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詩, 글

고아

송담(松潭) 2022. 12. 4. 07:59

고아

 

1918년

 

소녀들이 도시에 도착한 그날 조금 더 이른 시각에, 한 소년이 남대문을 통과했다. 전날 밤 그 아이는 궤짝 운반을 거들거나 소소한 심부름을 하는 대가로 몇 주간 그를 거둬주었던 보부상 한 무리와 작별했다. 그들은 아이에게 20전짜리 은화 두 닢을 주었는데, 그 정도면 공동 여관방에 묵으며 국밥 한 그릇을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금액이었다. 하지만 소년은 공복을 견딜 만한 힘이 남지 않을 때까지 끼니를 거르며 돈을 아끼기로 하고, 남대문 바깥 도로변의 도랑으로 향했다. 흙바닥 어느 귀퉁이에 둥그렇게 팬 곳을 발견하자 그는 옆으로 몸을 웅크려 그곳에 누운 뒤 무릎을 가슴까지 올려 바짝 끌어안았다. 마치 소년이 그 자리에 눕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연한 강아지풀 다발이 부드러운 이불처럼 그의 몸을 덮어주었다. 소년

은 별이 무수히 반짝이는 새카만 하늘을 곁눈질로 올려다보았다.

 

소년의 아버지는 과묵한 사람이었으나, 죽기 전에 그는 아들에게 한 말을 남겼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세상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을거라고. 그는 한때 명사수 사냥꾼으로 이름을 날렸으나, 삶이 끝날 무렵에 이르러서는 방 밖으로 걸어 나오지도 못하는 처지였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네 누나와 여동생을 잘 돌봐라. 이부자리에 힘없이 누운 채로 아버지는 말했다. 엷은 그림자처럼 마르고 여윈 그의 몸에서 눈에 띄는 거라곤 마치 새싹처럼 돋아난 회색빛 머리칼뿐이었다. 네가 이제 이 집안의 가장이다. 용기가 필요할 때마다 하늘을 올려다보거라.

 

별들이 잠자리에 들 무렵, 소년은 서서히 땅을 덥히는 태양의 냄새를 맡으며 잠에서 깼다. 그는 눈을 비비고 도랑에서 기어 나와 흐르는 듯한 감귤 빛깔에 흠뻑 물든 도시의 모습을 처음으로 상세히 둘러보았다. 경성의 여름 새벽은 짜릿함을 안겨주었지만 거의 감지하지 못할 만큼 찰나에 지나갔다. 타오르는 태양이 지평선 위로 냅다 뛰어오르자 축축하던 밤이슬은 몇 초 만에 말라버리고, 도시는 태양의 명령에 복종하듯이 잠에서 깨어났다. 이미 수많은 수레며 여행자들과 노동자들이 길게 줄을 지어 남대문을 드나들고 있었다. 소년은 조심스레 군중 속에 섞여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누구도 소년의 존재에 대해 질문을 던지지 않았으며,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는 거대한 지붕의 시원한 차양 아래쪽에 안전히 숨었다가 다른 쪽으로 빠져나왔다. 노면전차가 분주히 오가고, 서양식으로 높고 위풍당당하게 지어진 건물들이 늘어선 거대한 도로가 펼쳐져 있었다. 배를 곯아 기운이 빠진 상태였음에도 소년은 미소를 짓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가슴 속에 품은 자그마한 주머니로 손을 뻗어 익숙한 동작으로 그것을 꽉 쥐어보았다. 주머니 안에는 꽁꽁 간직한 은화 두 닢, 은가락지 하나, 그리고 은제 담뱃갑 하나가 들어 있었다.

