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 소설

조정래 / ‘한강6’중에서

송담(松潭) 2021. 8. 10. 10:39

조정래 / ‘한강6’중에서

 

< 1 >

 

독일 의사들은 집으로 초대받는 것을 마치 무슨 상이라도 받는 것처럼 기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서양에서는 사람을 집으로 초대하는 것이 상대방에 대한 최고의 호의의 표시이니까 초대받은 의사로서는 자기의 의술이 인정받는 보람스러운 자리가 아닐 수 없었다. 김광자는 의사의 보조자로서 서너 번 그 기쁨을 함께 나눈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 자리에서는 꼭 기분 언짢은 일이 생겼다. 한국에도 텔레비전이 있느냐, 냉장고를 쓰느냐. 한국에도 한국의 고유 문자가 있다는 것이냐? 아니, 시인과 소설가가 있다고? 그들의 호의적 관심이 어느새 자존심을 긁는 모독감을 느끼게 하고는 했다.

 

그러나 해가 바뀔수록 한국 간호원과 광부들에 대한 호감과 신뢰는 독일 사회에 넓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건 한국 간호원들을 겪어본 환자들이나, 광부들을 부려본 탄광회사들에 의해서만이 아니었다. 신문들이 기사로 다루면서 그런 인식은 빠르게 확산되고 있었다. 신문들은 한국의 간호원과 광부들을 취업시킨 것은 아주 성공적이라고 평가하고, 그들은 성실하고 부지런하며 기술 습득이 빠르고, 책임감이 강하다고 쓰고 있었다. 특히 간호원들이 노인 환자들을 상냥하고 극진하게 간호하는 것은 어른에 대한 공경심이 높은 한국적 전통이 발휘된 아름다운 인간애라고 강조하고 있었다.

 

(P.10~11)

 

< 2 >

 

 

전태일은 며칠째 불기 없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방바닥에 『근로기준법』 책을 놓고 두 손을 모았다. 손때가 까맣게 전 그 두꺼운 책은 해질 대로 해져 있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을 찾아 펼치고 펼치고 또 펼치기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이 했던 책. 그러나 그건 거짓 치장이었고 가짜 눈속임이었다. 그것을 불태워 없애야 할 날이 하루하루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전태일은 두 손에 이마를 대고 차가운 방바닥에 엎드렸다.

“주여, 약한 저에게 용기와 확신을 주소서. 제가 저의 죽음을 넘어설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저의 죽음이 절대 헛되지 않을 것이란 확신을 주소서.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돈 많고 권력 가진 자들이 서로 작당해서 속이고 속이고 또 속이고, 거기에 정부까지 한 통속이 되어 있습니다. 그 벽은 높고 높으며, 두껍고 두껍습니다. 그 벽을 어찌해야 깰 수 있겠나이까. 그 벽을 깨고 모든 사람끼리 빈부도, 강약도, 귀천도 없는 세상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이 한 몸을 육탄으로 날리는 길뿐이라고 여겨지옵니다. 이 미천한 몸 하나 육탄으로 날아가 산산이 부서져서 천대받고 억눌려 사는 모든 노동자들이 눈 똑바로 뜨고 자기자신들을 보게 하고자 하옵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다함께 뭉쳐 일어나 그 벽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인간다운 세상을 이룩해 내는 데 한 톨 불씨이고자 하나이다. 이 결심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번뇌하였으나 이 길이 가장 옳은 길이라 여겨지옵니다. 주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심은 2천 년 동안 끝없이 부활하시기 위함이었나이다. 이 나약한 자 감히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한 줌 거름이 되고자 하오니 주여, 부축하여 주소서......”

 

국민은행 앞에서는 500여 명의 남녀 노동자들이 경찰과 경비원들의 거친 몽둥이질 앞에서 어찌할 줄을 모르고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고 있었다. 전태일은 10분쯤 지나 회원들 옆에 나타났다. 그는 가장 친한 친구 김개남을 끌어당겨 급히 옆골목으로 갔다.

"너 성냥 있지? 불 좀 켜봐."

전태일의 말에 김개남은 무심코 성냥을 켰다. 다음 순간 전태일이 다가서는가 싶더니 옷에 불이 확 붙었다.

"아니, 태일아!" 김개남은 눈이 뒤집혀 소리쳤다.

순식간에 온몸이 불길에 휩싸인 전태일은 길로 뛰쳐나가고 있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불길 속에서 전태일이 외쳐댔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노동자들을 향해 뛰는 불길이 외쳤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아!"

