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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재 /‘다시 문학을 사랑한다면’중에서

송담(松潭) 2023. 11. 19. 21:09

이선재 /‘다시 문학을 사랑한다면’중에서

 

 

< 1 >

 

오해와 이해

 

오해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제가 꼭 함께 소개하는 소설이 있습니다. 바로 프레드 울만의 소설 『동급생』입니다. 이 소설에서 운명처럼 서로에게 끌렸던 두 소년 한스와 콘라딘의 관계가 소원해진 것도 다름 아닌 오해 때문입니다. 이 소설은 유대인 의사의 아들인 열여섯 살 한스슈바르츠와 새로 전학 온 독일 귀족 소년 콘라딘 폰 호엔펠스의 우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한스와 콘라딘은 예술과 철학 그리고 신에 대해 토론하고 시를 낭송하면서 그들만의 우정을 쌓아나갑니다.

 

어느 날 한스는 자신의 수집품을 보여주기 위해 콘라딘을 집으로 초대합니다. 그런데 한스의 아버지가 콘라딘을 '백작님'이라고 부르며 깍듯이 대하자 한스는 열등감을 느낍니다. 자신의 우상과도 같은 아버지가 계급 앞에서 무너지고, 자신의 초라한 옷차림이 콘라딘의 거대한 성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깨닫게 되면서 자격지심까지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콘라딘은 한스를 집으로 초대.하기를 꺼리고 반드시 부모가 없을 때만 초대합니다. 어느날엔 한스가 오페라를 보러 갔다가 콘라딘과 그의 부모를 보게 되는데, 콘라딘은 한스를 못 본척 지나가고 맙니다

 

이 일로 둘은 크게 다투지요. 급기야 한스는 콘라딘의 어머니가 유대인을 혐오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 콘라딘이 한스에게 자신의 부모님을 소개하지 않은 건 일종의 배려였습니다. 진실이 항상 아름답지는 않잖아요. 불편한 진실을 감추려 했던 콘라딘의 행동을 한스는 오해했던 것인데, 열여섯 살 소년에게 이 일은 마음 깊은 곳의 열등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죠. 한스는 상처를 받게 되고 결국 둘 사이는 멀어지게 됩니다. 무엇보다 한스에게 충격적인 사실은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영혼의 단짝과도 같았던 친구가 자신의 부모를 죽음으로 내몬 나치의 신봉자가 되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때의 상처가 너무 컸던 한스는 서로에 대한 오해를 풀 생각도하지 못한 채 오랜 세월을 외면하며 살게 됩니다.

 

이 소설의 마지막에서 콘라딘에 대한 한스의 오랜 오해는 단번에 풀립니다. 독일을 떠나 미국에서 성공적인 변호사로 일하고 있던 한스에게 콘라딘과의 우정은 어느덧 잊힌 지 오래였죠. 그런데 어느 날 한스에게 제2차 세계대전 때 목숨을 잃은 동창들을 기리는 추모비 건립에 기부해 달라는 호소문과 죽은 학우들의 인명록이 담긴 편지가 도착합니다. 그리고 한스는 인명록 속에서 익숙한 이름을 마주하게 됩니다.

 

폰 호엔펠스, 콘라딘. 히틀러 암살 음모에 연루. 처형.

 

나치 신봉자였던 콘라딘이 히틀러 암살 음모에 가담해 죽음을 맞이했던 것입니다. 이 소름 돋는 반전을 통해 작가가 의도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아마도 오해와 이해가 한 끗 차이라는 걸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한스는 콘라딘을 오랫동안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지만, 저 한 줄의 문장으로 한순간 그의 모든 삶을 이해하게 되었으니까요.

 

소설처럼 극적인 상황이 아니더라도 일상생활 속의 수많은 인간관계는 오해를 주고받다가 결국은 이해하게 되는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누군가를 섣불리 오해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일단 그 사람의 근본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겠죠.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을 오해할 일이 생겼을 때 '그 사람이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어. 뭔가 이유가 있을 거야'라고 한 번쯤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을 정도의 믿음을 갖고 있다면 오해를 줄일 수 있습니다.

 

'이해'란 가장 잘한 오해이고, '오해'란 가장 적나라한 이해다.