 

거리 양쪽에는 연립한 저택들이 가득히 서 있었다. 소년은 그것들이 모두 기독교인들의 예배당이라 생각했지만, 사실 그중 다수는 정부 기관이나 영사관, 무역 회사의 사무실들이었다. 거리를 오가는 인파에는 하얀 옷을 입은 한국인들과 검은 옷을 입은 일본인들이 뒤섞여 있었다. 말을 탄 순사들도 보였는데, 그들 주변을 지나는 이들은 바닷속을 순찰하는 상어 주변의 물고기 떼처럼 조심스럽고 다소곳한 태도로 스쳐 갔다. 두 백인 남자도 소년의 눈에 들어왔다. 깡마르고 나이 든 남자가 이끄는 인력거 밖으로 그들의 길고 당당한 다리가 비죽 나와 있었다. 흙을 뒤집어쓴 인력거꾼의 이마에는 머리띠가 질끈 매여 있었다. 머리띠 밑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누런 먼지가 자욱한 길과 노인 자신의 발등으로 뚝뚝 떨어졌다. 인력거가 점차 속도를 내며 소년에게서 멀어져 군중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는 내내 자기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해는 벌써 중천에 있었고 소년의 목구멍은 마르다 못해 아예 달라붙어 버릴 지경이었다. 몇 차례 침이라도 머금었다 삼켜보려 했지만, 정작 목구멍으로 내려가는 침은 한 방울도 없다시피 했다. 무엇이든 해보기 전에 마실 물부터 찾아야 했다. 시골에는 마을마다 그 동네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 근처에 우물을 파놓아, 주변을 둘러보고 제일 높이 솟은 나무를 찾거나 커다란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물을 길러 걸어가는 어린 여자들을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다. 여기서는 그 어느 곳에서도 나무 한 그루 찾을 수 없었고, 보이는 거라곤 끝없이 펼쳐진 거리뿐이었다. 그 거리를 메운 각양각색의 사람 중 물을 길러 가는 여자는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소년은 근처에서 바구니를 짊어지고 지나가는 어느 중년 여자를 보고 걸음을 놀려 그를 따라갔다.

 

"실례합니다, 아주머니. 마실 물 얻으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녹슨 못처럼 쉬고 건조한 그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여자는 속도도 늦추지 않고 바삐 제 갈 길만 서둘렀다. 이어 다른 두 사람에게도 접근해 보았지만, 그들 역시 소년의 말을 전혀 못 들은 것처럼 앞으로 걸어가기만 했다. 둘 중 대학생 같아 보이던 사람은 최소한 멈춰서 뭐라도 이야기해 주지 않을까 생각했건만 그마저 매정하게 자신을 지나쳐 가자, 소년은 몸속의 피가 머리에서부터 아래로 쭉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이제 두 발로 버티고 서 있는 것조차 버거워져, 그는 어느 건물 처마 아래 그늘을 찾아 그곳에 엉덩방아를 찧듯 아무렇게나 풀썩 주저앉았다. 더는 어떤 기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손꿈치로 자신의 두 눈을 꾹 찍어 눌렀다. 보부상 중 한 사람이 특별히 피곤할 때면 이런 동작을 하곤 했는데, 소년에게 이는 부끄럽거나 어린아이 같은 행동이 아니라 남자답게 피로를 진정해 주는 동작으로 인상에 남아 있었다.

 

"너 시골서 왔니?"

 

소년은 두 손을 내리고 제 또래로 보이는 다른 소년을 올려다보았다.

"아니." 소년은 본능적으로 거짓말을 했다."이름이 뭐야?""남정호."

 

"하. 이거 시골 촌놈 맞는구먼. 누가 낯선 사람한테 그렇게 제 이름을 홀랑 대준대, 그날 막 도성 대문을 통과한 촌뜨기가 아니고선?"

 

"넌 몇 살이나 먹었냐, 이 버릇없는 새끼야?" 정호가 말했다. "맞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하지?" 정호는 아직 열두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고향 마을의 거친 아이들 사이에서는 가장 싸움을 잘하는 걸로 정평이 나 있었다. 골격은 작지만 강단 있고 몸놀림이 잽싼 데다, 맞을 때의 고통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상대를 얼마나 많이 때릴 수 있는지에만 모든 신경을 집중했기에, 그는 저보다 훨씬 더 몸집이크고 나이가 많은 소년들도 이길 수 있었다.

 

“너 진짜 웃긴다. 며칠간 주워 먹지도 못한 꼴을 한 주제에. 두 발로 일어날 힘이나 있겠니?" 도시 소년이 비웃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정호는 단단히 쥔 주먹을 자신의 턱 아래 갖다 대고는 언제든 날릴 태세를 갖추었다. 도시 소년이 정호보다 키가 크긴 해도, 고작 손가락 두 마디 정도 차이였다.

