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
사랑받지 못한 자의 더 커다란 사랑 < 바라데기 >
바리데기 신화는 내 마음속에 항상 언젠가 꼭 닮고 싶은 이상형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여기가 끝인가 싶을 때마다, 난 이것밖에 안 되는 존재인가 싶을 때마다 남몰래 꺼내보는 이야기가 바리데기 신화다. 바리데기는 태어나자마자 버려졌다. 오구대왕의 일곱 번째 딸, 그러니까 공주로 태어났는데도 바리데기는 공주다운 삶은 누려보지 못했다. 미처 자기 존재의 아름다움을 펼쳐 보인 기회조차 없었다. '또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버려졌다. 그 이름 자체가 '버려진 존재', 즉 허섭스레기같은 존재라는 의미를 새기고 있으니, 그렇게 철두철미하게 버려진 것으로 모자라 자기를 버린 아버지의 병을 고치기 위해 머나먼 서천서역국으로 치유의 꽃과 물을 찾아 나선다. 서천서역국은 하데스처럼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기 힘든 무시무시한 죽음의 장소였다.
찢어지게 가난한 노부부가 바리데기를 데려다 기르지만 바리데기는 그들이 부모가 아님을 알고 자신의 정체성을 궁금해 한다. 그러던 어느 난 죽을병에 걸린 아버지, 오구대왕을 위해 생명수와 꽃을 구하러 서천서역국으로 떠난 바리데기는 무장승의 창을 들어주고 결혼하여 아들까지 낳아준 뒤 마침내 약초와 물을 얻는다. 그렇게 구해 온 물과 꽃으로 병이 낫자 아버지는그제야 바리데기의 소중함을 깨닫고 나라의 절반을 주겠다고하는데 바리데기는 죽음의 강을 건네주는 만신의 몸주가 되겠다며 거절한다. 만신의 몸주란 지상에서 고통받는 존재가 저세상으로 갈 때 그 아픔을 덜어주고 무사히 저승으로 길을 안내하는 사람이다. 바리데기는 인간의 부귀영화를 포기하고, 공주라는 지위와 특권조차 포기하고, 삶과 죽음을 이어주는 자, 샤먼이 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바리데기는 단순히 효심의 아이콘이 아니며 버려진 자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삶이 무엇인지를 성찰하게 하는 이야기이다.
바리데기의 슬기로움은 이 세상에 내 자리가 없다는 판단이 들 때마다 더욱 빛을 발한다. 바리데기의 가장 큰 장점은 부모에 대한 효심이 아니다. 효는 바리데기가 실천하는 수많은 사랑 이야기 속에서 아주 작은 부분을 차지한다. 바리데기는 그저 자신을 버린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건 모험을 떠나는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자기 운명의 가혹함을 이해하기 위해 모험을 떠나고, 나중에는 도움을 청하는 수많은 사람의 고통에 대한 연민과 공감으로 온갖 허드렛일을 자청하여 그들의 아픔을 보살피며, 마침내는 인간의 가장 커다란 두려움인 '죽음의 고통'을 어루만지는 존재가 되기 위해 목숨을 건 도약으로 나아간다. 모든 것은 자발적인 선택이었다. 자신을 버린 아버지에게 사랑받거나 인정받기 위한 가여운 몸부림이 아니었다.
그것은 버려진 자의 슬픔을 뛰어넘은 사랑, 짓밟힌 자의 복수를 뛰어넘은 사랑, 마침내 그 어떤 상황에서도 모든 존재는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찬란한 사랑이다. 살다보면 그럴 때가 있다. 이 세상에 내 자리가 없을 때, 내 한 몸 편히 누일 자리가 없다고 느껴질 때, 내 가치를 알아주는 이가 아무도 없다고 느껴질 때, 그럴 때 눈부신 바리데기를 떠올리기를. 버려진 자에서 잠시 필요한 자로, 잠시 필요한 자에서 세상을 구하는 이로, 마침내 이 세상과 저 세상의 건널 수 없는 간극마저 메우는 찬란한 가교가 된 존재 바리데기를. 사랑받지 못하여 그 저주받은 이름처럼 버려졌지만 이름을 통쾌하게 배반하며 저주받은 운명을 바꿔버린 존재. 저주를 피해 더 편안하고 안락한 자리로 도망치지 않고 모든 사랑받지 못한 기억의 트라우마를 더 커다란 사랑으로 갚은 바리데기. 바리데기는 나에게 가르쳐주었다. 받지 못한 사랑 때문에 칭얼거리지 않고, 한 번도 배운 적 없는 한없는 사랑을 베푸는 존재의 아름다움을.