 

“너는 나를 이해하는구나”라는 말은 내가 원하는 내 모습으로 나를 잘 오해해준다는 뜻이며, “너는 나를 오해하는 구나”라는 말은 내가 보여주지 않고자 했던 내 속을 어떻게 그렇게 꿰뚫어 보았느냐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김소연 시인의 에세이 『마음사전』 속 한 구절입니다. 오해와 이해에 관해 이처럼 명징하고 통찰력 있게 정의한 문장이 있을까요? 이 글을 찬찬히 곱씹어 보면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이 오히려 상대가 보여주고 싶은 부분만을 골라 봤다는 의미가 됩니다. 단편적인 부분만 알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죠. 우리는 언제나 오해보다는 이해를 받고 싶어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마음은 곧 내가 상대에게 보여주고 싶은 좋은 부분만 그들이 보고 이해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기도 합니다. 내가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습을 그들이 목격했을 때 그것을 오해라고 단정 짓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어쩌면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오해와 이해 두 가지 모두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때로는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 적은 없을까 되돌아볼 필요도 있습니다. 나에게서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은 그만큼 오해의 크기도 커질 수밖에 없잖아요. 특히 멀어지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를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는 일도 가치 있습니다. 혹시나 내가 저 사람에게 뭔가 상처를 준 것은 아닐까 고민해 보고 그래도 답을 찾지 못했을 때는 용기를 내서 직접 물어보세요. 잃고 싶지 않은 누군가가 곁에 있다는 건 참으로 행복한 일이니까요.

 

 

< 2 >

 

사랑

 

사실 저도 아직 사랑과 연애의 본질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사랑의 본질이 ‘충만함'일 거라는 짐작을 어렴풋이 해볼 뿐이죠. 사람은 누구나 결핍과 외로움을 느끼기 때문에 내 존재를 인정해 주는 누군가와 함께할 때 충만함을 느낍니다. 그러니까 연애를 할 때 오가는 달콤한 말들은 모두 서로의 존재를 그 자체로 인정해 주는 언어들입니다. 그래서 부모님이 나에게 쏟는 절대적이고 무한한 사랑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연애를 통해서 우리는 더 큰 충만감을 느끼곤 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렇게 서로의 존재를 뜨겁게 사랑하던 연인들 사이에서 갈등은 어떻게 생겨날까요? 대개는 상대방에게 나의 욕망을 투영해서 그를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바꾸려고 할 때 갈등은 시작됩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죠? 회사 선후배나 상사와 부하 직원 사이에서 갈등이 생기면 우리 모두 어느 정도씩 체념하거나 참으려고 하잖아요. 상대를 이해해 보려고도 하고요. 불같이 화를 내는 경우는 많지 않죠. 하지만 상대가 연인이나 가족처럼 정말 사랑하는 사람일 때 오히려 우리는 '내 기준'을 강요합니다. 가까운 사이에서는 감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만큼은 나의 존재감이 더 크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만큼 나를 내세우고 강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이번에는 엄마를 떠올려볼까요? 세상에서 가장 가깝고 소중한 존재이면서 애틋한 대상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아이러니하게도 엄마를 가장 함부로 대하곤 합니다. 하루 치의 스트레스와 짜증을 잔뜩 껴안고 집에 돌아와서는 가장 먼저 엄마한테 쏟아붓는 경우도 많잖아요. 도대체 우리는 왜 이러는 걸까요?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그들을 가장 사랑하고 가장 가까이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성보다는 감정이 앞서게 되죠. 밖에서는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도록'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억누르며 지내지만, 집에 돌아오면 고삐가 풀린 듯 감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나의 존재감을 어필하려고 합니다.

 

오래된 연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오래 유지하려면 이런 아이러니를 이해하고 늘 조심해야 합니다. 운명적인 사랑도 결국은 내가 노력해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상대방을 향한 강렬한 끌림을 느끼고 거기에 운명이라는 서사를 부여해서 낭만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상대방에게 익숙해지고 결국은 서로의 진실에 가까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진실에 다가가는 순간 모든 환상이 깨진다는 것이에요.