더 거세게 휘돌고 너울거리는 불길 속에서 울부짖는 목소리가 갈라지고 있었다. 전태일은 불길과 싸우며 무슨 구호를 또 외쳤다. 그러나 입에서는 말 대신 허연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또 외쳤다. 역시 허연 연기만 한 줄기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그는 불길과 함께 쓰러졌다.

 

(P.49,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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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근로기준법처럼 달라졌냐?" 나복남이 여동생을 쳐다보았다.

"아니,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어. 아니, 있긴 있네. 사장들이 운영하는 시장조합 쪽에서 경비를 전보다 훨씬 심하게 돌고, 형사들도 자주 나타나고, 공장장들도 더 심하게 감시하고 그래.”

"그럼 그 사람 죽음은 헛되이 되고 말았잖아.”

"그건 그렇지 않아. 1만 명이 넘는 평화시장 공원들이 전과 다르게 자기들이 얼마나 사람대접을 못 받고 기계처럼 일하고 있는지 알게 됐고, 근로기준법이라는 게 있다는 것도 알게 됐어. 그리고 거의가 다 나처럼 죄진 마음을 가지고 있어. 그 사람은 죽었지만 죽은 게 아니야. 우리 마음속에 살아 있으니까."

"그래 그 사람 참 장하고 장하다. 몇 살이나 먹었냐?""

“스물 둘.”

“뭐? 스물둘? 서른둘이 아니고?""

"아니야. 틀림없이 스물둘이야."

"하! 스물두 살짜리가……”

 

(P.72)

 

 

< 3 >

 

 

월출산을 보고 나자 버스 안은 더욱 소란해지기 시작했다. 영암에 다 왔고, 월출산을 감돌아가면 이내 강진이었다. 김명숙은 마음이 바빠 사람들을 따라 짐을 챙기고 싶기도 했지만 촌스럽게 굴지 않으려고 꾹 참았다. 미리 챙겨야 할 만큼 짐이 많지도 않았다.

 

어머니와 동생들을 10년 만에 만날 생각으로 김명숙은 가슴이 울렁거리면서도 한편으로는 겁이 나고 있었다. 함께 돌아와야 하는데 나복녀의 식구들을 어찌 대하나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복녀와 함께 집을 떠날 때 품었던 꿈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꿈을 줄이고 바꾸기도 했지만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가발공장 여공 신세로 나이만 열 살이나 불어나 있었다. 그러나 타관생활 10년을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워메 이년아, 니가 누구여!" 부엌에서 나오던 월하댁은 이렇게 울부짖으며 둘째딸을 왈칵 보듬었다. 김명숙은 짐을 마당에 내던진 채 제 몸집보다 작은 어머니의 품으로 한사코 파고들며 느껴울고 있었다.

 

“시상에나 만상에나 요새넌 꿈자리서도 잘 안 뵈동마 니가 워쩐일이다냐 이년아. 이 독하고 무정한 아, 그간에 죽지는 않고 있다고 간간이 소식이나 전했어야제 10년 세월 다 흘러가도 핀지 한 장 안 보냄서 이 에미 애간장얼 그리도 태우다니, 에라이 요. 못된 년아, 웬수가 따로 옶다.”

그때 키 껑충한 고등학생이 사립을 들어서다가 엉거주춤 멈춰섰다.

“인냐 선진아, 둘째누나 왔다. 둘째누나. 니가 그리 보고 잡어허고 걱정해튼 명숙이 누나가 왔어." 월하댁이 눈물을 훔치며 생기 넘치는 소리로 막내아들에게 알렸다.

”음마.....!“

김명숙은 키 큰 고등학생을 올려다보며 어리둥절해졌고,

“얼라....”

김선진도, 파마머리의 여자를 바라보며 당황스런 기색이 드러나고 있었다.

“봐라, 10년 세월이란 것이 늙어가는 사람헌티는 벨라 표가 안나도 커나는 사람들헌티는 요리 무서운 것이여, 한 성제간에도 그간에 한 분도 안 보고 산께 서로 얼렁 못 알아보덜 안혀." 월하댁이 양쪽 손으로 딸과 아들의 손을 각각 잡아 끌어당겨 서로 마주잡게 했다.

"선진아, 니가 요리 커부렀을 줄 몰랐다. 참말로 몰라보것다."