< 2 >
프로마테우스, 매일매일 고통을 이기는 희망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가 보낸 독수리에게 매일 간을 쪼아 먹히고, 또 그 고통이 행여 끝날세라 다음 날 아침 또다시 간에 새살이 돋아나는 형벌을 받을 줄 알면서도 제우스의 명을 거스르고 인간에게 불을 주었다. 불은 문명의 원천이 되었고, 우리가 매일 누리는 과학과 의학과 예술, 그 모든 것의 발전을 혁명적으로 바꾸어놓았다. 모두가 그를 잊을 줄 알면서도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인간에게 불을 남겼다. 제우스의 저주를 충분히 예상하면서도, 프로메테우스의 이야기를 떠올릴 때마다 나는 내게 필요한 용기의 뿌리를 깨닫는다.
우리는 단지 신화를 읽는 것이 아니라 신화를 살아내야 한다. 신화를 살아낸다는 것, 그것은 신화 속 올림포스 신들처럼 멋지고 영웅적으로 살아내는 것만은 아니다. 신화를 살아낸다는 것, 그것은 신화 속 인물들이 받았던 고통의 의미를 되새기며, 나에게 그런 고통이 다가왔을 때 그 고통을 이겨낼 힘을 기르는 일이다. 내 안에 꿈틀거리는 작은 신화의 씨앗에 물을 주기 위해 나는 매일 조금씩 고통을 참는 연습을 한다. 이제 고통이 엄습할 때마다 스스로에게 속삭인다. 나를 몸부림치게 했던 모든 고통은 프로메테우스의 아픔에 비하면 아직 멀었다고, 신화를 살아낸다는 것, 그것은 고통을 뛰어넘는 자만이 다다를 수 있는 눈부신 운명을 향해 전진하는 것이다. 우리 무의식에 너무 깊숙이 뿌리박혀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신화의 힘과 지혜가 당신을 지켜주기를.
< 3 >
나의 행복이 당신을 찌른다면
《 가든파티 》
캐서린 맨스필드의 소설 《가든파티》는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는 한없이 조심스러운 마음을 가르쳐준 아름다운 작품이다. 주인공 로라에게 가든파티가 열리는 날은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온 설렘과 축복의 시간이었다.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로라는 정원을 세련되게 장식하고, 악단을 부르고, 음식을 장만하는 '파티의 주인공'이 되는 그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호화로운 저택에서 아무 부족함 없이 살던 로라는 건장한 인부들이 자신의 가든파티 준비를 돕기 위해 힘든 육체노동을 척척 해내는 모습을 보며 감탄한다. 연약하고 지루한 부잣집 도련님들만 알고 지내온 로라의 눈에 비친 인부들은 생동감이 넘치는 존재, 바라보고만 있어도 기분 좋아지는 존재로 다가온다. 함께 춤을 추지만 전혀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부잣집 도련님이 아니라 이렇게 건장하고 매력적인 인부들을 친구로 사귀면 어떨까 하는 즐거운 상상에도 빠져본다. 로라는 사람을 계급으로 차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 바라보려 한다.
그런데 로라의 순수한 마음에 균열을 일으키는 사건이 발생한다. 모두가 파티 준비에 열심인 동안 이웃의 짐꾼 스코트가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그토록 기다려온 가든파티 당일에 바로 길 건너 사는 이웃이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로라는 충격을 받는다. 로라는 집 근처에서 사람이 죽었는데 차마 가든파티를 열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결심을 말하자 엄마는 태연하게 반응한다. 우리가 파티를 그만둬야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고. 그들은 우리의 희생을 바라지 않는다고, 로라가 모두의 행복한 분위기를 망치고 있다고, 스코트의 죽음만큼이나 엄마의 냉담함에 충격을 받은 로라는 어쩔 줄 모르지만, 엄마는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새 모자를 씌워주며 제발 파티에 집중할 것을 명령한다. 이건 아닌데 싶으면서도 거울앞에 선 로라는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해버린다.