 

“장난 좀 친 거야." 도시 소년이 황급히 어조를 바꾸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독하게 성질낼 거 없잖아."

 

“그냥 좀 내버려 둬라, 이 새끼야." 여전히 주먹을 치켜든 채 정호가 낮게 말했다. “나 내버려 두고 꺼지라고!"

 

“알았어, 얘. 그렇지만 너 물이나 음식이 필요해 보이는데." 도시소년이 말했다. "따라오면 어디서 물 마실 수 있는지 알려줄게."

 

"거짓말하지 마.”

 

“일단 가서 보고 내 말이 거짓이면 그때 날 두들겨 패도 되잖아. 안 그래?" 도시 소년이 웃음을 지어 보였다.

 

“네 이름은 뭔데?"

 

"다들 '미꾸라지'라고 불러."

 

“이름 한번 등신 같다." 정호가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하지만 결국 두 소년은 같이 걷기 시작했다. 미꾸라지라는 자신의 별명에 걸맞게, 도시 소년은 사방팔방으로 향하는 군중을 요리조리 피하며 한순간도 멈칫하거나 발을 잘못 디디는 일 없이 걸어나갔다.

 

"얼마나 더 가야 되냐?" 정호는 계속 같은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만 더가면 돼." 미꾸라지의 답도 그게 다였다. 처음에 정호는 남대문으로 되돌아올 수 있도록 그들이 걸어가는 길을 기억하려 애썼다. 하지만 결국엔 그 한 장소만을 기준으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은 의미가 없음을 깨닫고 포기했다. 가는 방향을 기억하든 말든, 뭐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그는 근본적으로 길을 잃은 상태였다. 복잡한 한자 간판을 내건 가게들이며 바쁜 인력거들이 공기를 가르며 내는 쉭쉭 소리, 행상들의 호객 소리, 거리에서 공연하는 광대들, 그리고 꼭대기에 전선을 매단 채 사람들을 가득 태우고 다니는 전차들까지, 모든 것들이 정호의 사방을 메우며 그의 온 감각을 지치게 했다. 몸을 가누기 위해 정호는 미꾸라지의 마른 등과, 그 중간에서부터 천천히 아래로 번지며 화살촉 모양을 만들어가는 땀자국에 시선을 집중했다.

 

"이제 다 왔어." 미꾸라지가 몸을 돌리고는 앞쪽을 가리키며 씩 웃었다.

 

“그래?”

 

그들이 도착한 곳은 운하 가장자리였다. 그러나 운하를 흐르는 물은 정호의 산기슭 고향 마을을 끼고 돌던 힘차고 신선한 시내와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었다. 지면보다 열다섯 자 정도 아래 질퍽질퍽하고 얕은 물이 흐르고, 그 양쪽으로 자갈이 깔린 둑에는 바위와 시멘트 제방이 이어져 있었다. 미꾸라지가 가리키는 것은 바로 앞에 있는 돌다리였다. 짐수레와 보행자들의 무게에 다리는 끙끙 신음하고 있는 듯했다.

 

"이게 뭔데, 멍청아?" 정호가 실망을 숨기지 않은 채 물었다. "물이 있을 거라며."

 

“물은 다리 아래 있지." 미꾸라지가 곧바로 받아쳤다.

 

“저 진흙탕이 물이라고? 내가 개인 줄 알아?"

 

“매번 열내지 말어. 안 그래도 뒈지게 더운데. 내가 다리 밑에 살아." 미꾸라지가 대꾸하고는 더 반박이 나오기 전에 말을 이어갔다. "날 따라오든가, 아니면 네가 왔던 데로 돌아가든가, 이 촌놈아." 그는 몸을 웅크리고 제방의 가장자리 쪽에 손바닥을 짚더니, 튀어나온 바위 위로 가볍게 다리를 휙 넘겨 저 아래쪽으로 몸을 떨어뜨렸다. 당황한 정호가 서둘러 몸을 내밀어 살펴보니 냇가로 내려간 미꾸라지는 이미 여유 있게 몸을 풀면서 손의 먼지를 털고 있었다.