 

우리는 늘 미디어를 통해 사랑에 관한 낭만적 서사를 접하고 있어서 그 서사에 익숙합니다. 사랑은 운명적이고 뜨겁고, 완전하리라는 착각에 빠지곤 합니다. 그러나 사랑 자체가 우리 인생의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사랑만으로 온전히 그리고 영원히 서로를 충족시켜 줄 수는 없습니다. 시인 김수영도 「사랑」이라는 시에서 균열이 예정된 사랑의 속성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어둠 속에서도 불빛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랑을 배웠다 너로 해서

 

그러나 너의 얼굴은

어둠에서 불빛으로 넘어가는

그 찰나에 꺼졌다 살아났다

너의 얼굴은 그만큼 불안하다

 

번개처럼

번개처럼

금이 간 너의 얼굴은

 

그렇습니다. 정말 모든 사랑의 얼굴에는 균열이 내재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변치 않는 사랑을 가르쳐준 연인의 얼굴에 깃든 불안처럼요. 그것은 김수영 시인의 표현처럼 '찰나에 꺼졌다 살아났다' 하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쩌면 그 불안과 불길함을 견디는 과정에서 진정한 사랑을 배워나가는 게 아닐까요. 그 단계를 넘어서 깨닫게 되는 것이 우리가 말하는 진짜 사랑의 본질이리라 믿으며 세상의 온갖 사랑 이야기들을 곱씹어 봅니다. 우리는 결국 사랑 없이 살 수 없는 존재들이니까요.

 

 

< 3 >

 

대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이야기도 함께 나눠보고 싶습니다. 몇 달 동안이나 고기를 잡지 못했지만 매일같이 바다로 나가는 늙은 어부. 그가 상어와 사투를 벌이며 뱃전에서 혼자 되뇌는 이 말보다 인간의 숙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비유가 있을까요.

 

"하지만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된 게 아니야." 그가 말했다.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

 

노인에게 관심을 두는 마을 사람은 어린 소년 한 명밖에 없었습니다. 누구도 '최악의 불운'을 만난다는 그를 가까이하려 들지 않았죠. 그런데 어느 날 홀로 조각배를 타고 바다로 나간 노인의 낚싯바늘에 자신의 배보다 큰 청새치가 걸려듭니다. 이틀 밤낮을 꼬박 거대한 물고기와 사투를 벌인 끝에 노인은 물고기를 끌고 항구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해안에 도착했을 때 그 물고기는 뼈만 남은 잔해에 불과했지요. 피 냄새를 맡고 몰려든 상어들이 다 뜯어먹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습니다. 다시 황금빛 사자의 꿈을 꾸면서 잠에 빠지죠.

 

이쯤 되면 궁금해집니다. 노인이 욕망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어쩌면 노인에게는 대어를 잡는 것보다 매일 바다로 나가는 것 자체가 삶의 목표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비록 뼈만 앙상한 청새치를 끌고 집에 돌아왔지만, 그는 낙담하거나 삶의 고단함을 하소연하는 대신 '오늘은 푹 자고 내일 또 그물을 끌어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갈 거야'라며 의지를 다집니다.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요.

 

노인은 결코 몰락하지 않습니다. 더 큰 물고기를 잡고야 말겠다는 욕망은 분명했지만 그것만이 삶의 목적은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생각해요. 오늘은 허망함을 느낄지언정 내일 또다시 물고기를 잡으러 가는 것. 노인의 삶이 바로 인간의 삶 그 자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망망대해에 홀로 선 고독한 존재입니다. 처음부터 그럴듯한 인생의 목표를 설정해 두고 달려가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다람쥐 쳇바퀴 돌듯 평범한 삶을 살면서 하나씩 목표를 만들어가니까요.

 

“우리 『노인과 바다』속 늙은 어부처럼 살자."

 

저는 가끔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선망의 대상이 되는 원대한 이상에 인생을 거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 대부분은 그렇지 않잖아요. 매일의 작은 목표조차도 이루어내지 못해서 좌절하고 회의에 빠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꿈꾸기를 멈춰서는 안 됩니다. 실패하더라도 치열하게 욕망했던 삶의 태도는 우리 마음에 새겨지기 때문입니다. 그 태도와 경험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큰 자양분이 됩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했던 모든 시간이 쌓여서 또 다른 꿈을 꾸게 해주는 거죠. 망망대해에 우뚝 선 노인처럼요. 내게 주어진 생을 가장 나답게 살아낸다면, 그 과정을 즐기고 그때 얻은 교훈을 몸에 새긴다면 결과에 상관없이 우리는 결코 패배자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4 >

 

성찰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이카루스는 밀랍 날개를 달고 하늘로 날아올라 미로 속에서 탈출한 인물인데요, 하늘을 나는 것에 재미를 붙이고 더 높이 날 수있다는 자만에 빠져서는 아버지의 경고를 잊고 태양을 향해 더 높이 날아오르다 밀랍이 녹아 바다로 추락하고 맙니다.