파티의 여주인공에게 딱 어울리는 호화로운 모자는 로라의 부끄러움을 마비시킨다. 로라는 몰려드는 손님들과 흥겨운음악, 현란한 파티 장식, 맛있는 음식에 파묻혀 이웃의 죽음을 애도하는 의미에서 파티를 취소해야 한다던 애초의 신념을 접고 만다. 악단의 음악 소리와 손님들의 왁자지껄한 대화 소리가 스코트의 장례식장까지 들릴까 봐 노심초사했던 로라. 그러나막상 파티의 흥겨움이 절정에 달하자 스코트의 죽음이 전해준 심각한 화두를 깡그리 잊고 파티의 여주인공이 된 듯 찬란한 희열에 흠뻑 도취한다. 진정 어려운 결정의 순간은 파티가 끝난 뒤 찾아온다. 스코트네 집안에는 관심도 없던 어머니가 갑자기 로라에게 파티에서 남은 음식을 장례식에 갖다주라는 어처구니없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호기심 반 걱정 반으로 장례식에 가게 된 로라는 드디어 자신이 그저 막연히 동경하던 일꾼들의세계가 얼마나 거칠고 힘든 것이었는지를 생생하게 깨닫는다.
로라의 일거수일투족, 옷차림 하나하나가 빈민가 사람들에게는 처음 보는 구경거리였다. 로라는 미술관의 풍경화를 바라보듯 인부들의 힘찬 노동의 세계를 멀리서 '감상' 했을 뿐 이 세계를 제대로 이해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던 자신을 발견한다. 그리고 가장의 죽음을 안타까워할 기운조차 남아 있지 않은 스코트 씨 가족을 본 순간 자신이 그토록 안전하다고 믿었던 평온하고 아늑한 세계가 붕괴하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그 불쌍한 사람들에게 이 완벽하고 훌륭한 음식을 갖다주고 오너라.”어머니의 명령은 부의 과시였고, 치사한 생색이었으며, 죽은 이에 대한 배려나 애도라고는 눈곱만치도 찾아볼 수 없는 냉혹함의 발로라는 것을 로라는 아직 이해하지 못한다. 스코트 가족은친절하게 로라를 맞으며 스코트의 시신까지 보여준다. 로라는가족을 위해 평생 뼈 빠지게 일하다가 비명횡사한 스코트의 얼굴이 뜻밖에도 너무나 평화롭고 아름답게 느껴져 또 한 번 충격을 받는다. 로라는 울면서 그 집을 뛰쳐나온다. "내 모자를 용서해 줘요!" 로라는 자신의 화려한 옷차림이 그들의 참혹한 슬픔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로라가 지금 당장 세상을 바꾸는 혁명가가 되지 못할지라도 분명 어머니보다 나은 선택을 하며 살아갈 것이다. 로라는부끄러움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내 모자를 용서해 줘요”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사람이기에 더 많이 가지고 싶은 열망 때문에 화려한 것들에 마음을 뺏기는 순간마다 나는 《가든파티》의 로라를 생각한다. 가난한 가장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들의 슬픔 앞에서 로라가 화려한 모자를 부끄러워했듯이, 우리 또한 자신이 이미 가진 것들이 누군가에게 칼이 되고 화살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이 순수한 부끄러움은 훗날 타인의 슬픔에 기꺼이 참여하는 용기의 씨앗이 될 것이다.
"내 모자를 용서해 줘요"라고 외치며 도망치듯 장례식장을 빠져나가는 로라의 애처로운 뒷모습이야말로 우리가 지켜야 할 윤리의 마지노선이다. 로라는 가난한 스코트 씨 가족이 평생 만져볼 수 없는 화려한 모자를 쓰고 장례식장에 나타난 자기 모습이 칼날처럼 스코트네 가족을 찌르고 있음을 깨닫지 않았을까.우리가 이미 누리고 즐기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을 잊어버리면 결코 자기도취와 허영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나는 이 작품을 통해 아프게 배웠다. 부끄러움이야말로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감정이라는 것을 타인을 향한 조용한 배려야말로 우리를 더 나은 존재로 만들어주는 힘이라는 것을.
< 4 >
아름다운 방백, 그때 하지 못한 고백
윤이형의 단편소설 <작은마음동호회>는 차마 일상에서는 표현하지 못한 마음속에 담아놓은 수많은 사연을 가진 엄마들의 이야기다. 그들이 모여 함께 만들어내는 첫 책을 통해 마음속에 갇힌 아픔을 해방시켜 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작은마음동호회〉의 주인공은 자신들을 "혼자 노래방에 가서 두 시간 동안 악을 쓰고, 아이를 때리지 않으려고 부엌 휴지통을 찌그러뜨리고, 신경정신과 상담 예약을 했다가 취소하고, 증명할 수 없는 무언가를 증명하기 위해 일기를 쓰고, 과일청을 만들다가 시계를 보고 쫓기듯 자러 가는 사람들, 방안에서만 서성거리는 사랑스러운 지식인들"이라고 묘사한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사연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바이링궐bilingual', 즉 이중 언어구사자가 아닐까.