김명숙은 저절로 나오는 고향말을 하며 청년 선진의 모습에서 문득 아버지의 느낌이 스치는 것을 보았다.

"누나도 너무 변해부렀구마, 꿈에서는 맨날 여학생이든디 ......."

김선진이 쑥스럽게 웃으며 목이 잠겼다.

"어야 선진아, 요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 얼렁 달구새끼 한 마리 모가지 삐틀어라. 누나 시장허다."

어머니가 밥을 하면서 쉼없이 엮어내는 집안 이야기를 들으며 김명숙은 한없이 초라해지는 자신을 느끼고 있었다. 큰오빠는 검사. 언니는 서독 간호원, 작은오빠는 고시생, 여동생 금숙이는 사범대생, 막냇동생은 고3이었다.

“… 언니가 서독에 안 갔드라면 큰 탈 날 뻔했어. 다 그 덕에 묵고살고 핵교 댕기고 헝께.” 월하댁은 긴 한숨을 쉬었다.

"큰오빠는 으찌고라?"

김명숙은 자신도 모르게 기를 세웠다.

“글씨……, 검사 월급이 원체로 작은 디다가 양심 잘 지켜야 헝께 어쩔 수가 없고, 언니도 핀지 보낼 때마동 큰오빠 심들게 하지 말라고 당부다."

"음마 요상허시, 판검사 되면 금세 그 집안이 활짝 핀다고 허든디.....”

“피기야 무섭게 폈지야. 사람덜이 우리 집안을 얼매나 높이 보는지 아냐? 워디서 만내도 내 그림자도 못 볿는다 말이여. 그리 지체 높아졌으면 되았제 멀 더 바래겠냐."

김명숙은 뭔가 서운한 느낌이 들었지만 너무 오랜만에 상면한 어머니가 어려워 더 입을 놀리지 못했다.

"엄니 말 믿으면 안 되야. 그냥 듣기 좋게 하는 소린께, 큰성은 우리럴 우세시럽게 생각하고 자주 볼라고도 안 혀. 작은성이 큰성 집에 있지도 못허고 따로 하숙하는 형편잉께.”

말문이 트인 막냇동생이 다음날 어머니 없는 틈에 한 말이었다.

김명숙은 그제서야 어머니가 왜 자꾸만 한숨을 쉬었는지 깨달았다.

"아조 잘되얐다. 요. 가발공장 공순이가 찾아가면 검사님이 징허게 반가와라 헐 것잉께 서울 가듬절로 찾아가야 쓰것다."

김명숙의 입술이 씰그러지고 있었다.

"글먼 안 돼야, 엄니 속 터진께로!"

김선진이 울상이 되어 소리쳤다.

 

(P.117~120)

 

< 4 >

 

 

며칠이 지나 김명숙은 기다리고 기다리던 언니의 편지를 받았다.

 

… 너의 꿈은 잘 알겠다만 여기 독일에 올 생각은 안 하는 게 좋겠다. 왜 그러는고 하니 우선 돈벌이가 달라져서 그런다. 한국보다 여섯 배나 일곱 배가 더 많이 벌린다는 것은 몇 년 전 계산이고 그 동안에 절반 가까이 줄었다. 여기 월급이 깎인 것이 아니고 그동안 우리나라가 경제발전하는 것에 따라 사람들의 월급이 많아지면서 그리 되었다. 또 집값, 땅값 같은 것도 다 올라 이런 식으로 몇 년 더 가다가는 독일에 와서 고생한 것이 헛고생이 되지 않을까 우리 간호원들이고 광부들이고 다 걱정이 태산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문제는 여기서 간호원들이 하는 일이 너무나 뼛골 빠지게 힘이 든다. 말이 났으니 솔직하게 하는 말인데, 한국의 간호원과 여기 간호원은 일의 범위나 방법이 아주 달라. 한국의 간호원들이 신선놀음을 한다면 여기선 막노동자나 머슴처럼 일을 한다. 한마디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중풍환자의 대소변을 받아내고, 똥오줌이 묻은 더러운 옷을 갈아입히고, 목욕을 시키고 하는 건 한국에선 다 보호자들이 알아서 한다. 그러나 여기선 전부 간호원들이 해내야만 한다.

 

명숙아, 너에게까지 이런 고생 시키고 싶지 않다. 내가 돈을 조금씩 더 보낼 테니 학원비로 쓰고 네가 원하는 길을 택해라. 그리고 한 가지 꼭 약속해라. 여기 일이 힘들다는 건 어머니한테 절대 말하면 안 된다…….