 

물론 인간의 삶에서 욕망을 아예 없애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카루스의 아버지 다이달로스가 아들에게 당부했듯이 '너무 낮게 날아서 날개가 파도에 젖지 않도록, 너무 높게 날아서 태양에 날개가 녹아내리지 않도록' 적당한 높이를 유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성찰'이라는 수단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성찰만이 폭주하는 욕망의 속도를 잠시 멈춰줄 수 있기 때문이죠. 성찰은 내가 지금 달려가는 방향이 과연 올바른지, 이 노력의 강도가 내 일상의 균형을 깨트리는 것은 아닌지, 진정한 성취는 무엇인지를 상기하면서 건강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법을 알려줍니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혼용하는 후회, 반성, 성찰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사전적인 의미를 파악하는 대신 자의적인 해석을 해보자면, 후회는 '내가 왜 그랬을까?'에 대해 생각하고 아쉬워하는 감정이겠죠. 반성은 내가 무언가 잘못한 것은 없는지 돌이켜 보는 자세이고요. 그다음 단계가 성찰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나온 시간에 아쉬운 점이 있다면 내가 잘못한 바는 없는지 돌이켜 보고 다음에는 이렇게 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게 바로 성찰 아닐까요? 확실히 후회와 반성보다는 한발 나아가는 개념이죠. 과거의 나를 되돌아보면서 미래에 대한 다짐도 해야 하기에 아무래도 시간이 많이 필요할 겁니다. 그래서 더더욱 성찰은 어려운 과정입니다.

 

 

< 5 >

 

놀라운 성과를 내며 승승장구해도 그 끝에는 늘 공허함이 기다리고 있죠. 마찬가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고요한 삶에도 공허는 스며들기 마련입니다. 어쩌면 우리 삶은 공허에서 벗어나기 위한 여정이 아닐까요.

 

열정은 이내 사그라들고 안온함 얼마 지나지 않아 무료함으로 바뀌잖아요. 저는 이 공허한 삶을 의미 있게 살아가기 위해 삶의 이유를 '배움'이라 여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시간이 날 때마다 무엇을 배워볼까 행복한 고민을 합니다. 제게 배움은 거창한 지식을 습득하거나 누군가에게 과시하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그저 삶의 공허함을 조금이나마 채우기 위한 노력 그 자체입니다. 학교에서 전문 지식을 배우거나, 책을 읽으며 영감을 얻거나,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활기를 찾거나, 취미 생활을 하면서 충만해질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게 다 배움의 과정이죠. 내가 모르는 대상에 대해 알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면 어떤 인생이든 적어도 공허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본성은 서로 비슷하나, 익히는 것에 의해 서로 멀어진다.

 

공자는 늘 배움의 자세를 중요하게 생각했죠. 사람의 본성은 비슷하지만 무엇을 익히고 반복하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인생을 살게 된다고 말합니다. 남의 것에 연연하지 않고 스스로 당당해지기 위해, 타인의 인정에 끌려다니며 내 인생을 불태우지 않기 위해, 남들이 정해놓은 한계를 이겨내기 위해 늘 배우려는 삶의 태도를 가지라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인간으로 태어나 숙명처럼 짊어지는 인생의 허무를 채워줄 수 있는 삶의 태도가 아마도 배움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6 >

 

양질전화(良質轉化)는 독일의 철학자 헤겔이 말한 개념으로 일정한 양이 누적되면 어느 순간 질적인 비약이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이 말처럼 안심되는 개념이 또 있을까요. 저는 어찌 보면 무식하다 싶을 정도로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돌이켜 보면 제 삼십 대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요. 이렇게 절대적인 노력을 쏟아부으며 일을 해온 시간이 쌓여서 비로소 지금의 제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데 이렇다 할 성과가 없다면 물론 절망스러울 겁니다. 왜 세상이 날 알아봐 주지 않을까 두렵고 억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루어내는 성과는 절대 양적인 축적 없이 어느 순간 비약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 책을 읽는 모든 분께 말해주고 싶습니다. '지금의 성실함이 쌓여 언젠가 질적인 비약을 이룰 것'이라고, ‘그때 비로소 스스로를 증명해 줄 것'이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