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詩, 글

울지 말아요, 베트남

송담(松潭) 2021. 12. 8. 10:50

울지 말아요, 베트남

 

 

몇해전, 성탄절을 앞두고 베트남에 갔다. 호치민(사이공)공항 대합실에 들어서자 여기저기서 우는 소리가 들렸다. 둘러보니 가히 눈물바다였다. 그날은 마침 한국으로 산업연수생들이 떠나는 날이었다. 저들의 눈물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을까? 순간 1960, 70년대 우리네 풍경이 떠올랐다. 그래, 그때 김포공항이 이랬었지…. 순전히 돈을 벌려고 낯선 나라로, 잘 사는 나라로 주먹 쥐고 눈물을 뿌리며 떠나갔다. 김포공항은 눈물이 마를 새가 없었다. 후진국일수록 공항은 눈물에 젖는다. 가난했던 그때 우리처럼, 베트남 사람들도 조국을 떠나고 있었다.

 

한국은 1964년부터 1973년까지 8년 5개월 동안 32만여 명이 베트남전쟁에 참여했다. 파월장병! 당시 나라 안의 관심과 화제, 이야깃거리의 더듬이는 모두 월남을 향해 열려 있었다. 파월장병의 노래가 메아리쳤고 맹호, 청룡, 백마부대 용사들이 줄이어 정글 속으로 들어갔다. 당시 우리 생각 속의 베트남은 미개한 땅이었고 월맹군은 총알 한 방에 서너 명이 죽어넘어지는 보잘 것 없는 존재였다. 전황은 날마다 중계되었고 그때마다 용맹스런 우리 국군은 이겼다. 월남치마가 유행했고,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가 흘러 다녔다. 학교 교련시간에도 월맹이라는 나라는 철저하게 뭉개졌다. 베트콩의 해골을 줄줄이 엮어 목에 걸고 다녔다는 무용담과 꽁까이(월남 치녀)를 자빠뜨리는 음담으로 채워졌다. 교관은 거품을 물었고 학생들은 침을 삼켰다.

 

그런데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우리가 철석같이 믿었던 미국이, 그토록 늠름했던 미국이 작고 보잘 것 없는 베트남에서 도망쳐 나왔다. 그러자 싸우면 이겼던 용감한 국군도 라이따이한과 태권도를 남거둔 채 떠나와야 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몰랐다. 그토록 싸움 잘하던 우리 용사가 5천명이 넘게 전사하고 1만 6천여 명이나 부상한 사실을.

 

그 후 거의 30년이 흘렀다. 이 땅의 젊은이들이 머나 먼 이국에서 흘린 피, 그 피가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이 땅에 피를 돌게 만들었다. 한국은 고도성장을 거듭했다. 한국민은 더플백 대신 가방을, 총 아닌 돈을 들고 다시 베트남에 상륙하고 있다. 대신 베트남 사람들은 기술을 배우러, 돈을 벌러 한국에 들어오고 있다.

 

베트남 사람들은 한국을 어떻게 새기고 있을까? 전사한 전우의 이름을 필명으로 쓰고 있는, 시인이며 영화감독인 반레는 “베트남은 피치 못할 전쟁에 목숨을 걸지만 그것이 끝나면 용서와 더불어 화해의 길을 열어왔다”고 한다. 확실히 베트남은 가해국인 미국과 한국에 사죄나 사과를 강요하지 않았다. 베트남 작가 반레는 당당히 말한다.

 

당대 최강국에 맞서서 베트남이 쟁취한 승리는 아직도 세계 인류사의 경이로운 역사로 기록되고 있다. 중국 왕조에 동화되지 않은 유일한 민족, 몽골을 물리친 유일한 민족, 프랑스 같은 제국주의 국가를 자력으로 몰아낸 유일한 민족, 미국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유일한 민족. 우리 민족에 싸움을 걸어왔던 중국, 몽골, 프랑스, 일본, 미국은 우리보다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신뢰의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민족은 '강한 힘을 신뢰하는 상대방의 마음을 완전히 소멸시킬 수 있는 법이다.