 

“개새끼." 정호가 입속으로 중얼거리곤 이내 둑 아래로 떨어졌다. “뭐 이렇게 오래 걸렸니? 아까 전의 용기는 다 어디로 가셨나?"

 

미꾸라지가 놀리듯 말했다. “이제 다 왔어."

 

정호의 바람과 달리, 그들이 다리로 향하는 동안 흐르는 물은 후덥지근한 공기를 조금도 식혀주지 않았다. 다리 밑에는 쓰레기 무더기 같은 것이 있었는데, 점점 가까워지며 정호는 이것들이 임시변통의 움막임을 알아챘다. 그들 또래의 남자아이들 몇몇이 그 옆의 커다란 바위에 앉아서 서로 얘기를 나누다가 미꾸라지를 맞이하느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보기만 해도 피부가 근질근질해져 머릿속까지 벅벅 긁고 싶어지게 만드는 매우 더럽고 꾀죄죄한 모습이었다.

 

남자아이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며 정호는 불안을 감추려고 노력했다. 이 시점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최악의 행동은 그곳에서 달아나는 것이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단숨에 제방 위까지 올라갈 수 없을테고, 다른 소년들이 한순간에 그를 덮쳐버리리라. 하지만 정호가 겁먹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모른다면, 무사히 넘길 수 있을지도 몰랐다.

 

"미꾸라지, 얜 누구냐?" 남자아이 중 하나가 물었다. 무리 중 가장 키가 크고, 유일하게 입술 위쪽에 희미하게나마 잿빛 솜털이 난 아이였다.

 

“새로 온 애. 깡촌에서 이제 막 상경했대." 미꾸라지가 말했다."야. 얘 목이 말라 죽는단다. 물 좀 떠줘." 누가 다녀와야 하는지를 두고 작은 소란이 벌어졌지만, 결국 그들 중 한 아이가 움막 안에서 물한 바가지를 가져와 정호에게 건넸다.

 

"마셔, 촌놈아." 미꾸라지가 말했다. “우물에서 뜬 물이야."

 

일단 의심이 걷히자, 정호는 잽싸게 바가지를 입술에 대고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는 동안에도 소년들이 줄곧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이제 좀 낫니?" 빈 바가지를 내리자 미꾸라지가 히죽거리며 물었다. 정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넌 이름이 뭐야?" 콧수염 흔적이 있는 키 큰 소년이 물었다.

 

"남정호, 그러는 네 이름은 뭔데?" 정호는 훨씬 덩치가 크고 나이도 많아 보이는 상대를 마치 동갑내기라도 되는 양 아무렇지 않게 '너'라고 칭하며 되물었다.

 

“예의 좀 차리지. 방금 우리 물 처마셔놓고………. 내 이름은 영구야. 하지만 너한테는 형님이지."

 

정호가 대꾸를 않자 영구는 계속 말을 이었다.

 

"넌 어느 지방에서 왔냐? 경성엔 왜 왔어?"

 

"평안도에서 왔다. 그리고 내가 경성에 온 이유는, 다른 사람들이 여기 오는 이유랑 똑같지." 정호가 대답했다. "시골에는 더 이상 입에 풀칠할 게 없거든."

 

"가족은 어쩌고?”

 

정호는 잠시 생각했다. 아버지가 죽은 뒤, 마을 홀아비 하나가 정호의 예쁜 누나에게 새장가를 들고 싶다고 나섰다. 남자는 정호의 여동생도 데려가 주기로 했지만, 정호까지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다섯 살짜리 처제를 먹이고 돌볼 수는 있어도, 거의 다 자란 남자아이라면 얘기가 다르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누나가 남자의 제안을 거절하며 남동생만 내버리고 홀아비에게 시집가느니 차라리 다 같이 굶어 죽겠다고 버텼기 때문에, 정호는 한밤중에 몰래 고향을 떠나올 수밖에 없었다.

정호가 입을 열었다. "다 죽었어.”

 

“그렇담 너 오늘 운수 한번 좋다." 영구가 말했다. “우리 무리에 들어오면 굶어 죽을 걱정은 안 해도 될 거야. 양은 적어도 우린 들어온 음식을 다 함께 나누거든."

 

“우리 다 너 같은 고아들이야." 미꾸라지도 끼어들어 말을 얹었다.“먹을 건 어떻게 구하는데?" 정호가 물었다.