우리는 바이링궐이다. 우리의 말들은 반쯤은 자신의 것이지만 반쯤은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들의 것이다. 우리는 종종 싸우려다 싸울 대상을 변호하며 주저앉는다. 그러고 나서는 성나고 괴로운 마음이 되어, 자신을 때려 기어이 피를 내곤 한다. 아무리 싫어도 우리 입에선 자꾸만 '아줌마'라는 말이 흘러나온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비하하는 그 말이.
'작은마음동호회' 회원들은 겉으로는 아주 소박하고 은밀하며 내성적으로 소통하지만 속으로는 아주 커다랗고 풍요롭고 화려한 우주적 언어를 품은 사람들이며, 알고 보면 너무 거대하고 광활해 측정할 수조차 없는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다. 이제 아이나 남편이나 시어머니를 위해서가 아니라 처음으로 나자신을 위해 글을 쓰기 시작한 엄마들의 눈빛은 누구도 말릴 수없는 열정으로 불타오른다. 문학은 이 바이링궐의 언어, 갑갑한이중 언어의 감옥을 부수고 스스로 해방의 언어를 구축하는 전사들의 몫이다.
'바이링궐'이라는 단어는 본래 두 언어를 모두 구사할 수있는'이라는 긍정적인 의미로 쓰이지만, 지배자의 언어와 피지배자의 언어를 동시에 구사하는 소수자야말로 또 다른 바이링궐이 아닐까. 겉으로는 스스로 '아줌마'라고 비하하지만 마음속에서는 세상 모든 쓸쓸한 주부들의 슬픔을 이해하고 감싸줄 준비가 된 사람들, 스스로를 '아싸(아웃사이더)'라고 폄하하면서 사실은 세상 모든 주변인의 아픔에 공감할 준비가 된 사람들, 온갖 저항의 언어를 마음속에 잔뜩 쌓아놓고도 차마 우리를 괴롭히는 그들 앞에서는 아무 일 없는 듯 '정상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우리 모두가 바이링궐이 아닐까. 문학은 이렇게 마음속에 저항의 언어를 쌓아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더 이상 이중 언어로 자신을 은폐하지 않아도 된다고, 이제 침묵을 끝장내자고 속삭이는 내성적인 사람들의 가장 매혹적인 친구다.
문학은 운명적으로 이중 언어와 복화술을 구사한다. 사회화되고 표준화된 언어로는 결코 표현하지 못하는 감정, 아무리 민주적인 사회에서도 어딘가는 반드시 억압되어 있는 인간의욕망, 가장 평등해 보이는 관계에서도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내밀한 권력관계를 표현하는 언어는 절대 단순할 수가 없다. 그리하여 무조건 쉽고 빠르게 잘 읽히는 글을 쓰라는 대중화의 주문은 문학의 입장에서는 가혹한 폭력일 수 있다. 여러 번 곱씹으며 소중하게 다루어야 할 언어, 어딘가 기이하게 뒤틀리고, 하도 여러 번 구겨지고 짓밟혀 본래 모습을 찾기 힘든 뼈아픈 언어야말로 억압의 흔적을 온몸에 문신처럼 새긴 문학의 언어다.
내가 견뎌야 할 일상이 절대 끝나지 않는 기나긴 터널처럼느껴질 때, 나는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고, 읽지 않으면 버틸 수없는 나를 발견한다.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시간, 읽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시간을 통해 나는 조금씩 더 나은 존재가 된다. 읽고 쓰고, 쓰고 또 읽음으로써 우리는 매번 더 나은 존재가 되어간다는 믿음이 나를 떠민다. 지금 내게 다가오는 고통을 저번보다는 더 낫게 견뎌내는 사람, 첫 번째 화살에는 어쩔 수 없이 맞았지만 두 번째 화살, 세 번째 화살은 피할 수 있는 내면의 힘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
마음속에 영원히 꺼내지 못할 비밀을 쌓아놓고 사는 모든사람이 바이링궐이다. 그렇게 안으로만 삼킨 말들이 거대한 화산을 이루어 마침내 마그마처럼 폭발할 때까지. 우리는 부디 침묵하지 말고, 결코 포기하지 말고 우리 안의 슬픔과 분노와 희망을 '문학'이라는 아름다운 타임캡슐에 담아 이 세상을 향해힘차게 내보낼 수 있기를.
정여울 / ‘문학이필요한 시간’(한겨레출판)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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