 

어떤 침략에도 그들은 마침내, 기어이 이겼다. 천년 동안 중국의 지배를 받았지만 베트남 사람들은 그 천년을 독립을 준비하는 시기로 생각했다. 천년은 굴욕이 아니라 거듭남의 세월이었다. 천년을 기다리는 민족, 후손과 미래를 믿는 민족, 그래서 침략자를 꼭 물리치는 민족, 그들이 지금 한국민에게 악수를 청하고 있다.

 

한국민의 베트남에 대한 인식은 어떤가. 한국내 베트남 노동자들이 배우는 한국말 교본 제1과에는 "때리지 마세요” “욕하지 마세요” “월급은 언제 주실 거예요?" 가 나온다. 그들이 이 땅에서 살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말들이다. 또 베트남에 진출한 외국업체 중 유독 한국기업에서 노사분규가 가장 많이 발생하고 있다. 아직도 우리는 베트남을 30년 전 흑백사진첩 속에 가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할리우드 영화는 여전히 베트남을 향해 총질을 하고 있다. 람보가 쏘는 총 한방에 서너명씩 쓰러지고 있다. 우리도 그 속에 머무르고 있는 게 아닌지, 또 다른 미국이 되어가는 건 아닌지. 어림잡아 1만 2천 명의 불법체류 베트남 노동자가 이 땅에 꽁꽁 숨어 겨울을 나고 있다. 베트남전 때 우리 젊은 병사들이 조국에 ‘달러’를 바치러 밀림에서 숨죽이고 매복했듯이.

 

우리 아파트단지를 둘러싸고 있는 철망에 걸린 결혼정보회사의 선전입니다. 큼지막하게 쓰여있는 전화번호는 지웠습니다. 베트남인들이 한국과 한국인들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우리나라 영화와 드라마에 웃고 울고, 그 속의 주인공들을 우리보다 더 좋아한답니다.그런데 우리는 베트남을 어떤 눈으로 바라봅니까?

 

철망에 걸려있는 문구가 아팠습니다. 제가 베트남에 간다니까 동양사학을 전공한 후배가 이런 말을 했지요. "베트남 처녀를 보면 그 옛날 우리 누이들을 생각하십시오." 정말 베트남 처녀들은 70년대 우리 누이들이 그랬듯이 돈벌이를 위해 이국땅으로 숨어들고 있습니다. 그때 김포공항이 그랬듯이 호치민공항은 늘 눈물에 젖어 있습니다. 베트남인들은 우리를 향해 맑게 웃고 있는데, 우리는 그들을 보며 비릿한 웃음을 흘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 2 >

 

지금 우리는 방패연

 

 

설이 오면 우리는 일제히 떡국을 먹고 일제히 한살씩 더 먹는다. 고향은 객지로 떠나간 자식들을 기다리며 한껏 부풀어 오른다. 하지만 자식들이 다시 떠나가면 고향도 한살 더 먹고 그만큼 늙어간다. 설이 양력에 밀려 구박을 받다가 '민속의 날’ 로 부활한 것은 1985년의 일이었다. 그리고 1989년 설날로 완전 복권되었다. 그러나 정작 설날은 본래의 얼굴과 모습이 아니다. 많은 것들이 빠져나갔거나 일그러졌다. 요즘에는 명절이래야 아이들은 컴퓨터 속으로 들어가고 어른들은 화투에 빠져든다. 세시풍속은 박제되어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아이들은 전자게임에 열중하고, 어른들은 '고스톱' 에 침을 튀긴다. 그러나 우리 명절에는 철따라 격과 기품이 있었다. 놀이마다 깊은 뜻이 있었고 정이 흘렀다. 특히 새해가 떠오르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설빔으로 갈아입었다.