 

“구걸도 하고, 훔치기도 하고……. 걱정하지 말어 우린 나쁜 놈들한테서만 훔치니까 금방 익숙해질 거야. 하지만 중요한 일부터 먼저 해야지." 영구가 말했다. "우리 조직에 충성을 맹세하고, 가진 돈이 있으면 다 내놔야 해."

 

“돈이 하나도 없는데……….” 정호가 항변하기 시작하며, 본능적으로 품속에 있는 주머니를 향해 손을 뻗었다가 그게 사라졌다는 걸 깨닫고 서늘한 당혹감에 휩싸였다.

 

“내가 갖고 있단다, 이 촌놈아." 미꾸라지가 주머니를 들어 보였다. "있지. 난 이것만 따고 너는 그냥 사람들 속에 버려둘 수도 있었어. 하지만 그러는 대신 우리가 사는 이곳까지 데려와 줬잖아. 그러니 너무 지랄같이 상처받은 면상 짓지 마라, 등신아."

 

미꾸라지가 영구에게 주머니를 던져 보내자 영구는 한 손으로 그걸 받았다. 정호가 분노로 몸을 떠는 동안 나이 든 소년은 주머니를 열고 내용물을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영구는 은화 두 닢을 발견하고는 즉시 제 주머니에 넣었지만, 은가락지와 담뱃갑은 양손에 하나씩 들어 보였다.

 

“돈은 마음대로 가져. 하지만 그 물건 두 개는 안 돼." 정호가 말했다. 그의 심장이 쿵쿵 뛰고 있었다. "그건 돌려줘."

 

"내가 미쳤냐? 이걸 돌려주게?" 영구가 코웃음을 쳤다. "부자들이나 갖는 물건이잖아. 너 이거 훔쳤냐? 훔쳤지?"

 

“아버지가 죽기 전에 남겨주신 물건이야." 정확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베개 아래서 찾아낸 것들이지만, 정호는 결국 그게 그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아버지의 유일한 아들이자 후계자이니까. 값어치가 나가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유품이기 때문에 그 물건들은 정호의 것이었다.

 

“너 아직도 이해를 못 하는구나." 영구가 피식 웃었다. “네가 진짜로 배를 곯아보지 못해서인지, 아니면 그냥 그 정도로 바보 멍청이라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어느 도랑에 누워 굶어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 이런 것들이 네 명줄을 늘려줄 수 있는 줄 알아? 하지만 내가 이것들을 팔아오면 우리 모두 배가 터지도록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거다." 대장답게 으쓱한 말투였으나, 마지막 말에는 진심 어린 갈망이 섞인 듯 영구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너희 모두 굶어 죽더라도 나하곤 상관없어. 난 네 무리에 끼지 않을 거야.” 정호가 말했다. "그러니까 내 물건 돌려줘!"

 

영구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고 다른 아이들도 그를 따라 웃었다.

 

“맘에 안 들면 여기서 꺼지든가 아무도 잡는 사람 없다. 하지만 이것들을 돌려받진 못할 거야. 넌 진짜 말도 못 할 정도로 꼴통이구나. 이게 경성에서의 첫 가르침이라고 생각해라."

 

영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호는 양 주먹을 턱 아래로 바짝 붙여 싸울 자세를 취했다. 그 모습에 다른 아이들은 웃음을 멈추었고, 영구조차 얼굴에서 미소를 거두었다. 그는 두 물건을 다시 주머니에 넣어 잠시 맡아놓으라는 뜻으로 미꾸라지에게 던졌다.

