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詩, 글

친절한 사람과의 소통

송담(松潭) 2021. 1. 24. 06:43

친절한 사람과의 소통

 

 

(...생략...)

 

우리 마을에서 오르는 길도 너덧 갈래가 되지만 내가 개발한 길은 1년 내내 아무하고도 안 마주칠 정도로 사람들이 안 다니는 길이다. 딴 길은 가다 보면 약수터도 나오고 배드민턴장이나 암자도 나오는데 내가 다니는 길은 볼거리 없는 그냥 산길이다. 그 대신 하루도 같은 날이 없는 나무와 풀들, 새들과 다람쥐들을 눈여겨보게 된다. 사람들이 안 다니는 길은 꽃나무들이 온전하고 온갖 새들이 거침없이 지저귄다.

 

혼자 걷는 게 좋은 것은 걷는 기쁨을 내 다리하고 오붓하게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내 다리를 나하고 분리시켜 아주 친한 남처럼 여기면서, 70년 동안 실어 나르고도 아직도 정정하게 내가 가고 싶은 데 데려다주고 마치 나무의 뿌리처럼 땅과 나를 연결시켜주는 다리에게 감사하는 마음은 늘 내 가슴을 울렁거리게 한다.

 

매일매일 가슴이 울렁거릴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큰 축복인가. 그러나 산이 나를 받아주지 않으면 이런 복을 어찌 누릴까. 눈 온 산이 아니더라도 산에는 평지와 다른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 오늘도 이 노구(老軀)를 받아주소서, 산에 기도를 드리게 되는 것도 울렁거림과 함께 차분한 경건을 맛볼 수 있는 기회이다.

 

하루는 산에서 열쇠를 잃어버렸다. 오르는 길에 땀이 나서 재킷을 벗었는데 아마 그때 열쇠가 떨어진 듯했다. 집에 와서야 그 사실을 알았다. 워낙 문단속이 허술한 성격이라 현관문은 안 잠그고 대문만 잠갔는데 대문 또한 허술하여 밖에서 팔을 안으로 넣어 열수 있게 되어있어 집에 들어오는 데 지장은 없었다. 그래도 시간 걸리는 외출을 하려면 문단속을 안 할 수가 없겠기에 오던 길을 되짚어가서 찬찬히 살펴보았지만 못 찾았다. 그 후 며칠은 산에 갈 때마다 발밑만 보고 걸었지만 어디 꼭꼭 숨었는지 눈에 띄지 않았다. 자식들한테 준 스페어 열쇠를 회수해서 문단속을 제대로 하게 된 후 비로소 발밑을 살피는 일에서 해방이 되었다.

 

다시 한눈을 팔 수 있게 되었을 때 내 열쇠가 바로 길가 내 눈높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걸 발견했다. 누군가가 주워서 그렇게 눈에 잘 띄게 걸어 놓았을 것이다. 그 산책 길은 나 혼자만의 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길은 내가 낸 길도 아니었다. 본디부터 있던 오솔길이었으니 누군가가 낸 길이고 누군가가 현재도 다니고 있어서 그 길이 막히지 않고 온전한 것이다.

 

길은 사람의 다리가 낸 길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마음이 낸 길이기도 하다. 누군가 아주 친절한 사람들과 이 길을 공유하고 있고 소통하고 있다는 믿음 때문에 내가 그 길에서 느끼는 고독은 처절하지 않고 감미롭다.

 

박완서 에세이 ‘모래알만한 진실이라도’중에서

 

 

 

이멜다의 구두

 

 

봄기운이 도타워지면서 낮엔 집 안보다 집밖이 한결 따습다. 난방이 덜 되는지, 집 안엔 아직 겨울기운이 남아 있어 껴입고 외출을 했다가 번번이 진땀을 흘리는 고역을 치렀다. 오늘은 마음먹고 내복을 벗고 겉옷도 가볍고 밝은 색으로 차려입었다. 좀더 봄기운 나는 새 옷을 장만하고 싶다는 욕심도 생기면서 마음이 들떴다. 그러나 신발장을 열고 보니 마땅한 구두가 없었다.

 

어제까지 신던 굽 낮은 까만 구두 말고 상큼한 보라색이나 베이지색 구두를 신고 싶은데 없었다. 산 적이 없으니 없을 수밖에. 그래도 좀 나은 구두가 있을 것 같아 신발장의 구두를 거의 다 꺼냈다. 맙소사 식구가 세 식구밖에 안 되는데 구두는 30켤레가 넘었고 그중의 20켤레 이상이 여자 구두였다. 식구 중 나 혼자가 여자라고 해서 그 구두가 다 내 것은 아니다. 딸이 시집가면서 버리고 간 것을 내 눈엔 말짱해서 껴둔 것까지 합쳐서 그랬다. 그중엔 철 지난 부츠도 있고, 철 이른 샌들도 있고, 산 지가 너무 오래되어 모양으로나 수명으로나 다 된 것도 있었다.

