 울기 때문이다.오로지 박해받는 자만이 인류다.
-- 엘리오 비토리니, 『시칠리아에서의 대화』(민음사, 2009)

이 소설은 총 49장으로 끝나는데,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은 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하러 집으로 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부엌에서 초췌한 형색을 한 낯선 남자의 발을 씻겨주고 있습니다. 알고 보니 주인공의 아버지로 보이는 남자는 그동안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실제보다 훨씬 늙어 보입니다.남자는 얼굴을 들지도 못하고 울고 있는데, 어머니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흔쾌히 그를 보살피며 아들에게 말합니다.

소설은 주인공 아들과 어머니의 대화가 몇 마디 더 이어지고 끝납니다. “오로지 박해받는 자만이 인류다.” 그런 것같습니다. 새하얀 머리와 늙은 발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세상을 살며 박해받은 자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울고 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고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그의 늙은 발을 씻겨 줍니다. 역설적이게도 평생을 울던 그의 존재가 그 사랑을 만들었습니다.

버트런드 러셀의 말이 다시 귓전에 들립니다. '인류의 고통에 대한 연민', 철학적 문법으로 쓰인 이 도도해 보이는 말의 본질은 바로 사랑이네요. "울고 있어. 내가 행복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어.” 이 말은 러셀의 말을 문인의 문법으로 전환해 놓은 표현입니다. 나라면 신영복 선생의 ‘함께 맞는 비’라는 표현을 빌려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한 사람이 비를 맞고 있고 나에게 우산이 있더라도 덥석 우산부터 씌워 주지 말자. 먼저 함께 비를 맞자." 더 간단히 말해 볼까요? “곁에 있을게. 실컷 울어도 돼.”

누군가는 '타인은 지옥'이라고 말합니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누군가를 울리면서 자신은 웃는 사람이 없지 않으니까요. 다른 사람의 불행과 희생 위에 자신의 성공을 쌓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그런 사람은 공감할 줄 모릅니다. 그럼에도 살면서 당한 모욕을 씻어 주고, 억울함을 위로하고, 슬픔을 나눌 수 있는 휴식처 또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공감할 줄 압니다. 공감은 봄바람이 얼음을 녹이듯 사려 깊고 밤 호수를 비추는 달빛처럼 부드럽습니다.

공감은 관계의 바탕이어서 나와 타인 간의 거리를 좁혀 줍니다. 그리고 나와 상대 사이에 생명력이라 부를 수 있는 숨결을 불어넣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상처를 입은 사람은 자신에게 깊이 공감하는 사람 속에 숨습니다. 그런 사람 하나만 있어도 견딜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어머니입니다. 그 사람은 친구입니다. 그 사람은 연인입니다. 그 사람은 누구나 될 수있습니다. 다만 반드시 사랑이어야 합니다.

지금 나에게 물어봅니다. 나는 누군가를 위해 함께 비를 맞아 본 적 있는가? 한 사람을 위해 울어 본 적 있는가? 또 물어봅니다. 힘들 때 나에게 가장 깊이 공감해 준 사람은 누구였는지, 무엇이 깊은 공감을 가능하게 해 주었는지를.

구본형/'마음편지(구본형 홍승완 지음)'중에서



< 4 >

당신의 '인생의 오후’를 어떻게 그려 두었나요?



존재를 그만두지 않고는 어떤 생명체든

보다 높은 차원의 존재를 획득할 수 없다.

- 조지프 캠벨,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민음사, 1999)

오래전 이 글귀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그 앞에서 꼼짝할 수 없었습니다. 아마 뱀의 눈앞에서 얼어버린 개구리 같은 모습이었을 겁니다. 이 말은 ‘죽어야 살리라.'라는 뜻입니다. 지금의 나를 죽여서 해체해야 한다는 의미이자, 나의 죽음을 맛봐야 한다는 말이지요.

모든 본질적 변화의 정수는 죽음과 재생입니다. 거대한 낭떠러지가 폭포를 만들고 큰 강을 만듭니다. 낙엽은 나무가 겨울을 나기 위한 아름다운 죽음의 의식입니다. 모든잎을 떨궈야 다시 하나의 나이테를 만들어 낼 수 있고, 새봄에 물오른 나무가 되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도 다르지 않습니다. 낙엽이 혹독한 겨울을 견디기 위한 나무의 지혜이듯이, 나를 잃음으로써 나를 되찾음은 모든 지혜의 공통된 메시지입니다. 개인의 혁명은 자신의 껍데기를 죽임으로써 가장 자기다워짐을 지향합니다. 자기가 아닌 것을 다 버림으로써 새로 태어나는 과정이 변화의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불가항력적이고 무기력한 소멸이 아닙니다. 오히려 변화하지 않는 본질을 발견하려는 열정이며, 그걸 발판 삼아 새로이 거듭나기 위한 끊임없는 모색입니다.