 

마을 구석구석, 집집을 돌며 세배를 다녔다. 어른들께는 그 누구에게나 넙죽 큰절을 올렸다. 그 시절 집집마다 배어나던 특유의 냄새들이 아직도 생생하다. 어떤 집에서는 기름냄새가, 어떤 집에서는 담배냄새가, 어느 집에서는 생솔가지 타는 냄새가 났다. 어떤 할아버지는 몸이 아프다고 세배를 받지 않았다. 그러면 어린 마음에도 걱정이 됐다. 집집마다 곶감, 부침개, 약과, 과일, 쌀과자 등을 내놨다. 하루 종일 배가 불렀다. 옛 고향의 설 명절은 정월 초하루부터 정월 대보름까지 이어졌다. 보름 동안은 새해맞이와 풍년을 기약하는 놀이들이 쉴 새 없이 펼쳐졌다. 그 많던 놀이들, 팽이치기, 썰매타기, 자치기, 제기차기, 말타기, 숨바꼭질, 널뛰기, 돌싸움, 다리밟기, 고싸움, 윷놀이….

 

그중 연날리기는 새해의 액막이 놀이였다. 보름날 연에 '송액(送厄)' 또는 '송액영복' 이라는 글자를 써서 연실을 끊어 날려 보냈다. 질병, 사고, 흉작 등의 나쁜 액운은 멀리 사라지라고 하늘에 빌었던 것이다. 지금도 어릴 때 연날리기를 떠올리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 언덕, 그 얼굴, 그 순간들이 떠오른다. 바람의 강도가 실에 그대로 전해져 왔다. 형형색색의 가오리연, 방패연, 하늘로 오르는 연을 따라서 마을도 떠올랐다. 마을의 밥 짓는 연기도, 개 짖는 소리도 함께 올랐다. 하늘에는 꿈들이 두둥실 떠다녔다. 또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연을 날리면 연싸움은 피할 수 없다. 연이 재주를 부리면 연실이 얽히고 설켜 어쩔 수 없이 싸워야 한다. 또 누군가 연싸움을 걸어오면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겁쟁이란 말은 얼마나 듣기 싫었는가, 연싸움의 명수들은 대개 사금파리를 으깨 연실에 발랐다. 연과 연실과 조종 기술, 이 세 가지를 두루 갖춘 싸움꾼들이 겨울 하늘을 지배했다. 그들에게 걸리면 단번에 연실이 끊어졌다. 연실이 끊겨 연이 하늘 저 멀리로 아득히 사라지가면 형용하기 어려운 분함과 설움이 저 깊은 곳에서 북받쳤다. 연이 떠나간 얼레는 얼마나 초라했는지…. 그날 밤에는 꿈에 연이 보였다. 세상 일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사는 게 따지고보면 싸움의 연속 아닌가. 우리가 연을 날렸지만 기실 우리도 바람에 날렸다. 해마다 떡국을 먹으며 누군가로부터 멀어져왔다.

 

고향은 어디쯤이죠, 돌아보면 더 멀리 있네요.

내 이름이 생각 안나요.

돋는 건 소름, 소름뿐이에요.

 

(저 들녘 끝에서 나를 날리는 저 사람은 누굴까)

 

아버지, 시린 세상 끝에 계시다가 세상을 버리신 아버지

그래요 허공살이, 당신 눈물로도 뿌리내릴 수 없지요

가슴을 뚫었어요.

이제 산 두개를 넘어왔어요.

 

졸시 2

 

우리도 결국 허공에 떠있다. 처음엔 꼬리를 나불거리는 가오리연이었다. 하지만 자꾸 꼬리가 잘렸다. 시린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가슴에 구멍을 뚫어야 했다. 그래서 지금은 방패연이 되었다. 유년의 기억이 가물거릴 정도로 우리는 멀리 떠나왔다. 하늘에 떠있으면 땅만을 굽어보게 되는 것일까? 머리 위로 무수히 떠있는 별을 보지 못한다. 너무 멀리 떠나왔다. 설 아침, 언덕에 올라 하늘을 보자. 저 멀리, 이제 보이지는 않지만, 인연을 끊지 못하고, 저 언 땅에서 얼레를 잡고 아직도 나를 날리는 사람은 누굴까?