 

신을 만한 게 단 한 켤레도 없는 30켤레의 구두 앞에서 나는 엉뚱하게도 이멜다의 3,000켤레의 구두(1965년부터 1986년까지 장기 집권했던 필리핀 전 대통령 마르코스의 부인 이멜다가 국민들의 저항을 피해 도망갈 때 남겨 놓고 간 명품 구두의 수가 3,000켤레라고 알려졌었다.- 편집자 주)를 연상하고 있었다. 우리집의 30켤레의 구두와 이멜다의 3,000켤레의 구두는 양적으로도 그렇지만 질적으로도 비교가 안 된다. 내 것은 문자 그대로 고물 장수도 안 집어갈 헌신짝일 뿐이다. 그러나 내가 이런 식으로 헌신짝을 못 버리고, 시집간 딸들이 버린 헌신짝까지 껴두다가는 죽는 날까지 300켤레쯤의 헌신짝을 모으는 것쯤 문제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세계적인 화제는 못 되더라도 유족들 사이에서 참 딱한 늙은이였다는 화젯거리로 남게 될 수도 있으리라.

 

가끔 얼토당토않은 것끼리, 또는 정반대되는 것끼리 묘하게 닮아 보일 때가 있다. 이를테면 한 달에 10만 원 수입에서 7만 원을 저금했다는 거짓말 같은 사실의 주인공과 남의 돈 내 돈 없이 몇십 억 몇백 억을 주무르고 사치의 극을 누린 큰손을 가진 사람이 닮아 보일 적이 있다. 그 지나침 때문에. 지나치면 만고의 미덕이라는 절약도 아름답지가 않고, 누구나 누리고 싶어 하는 부도 혐오스럽게 된다.

 

내가 반 평도 안 되는 현관에 수북이 산처럼 쌓인 헌 구두를 망연히 바라보면서 이멜다의 구두를 연상한 것도 그런 까닭이다. 그 두 가지는 얼토당토않은 거였지만 아름답지 않고 혐오스럽다는 걸로 매우 닮아 보였다. 뭐든지 그것을 즐기려면 우선 제정신이어야 한다. 그러나 3,000켤레의 새 구두는 이미 제정신을 가진 사람의 것이 아니다. 병적인 집착이요 광분일 따름이다. 뭐든지 덮어놓고 아까워서 껴두는 걸로 자신을 가장 분수를 지키며 검약하게 사는 걸로 착각해 온 나는 그럼 제정신인가. 그 두 가지는 서로 상반되는 것 같으면서도 집착과 자기도취라는 공통점이 있다.

 

동양 사상이 왜 중용을 인간 최고의 덕목으로 삼았나를 알 것 같다. 중용은 유교 경전 중 사서의 하나지만, 단지 중용의 날말 풀이만 들어봐도 아름답다. "마땅하여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으며 또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떳떳하여 알맞은 상태나 그 정도"(신용청 ·신기철 편저, 「새 우리말 큰사전」에서).

 

이멜다의 구두 덕에 나는 오랫동안 껴두었던 헌 구두들을 미련 없이 버릴 수가 있었다. 물론 다시 신을 만한 것 몇 켤레도 남겼다. 내일쯤은 새 구두도 한 켤레 사야겠다. 회색으로 살까 베이지색으로 살까? 눈딱 감고 분홍 구두를 살까? 주책없이 설레고 있다.

 

 

 

넉넉하다는 말의 소중함

 

 

가끔 무엇을 좋아하느냐라든가 누구를 좋아하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대답을 못 하고 난처해하면 먹을 것 중에선 무엇, 정치가 중에선 누구 하는 식으로 범위를 좁혀줘도 대답을 못 하긴 마찬가지다. 싫고 좋고가 자주 변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대부분의 대상에 대해 싫고 좋고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말 중에서 어떤 말을 가장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서슴지 않고 대는 말이 있는데 그건 '넉넉하다'는 말이다. 나는 ‘넉넉하다'는 말을 아주 좋아한다. 내가 좋아하는 ’넉넉하다‘는 말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나의 가장 궁핍했던 시절과 관계가 깊다.

 

6-25동란 중 집안이 망하다시피 해서 단칸방에서 끼니 걱정을 해야 할 때, 그러니까 가장 궁핍하게 살 때 우리 어머니는 이 '넉넉하다'는 말을 거의 남용하다시피 하셨다. 우리뿐 아니라 그때는 이웃이고 친척이고 못사는 사람 천지였다. 모두 굶주리고 헐벗고 잠자리조차 편치 못

한 피난 시절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집에 온 손님을 끼니때 그냥 돌려보내는 일이 없었다. 번연히 우리 먹을 밥도 넉넉지 못한데 어머니는 한사코 넉넉하다면서 손님을 붙들어서 끼니는 때워 보냈다. 또 해 어스름 녘에 온 손님이면 방 넉넉하니 자고 가라고 붙들기가 일쑤였다.