 

"언니이….”

김명숙은 편지를 떨어뜨리며 눈을 훔치고 또 훔쳤다. 언니의 모습과 함께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솟구치고 있었다.

 

(P.248)

 

< 5 >

 

 

“몇 년 전부터 서울의 무허가 집들을 대대적으로 철거하면서 사람들을 광주 남한산성 밑으로 이주시키기 시작했지요. 서울의 위성도시를 만든다면서요. 가만있거라, 그게 72년까진가 얼마를 이주시키고, 주민의 생계 안정과 지역의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각종 제조공장들 몇 개를 유치한다고 했더라? 어디서 보긴 봤는데…….”

이상재 옆의 박 기자가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이 기자, 자넨 어때?"

고참이 이상재에게 눈길을 돌렸다.

"예, 72년 말까지 30여만을 이주시키고, 공장을 300여 개 유치해 생계문제를 완전 해결한다고 했었지요. 그런데 금년 1월에 보도된 특집기사에 의하면 공장이 두세 개밖에 들어오지 않아 취업할 데가 없어서 생계위협이 심각한 데다, 서울시에서는 시내까지의 버스 운행도 자주 하지 않아 교통난 때문에 취업문제가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뿐만 아니라 상하수도 시설이 전혀 안 되어 있어서 대소변과 쓰레기 같은 것들이 썩어 우물을 오염시키기 때문에 수인성 전염병까지 번창하는 실정이라고 했습니다."

 

도시 미관상 무허가 집들을 철거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일은 충분한 계획과 준비를 거쳐 단계적으로 처리해야 할 중요한 문제였다. 그건 국민의 생존권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울 시장은 누가 군대 출신 아니라

고 할까 봐 군대식으로 몰아붙여 버린 것이다. 보기 흉한 무허가 집들을 무작정 두들겨 부셔버리고 거기 살던 사람들을 쓰레기 청소하듯 강 건너 야산자락으로 내몰아버렸다. 가축도 집을 지어주는데 그 야산자락에는 사람이 살 수 있는 아무런 시설도 되어 있지 않았다. 사람을 짐승만도 못하게 취급해 버린 것이다. 아까 어떤 사람이 우리가 쓰레기냐고 외친 것은 한 치도 틀리지 않은 정확한 인식이었다. 사람을 쓰레기로 취급해 버릴 수 있는 것은 군대식 정권에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무작정 밀어붙이는 그 고질적 악습의 폐해는 이미 와우아파트 붕괴 참사로 잘 드러났다. 성남의 폭동은 당연히 일어날 수밖에 없는 제2의 와우아파트 사건이었다. 같은 시장이 한 일이니 결과가 같아지는 것은 그야말로 사필귀정이었다.

 

이상재는 악취 풍기는 길을 걸어가며 수인성 전염병이 번창하고 있다는 지난날의 보도를 되짚었다. 상하수도 시설이 없고, 변소를 아무데나 지은 데다, 더러운 물을 마구 버려대니 지하수가 오염되어 병이 생기는 것은 너무 당연했다.

 

문제는 잘못된 공업입국의 경제정책이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국제경쟁력을 높여 수출을 계속 신장시키기 위해 노동자들의 임금인상을 억제하는 저임금 정책을 확정했고, 저임금을 유지시키려면 물가를 안정시켜야 하고, 물가가 안정되려면 노동자들의 주식인 곡물가격을 통제해야 하고, 곡물가격이 억제되면 농민들이 몰락해 이농을 하게 되고, 이동한 농민들은 살길을 찾아 도시로 몰려들고, 그러면 도시 노동력은 과잉이 되어 임금이 싸질 수밖에 없는 악순환의 이중효과를 나타냈다. 그런 이농현상으로 해마다 50만 명 이상이 도시로 몰려들게 되었고, 그것은 결국 도시빈민 문제를 야기 시켰다.

 

그 표본적인 비극이 바로 광주대단지 사건이었다. 이렇게 뼈대를 정리하며 이상재는 서울로 돌아왔다. 경제발전의 상징인 으리으리한 고층건물들이 즐비한 서울은 천당이었고, 천막집들이 촘촘한 골목마다 악취가 진동하고 있는 성남은 갈데없는 지옥이었다.