나는 나답게 살고 싶습니다. 그래서 나다운 것에 천착하고 매달렸습니다. 사십대에 접어들면서 마음 안에서 한 가지 꿈이 움트기 시작했습니다. 나무가 되고 싶다는 꿈. 동물의 삶을 죽이고 나무의 삶을 살고 싶습니다. 동물은 살기 위해서 다른 살아 있는 생명을 죽여 먹어야 합니다. 필멸의 인생이 갖는 슬픔입니다. 그러나 나무는 스스로 광합성을 합니다. 생명의 근원인 먹거리를 다른 생명에 의존하지 않고, 단지 태양과 비와 바람과 흙의 힘을 받아들여 살아갑니다. 그리고 오직 하늘을 향해 자라납니다.

'인생의 오전이 살아 있는 다른 생명을 죽여 먹고살아야 하는 동물의 삶이었다면, 인생의 오후는 스스로 먹고사는 나무의 삶을 살아 보리라. 내 발이 땅속에서 뿌리를 내리고,내 두 팔은 굵은 가지가 되어 무수한 엽록소를 가진 푸른 잎으로 가득하게 되리라. 바람과 함께 내 홀씨들은 푸른 하늘로 무수한 여행을 하게 되리라.'

이것이 내가 10년도 더 전에 그려 둔 두 번째 인생의 그림입니다. 나의 50대는 이 그림을 현실에서 다시 그리는 나날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듯합니다. 그대는 인생의 오후를 어떤 모습으로 그리고 있나요? 언제 어떻게 새로운 인생을시작하고 싶은가요?

구본형/'마음편지(구본형 홍승완 지음)'중에서



< 5 >

상징은 기호나 부호가 아닙니다. 기호와 부호는 뜻이 명료해서 문자로 표현할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교통 표지판은 교차로 표시나 직진신호처럼 각각 하나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에 비해 상징은 다층적으로 해석될 수 있고 하나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있습니다. 50년 넘게 상징을 연구한 카를 융은, 상징은 통상적인 의미 외에 다른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무엇이며, 인간의삶에 의미를 부여한다고 말했습니다. 루마니아 출신의 종교학자 미르체아 엘리아데도 상징이 정신적인 삶의 본질을 이룬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에게 중요한 상징은그의 마음에 중요한 무언가를 일깨우고 메시지를 전합니다.

매화를 상징으로 받아들이면서 관련 정보를 찾아보니, 나무를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거울로 여긴 사람이 적지않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자연주의 사상가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소나무의 그윽한 향기와 곧추선 자세, 참나무의 강건함에 매혹되었습니다. 그는 한 친구에게 자신이 죽고 나면 가슴에 묻혀 있던 참나무가 돋아난 걸 보게 될 거라고 고백했으며, 1852년 4월에 쓴 일기에서는 소나무가 자기 인생의 상징이라고 선언하기도 했습니다.



< 6 >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행복은 포도주 한 잔, 밤 한 알.허름한 화덕, 바다 소리처럼 참으로 단순하고 소박한 것이며,단순하고 소박한 마음이 행복의 문을 연다고 말했습니다. 행복은 대단한 게 아닐지도 모릅니다. 삶 역시 거창한 게 아닐지도 모릅니다. 지혜로운 이들이 한결같이 말하듯이 행복은지금 여기에 있고, 모든 하루는 유일한 날이며, 순간순간이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오늘 하루에서 작은 기쁨을 하나둘 발견하고, 만들고, 나눌 수 있다면 그 하루는 특별합니다. 내일과 또 내일에서 그럴 수 있다면 앞날들 역시 오늘과 다르게 빛날 겁니다. 그런 하루가 강물처럼 흐를 때 일상은 풍요로워지고 존재는 새로워집니다. 이 역시 내 마음에심어 둔 철학입니다.

가만히 관찰해 보니 내가 아는 행복한 사람들은 두 가지 믿음을 가지고 있더군요. 기쁨은 자기 안에 자리하고 있다는 믿음과 작고 단순한 것에 행복이 있다는 믿음. 다르게 말하면 행복한 사람은 자기 안에서 기쁨을 찾을 수 있는 눈과 작은 것에서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이 두 개의 눈으로 내면과 외면을 보고 느낄 수 있기에 안팎으로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눈을 어떻게 뜰 수 있을까요? 무엇엔가 순수하게 집중하고 몰입하는 과정을 통해서 안목을 갖추게 될 것이라는 법정 스님의 말씀에서 나는 실마리를 찾았습니다. 오늘도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길을 걷습니다. 이 세 가지를 할 때만큼은 오롯이 열중합니다. 이러한 활동과 존재 양태가 마음과 하루의 결을 만듭니다.

홍승완/'마음편지(구본형 홍승완 지음)'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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