 

영구와 정호가 서로에게 바짝 다가시자 다른 소년들은 마치 미리 지시라도 받은 양 한두 발짝씩 물러서며 두 사람을 둘러싼 원을 넓혔다. 주변의 공기는 잔뜩 굶주린 사춘기 소년들이 내뿜는 거칠고 예민한 긴장감으로 끓어올랐다. 그 긴장 속에서 두 소년 모두 자신을 둘러싼 현실 세계를 쓰레기가 흩뿌려진 이 진흙투성이 운하와 거대한 다리 아래 칙칙하게 늘어진 그림자, 그리고 그들 위로 펼쳐져 있는 이 무정한 도시를 잠시 떠난 순간이 있었다. 영구는 지금 그들이 서 있는 그곳에서 4리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 그가 태어나고 자랐던 흙집 움막을 떠올렸다. 어머니의 손길에 대한 기억과 집에서 키우던 개의 부드러운 털을 쓸던 느낌이 아무렇게나 섞인 채로 설명할 수 없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고, 그는 마음속에 차오르는 안정감을 느꼈다. 한편 정호는 제 주위의 모든 것들에 대한 감각을 잠시 차단했다. 심지어 눈앞에 서 있는 영구의 존재도, 이미 극도의 피로감으로 한계에 도달한 그 자신의 육체까지도 말이다. 첫 주먹이 날아가기 직전의 그 순간에, 그는 그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늦은 오후의 햇빛이 퍼져나간 하늘 전체는 눈을 찌르는 것 같은 강렬한 노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하늘의 모습은 그에게 아무런 위안도 주지 못했고, 아버지가 약속했던 것처럼 별다른 용기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저 하늘 어딘가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음을 자신이 이 세계에 홀로 떨어져 나온 것이 아님을 상기했다. 그러니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이 번쩍 들자마자, 그는 영구의 머리를 향해 힘차게 주먹을 날렸다.

 

영구는 정호의 주먹을 쉽게 피하고 곧장 반격에 나섰지만, 이 작은 소년 또한 날렵하게 몸을 피했다. 이후 몇 분간 그들은 서로를 가볍게 후려치고 막아내며 탐색전에 나섰다. 그러다 정호가 주먹으로 영구의 배를 겨냥한 채 몸을 날렸다. 그러느라 살짝 허리를 굽혔기에, 정호의 머리는 영구의 주먹이 정확히 꽂힐 만한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나이 든 소년이 자신 있게 주먹을 날리는 순간, 정호는 갑자기 몸을 더욱 웅크려 영구의 몸 중앙으로 머리를 겨눈 채 있는 힘껏 돌진하여 큰 나무를 베어 넘어뜨리듯 그를 땅에 쓰러뜨렸다. 양쪽 다 바닥에 쓰러진 상태에서는 키가 큰 쪽의 신체적 강점이 모두 사라지고, 몸집 차이가 어떻든 상대 위에 올라타 꼼짝달싹 못 하게 누르는 쪽이 무조건 이긴다는 것을 정호는 잘 알고 있었다. 예상치 못했던 기습으로 영구가 놀라 쓰러지자, 정호는 순식간에 그의 가슴위에 걸터앉아 두 주먹으로 영구의 머리를 무자비하게 때리기 시작했다. 영구가 재빨리 정호의 깡마른 손목을 쥐곤, 이번엔 진실한 분노가 담긴 목소리로 절규했다. “너 이 새끼! 이 개새끼야!" 바로 그 순간, 정호가 고개를 뒤로 젖히더니 온 힘을 다해 영구의 이마를 박았다. 영구가 고통의 비명을 내질렀지만, 정호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다시 한번, 아까보다 더 세게 박치기를 했다. 나이 든 소년이 정호의 손목을 놓고 힘없이 양팔을 늘어뜨렸다. 깨진 이마에서 조용히 피가 흘러 나왔다. 그제야 정호는, 제 이마에 묻은 핏자국을 손등으로 쓱 닦아내며 일어났다.

 

“내 물건들 돌려줘." 정호가 미꾸라지에게 말했다. 주머니는 즉시 정호를 향해 날아갔다.

 

다른 아이들이 침묵을 지키며 지켜보는 동안, 정호는 영구의 호주머니를 뒤져 은화 두 닢을 찾아내 주머니에 넣고서 끈을 조였다. 그는 다리 아래에서 걸어 나가 쉽게 제방을 오를 수 있을 만한 곳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1분도 지나지 않아 그를 쫓는 발소리와 고함이 들렸다.

 

"야! 거기 서봐!" 미꾸라지의 목소리였다.

 

“뭐야?” 정호가 으르렁거리듯 대꾸했다. “너도 흠씬 두들겨 맞고 싶어?"