 

(P.257, 272, 278)

 

< 6 >

 

 

“이승만 정권보다 박정희 정권이 정치 푸닥거리하는 기술이 더 능란한 거지”

"정치 푸닥거리?"

“거 간단하잖아. 경제발전이라는 굿상을 차려놓고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를 전국 방방곡곡에서 외치게 하면서 모두 희망을 갖게 했고, 해가 바뀔 때마다 조금씩 그 단맛을 보게 해주었고, 막연한 희망을 확실한 현실로 믿게 해준 거야. 작년인가 언제 장충체육관이 터져나가도록 모인 사람들이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세'를 목터지게 노래하면서 울먹이는 모습이 테레비 화면에 비치는데 나도 목이 메면서 가슴이 먹먹해지더라구, 그건 분명 정부에서 벌인 행산데, 정부하고는 상관없이 그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일시에 관통하고 있는 감동적인 감정이 있는데, 그게 뭐지? 전쟁이 남긴 이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 어서 잘살고 싶다는 욕망 아니겠어?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는 대중들의 그 갈망을 꿰뚫어봤던 거야. 그리고 빨리 민심을 얻고 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그 사람은 경제개발이라는 깃발을 들어올렸지. 그게 차츰 성과를 올리면서 국민들은 그를 신뢰하게 되고, 그는 더욱 자신감에 차서 깃발을 한층 드높이 들고 흔들며 ‘중단 없는 전진’을 외쳐댄 거야. 그 신명나는 푸닥거리에 우리도 다함께 휩쓸리고 취하다 보니 같은 길이의 세월인데도 서로 다르게 착각을 일으키는 거지 뭐야."

"이거 듣다 보니 영 이상하네? 저 친구 저거 낼모레 입각하는 것 아냐?”

“글쎄 말야, 박정희 교도들이 있다던데, 영락없이 박정희 선전원 같은 소리만 하고 앉았네.”

“어쨌거나 그 말이 일리가 있는데, 경제를 발전시킨 박정희의 그성과를 부인할 수 없게 된 게 우리 4·19세대의 딜레마고 괴로움이야."

 

"글쎄, 그건 너무 인심 후한 거고 결과론적 속단 아닐까?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장면정권이 세운 것이었어. 그걸 박정희 쿠데타 세력들은 고스란히 이용한 거야. 장면정권은 그 계획의 일부를 추진하고 있었으니까 5·16 쿠데타만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경제개발은 계속됐을 거라구."

"뭐, 장면정권? 난 박정희정권도 싫지만 장면정권은 더 질색이야. 장면정권 무능한 걸 다시 말하면 입만 아프니까 다 그만두고 딱 한 가지만 보자구 이승만정권의 원흉들 처리를 어떻게 했지? 우리가 180명이 넘게 죽어가면서 혁명을 성공시켜 정권을 손에 쥐여 줬으면 그 원흉들을 어떻게 해야 되겠어? 학생들에게 총질하고 테러를 가한 놈들인데 가차없이 처단해야 되잖아. 그런데 다 풀려났어, 결국 장면정권은 4·19를 배신하며 쿠데타를 불러들였는데, 군인들은 어떻게 했지? 원흉들을 속시원하게 처단해 냈잖아, 경제개발이라는 것도 그 차이야. 난 박정희를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장면정권이 경제개발 했더라면 엉망진창, 개판을 만들었을 거야."

 

"아니, 그건 아주 위험한 논리야. 장면정권이 무능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경제개발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국민이니까 결과를 나쁘게만 생각하면 안 돼, 정권이 무능하면 국민들이 바꿔가며 경제개발을 추진해 나갔을 테니까 국민들의 욕구만큼 경제는 발전하게 돼 있어."

 

"그 무슨 속 편한 소리야? 그거야말로 현실성 전혀 없는 형식논린데, 국민들이 뭐 유식한 대학생들이거나 훈련 잘된 군인들인 줄 알어? 아니 대학생들도 지도부가 시원찮으면 데모 대열이 엉망이 되고, 군인들도 지휘관 없으면 금방 개판이 되잖아. 그런데 국민이 뭘 어쩐다는 거야. 말이 되는 소릴 하라구."

 

"어허, 이봐, 이봐, 이러다가 쌈들 나겠어. 자아, 토론의 열기를 식히기 위해서 다들 쭈욱 한잔씩 하더라구." |

 

(P.292~294)

 

조정래 / ‘한강6’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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