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로 가는 시내버스
계속된 장마와 6달째 꼼짝 못 하게 하는 코로나19로 심심하고 하릴없이 서글펐는데, 거짓말처럼 앙큼한 하늘이다. 시침을 뚝 떼고 파랗기만 한 하늘이 밉지가 않다. 오랜만에 보는 푸른 하늘이다. 차장 밖의 살아 움직이는 풍경, 나른하게 속삭이는 햇살, 투박하게 오가는 시골 할머니들의 푸근한 말들과 기분 좋은 덜컹거림까지, 가만히 앉아 그 생경한 시간을 누리는 것만으로도 굳어있던 마음이 푸근해진다.
그런데 버스비가 천원이다. 천원으로 군내 어디든 간다고 한다. 세상에 단돈 천 원으로 이렇게 호사를 누릴 줄이야. 끼익, 낡은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고 두 분 할머니가 내리고, 느릿느릿 어르신이 올라탄다. 언제 그랬나는 듯 버스는 새로이 달음질친다. 작은 버스에는 나와 노인 한 분, 괜히 내가 미안해진다. 다시 적막한 시간이다.
공기는 더욱 청량하고 대지는 제 몸과 꼭 같은 색으로 물기를 덜어낸다. 들판에는 사람은 보이지 않고 온통 초록뿐이다. 장난감 같은 버스는 바닷가를 따라 마을마다 인사를 드려도 승객은 늘지 않고, 멀리 언덕 위 밭일하는 사람이 마치 푸른 이파리 위에 풍뎅이 한 마리가 노닐고 있는 것만 같다. 온화하게 펼쳐진 초록 땅에 몸과 마음이 편해진다. 한쪽 눈으로 세상을 구경하고, 다른 한쪽 귀로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 노래를 몇 번 더 들으며 그만 내릴 곳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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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마을, 늙은 팽나무 한 그루가 마을을 지키는 작은 포구에 내렸다. 읍내로 나가는 막차가 6시 반이란다. 무려 6시간, 나만이 오롯이 누릴 수 있는 시간이다. 나무와 검푸른 하늘이 거울 같은 수면 위에 비치고 있다. 나무 밑에 펼쳐놓은 시집 속엔 글자 대신 맑은 풍경이 들어와 있다. 한낮의 시간이 멈춘 듯한 오직 고요함으로 가득한 곳. 몇 발짝 떨어진 곳에, 긴 밧줄에 겨우 삶을 붙들고 있는 작은 어선 한 척이 흘러가던 삶을 잠시 쉬고 있다. 흔들리는 물결에도, 불어오는 바람에도, 자리를 지키게 하는 동아줄. 정박한 배는 떠내려가지 않고 그저 물결 위에서 흔들림에 몸을 맡기면서도 휩쓸리지 않는다. 어디. 흔들리는 것이 배뿐이겠는가. 긴긴 세월 나는 그동안 어떤 줄에 매달려 흔들리면서 여기까지 왔을까?
모래밭에서 소라껍질을 주워 지그시 눈을 감고 천천히 만지작거린다. 희고 깨끗하고 고혹적인 소라껍질, 귀에 대본다. 소라껍질 속에서 파도 소리가 난다. 먼 바다의 일렁이는 파도 소리처럼 아득하다. 허공 어디선가 파도치는 소리도 같다. 꿈틀거리는 추억과 두근거리는 그리움. 눈앞의 바다가 아니라 훨씬 아련하면서도 머나먼 과거나 미래에 연결된 듯한 파도 소리. 이 소라껍질도 언제였던가는 숨 쉬고 움직이고 자라고 사랑을 나누었을 것이며, 죽어서는 또 누군가 산 것들의 몸이며 집이었을 것이다.
길갓집에서 밭일하는 할머니에게 잘 계셨냐고 인사드리자, 울타리가에 열린 오이를 툭 따 손에 쥐여 준다. 울퉁불퉁 구부러지고 못생긴 오이다. "잡사 봐! 생긴 것은 나처럼 물짜도 맛있어." 받아드는 손보다 내미는 손이 오히려 부끄러워한다. 나뭇등걸처럼 투박한 손이 내 손등에 스친다. 옛 어머니의 손이 생각나 괜히 콧등이 시큰해진다. 옷에 쏙 문질러 오이를 한 입 베어 문다. 향기로운 내음이 입안에 가득 고인다. 세상은 변해도 옛 분들의 온기는 그대로 남아, 혼자 걸어도 그분들의 거칠고 투박한 손에 대한 기억으로 따뜻하고 외롭지 않다.
임인택 / 광주문인협회 수필분과 위원장
문학춘추 2020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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