 

 

< 3 >

 

거대한 술독

 

 

해마다 10월이면 방방곡곡이 축제 마당이요 잔치판이다. 지역축제, 향우회, 야유회, 수학여행, 운동회, 수련회 등 별별 모임이 다 열린다. 그런 모임은 대개 어떤 이야깃거리를 남긴다. 확실히 우리네 잔치는 유별나다. 술은 빠지지 않고 꼭 나온다. 술을 못 마시는 사람이라도 기어이 먹인다. 모두들 눈을 부릅뜨고 감시한다. 술이 거나해지면 약속이라도 한듯 한 곡조씩 뽑는다. 노래 못하는 사람도 기어이 시킨다. '안 나오면 쳐들어 간다' 고 윽박질러 불쌍하고 처량한 노랫가락을 듣고야 만다. 그러는 중에 몇 명이 고꾸라진다. 그리고 싸움판이 벌어진다. 누구도 말릴 수 없다. 이쯤 돼야 하나 둘 잔치판을 떠난다. 다음 날 어제 일들을 조각조각 맞춰 본다. 그리고 혼자서 빙그레 웃는다. 죽었다 살아났음이 실로 장하다. 문득 서로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별일 없었지? 잘 들어갔고… 아무튼 잘 놀았다… 그런데 나 실수 안했냐?"

 

이렇듯 토하고 싸움질하고 망가져야 ‘잘 놀았다' 고 한다. 이러한 행태를 혹자는 ’개인보다 집단을 중시하며, 대륙을 질주하던 유목민 특유의 야성(性)의 잔재‘로 본다. 그래서인지 취중 무례는 대부분 용서한다. 미국이나 프랑스,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같은 나라에서도 알코올중독자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다. 이들의 관리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오른지 오래 됐다. 하지만 그들보다 훨씬 술을 많이 마시는 (우리의 음주량은 슬로베니아 다음으로 세계 2위) 우리나라에는 왜 알코올중독자가 없는가? 실은 우리 사회에도 알코올중독자는 많다. 매일 밤 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취객들이 경찰서마다 넘쳐나고 보호실에서는 술 냄새가 진동한다. 경관이 취객에게 매를 맞는 나라는 대한민국뿐일 것이다.

 

이렇듯 술 권하는 사회' 에 살고 있지만 우리는 술 취한 사람을 따뜻하게 품어준다. 그래서 가히 술꾼들의 천국이다. 술에 취해서는 가장 요긴한 변명이며 핑계이다. 알코올중독자에 대한 통계조차 내지 않는다.

 

“술은 말하자면 우정에 대한 일종의 시멘트 공사요, 제방 공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술로써 우리네 상호의 육체를 마취시키고 모살(殺)함으로 인해서 우리의 정신에 아름다운 정의의 꽃을 피우려는 것이다.”

 

작고 수필가 김진섭의 술에 대한 예찬이 이 정도이니 우리 정서 속에 스며있는 술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각별한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술로 서로를 섞고, 술을 마셔 우정이 콘크리트처럼 단단해지게 하고, 마침내 육체를 망가뜨려 정신에 정의의 피가 흐르게 한다니 이 얼마나 비장한가.

 

여기서 우리 민족의 음주습관이 혼자 마시는 독작(獨酌)이 아니라 대작(對酌)임을 알 수 있다. 주고받아야 멋과 맛이 우러났다. 상대가 없으면 한 송이 꽃을 앞에 두고 달을 벗 삼아 술잔을 기울였다. 술잔을 돌리며 함께 취하는 민족은 세계에서 찾기 힘들다. 너와 내가 없고 우리만이 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혼자 마시는 사람이 훨씬 많다. 그러나 우리는 혼자 마시지 않는다. 누군가 홀로 술집에 앉아 있다면 아마도 어떤 사연을 술에 타서 들이켜는 것이리라.

 

잔치가 벌어지면 한국인들은 먹고 마시고 때리고 부른다. 그리고 술에 취해 헤어진다. 바람결이 가장 좋은 가을을 팽개치고, 술이 시키는 대로 휘청휘청 걸어가는 뒷모습이 참으로 허허롭다.

 

김택근 / ‘뿔난 그리움(2003년)’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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