 

밥도 방도 넉넉할 거 하나 없는데 어머니는 부자처럼 넉넉한 얼굴을 하시고 사람들을 먹여 보내고 재워 보내고 하셨다. 손님이 간 다음 우리는 어머니한테 신경질도 부리고 때로는 울고불고한 적까지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난처한 건 옷을 살 때였다. 그저 품도 넉넉한 거, 길이도 넉넉한 거, 넉넉한 것만 찾다 보니 꼴이 말이 아니었다.

 

(...생략...)

 

그러나 자기보다 못 가진 사람에게 자기 가진 것을 나누어줄 만큼 넉넉해진 사람은 참으로 드물다. 나부터도 6·25 당시에다 대면 지금 사는 게 큰 부자가 된 셈인데도 초대하지 않은 손님에게 차 이상을 대접하려들지 않는다. 명절에 음식이 남아, 더러 버린 적도 있는데도 못 먹게 되기 전에 누구에게 나누어줄 생각을 못 했다. 못 했다기보다는 그런 일이 번거로워서 하기가 싫었다. 시골서 손님이 와도 묵어가는 게 달갑지 않다. 아이들마다 독방을 쓰는데도 방이 없다고 생각한다.

 

'광에서 인심 난다는 옛말도 말짱 헛것인 게, 있는 사람일수록 더 인색하다. 넉넉하다는 게 남에게 베풀 수 있는 마음이라면, 요새 부자는 늘어나는지 몰라도 넉넉한 사람은 자꾸만 줄어드는 것 같다. 청소비나 야경비 몇백 원 때문에 동네가 떠나가게 다툰 이악스러운 집, 쓰레기통에 궤짝째 쏟아버린 사과와 통째로 버린 비싼 생선을 본 적도 있다. 남 나무라 무엇하랴. 크고 작고의 차이만 있을 뿐 내 뱃속도 그 쓰레기통과 얼마나 다르랴 싶다.

 

광에서 인심 나는 게 넉넉한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 같다. 가장 궁핍했던 시절을 넉넉한 마음 하나로 가장 부자스럽게 살게 해주신, 그래서 그 시절만 회상하면 저절로 환한 미소가 떠오르게 해주신 어머니가 새삼스럽게 자랑스럽다. 아무리 많아도,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줄 생각은커녕 더 빼앗아다가 보탤 생각만 굴뚝같다면 가난뱅이와 무엇이 다를까. '넉넉하다'는 후덕한 우리말이 사어(死語)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마음의 부자가 늘어나고 존경받고 사랑받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박완서 에세이 ‘모래알만한 진실이라도’중에서

 

 

이제부터라도 문학이라는 고통스럽고 고독한 작업에 모든 것을 걸어보느냐, 아니면 다시 일상의 안일에 깊숙이 함몰할 것인가를 놓고 나는 고민을 되풀이했다. 그리고 나 자신의 작가로서의 창조적 능력에 대해서도 회의를 거듭했다.

 

우선 자신의 능력을 시험할 겸, 개발도 할 겸, 하나둘 습작을 시작했다. 지독하게 열심히 했다. 밤잠을 설치고, 입맛을 놓치고, 남의 좋은 글을 읽고 샘을 내고, 발표의 가망도 없는 글을 썼다. 차차 글 쓰는 어려움에 눈 떴다. 자연히 쉽게 쓴 글이 쉽게 당선된 데서 비롯된 내심의 은밀한 오만도 숨이 죽었다.

 

당선작을 쓰고 나서 습작을 썼으니 순서가 거꾸로 됐지만 그 시기는 당선작을 쓴 시기보다도 훨씬 더 소중한 시기였다. 글 쓰는 어려움에 바싹바싹 마르는 것 같으면서도 속에선 뭔가 조금씩 조금씩 살이 찌고 있는 것 같아 보람을 느꼈다. 곧 「여성동아」에서 연재의 기회를 주었고 그 후 여러 지면의 비교적 고른 혜택을 받고 보니 어름어름 작가인 척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자랑할 거라곤 지금도 습작기처럼 열심히라는 것밖에 없다. 잡문 하나를 쓰더라도, 허튼소리 안하길, 정직하길, 조그만 진실이라도,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진실을 말하길, 매질하듯 다짐하며 쓰고 있지만, 열심히라는 것만으로 재능 부족을 은폐하지는 못할 것 같다. (P.215 ~ 216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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