 

"가지 마." 미꾸라지가 말했다. “네가 무슨 일을 한 건지 모르겠어?" 미꾸라지는 잠시 가쁜 숨을 고르다가 불쑥 말했다. "방금 우리 왕초를 이겼잖아. 그건 이제 네가 우리 왕초란 소리야."

 

정호가 코웃음을 쳤다. “너희 왕초 같은 거, 되고 싶지 않아. 영구나 실컷 너희들 데리고 대장 놀음 하라고 해. 나는 그딴 거 안 해."

 

"세상일이 그런 식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고!" 미꾸라지는 고집스레 말을 이었다. “우리랑 무리 짓기 싫다고? 그러면 너 혼자서 어떻게 살아남을래? 경성 바닥에 거지새끼가 우리뿐인 줄 알아? 이 구역에만 해도 몇 무리가 있고, 다 큰 어른 흉악범들끼리 모인 진짜 깡패들도 있다고. 그런 인간들이 널 가만 놔둘 것 같아?"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정호가 소리쳤다. "내가 죽으면 뭐 죽는 거지. 네가 무슨 참견이야?"

 

"성질머리도 참 급하시네. 난 널 도와주려는 것뿐이야." 미꾸라지가 말했다. “살고 싶으면 다른 놈들과 무리를 지어야 해. 게다가, 일단 왕초 자리에 오르면 뭐든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다른 놈들이 가져온 걸 받아먹으면서 네가 직접 거리에 나가 구걸할 필요도 없단 말이야."

 

“몇 분 전만 해도 영구의 오른팔이었으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 정호가 경멸 섞인 어조로 말했다.

 

"나는 누구의 오른팔도 아니걸랑." 미꾸라지가 킥 웃었다. "난 그냥 살아남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거야. 너도 이렇게 황소고집 멍청이가 아니라면 나랑 똑같이 할걸."

 

두 소년의 눈이 잠시 마주쳤다. 미꾸라지는 미소를 지었다. 정호를 자기 소굴로 이끌면서, 또 정호의 돈을 훔치면서도 보여주었던 그 미소였다. 그는 작고 가느다란 올챙이 모양의 눈을 하고 누구에게나 쉽게 값싼 눈웃음을 지어 보이며 모두에게 의뭉스럽고 불쾌한 인상을 남기는 그런 아이였다. 정호는 미꾸라지의 실실대는 그 눈에다 호된 멍 자국을 남기고 싶은 욕구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걸 애써 억눌렀다. 하지만 그 닳아빠진 도시 소년이 자신에게 대놓고 거짓말을 하거나 일부러 자신을 해하려던 게 아니었음은 부인할 수 없었고, 지금도 도시에서 살아가기 위해 함께 뭉쳐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다음 순간, 미꾸라지가 손을 뻗었다. 정호는 이유도 모르는 채 그 손을 잡아 한 두어 번 위아래로 흔들어 그와 악수를 나누는 스스로에게 놀랐다. 이내 부끄러움이 밀려와 두 소년은 서로 맞잡은 손을 떨쳐냈다.

 

"자, 가자." 미꾸라지가 말했다. "이제 곧 길거리에 나갔던 애들이 돌아올 거야. 곡예로 사람들을 모으는 애들, 그렇게 몰린 구경꾼 주머니를 따는 소매치기 애들, 그리고 그냥 평범하게 동냥하며 다니는 애들이 있어. 오늘은 다들 저녁거리가 될 만큼은 벌어 왔으면 좋겠다.”

 

“보통 뭘 먹는데?" 정호는 호기심과 희망에 차서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냥 아무거나 물 넣고 끓인 국이지. 운이 좋으면 감자도 좀 먹고, 아니면 오래된 생선 같은 거.”

 

“국 한 그릇 진짜 먹고 싶다. 하루가 넘도록 아무것도 먹은 게 없어.” 말을 뱉으면서도 정호는 속마음을 드러내는 것에 수치스러움을 느꼈다.

 

“나도야. 그렇지만 사람은 이틀에 한 번만 먹어도 살 수 있대. 예전에 우리 어머니가 한 말이야." 미꾸라지가 또 실실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이번에는 정호의 눈에도 그리 경멸스럽게 보이지 않는 미소였다.

 

김주혜(박소현 옮김) /‘작은 땅의 야수들’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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